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61
가슴앞에 크로스로 교차된 손이 나타내는 순결과 인내.
지젤 라인Giselle Line.
‘아···’
세련이 감탄을 터뜨렸다.
척추가 완벽히 곧게 늘려지고, 팔이 한계까지 이완되어 고혹적인 라인을 만든다. 발레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흉내로는 할 수 없는 동작.
그 자세에서 팔을 펼치며 깜브레(*허리에서 시작하여 몸을 전후좌우로 굽히는 동작)로 몸을 젖힌다.
…지젤의 절망. 2막이다.
지젤Giselle
낭만주의 발레 시대에 작곡된 고전발레의 명작.
1막에서 순수한 마을처녀 지젤은 청년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심장이 약한 지젤은 그가 귀족이고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광란에 허우적대다 죽어버린다.
2막에서 지젤은 죽은 후 윌리(*서유럽 설화에 등장하는, 밤마다 무대에서 깨어나 청년을 유혹하여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만드는 요정)가 된다.
윌리들의 여왕 미르타가 그녀의 무덤에 사죄하러 찾아온 알브레히트를 보고 밤새 춤추다 지쳐서 죽게되는 저주를 건다. 알브레히트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던 지젤은 밤새 함께 춤추며 그를 지켜준 후, 동이 트자 무덤 속으로 사라진다.
죽어서까지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사랑하는 지젤의 애절함과 안타까움이 압권인 이 고전발레의 한 장면을, 앞에 있는 배우는 폴드브라(*손을 사용한 발레동작)만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어떻게 발레 전공자도 아닌 사람, 심지어 남성이
지젤의 애절함을 저렇게까지나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겨우 몇 동작 뿐이라고 해도.
시연을 멈추고 그가 다시 입을 연다.
“봐, 윤화란. 2막의 지젤은 영혼이잖아. 너의 지젤에는 아직 힘이 너무 들어가 있어. 1막의 마을처녀와 구분이 안돼.”
화란에게 내리는 준엄한 질타. 그 목소리에 깃든 자신감과 위엄.
그야말로 발레의 신이 느껴지는 연기.
발레를 어릴 때 배우기라도 했던 것일까…
세련은 들끓는 궁금함을 이길 수 없어, 연기가 끝나자마자 급하게 입을 열었다.
“발레, 예전에 하셨었나요?”
“아니요. 경합 전의 기간동안 발레학원에 다니면서 이 동작만 계속 연습했습니다. 도서관에서 지젤에 관한 영상자료도 버전별로 참고했고요.”
“한두 동작이라고 하더라도, 발레를 모르던 사람이 어떻게…그럼 하필 이 장면을 택한 이유는요?”
“화란에게 절대적인 스승의 면모를 보여줘야 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의 바스트컷은 대역으로 채우기 힘들다고 판단했고, 이 정도까진 배우로서 해낼 수 있는 걸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보정은 필요하겠지만.”
보정이…필요할까?
그 순간의 상반신의 움직임만 따진다면 나무랄 데 없는 지젤이다.
세련의 볼펜이 좀더 빠른 속도로 심사지 위를 뱅글뱅글 돌았고, 기도한 감독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있었다.
‘어떻게 된 인간이···’
자신에게 얘기하지 않고 준비한다는 자유연기가 내심 불안했는데, 이런 것을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발레에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감독으로서 방금 그 장면을 떠올려 보면 잘라낼 곳 없이 온전하다.
바스트샷들 만이라도 다 저만큼씩 표현할 수 있다면···
‘엄청난 노력가.’
그는 자신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대본 분석을 했었다. 그리고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학교 수업과 기말고사에도 매여 있었던 터다. 언제 저렇게까지 준비했던 것일까.
기도한은 옆을 둘러보았다. 권성한은 놀란 듯 입을 헤벌리고 있었고, 자신과 경합을 붙은 국감독의 욕심많은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건, 이겼다.
*
“마지막으로 인터뷰 진행하겠습니다.”
배우들의 의자가 좀 더 앞쪽으로 당겨졌다. 공간의 한가운데서 심사위원들을 마주본 형태.
말이 심사위원이지 전권이 있다시피한 윤세련의 질문은 거의 일방적으로 한 명에게만 퍼부어졌다.
“신유명씨, 지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 동생이었으면 등짝 때리면서 욕했을 캐릭터죠.”
세련이 풉-하고 터질뻔한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이해해요. 지젤에겐 알브레히트가 단순한 사랑이 아닌, 어떤 이데아의 일종이지 않았을까요. 선택받지 못하고 늘 배신당한다 해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가치라면 저에게도 있으니까요.”
그 말에 세련의 눈이 흔들렸다.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저 배우에게 그 가치는 ‘연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화란이 불쾌하지는 않았나요?”
“어리석고 안타깝지만 불쾌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해치고서야 ‘그 가치’를 쟁취할 수 있다면 저라도 유혹을 이기기 힘들 것 같네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안쓰러울 뿐이죠.”
흠···
세련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럴까요. 결국 화란은 원하는 것을 얻는데, 이것은 화란에게 해피엔딩이지 않을까요?”
“영화의 끝이 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니까요.”
“…?”
“이 뒤에 화란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프리마로 잘 살지 않았을까요?”
“이미 동료를 밀어뜨려서 경쟁이 될 만한 여지를 차단하는 것을 성공했는데, 나중에 더 강력한 라이벌이 나타난다면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생각이 들까요?”
“…”
“이 영화에서는 프리마돈나가 된 화란의 모습으로 끝이 나죠.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는 조명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게 집착하고, 타인을 해치고서야 얻은 자리가 화란에게 과연 득이 될까요, 짐이 될까요? 평생 괴로워할 것 같습니다만.”
“저는 그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네요. 괴로워하더라도, 꿈을 이루었잖아요. 괴로움보다 행복이 더 크지 않을까요?”
세련은 이상할 정도로 욱하게 반응했다.
눈 앞의 젊은 남자.
저 나이에 이미 저 정도의 연기력. 천재이겠지. 노력?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불행이 닥친다면···?
“그 판단은 개인의 몫입니다. 하지만 저라면, 결국에는 괴로워질 것 같군요.”
그 대답 이후로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녀는 권성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권성한씨에게 묻겠습니다. 팬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멋진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발레에 관한 절대적이고 엄격한 면모가 무척 멋있고, 그래서 발레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 맡는 게 확실히 유리하지 않나…하고 생각합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하고싶은 말을 끝까지 하는 권성한.
“신유명씨는요?”
“팬텀 캐릭터. 좋긴 한데 조금 아깝습니다.”
“어떤 부분이요?”
“이 대본은 전적으로 윤화란 시점의 대본입니다. 화란의 생각과 의도에 대해선 상세하게 그려진 반면, 팬텀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절대자적인 존재로만 그려져 있어요. 다소 평면적이죠.”
“실제로 팬텀은 그런 존재인데요.”
“글쎄요.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이 극장의 틈새에서 살아왔던 발레에 미친 남자가 과연 뒤틀린 곳 하나 없는 신적인 존재일 수 있을까요?”
“…”
“좀더 ‘인간다운’ 팬텀의 모습이 섞인다면 훨씬 이야기가 매력있어 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원래라면 배우가 오디션장에서 작가에게 할 수는 없는 얘기였다.
역의 해석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연출과 상의하고, 연출이 그 해석이 충분히 납득이 갈 경우 다시 작가와 상의하게 되는 것이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함께 연기할 배우라는 점과, 그녀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차라리 이 작품을 포기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유명을 과감하게 만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의 그녀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고,
“그런데 아까 신유명씨의 연기는, 완벽히 제가 의도했던 절대자적인 면모의 팬텀이던데요?”
유명이 대답했다.
“네. 현재 대본은 그러니까요. 거기 맞는 연기를 했습니다.”
그 대답은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을 잠시 놀라게 했다.
*
“기도한 감독님, 신유명씨. 잘 부탁드립니다.”
경합이 끝났고, 이변은 없었다.
국감독은 맹한 표정의 권성한을 구박하며 씩씩거리고 나가버렸고, 세련이 생글 웃으며 두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손을 유명은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잡았다.
기도한 감독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감독이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회의실 밖을 나가있는 동안, 옷가지를 수습하고 일어서려는 유명에게 세련이 말을 붙였다.
“아까는 제가 무례했죠. 미안했어요.”
그가 그녀를 힐끔 보더니 다시 가방에 대본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밤새 연습하셨어요?”
“…네?”
“술 마신 것 같진 않은데.”
아침에 본 발레리나의 등근육. 밤새 술을 먹고 늘어진 근육일 리가 없었다.
과할 정도로 혹사시켜 바짝 결이 살아있는 근육.
왜 그녀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척하며 무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거든요!”
당황한 그녀는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 옅은 캐모마일 향이 감돌았다.
*
“휴학을 하려고 합니다.”
캐스팅이 확정된 지 약 2주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유명이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학교는 마치고…하면 안되겠니?”
엄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예술계는 적절한 시기가 있는 법이야. 아예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휴학인데 저 녀석이 어지간히 잘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