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34
다만…그 소리는 무언가 상식을 벗어나 있다.
배운 음악이 아니다.
베토벤을 쇼팽처럼 치고 있달까. 엄격한 고전주의의 악보에 불쑥불쑥 끼어 들어가 있는 묘한 불협화음들. 세상을 데이터의 축척으로 해석하는 아스에게, 이 ‘기존에 없었던 데이터’는 몹시 귀를 자극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협화음들까지 몹시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아주 독특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야, 어디가- 아스?!]그는 농구공을 손에서 떨구고, 홀린듯이 음악을 따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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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아스와 헤티의 첫 만남 씬입니다.]유명 혼자만 등장하는 것은 씬6까지.
오늘은 드디어 헤티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씬이다.
체육복을 입은 유명과 교복을 입은 에르히는, 음악실 세트의 한 가운데에 섰다.
세트는 대본에서 묘사된대로, 한쪽 벽면의 전체가 다 창문이고, 창문을 등지고 뒤에서 빛을 받는 각도로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자리해 있다.
그 피아노 앞에, 에르히가 앉는다.
[에르히, 연습은 충분히 되었나요?] [네. 음악 감독님과 함께 계속 연습했어요.]이 작업을 위해서, 워크브로더스에서 가장 실력있는 음악 감독과 아울러,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자문까지 구했다. 음악 감독은 에르히의 피아노 실력이 기대 이상이라며 흡족해했다.
[좋아요, ‘아스의 충격’이 보다 실감날 수 있도록, 첫 컷을 찍기 전에 처음으로 ‘헤티의 연주’를 들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유명씨. 씬 7-8 동선을 체크해보죠. 한 번 동선대로 걸어볼까요.]리허설. 카메라가 유명의 동선을 따라 함께 움직인다.
유명은 음악실 앞 복도를 걷는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문에 달린 작은 창 너머로 안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다.
그리고 문을 열고, 헤티와 눈이 마주친다.
음악실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서, 그랜드 피아노를 끼고 헤티와 마주본다.
[오케이 좋습니다. 음악실 문을 넘어간 후부터 메인 카메라가 바뀌고 씬 8로 넘어가지만, 감정씬이니 촬영은 안 끊고 쭈욱 갈게요. 중간에 텀 뜨는 건 나중에 편집에서 잘라낼 테니까, 신경쓰지 말고 감정에만 집중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네-]그렇게 촬영이 시작되었다.
*
에르히는 피아노에 손을 올렸다.
등 뒤의 창문에서, 햇빛처럼 쏟아져 내리는 조명광이 악보를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밝힌다.
‘연기와 피아노.’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과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니, 에르히의 마음이 작게 고동쳐 온다. 그녀는 수백 수천 번 연습해 온, 아주 특이한 베토벤을 손가락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천재다움’을 계산하여 만들어낸 악보와 주법.
하지만 이제 헤티가 된 그녀에게 이것은, 지금 자신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 즉흥적으로 연주해 나가는 음악이다.
자신도 모르게 음악에 흥이, 그리고 혼이 실린다.
최후까지 자신의 영혼을 표출해내고 침잠하듯 눈을 감은 그녀는, 드륵- 하는 소음에 서서히 눈을 뜬다.
껌뻑-
뜬 눈을 다시 감았다 뜬다.
착시일까.
등 뒤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지금 문을 연 사람의 실루엣을 통과하지 못해 뒤쪽 복도 너머로 만들어 내는 음영은, 지나칠 정도로 거대하다.
‘누구···?’
빤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대한 무엇.
자신도 모르게, 피아노 위에 얹혀 있던 손가락부터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그 진동은 전염되듯 손으로, 팔로 이동해서, 결국에 그녀의 몸 전체를 덜덜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껌뻑-
이번엔 스스로 깜빡인 것이 아니라, 한참 뜨고 있던 눈이 시려져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뜨여졌을 때, 거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스…프리데터···?] [나를 알아?] […우리 학교에서 너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어.]그녀는 아직 떨림이 가시지 않은 몸을 겨우 붙잡으며 대꾸한다.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해.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음…어디 아픈 건 아니야? 선생님을 불러 줄까?] [아니, 이제 괜찮을 것 같아.]이상하다.
그의 존재가 순식간에 편안해진다.
[너, 피아노를 무척 잘 치는구나?] [내가? 그런 소리 처음 들어. 선생님이 늘 나는 개성이 부족하다고 하시는데.] [그럴 리가. 이상하네, 나는 정말 좋았어. 너는 이름이 뭐야?] [헤티…헤티 램이야.] [그래 헤티. 한 곡 더 들려줄래?]아름다운 웃음이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꺄아 꺄아 떠들어대는 소리에 자주 섞여 있는 이름. 소문대로 무척이나…시선을 잡아당기는 남자의 부탁에, 헤티는 건반에 다시 손을 올렸다.
[컷-]아직 꿈을 꾸고 있는 듯 몽롱한 헤티의 귀로, 씬의 종료를 알리는 커트 소리와 함께, 카일러의 놀란 반응이 들려왔다.
[유명씨, 방금 그건…]209 무편집본입니다
[흠…감독님. 모든 테이크를 두 번 찍으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카일러 언쇼는 TW의 영화사업부 총괄 본부장과 대면을 하고 있었다.
워크브로더스쯤 되면 기획 단계부터 촬영 단계까지 동시에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수십 개이다. 그것을 총 관할하는 영화사업부 본부장 쯤 되면, 개개의 영화 감독과는 계약할 때와 내부 시사 때 정도가 아니면 만날 일이 별로 없다.
아, 물론 한 해 사업부의 실적을 좌지우지하는 대형 영화를 제외하면.
[예산 때문이라면, 배우들이 거의 NG없이 연기를 잘 소화해주고 있는 덕에, 오버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 TW에서 에 상당한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돈보다는 시간과 에너지 문제죠. 소용없는 일에 현장의 에너지를 나누어 쓰는 것 보다는 집중하는 것이···]처음에는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회사 차원에서 합병한 방송국을 띄우기 위해 영화 제작을 상품으로 건다고 했을 때, 영화사업부 내에선 원성이 자자했었다. 하지만 캐스팅보트는 이례적인 대박을 쳤고, 무엇보다도 캐스팅이 너무 좋았다. 한 명, 쓸데없이 무명 배우를 여주로 끼워넣은 것만 제외하면.
그러므로, 더 이상의 무리수는 안 될 말이었다.
[소용없는 일이라···]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십시오. 이건 사업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쏠쏠히 들리는 소문으로는, 우리 주연 배우가 연기의 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활약중이라던데, 감독님도 결국 편집에 들어가면 그 그림을 안 쓰고 못 배기실 겁니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집중을 하는 게 좋다는 거죠.]들리는 소문이 아니라, 심어둔 눈이 있겠지.
[소용없는 일이 아니라면요?]카일러는 품 안에서 하나의 테입을 꺼냈다.
그것은 아스와 헤티의 첫 만남 씬을 찍은 테이프.
[이걸 한 번 보시죠.] […?]재생이 끝난 후, 본부장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당연하다.
카일러는 그 날, 유명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헤티는 자신이 수집해 온 정보의 테두리 밖에 위치하는 존재죠. 그래서 아스는 방심했어요. 아주 어릴 때 말고는 언제나 몸에 두르고 있었던 보호색을, 헤티의 음악을 듣고 잊어버렸습니다.
-…좋아요. 헤티의 몸이 자동으로 떨릴만한 위압감은 정말 좋았어요. 그건 씬2에서 처음 본연의 모습을 보였을 때 아스의 분위기와 일치했죠. 그런데 그 이후…는 어떻게 한 건지.
옆에서 에르히가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질릴 정도의 위압감이 들다가, 갑자기 이유 모르게 몸이 편안해진 느낌이 들었다고.
그러자 유명이 말했다.
-그건 ‘헤티’에게 의태한 겁니다.
-??
-일반적인 인간보다 훨씬 에너지가 미약하여 눈에 띄지 않는 인간. 그녀가 가진 에너지 레벨에 맞추어 의태한 거죠.
?!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카일러가 ‘영화적’으로 구성한 설정. 그것을 실제로 해내는 인간은 없을 터이다.
그런데…지금 그 투샷에서 에르히는, 언제나처럼 존재감이 흐릿하지 않았다.
아스의 기운에 눌리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친해지면서, 둘이 같이 있을 땐 존재감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화면을 보여주려고는 했지만, 투샷으론 불가능할 것 같아서 교차 편집과 화면 보정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의 연기는 어디까지 닿아있는 것일까.
그 때 카일러가 받은 충격이, 지금 본부장의 얼굴에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무편집본입니다.]그 말에, 가늘게 찢어져 있는 본부장의 눈이, 단춧구멍처럼 동그래졌다.
[아니 그러면 더욱…이 화면을 포기할 수는-] [전략이 있습니다.]그 날, 본부장실에서의 회의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
세상의 시간은 느려도, 촬영장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영화 속의 시간은 더욱 빠르게.
3주간의 시간은, 영화 속에서는 반 년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동안 아스는 ‘분석 불가능한’ 헤티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녀의 피아노를 주의깊게 들었으며, 이 변칙적이고도 아름다운 소리가 왜 다른 인간들에게는 평범한 소리로 치부되고 마는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헤티의 일상은 예전보다 훨씬 파란만장해졌다. 교내의 인기인인 아스가 헤티를 따라다니는 것을 시기한 몇몇 학생들이,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나 때문에 다친 거지?
-너 때문이 아니고 그 멍청이들 때문이지. 괜찮아. 나는 누가 잘못한 건지를 착각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 고작 이런 일에 내 첫 관객을 내칠 정도로 소심하지도 않으니까.
얼굴에 상처가 나서도 담담하게 그의 걱정을 일축하는 헤티.
‘걱정하는 표정’을 의태한 아스의 어깨를, 그녀가 위로하듯이 툭툭 친다.
그 때 처음으로 아스의 표정에는 ‘다른 감정’이 깃들었다. 사실 자신은 그녀를 걱정한 적이 없는데도, 정말 위로받은 것처럼 마음에 파문이 번진다.
아프지 않았는데도, 누군가 아프지? 라고 묻자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울먹이기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또…분석이 불가능한···’
아스의 ‘인간 분석’에 따르면, 지금은 그녀가 그를 위로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눈빛으로 앉아 있는 아스를 내려다본다. 오히려 그가 마음을 쓸까봐 걱정하고 있다.
‘왜 그녀는 다른 인간들과 다를까.’
자신을 두려워하던 부모.
자신에게 집착하는 누나.
‘좋아할만한’ 모습에는 현혹되고, 조금만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금방 등을 돌리는 것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판단했던 그의 머리 속에 어지러운 계산이 반복된다.
‘조금 더…그녀를 알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그는 자신의 눈 앞에서 흔들리는 헤티의 손을 잡았다.
놀란 헤티와 아스의 시선이 부딪혀, 서로에게 한참을 머물렀다.
[컷-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이것이 고교 시절, 초반 30분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대본에서 빠져나온 듯한 아스와 헤티는 거의 NG없이 장면들을 소화해 왔고,
처음엔 걱정이 많던 에르히의 연기력에 대해서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다른 배우들 속에서는 뭔가 엑스트라처럼 보이는 헤티는, 아스의 옆에서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투샷에 무리가 없었다.
‘저 녀석이 일부러 에르히가 묻히지 않도록 존재감을 조절하고 있으니깡···’
오로지 미호와 유명만 아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Alter B 촬영.
고교 시절이 끝나고 나면, 아스 시점샷은 완전히 끝이 난다.
라스트 씬의 라스트 컷을 돌려보던 촬영감독은,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드는 자신이 어이없어지려고 했다.
‘분명, 아스가 찍힌 샷을 본 컷으로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는데···’
30분의 트레일러 전략.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영화 본편의 초반 30분을 예고편처럼 노출시킵니다. 단, 나레이션 오프 상태로요.
-아니, 영화의 1/4이 공개된 상탠데, 누가 돈을 주고 보겠습니까?!
-아스의 속마음을 알고 싶은 사람들이요.
트레일러 필름은 고교 시절 아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누가 보아도 매혹적인 남학생. 그가 웃고 떠들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헤티를 만나고 친해지는 모든 과정들.
하지만 뭔가 미묘하게 타인과 다른 그의 속마음만은 노출되지 않는다.
‘그런데…궁금하다. 미칠 것처럼 궁금해!’
그걸 알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고 생각하던 촬영 감독의 마음은 3주간 완전히 바뀌었다. Alter A 촬영이 끝나고 나면, 시점 샷을 설계하면서 아까 그의 그 눈빛은 어떤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에 몸달아했다.
저 매혹적이지만 불길한 인물의 시선에서, 세상에 어떻게 보이는지가 궁금했고, 이 상황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어떤 목소리로 읊을 것인가를 상상했다.
심지어, 자신은 시나리오를 훤히 아는 사람인데도.
‘그만큼, 아스가 군데군데 섞는 표정들이 무척 미묘해.’
어디서 본 듯한, 그럼에도 볼 때마다 빠져드는 아스의 표정과 동작들. 이미 촬영장의 모든 여자 스탭들은 아스의 촬영 타이밍엔 심부름가는 것조차 저어할만큼, 이 매력적인 소년에게 심취해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나 헤티가 예상치 못한 면모를 보여줄 때, 살짝 살짝 균열이 가는 그의 껍질 사이로, 정체 모를 표정들이 드러났다.
‘그리고…시점 샷을 꼭 써야 하는 또다른 이유도 있지.’
촬감은 ‘그 이유’를 생각하며, 건조한 입술에 침을 발랐다.
*
유석은 어느 회사의 응접실에 비치된 잡지들을 훑고 있었다.
유석의 입매가 한일자로 꽉 다물어졌다. 헐리우드 위크가 스폰서 의혹을 쏘아올린 후, 가십지의 발로 쓴 기사들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근거없는 추측 기사라 곧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도를 지나치고 있는 것엔 ‘장작을 때고 있는 누군가’가 의심되었다.
[들어오세요.]인포의 직원은 그를 내부의 회의실로 안내했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에 유석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니콜라스 판다스가 직접···!’
이곳은 CRD 본사.
오늘 그가 이곳에 방문한 목적은 자사 배우들의 프로필 전달을 위해서였다.
공룡 드라마 제작사인 CRD의 입장에서, 아직 이렇다할 실적이 없는 신생 기획사의 대표의 영업성 방문은 좋게 쳐 줘봐야 팀장급이 응대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탑3 안에 드는 인물인 니콜라스가 그를 보러 나왔다.
[오셨습니까 문대표님. 저한테 먼저 연락을 주시지 않구요.] [오늘은 신유명씨와 관계된 일이 아니라, 저희 소속사 배우들의 프로필을 전달해 드리러 왔다보니···] [무슨 일이든요. 우리가 남입니까.]그는 털털하게 웃으며, 가지고 온 프로필을 보여달라는 손짓을 했다.
유석은 약 스무 개의 프로필을 묶은 서류를 니콜라스에게 밀어 보냈다. 그가 프로필을 한 장 한 장 넘겨 본다.
[그새 이만한 배우 풀을 만드시다니, 역시 행보가 거침없으시군요.] [아직 멀었습니다.] [여기 이 친구는, 캐스팅 보트에서 꽤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배우죠? 천사같이 아름다운 마스크의 흑인 배우라···]그가 짚은 것은 카이 누넨의 프로필.
[그렇습니다. 저희 회사의 기대주 중 한 명입니다.] [마침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군요. 다음 시즌에 파일럿에 들어가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데, 시나리오를 보내 드릴테니 괜찮겠다 싶으면 비공개 오디션 한 번 보십시다.]비공개 오디션이라 함은, 배역 이미지가 맞으면 우선 캐스팅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유명이라면 몰라도 카이는 아직 그 정도 급이 못 된다. 감독도 작가도 아직 카이를 못 본 상태에서, 제작자가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조금 꺼림직하다.
‘과도한 호의. 이걸로 빚을 지우겠다는 심산인가.’
[이건…빚입니까?]유석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니콜라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차피 결정은 감독이 하는 겁니다. ‘빚’이라기보다는 대표님과 가까워지고 싶은 작은 ‘호의’라고 해 두죠. 그나저나 문 대표님은 그런 타입으로 보이지 않는데…지나치게 방어적이시군요. 배우들을 가려내는 눈도 그렇지만, 노이즈 마케팅 하시는 스케일을 보고 꽤 수완가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노이즈 마케팅···?
[에는 저희도 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촬영장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더라구요. 작품은 잘 빠지고 있는데 화제성이 꺼질까봐 가십지를 이용해서 불을 살려놓는 솜씨도 일품이고.]순간 유석은 머리를 댕- 맞은 것 같았다.
유명이 쓰고 있는 억울한 누명을 어떻게 벗겨야 할 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자신을 빼다박은 수완가적인 인물의 눈에는 이것이 호재로 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의도한 호재로.
‘지금 나…뭘 하고 있는 거지?’
자신답지 않았다.
신유명이라는 인물에 감화되었는지, 자기 자신을 잠시 잊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손에 들고서, 왜 자신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는가. 유명과는 파트너이니 속이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세상을 속이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하.]유석은 복잡한 마음을 내색치 않고 살짝 웃음을 지어주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오랜만에 머리 속에서 새까만 증기기관이 김을 내며 빠르게 돌아간다.
[그럼, 카이는 다음 주에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대표님과 가깝게 지내고 싶습니다. 다음에 술이나 한 잔 하시죠.] [언제든지요.]유석은 CRD를 나오자마자, 호철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