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ek Cheo-yong, the shaman Park Soo-yeon RAW novel - Chapter 162
162
박수무당 백처용 162화
백처용은 천천히 창호지 발린 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지난번처럼 환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생생한 향냄새가 풍겨왔다.
안에 앉아 있는 것은 지난번 사람으로 변했던 여우. 백처용이 신돈이라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노승에서 편조라는 법명을 받은 그는 어느새 머리를 싹 밀고, 승복까지 입고 있었다. 여우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은 깨끗한 옷차림에 굳센 표정을 한 중년 남자였다.
백처용이 가까이 다가갔다. 이들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하께서 찾으시는데 무엇을 주저하는가.”
“…갑자기 전하께서 절 왜 찾으시는지요.”
편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천천히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그 종이에는 어떤 사람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낯이 익은 그 그림을 바라보다가 백처용이 얼른 편조 쪽으로 돌아봤다.
색도 칠하지 않은 그림이었지만, 딱 보는 순간 알아볼 정도로 편조와 닮아 있었다.
편조 역시 그림을 보고 살짝 놀란 눈치였다.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전하의 꿈에 나온 자네. 꿈속에서 전하가 자객을 만났는데, 이 스님이 나타나 옥체를 지켰다는군. 꿈속에 나왔던 산이 이곳이라며 내게 어떻게든 찾아내라 신신당부를 하셨네.”
남자는 말하며 다시 그림을 접어 품에 넣었다.
“꿈일 뿐인데 어찌….”
“내일 다시 오겠네. 그때도 따르지 않는다면, 전하께 고할 거네. 그리되면 강제로 끌고 갈지도 몰라. 잘 생각하시게.”
편조의 말을 끊은 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처용 옆을 지나 절 밖으로 나가려던 남자가 멈춰섰다. 그리고 다시 편조를 힐끗 바라봤다.
“전하께서는 그 꿈을 하늘이 뭔가 점지해 준 것이라 믿고 계시네. 자네를 만나본 뒤, 뭔가 큰일을 맡길지도 몰라. 그러니 잘 생각하게. 자네에게도 다시 없을 기회일 수 있으니.”
말을 마친 뒤 남자는 그대로 절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나간 뒤에도 편조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편조가 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것은 아까의 노승이었다. 아까보다 훨씬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노승은 천천히 편조 옆을 지나더니 불상에 절을 올렸다.
편조는 가만히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절을 올린 뒤 노인은 불상 쪽으로 구부정하게 앉았다.
“너는 사람도 아닌데, 왜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거냐.”
노승의 물음에 편조는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그저 불쌍하고 가여워서 그렇습니다.”
“요귀이면서 사람들을 가엾게 여긴단 말인가.”
“요귀든 사람이든. 불쌍한 것을 보고 가엾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불쌍한 사람과 안타까운 요귀들. 모두를 구할 수 있다면, 그럴 방법이 있다면 마땅히 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일은 사람이 알아서 할 것이다.”
“…알아서 못하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편조의 말에 노승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내내 불상을 바라보던 노승의 시선이 편조에게로 향했다.
“너라고 그럴 방법이 있단 말인가?”
“해봐야 알겠죠.”
“…이미 결심한 모양인데, 말해서 뭐하겠나.”
노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편조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사람이 되기 전에는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잊지는 않았겠지.”
“…….”
백처용도 똑똑히 들었던 그 약속. 편조 역시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그러나 편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노승은 가만히 서 있다가 결국 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날 널 받아준 이유는,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네 눈빛에 요귀의 살기가 어려 있었거든.”
노승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약속을 어긴다고 해서,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마음대로 해라.”
노승은 말을 마친 뒤, 문으로 걸어갔다.
편조는 일어서 노승이 나간 쪽으로 절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까처럼 공간이 무너졌다.
이번에 나타난 공간은 화려한 듯 수수하고, 고풍스러운 왕궁이었다.
왕궁의 한 방 안에 백처용은 서 있었다.
그곳에는 역시 편조가 있었고, 높은 곳에 왕으로 보이는 자가 앉아 있었다.
“사부는 과인의 스승이며, 동시에 벗이요. 그런 그대에게 오늘 어려운 부탁을 하고자 하오.”
“명하시옵소서.”
편조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왕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부가 과인을 대신하여 싸워 주시오. 권세 있는 자들과 큰 나라에 빌붙으려는 자들. 과인을 누르려는 자들. 그들 앞에 서주시오. 과인이 뒤에서 돕겠소.”
“전하께서 소인에게 ‘신돈’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새 삶을 내리셨으니. 어떤 명이든 마다하겠나이까.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신돈이 흔쾌히 대답했으나 왕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잠시 신돈을 바라보던 왕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사부는 두렵지 않소?”
“소인은 미천하니 거리낄 것이 없나이다.”
그 대답에 왕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신돈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를 지키겠나이다.”
“나 역시 스승을 지키겠소. 약조하리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주변은 어둠에 휩싸였다.
* * *
자미궁 외곽, 거대한 전각이 탑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맨 꼭대기 층에 태공망이 있는 옥궁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중간 정도 층. 갈색 벽지와 나무 바닥으로 된 작은 방안 침대에 지윤이 누워 있었다.
옆에는 백응이 앉아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멀리 전장은 매인 백응의 눈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렴풋이 느껴지는 기운으로 전투가 막바지임을 알 수 있었다.
‘전투는 끝나가는데. 이 기운은… 비형랑 님과 매구인가.’
백응이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데 침대에 누워 있던 지윤이 움찔했다.
“으….”
지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척거렸다.
백응은 얼른 지윤 쪽으로 팔을 뻗었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자라.”
중얼거리며 백응이 지윤의 입으로 콩알만 한 환약을 밀어 넣으려는 순간.
“아저씨….”
지윤은 힘없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백응을 바라봤다.
백응은 잠시 착잡한 표정으로 지윤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다시 환약을 지윤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지윤은 양손으로 백응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저씨는요?”
“무당이라면 집에 돌아갔다. 그러니 좀 더 쉬어.”
“여기는….”
지윤이 힘겹게 물었다.
백응은 한숨 쉬며 손에 든 환약을 만지작거렸다.
백응으로서는 차마 뭐라 말하기 난감했다. 그러나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거짓말을 해서 어쩌겠는가.
백응이 결심한 듯 지윤을 바라봤다.
“저승이다.”
“네? 저승?”
그 말에 지윤이 얼른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침대에 앉은 채, 지윤은 주위를 훑어봤다.
낯선 공간. 주변에는 낡은 나무 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가구 하나 없이 사람 넷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작은 방이었다.
지윤이 뭐라 입을 열려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자미궁 외벽에 뚫렸다! 서둘러!”
“이랑진군 님과 제천대성 님 두 분 다 자미궁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밖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응은 놀란 표정으로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추격조 조장 백응이다. 무슨 일인지 상세히 말해봐라.”
문을 열자마자 보인 병사들을 향해 백응이 물었다.
병사들은 백응을 보자마자 차렷 자세로 섰다.
“현재 적 일부가 자미궁 외벽을 뚫고 침입했다고 합니다. 현재 이랑진군 양전 님과 제천대성 님이 그곳으로 향하셨다고 합니다.”
“태공망 님께서 따로 명령이 있으셨나.”
“아직 태공망 님께는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병사의 말을 들은 뒤, 백응은 잠시 생각하다가 끄덕였다. 백응은 병사들에게 물러나라 손짓한 뒤, 다시 문을 닫고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 기다리던 지윤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신당에 있는 거예요?”
“…….”
백응은 아무 말도 없이 지윤을 바라봤다.
‘적이 자미궁까지 들어갔다. 북두칠성의 진이 뚫린다면….’
“신당으로 데려다줘요. 여기… 있기 싫어요.”
생각하는 백응 쪽으로 지윤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백응은 다른 생각 중이었다.
‘태공망 님은 여기 있으라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저승이기에 백응 역시 완전한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승에서 귀태의 몸을 이용한다면 100퍼센트 이상의 힘도 발휘하는 게 가능했다.
만약 천제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었다.
생각을 마친 백응이 지윤에게 다가갔다.
“그래. 데려다주마. 이걸 먹어라.”
백응이 건넨 것은 아까 들고 있던 환약이었다.
지윤은 그 환약을 보고 살짝 경계했다.
“이게 뭐예요?”
“일종의 수면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네 몸에 빙의하기 편하게 하는 거지.”
“굳이 이걸 왜….”
“지금 전쟁이 한창이야. 적을 만날 경우, 싸우든 도망가든 네 의식이 없는 게 편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신당에 도착해 있을 거다.”
백응의 말에 지윤은 머뭇머뭇 환약으로 손을 가져갔다.
지윤은 환약을 들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한 듯, 그것을 입에 넣었다.
잠시 후 지윤은 잠들어, 스륵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백응은 그런 지윤의 몸으로 얼른 빙의한 뒤, 창밖으로 날아갔다.
* * *
백처용이 서 있는 곳은 아까와는 다른 평야였다. 낮은 풀들이 빼곡하게 자라난 제법 넓은 평야에 신돈이 서 있었다.
그러나 제법 자라난 수염에 낡은 승복이 아닌 그럴듯한 복장까지 갖춰 입은, 아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신돈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몸은 여기저기 상처로 가득했고, 피가 묻어 있었다.
이제 중년 정도로 보이는 신돈은 그 와중에도 고통스러운 기색 없이, 가만히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그런 신돈 앞에는 하얀 매와 황색 개가 있었다.
서람대사가 가지고 온 만음비서에 나온 백응과 황구. 신돈을 잡기 위해 저승에서 내려보낸 자들이었다.
백응과 황구의 몸이 은은히 빛나더니 사람 모습으로 변했다. 둘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며, 상처까지 있었다.
“이놈. 감히 대순리를 거스른 것도 모자라, 저승의 추격조를 해하다니.”
백응이 호통치자 신돈은 말없이 피식 웃었다.
그런 신돈 쪽으로 이번에는 황구가 입을 열었다.
“감히 요물이 인간의 정치에 관여하다니. 너로 인해 요귀들의 힘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아느냐!”
“사람들에게 있어 요귀보다 두려운 것은 굶는 것과 추운 것이요.”
신돈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백응이 콧방귀를 뀌었다.
“건방진 놈. 입만 살았구나. 그래서 네가 사람들의 굶주림과 추위를 없애줬나.”
“…….”
“이제 왕도 널 죽이라고 명했다. 포기하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여라.”
“전하께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날 버렸으나 원망하지는 않소. 나 역시 은인의 약속을 어겼으니, 그것이 이리 돌아온 것이겠지요.”
“업보에 그리 순응하는 놈이 어째서 대순리는 받아들이지 않는가.”
백응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말했다. 그 사이 황구는 슬쩍 옆으로 움직이며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때 신돈의 얼굴로 조금씩, 붉은색 도는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지요.”
신돈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황구가 움직였다.
거대한 개로 변해 앞발을 휘두르는 황구. 신돈은 겨우 그것을 피했고, 곧장 백응의 깃털이 날아왔다.
“저승의 신장들은 이승에서 자기 힘을 다 발휘 못 한다 들었소.”
신돈이 말하며 팔을 뻗었다. 황구와 백응 둘 다 동시에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백응이 곧장 속박술을 풀고 달려들었다.
백응의 날카로운 발톱이 신돈의 배를 꿰뚫었다. 동시에 황구가 커다란 입으로 신돈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신돈은 입에서 피를 쏟으면서도 한쪽 팔로 황구의 머리를 붙잡았다.
펑!
폭발과 함께 황구의 머리가 날아갔다.
“네 이놈!”
백응이 분노에 차 소리치며, 이번에는 신돈의 목을 노렸다.
“나는 죽을 수 없소. 그대들이 대순리 운운하며 방관한 세상의 미래를 내 눈으로 보겠소.”
백응의 공격이 신돈에게 닿는 순간. 사방으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사그라졌을 때, 신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허허벌판에 백응 홀로 서서 착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다시 백처용 주변은 어둠에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