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87
그는 이 두 달 간, 모든 회차의 공연을 다 보았다.
유명이 홀로 서 네 명의 캐릭터를 연기하던 신기에 가까운 연기와, 동료들과 함께하는 색색이 다채로운 연기. 그 매번의 연기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그는 더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혜호의 마음이 더욱 쏠린 것은…
‘함께하는 연기…’
혜호는 지그시 두 눈을 감고, 객석까지 넘쳐 흐르는 에너지를 가만히 느낀다.
그의 머리 속에 두 어린아이의 웃음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천년 귀생의 한 가지 꿈이라면, 연기의 극의를 보는 것이었다.
관객이 있는 무대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그리고 그 앞에서 연기할 수 있는 제대로 훈련된 육체만 있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런 욕심에, 유명의 몸을 가지려고 했었지만…
바로 지금, 그의 꿈이 바뀌었다.
‘신유명과 함께 연기하고 싶다.’
어딘가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욕망이 문장으로 갖추어진 순간, 혜호는 눈을 번쩍 떴다.
-…연기…하고싶다. 그럼 뭔가 보일 것 같은데…
의 첫 연극무대를 보았을 때, 어렴풋이 그가 떠올렸던 생각.
…에 생략되어 있던, 잡힐듯 말듯한 자신의 마음이 이제야 형체를 갖춘다.
‘신유명과 함께’ 연기하고 싶다. 그럼 뭔가 보일 것 같다.
자신이 발견하고 키워 온, 연기사의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최고의 배우. 그런 배우와 직접 부대끼며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곧 완전히 그를 지배했다.
‘부실한 몸이 아니라, 온전히 내 뜻대로 움직이는 몸으로, 신유명과 같은 무대에…!’
혜호가 원생의 유명을 보고 눈이 번쩍 뜨인 이유는, 낮은 존재감 때문도 있었지만, 잘 훈련된 신체 때문도 있었다.
과거에도 그는 몇 번의 시도를 해 보았었다.
모은 생기를 뭉텅 사용하면서까지, 어떤 배우의 소원을 들어주고 무대에 서 보기도 했고, 어떤 작가에게 대신 작품을 써 주는 대신, 종종 몸을 빌려 연기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만족스럽게 연기할 수 없었다.
빙의를 한다고 해서 그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당 배우가 훈련해둔 신체의 한계, 딱 거기까지만.
흡족하지 못한 육체로 만족스럽게 연기하려면 연습시간이라도 많이 필요한데, 빙의라는 것은 시간적 한계가 있어 오래 사용할 수 없었다.
고로, 그의 목마름은 갈수록 더해져 갔다.
-내가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육체는…없겠지?
거의 포기에 다다른 순간, 그는 신유명을 발견한다.
충분한 재능, 훈련되어 있는 육체, 그럼에도 낮은 존재감. 자신이 바라던 조건을 한 몸에다 우겨넣은 듯한 인간의 등장에, 혜호는 자신이 가진 가장 커다란 힘을 써버리면서라도 그를 가지려고 했다.
결국 그를 가지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적절한 신체’ 이상의 가치를 보여 주었다.
그와 함께 연기한다면, 덜그럭거리는 부실한 몸이 아니라, 온전한 몸으로 그와 상대하려면…
혜호는 곰곰이 방법을 생각한다.
‘세상에 거저는 없지. 지극히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룰 수밖에.’
혜호는 자신의 탐스러운 꼬리를 쳐다본다.
천 년의 세월이 응축된, 생기의 농축체. 말 그대로, 그의 존재와도 동일한 것.
이미 사용해버린 황금색 꼬리만은 못하지만, 이 힘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것이다.
*
의 공연이 종료되고 약 보름 후, 2월의 마지막 날.
유명이 미호의 옆에 앉아, 한참이나 은빛 털을 쓰다듬다가 입을 연다.
‘미호.’
{왱?}
‘네가 내게 준, 5년이 지났어.’
278 딱 한 번
마치 ‘그 날’같은 달밤이었다.
달빛을 받은 미호의 은빛 털 주변에 달무리같이 은은한 빛이 번졌다.
‘나 예전에 네가 내 준 졸업과제, 62점 받았었잖아.’
{그걸 몇 점인지까지 기억하냥.}
‘이번엔 몇 점이었어?’
함께 갔던 유럽 배낭여행. 미호는 많은 것을 가르쳐준 후, 자신에게 테스트를 내어 주었었다.
-무무, 테스트하기 좋은 작품이당.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표정과 몸짓으로만 충분히 설득할 수 있는 연기를 해 봐랑. 세 달간 얼마나 배웠는지 보장.
유명은 극단 Vague의 단원들 앞에서,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농노 게라심 역을 연기했다.
그 연기를 마쳤을 때, 미호는 자신에게 62점을 부과했다. 충격을 받은 자신에게, 원래 자신의 기대치는 55점이었다며, 인간 주제엔 잘 받은 거라고 툴툴댔었지.
궁금하다.
그 사이에 자신은 얼마나 늘었을까.
{80점.}
‘어? 많이 늘었네?’
{인간 수준에선 점수를 매기기 어렵지. 내 수준을 기준으로 매긴 점수당.}
유명은 활짝 웃었다.
지난 7년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마 그 동안 한 연기의 총량을 따지면 보통 배우들이 15년간 연기한 것보다도 많을 것이었다. 거기에 집중도를 곱하면, 훨씬 더 늘어날 거고.
15년간 연기에 맺힌 한을 풀었다.
세계 최고의 배우란 수식어도 달아보았고, 칸에서 배우로선 유일하게 황금종려상도 수상해보았다. 그리고 이번엔, 스스로와 직면하는 시나리오를, 영화와 연극 두 가지를 통해서 연기해 내기까지 했다.
‘여한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 정도면 됐다.
‘미호야. 이제 약속을 이행하자.’
미호는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나는 충분해. 하고 싶었던 건 대부분 다 해 봤어. 이제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연기를, 가장 특등석에서 관람하는 관객으로 살아갈 거야.’
{너…그 때도 말했지만, 그 의미를-}
‘인격살인에서 갇힌 현성을 연기하면서, 내면의 집에서만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는 조금 체감했어. 하지만, 걔네들과 달리, 나는 티비를 무척 좋아하거든.’
유명이, 속마음을 알 수 없이 밝게 웃는다. 연기일까.
‘네가 연기하는 걸 보고만 있어도 나는 충분히 즐거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7년 간 쉴새없이 연기하느라 좀 피곤하기도 해. 이제 좀 편하게 지내지, 뭐.’
거짓말.
인간 수준 이상으로 완벽한 연기를 하고 있다고 해도, 혜호(*연귀의 진명)의 눈엔 뻔한 거짓말이다.
아니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누구보다도 그의 연기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그리고 그것마저도 은인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그의 인간성을 아는 혜호이기에, 그것이 필사의 거짓말인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때 내 생기가 44였으니까…지금은 49가까이 됐겠네. 나 그 동안 안 쉬고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그렇지?’
혜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유명이 ‘15년의 절반’인 7년 반이 아니라, 7년만에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당시에 도깨비들이 말하길, 유명의 생기 총량은 74라고 했다. 본연의 생기가 29에, 연기(*연기의 기운)를 흡수해서 늘어난 생기가 15, 연귀와의 계약으로 취득한 생기가 30이라고.
그걸 듣고서 유명은 5년을 마음 먹었나 보다. 5년이 넘어가 그의 생기가 혹시 50에 이른다면, 자신이 존재 탈취를 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니까.
‘정말로…몸을 줄 생각이었구나.’
혜호는 새삼스럽게 감동했다.
그 때 그가 했던 말이 거짓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거기에 얼마만한 진심이 들어 있었는지는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20의 생기를 더 받으면, 이 몸을 네가 쓸 수 있겠다, 그치?’
{이론적으로…가능한 일이기는 하다만-}
‘그럼 그렇게 하자. 그런데 미호야,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부탁···?
*
유명은 한 번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 시간을 나눠줬으면 해.’
{연기를 번갈아가며 하자는 거냥?}
‘아니. 연기는 네가.’
몸을 나눠쓰는 방법? 왜 그걸 유명이 생각해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문제가 있다. 몸을 차지한 주체가 아닌, 다른 영혼이 몸을 사용하는 것은 ‘빙의’로 간주된다. 즉, 존재감을 적게 보유한 쪽이 몸을 오랜시간 점유할 경우, 몸에 무리가 온다.
한 작품당 수 개월이 걸리는 배우의 직업세계에서 이것은 치명적인 문제이다. 즉, 유명이 미호에게 주도권을 내 주는 순간부터, 잠깐 몸을 빌리는 것 외에 꾸준히 연습을 하거나 공연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연기는 내가 해라, 그럼 왜?}
‘가족들, 친구들. 주변 사람들을 챙길 시간을 조금 줬으면 좋겠어.’
{은성과 시간을 나눠 쓰기로 한 유성처럼?}
‘…그래.’
유명이 움찔했다.
인격살인의 또다른 주제를, 미호는 눈치채고 말았나 보다.
미호를 의식하고 마지막에 엔딩을 바꾼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유성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이유였지만, 마치 미호에게 시간을 나눠 달라고 배려를 강요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비슷한 부탁을 하게 되었으니, 유명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네 결론이고, 은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유성의 노력이냥?}
‘…응.’
{거절한당.}
의외의 말에, 유명의 가슴이 덜컹했다.
역시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일까.
‘은성’으로서의 자신을 버리지 않기 위한 최선이었는데.
‘네가 정 싫으면…강요할 순 없지만, 다시 한 번만-’
그 때, 유명의 말을 미호가 끊는다.
{그 뜻이 아니당. 네 몸을 가질 생각은 진작에 치웠당.}
‘…그건 알아. 하지만 내가 원하는 일이야. 나는 이제 연기를 할만큼 했고, 나는 네가 즐겁게 연기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
이 또한 유명의 진심이었다.
미호가 앞으로 얼마나 대단한 연기를 해낼지를 기대하는, 배우의 마음.
그리고 저 위대하고 애틋한 존재가, 극상의 연기를 할 수 있음에도 펼쳐보일 무대조차 갖지 못한 존재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벗의 마음.
그 마음들 또한, 계속 연기하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강렬했다.
유명은 미호가 거절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그런 이유들을 집어넣은 것이다. ‘할만큼 했다’, ;쉴새없이 연기하는 것에 지쳤다’, ‘네 연기를 보는 게 더 즐거울 것 같다’는 이유.
네가 내 몸을 뺏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네게 몸을 주는 것이니, 부담도 죄책감도 가지지 말고 이 손을 잡으라는 제안.
하지만, 미호가 다시 한 번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 네 몸은 네가 갖고 있어야 한당. 그래야 나와 연기할 수 있으니깡.}
···!
처음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유명은, 미호가 한 번 더 이야기하자 눈이 동그래지고, 곧 입 밖으로 비명같은 의문을 내질렀다.
“뭐? 너와 같이…연기할 수 있다고?!”
이건 또 무슨 기적같은 소리일까.
*
{그랭. 가능하당.}
“어떻게?!”
샤아아-
은색 바람이 분다.
잠시 후, 유명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인간에게 달빛을 끼얹는다면 이런 모습일까. 은색의 금속으로 가늘게 뽑아낸 듯이 찰랑찰랑한 머리에, 미호의 눈동자와 똑같이 생긴 푸른 눈이 달빛처럼 아름다웠다.
스윽-
그가 손을 내밀었다.
유명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뻗어진 손을 잡았다.
‘헛···’
남자의 손에는, 온기가 있었다. 그리고 실체가 있는 것을 잡은 듯한 묵직한 느낌도.
미호는 푸른 형체를 띠고 있을 때는 아예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은색 여우의 형체를 갖출 때는 보드라운 털을 느낄 수는 있지만, 이렇게 살아있는 듯한 체온과 중량감을 느껴보는 것은 처음이다.
“이게 완전히 현신한 상태다. 이 상태에선 만질 수도 있고, 인간들도 나를 볼 수 있지.”
남자는 늘 하던 전음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 말했다.
듣기만 해도 힘이 풀릴 것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그것 또한 살아있는 인간의 목소리였다.
“그러면…혹시…설마···”
기대심을 말로 꺼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어질까봐, 차마 말도 꺼내지 못하는 유명을 대신하여, 연귀는 말을 잇는다.
“관객 앞에서, 연기도 할 수 있어.”
“…!”
유명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미호가 가려운 곳을 정확히 짚어 조언해 줄 때마다, 자신의 몸을 빌려 대단한 연기를 보여줄 때마다, 연기를 마친 자신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흡족하게 컁컁 웃을 때마다, 그리고…가끔 참을 수 없는 시선으로 연기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볼 때마다…
때때로 불쑥 치솟았지만, 무의식 속으로 꾹꾹 눌러 놓았던 마음.
결코 싹틔우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땅 밑으로는 뿌리가 자라고 자라 뽑아낼 수도 없게 뻗쳐 있던 거대한 욕망이, 순식간에 싹을 내고 꽃을 피운다.
‘미호와 함께 연기하고 싶다.’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여태 왜 한 번도···!”
“흥. 네가 나와 같은 무대에 설 레벨이었냐.”
현신한 모습인데도 여전히 새침한 말투는, 그림같은 미모에는 잘 어울린다.
유명은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아아…그래서-”
“바보냐. 뭘 곧이곧대로 들어. 그런 이유는 아니고…사실 이게 좀 무리를 준다.”
“뭐? 그럼 지금도 힘들어? 어디 안 좋아?”
“지금은 너 혼자뿐이고, 또 너는 내 계약자이다 보니 크게 무리는 아닌데, 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내가 내뿜는 에너지가 커질수록 더 무리다. 귀鬼인 내가 인人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역리(*逆理:이치를 거스르는 것)니까.”
그렇다면…수백 수천 명의 앞에서 연기력을 발산해야 하는 무대는···
“딱 한 번.”
“응?”
“딱 한 번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너와 같이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것.”
“…많이 무리가 되는 거면, 역시 안 하는 게···”
“아니, 참을 수 없어졌다. 나는, 꼭, 지금의 너와 연기하고 싶어.”
그 말에 유명의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연기의 극의에 가장 가까운 존재.
그래, 저 존재와 함께 연기를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수명을 일부 떼어줘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설마 그도 그런 기분이라는 것인가.
한계다. 미호가 걱정되어서, 안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말을 한 번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은 무리다.
자신도 참을 수 없이 그와 함께 연기하고 싶으니까.
“인간 따위에게 걱정을 끼칠 정도는 아니다. 신경쓰지 말고, 하자. 공연.”
“…좋아. 대신, 우리 계약은 이번 공연이 끝나면 꼭 이행하는 걸로 해 줘.”
“그건 생각해 보는 걸로 하고. 그보다, 무슨 작품을 연기하지?”
그 날 그들은, 하고 싶은 작품을 밤새 얘기했다.
*
유명은 다음 날 바로, 문유석을 찾아갔다.
“고생 많았어요, 유명씨. 보름간 푹 쉬었어요?”
“네, 잘 쉬었어요. 고생은 대표님이 많으셨죠. 제가 공연한다고 정신없는 사이에, 많은 일을 하셨더라구요. 축하드립니다, 윤성 엔터 대표님.”
“이제 윤성이 아니라 YOU 엔터테인먼트가 됐습니다.”
“그 유는, 대표님 성함에서 온 건가요, 제 이름에서 온 건가요?”
“하하···”
유명의 짓궂은 질문에, 유석이 멋적게 대답을 피했다.
“데렉 씨는 돌아갔나요?”
“네. 며칠 전에요.”
의 공연멤버들은, 공연이 종료된 후 돌아가면서 몸살에 걸렸다. 덕분에, 종연파티는 약 일주일이 지나서야 할 수 있었다.
그 날을 떠올리며 유명이 웃음을 짓는다.
데렉과 서류신이 니가 독하네 내가 독하네 서로를 헐뜯고, 효준은 혼자 홀짝홀짝 술을 마시더니 유명에게 의형제가 되어 달라는 요상한 요구를 하며 질질 짜댔다. 수연은 자기도 해외 진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유명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청했다.
그 와중에 육작가가 연락이 와서 이규성 뒤졌냐고 물어보고, 카이가 전화해서 형 나도 한국 갈거라고 떼를 쓰는, 아주 시끄럽고 정신없었던 뒷풀이.
그 기억이 유명에게는 왜 이렇게 행복한 영상으로 저장되어 있는지.
유명은 유석과 대화 중이었던 것을 떠올리고, 다시 용건을 이었다.
“당분간 바쁘시겠네요.”
“나야 바빠야죠. 하지만 유명씨는 바쁠 생각 하지 말아요. 영화에 연극에, 남들 몇 배의 에너지를 쏟아 부었으니, 당분간은 충전해야 합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진짜요? 웬일입니까.”
유석이 수상쩍은 눈초리로 유명을 쳐다본다.
그럴만도 했다. 유명이 쉬라고 순순이 쉰 적은 유럽 배낭여행 때 정도였으니. 그조차도 나중에 ‘연기순례’의 일환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었고.
“얼마나 쉬게요?”
“글쎄요…길면 반 년?”
“호오. 일단 유명씨가 스스로 쉬겠다고 한 부분이 바람직하네요. 어디 가고싶은 데라도 있어요? 아…혹시 미국이나 유럽으로 갈 거면 티쉬나 로열 왕립 아카데미도 한 번 들러보면?”
이미 유명의 명성이 확고한데도, 유석은 세계적인 명문연극학교들이 유명을 초빙했다는 타이틀이 욕심나는 모양이었다.
“아뇨, 그냥 여기 있을 거예요.”
“하기야…가족들과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죠.”
“네, 그러려고요. 그리고, 집 근처에 연습실 하나 섭외해주셔도 될까요?”
“연습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유석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냥 가끔 가서 잠깐씩 몸 풀려구요. 좀 넓고 조용한 연습실이면 좋겠어요. 누가 절대 찾아오지 않을 곳으로.”
“흐음…종일 거기 붙어있는 건 아니겠죠.”
“하하, 적당히 할게요.”
그러면서 유명은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