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60
“그 때 실링의 창문에서 한 줄기 달빛이 떨어지며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아이야, 길을 잃었니.”
천사가 나타났다.
*
최초에 기도한 감독은 유명에게 ‘지킬’을 주문했다.
토요일 낮 공연에서 보여준 그 천사같은 지킬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명이 말했다.
“감독님, 제 생각에는…씬8의 팬텀은 순수하되 불길함이 드문드문 섞여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면야 좋겠지만, 가능할까요? 정말 미묘하지 않으면 오히려 악역같은 인상을 줄까봐서요. 이 장면에서 팬텀은 여주에게도 관객에게도 확실히 선인이라는 설득력을 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나중의 반전이···”
“그래서 제 생각엔, 특정 단어에만 미묘하게 톤을 섞을까 싶어요. 이렇게···”
유명이 손을 아래로 내밀어, 넘어진 화란을 일으켜 세우는 시늉을 하면서 대사를 읊었다.
“아, 너 백조 군무를 하는 아이 중 하나구나. 이름이 뭐였더라?”
도한이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
무척 미묘하다. 분명 환하고 따뜻한 톤이다.
그런데, 슬쩍 똬리를 트는 이 미묘한 기류는 뭘까.
“‘뭐였더라’인가요?”
“네, 바로 알아보시네요.”
“흠…전체 문장 톤 자체는 환하니까 완벽한 의심이 가진 않는데, 한 단어에서만 슬쩍 뭔가가 섞이니 갸웃-해지는 느낌입니다. 독특한 발상이네요. 이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구나···”
특정 단어에만 분위기를 탄다.
자신도 수많은 작품들을 섭렵해 왔지만 처음 듣는 발상이었다. 도한은 연이어 떠오르는 궁금증을 캐물었다.
“왜 하필 ‘뭐였더라’입니까?”
“팬텀은 화란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거든요.”
“…?!”
“작중에서는 이게 우연한 만남인 걸로 그려졌고 추가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는 발레단 한 켠에 숨어살면서 발레에 관한 모든 것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인물입니다. 발레단 전원의 이름을 외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죠. 이 만남 자체도 어쩌면 의도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럴 법도 합니다. 흠···”
기도한이 뭔가 번뜩인 듯 시나리오에 메모를 휘갈겼다.
“그런데 한 단어에만 불길함을 심은 건 어떤 연기 방식입니까? 무척 어려울 것 같은데···”
“아, 이거 내적 대사를 응용한 방식이에요.”
“내적 대사요?”
‘내적 대사’
보통 리액션에서 쓰는 방식으로, 대사가 없을 때도 마음속으로 대사를 치면서 액팅하는 것을 말한다. 리액션을 보다 생동감있게 하기 위해 사용된다.
예를 들어, 달갑지 않은 상대가 마구 자기 자랑을 퍼붓고 있을 때 ‘얘는 또 자랑질이네, 지겹지도 않나?’ 이런 대사를 속으로 생각하면서 리액션을 하면, 자연스럽게 따분한 표정이 나오게 된다.
그걸 여기서 어떻게…?
“네, 천사모드를 유지하되,
이름이 ‘뭐였더라-‘ 부분에서 ‘안녕, 윤화란.’이라는 대사를 마음 속으로 같이 쳤습니다.”
도한의 입이 벌어졌다. 들어보지도 못한 방식이다.
아직 연기에 입문한 지도 얼마되지 않았다면서, 천재이기에 감각으로 연기하는 줄 알았더니 이론적 베이스마저 풍부한 연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문득, 자신이 굉장한 괴물을 주운 것이 아닌가 섬뜩해졌다.
“음…다른 대사들도 한 번 들어볼까요?”
“‘아이’야, 길을 잃었니?”
“아, 너 백조 군무를 하는 아이 중 하나구나.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한 가지 알려주마.”
“백조의 호수가 끝나고 ‘다음’ 공연, 지젤일 거야.”
문장마다 한 단어에만 ‘그’ 톤이 실린다.
자신은 전문가인데다 의식하고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지만, 관객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뒤에 가서야 ‘아···’ 하게 될 정도의 약간의 단초.
기도한은 그 연기를 보며, 자신의 배우복을 실감했다.
그리고 지금,
그 음성과 연기를 바라보면서, 윤세련은 어지러웠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다.
강하고, 따뜻하면서 자애로워보이는, 발레에게 선택되길 간절히 바라는 화란이 그리고 있을 법한 천사.
그것은 윤세련 자신이 그리고 있었던 발레의 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톤이 급변했다.
SCENE 75에서.
*
“뭐, 연애?”
“네. 알브레히트역의 수빈씨와요.”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왜요, 지젤은 알브레히트를 사랑하잖아요? 감정선에도 도움이 될 거에요.”
“멍청하게···!”
안절부절 왔다갔다 하는 팬텀.
그는 화란의 어깨를 붙들고 흔든다.
“화란아. 언제부터인지도 기억나지 않아. 내 기억이 있을 때부터 나는 이 발레 극장에 살고 있었다. 수많은 발레리나를 보았고 대부분은 코르드(*군무)만 하다 사라져갔지만, 개중 몇 명은 빛나는 재능을 보여주었지. 그들이 예술가로서 한 발짝 도약할 수 있을 때, 주저앉힌 것은 대부분 사랑, 연애, 결혼이었어.”
격한 말투에 배어있는 비난과 간구.
“이제 너의 지젤은 완성단계에 있다. 알브레히트와의 사랑? 그래 좋아. 그렇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야 말로 지젤의 완성이 아닌가? 거기서 멈춰.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세련의 몸이 벌떡 솟구쳤다.
실로 그다.
저 발레에 대한 간절한 집착. 주인공 화란을 설득하는 스승이자 절대자의 면모.
세련이 그려낸 팬텀.
볼펜이 평가지를 좌우로 격렬하게 훑었다.
신유명이라는 이름 위에 수많은 겹으로 덧칠해지는 동그라미.
그리고 그 연기를 옆에서 보고 있는 권성한은 기가 질려 있었다.
“자유연기 가겠습니다.”
성한은 자유연기 차례가 되자, 의상을 변경했다.
발레리노의 연습복.
“저는 지젤에서 알브레히트의 연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성한은 유명의 연기를 본 후, 연기로는 도저히 승부가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유연기를 보여주면 승산이 생길지도 모른다. 직전 영화에서 조연 역할도 춤이 되기 때문에 받았으니까.
“시작하세요.”
이미 마음은 유명에게 쏠려있는 세련이었지만, 그가 알브레히트를 준비해왔다고 하니 조금 흥미가 생겼다.
이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 메인 테마의 발레가 이며, 팬텀이 발레연기를 아우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강점이기 때문.
그녀는 턱을 괴고 그가 발레를 시작하는 것에 집중했다.
라~ 라라~
음악이 흘렀다.
2막의 후회하는 알브레히트.
그 동작들은 일반인인 유명이나 감독들이 보기에는 그럴싸했지만,
‘엉망이네. 앙드오(*발을 외측으로 여는 발레의 기본 자세)부터 다 무너졌어.’
세련이 보기에는 한참 기준 미달이었다.
전공자가 제대로 연습하지 않고 추는 춤은 같은 전공자가 보기에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물론 포지션을 잡을 줄 아는 것만으로도, 대역과의 합성에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저 사람은 아웃.’
연기도, 이미 놓은 지 몇 년은 넘어보이는 발레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이쪽 배우는…뭘하려나.’
아까 놀라운 팬텀연기를 보여준 배우의 자유연기가 무척 궁금해진다.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온 그는, 시나리오 안에서 뜻밖의 씬을 들고 나왔다.
“씬 34, 연기하겠습니다.”
scene 34.
지젤의 연기를 고민하는 화란을 가르치는 팬텀.
이렇게 연기해야 한다며 팬텀이 예시를 보여주기 때문에 발레적 소양이 필수적인, 그래서 대부분 대역을 쓰려고 했던 씬이였다.
대역조차, 남자 무용수가 ‘지젤’을 얼마나 표현할 수 있을 것인지 회의에 잠겨서 써내렸던 파트.
“윤화란. 1막과 2막의 지젤 연기는 완전히 달라져야 해. 이걸 봐.”
그가 한 손을 들었다.
‘아. 오른팔을 3번 포지션으로···’
폴 드 브라(*Port de Bras: 발레에서의 팔동작)로 표현된 상체의 움직임은···
지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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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끝, 이야기의 끝
앞쪽으로 갸웃이 굽은 허리에서 목까지 이어진 일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