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39
〈 139화 〉 과거, 그보다 더 먼 과거(2)
* * *
고대의 엘프, 카르디.
몇 살을 처먹었는지 모를, 이 꼰대 엘프는 언제나 건조했다. 담담했으며, 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얼마 없었다. 카르디가 감정을 드러내는 주제는 오직 제 과거와 연관된 일뿐이었다.
‘배교자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때, 나는 카르디에게서 처음으로 감정의 변화를 보았다. 내 이야기를 듣던 카르디는 눈살을 찌푸렸고,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내가 본 카르디의 유일한 감정표현이었다.
내가 분명 경고 했을 텐데.
그렇기에,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았나 보군, 스케발.
카르디가 씹어 뱉듯이 말하는 것은, 죽일 듯이 누군가를 노려보는 모습을 본 것은··· 카르디를 알고 지낸 지 십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죽고 싶나?
나는 카르디를 보았다. 카르디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본래부터 짐승의 것을 닮았던 누런 눈동자가 조금 더 사나워졌다.
하.
그 시선을 받는 이가 있다.
따각,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스케발이 웃음을 흘렸다. 비웃음이 설산에 메아리쳤다.
그 어느 것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입만큼은 살아있구나, 잿빛. 네가 그럴 말을 할 자격이나 되는가?
······.
너는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 모두에게 승리를 약속했으나 패배했다. 그 어느 것도 지키지 못했지. 아직도 제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로군.
스케발의 뼈마디가.
리치가 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인지, 아직은 새하얀 뼈마디가 카르디를 가리켰다.
너는 패배자에 불과하다, 카르디.
스케발이 손을 뻗었다.
들고 있는 걸 넘겨라. 그건 네가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다.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할···.
아주 지랄을 하는군.
스케발의 목소리가 끊겼다.
카르디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가 엄지와 중지를 맞댔다.
‘···뭘 하려는 거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로서는 카르디가 무엇을 하려는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카르디는 연금술사였고, 스케발을 상대할만한 실력이 되지는 않았다.
잿빛, 지금 뭘···?
그러나, 어째서일까.
카르디를 바라보는 스케발의 동공이 흔들렸다. 검은 안광이 이리저리 요동쳤다.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멈춰라!
스케발이 황급히 소리 질렀다.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묻어 나왔다.
모든 건 끝났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
모든 게 끝났더라도.
스케발이 황급히 주문을 짜 올렸다. 순식간에 완성된 결계가 스케발을 감싼다. 다급해 보이는 스케발과 달리 카르디는 여유로웠다.
내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딱, 하고 카르디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니, 계약 또한 건재하다.
주변이 밝아졌다. 설산에 드리운 노을이 한순간에 걷혔다. 노을을 몰아낸 것은 밤이 되어 드리운 어둠이 아니었다. 노을을 걷어낸 것은 더 큰 빛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보았다.
태양이 걸려 있었다. 해가 하늘의 한 가운데, 중천(中?)에 떴다. 비유가 아니었다. 정말로 하늘에 태양이 떠올랐다. 그것의 정체를 내가 깨달은 건, 조금 뒤의 이야기였다.
‘···주문이다.’
주문이었다.
마나로 만들어진 태양이었다.
입가를 비집고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친.”
주문과 주문이 얽혔다. 마나와 마나가 마찰했다. 회로와 회로가 부딪쳤다. 얽히고, 마찰하고 부딪친 것들이 만들어낸 것은 태양을 닮은 화염이었다.
한눈에 담는 것조차 불가능한 거대한 화염.
주문을 짜 올렸다기보단, 한데 뭉그러트렸단 말이 어울리는 주문이다. 그 주문이 만들어낸 화염이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꿈틀거리는 화염이 카르디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휙.
카르디가 손가락을 허공에 그었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무언가를 떨어트리듯이.
내 눈앞에서 꺼져라.
화르르륵!
화염이 추락한다. 태양이 떨어진다.
그건 마치, 태양이 저무는듯한 모습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저무는 곳이 수평선의 너머가 아닌··· 바로 눈앞이라는 점이었다.
화악!
섬광이 설산을 후려쳤다.
일대를 뒤덮은 눈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기나긴 세월에 거쳐 쌓인 만년설을 흔적도 없이 지우는 열기였다. 그 열기 앞에, 한낱 마법사가 쌓아 올린 결계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치이이이이이익!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게 재로 사위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환영이다.’
환영인 건 알고 있었다.
머나먼 과거에 일어난 일이므로, 열기가 나를 덮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심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쿨럭.
섬광이 걷혔을 때, 카르디는 마른기침을 하고 있었다. 후두둑, 하고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르디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타닥, 타닥.
잔불이 남은 곳.
카르디가 그곳을 향해 몇 걸음 움직였다. 그곳에는 반쯤 녹아내린 스케발이 있었다.
분명···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콰직!
카르디의 신발 밑창이 스케발의 라이프 베슬을 뭉갰다. 그리곤 카르디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음.”
나는 카르디의 뒷모습을 흘겨봤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내가 알던 카르디와는 두른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애초에··· 카르디가 마법사던가?’
카르디는 알고 있는 게 많다.
그는 뛰어난 연금술사다. 하지만, 마법사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랬다. 마법사에게 기초되는 것 중 하나가 타고난 마나의 양이었다.
‘그리고, 카르디가 가진 마나의 양은···.’
극소량이었다.
기초 주문 몇 개만 써도 바닥이 날 정도의 마나.
‘그 쥐꼬리만 한 마나를 들고 저런 걸 쓴다고?’
말이 안 됐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만한 건 나도 작정하고 써야 해.’
나는 미심쩍은 눈길로 카르디의 환영을 보았다. 물론 노려본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일단은 쫓아가 봐야겠지.’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나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은 뭉개진 스케발의 시체였다. 녹아내려 흐물흐물해진 개뼉다구.
‘어째 익숙한데.’
묘하게 익숙한 장면이었다.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애는 진짜 어딜 가나 보이네.’
낯선 것들 사이에 유일하게 익숙한 것이었다.
2.
쿠락트 산맥의 인근에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북부에서도 변방에 속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에는 낡은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주민들이 애용하는 곳은 아니었다.
북부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신을 믿을 여유가 없었다. 그들에겐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지금이야 사정이 나아졌지만, 그레이스 가문이 바로서기 이전의 북부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야만족과의 전투.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 들어오는 마수들.
거기에 거친 환경까지 더해지니, 북부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도를 올릴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존재하는지도 모를 신에게 기도하느니 산을 올라 들짐승 한 마리를 더 사냥한다.
그것이 북부에 깔린 종교에 대한 인식이다.
“무교자들의 땅이지. 썩 마음에 드는 땅은 아니야.”
그런 북부의 땅에 발을 들인 교인이 있다.
델로힘 교단의 추기경으로 추앙받는 노인, 베르딕트였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힘들수록 더욱 신을 믿어야 하는 법이거늘, 그분의 은총 아래 살아가는 주제에 기도할 시간이 없다니. 배가 부른 것이지.”
그 뒤를 따라 성기사들이 걷는다.
성기사들이 잡아끄는 줄의 끝에는 어린아이들이 묶여있다.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다. 그들은 맨발로 눈밭을 걸었다.
“이곳이다.”
탁, 하고 추기경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멈춰 선 곳은 넓게 펼쳐진 설원이다. 설원에는 성국에서 가지고 온 성물(?物)들이 놓여있다.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성녀의 세례식 때에도 한두 개가 나올까 말까 한 물건들이다. 저것들 하나하나에 담긴 성력을 마주하고 있자니 전능감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에 비하면 이것들은 쓰레기다.’
추기경은 드라카가 보여준 것을 떠올린다.
작은 뼈마디. 마치 별 그 자체를 보는듯한 뼈마디에 담긴 성력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결국에 그런 것이다.
찬란했던 고대, 찬란했던 시대의 성녀.
교단의 역사서 첫 장에 새겨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최초의 성녀.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는 너무나 터무니 없는 것들 뿐이라, 허구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최초의 성녀는 실존했으며, 드라카가 보인 것이 그 증거였다.
‘그만한 존재를 되살린다.’
추기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기적의 순간을 지켜볼 수 있다.
델로힘 교단은 다시 한번 번영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저, 추기경님.”
추기경의 몰입을 깬 것은 한 성기사였다.
추기경이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를 흘겨봤다.
“무슨 일이지.”
“하나,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말해라.”
성기사가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검귀는 어째서 최초의 성녀님을 부활시키려 하는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그, 검귀는 배교자의 존재만을 쫓지 않습니까. 그가 교단의 일원인 건 알고 있지만···.”
추기경이 알아들었다는 듯 손짓했다.
“복수에 미쳤을 귀신이, 어째서 최초의 성녀님을 되살리는··· 이런 종교적인 일에 관여하는가. 그것을 묻고 싶은 것 아닌가.”
“그게··· 예. 맞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
추기경이 쿠락트 산맥을 바라보며 말했다.
“델로힘의 작은 가르침, 다섯의 하나.”
읊어라.
추기경이 그렇게 말했고, 성기사는 답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마라, 지금을 살아라.”
“일곱의 셋.”
“죽은 이는 가슴에 묻어라. 그리워하되 죽은 이의 존재를 욕망하지는 마라.”
추기경이 뒷짐을 진 채 성기사를 돌아봤다.
“검귀는 그 둘을 지키지 못했다.”
과거에 얽매였다.
죽은 이의 존재를 욕망했다.
“그는 죽은 제 딸을 되살리고자 한다. 그 기적을 위해선 최초의 성녀님이 필요한 것이겠지. 회생의 기적을 쓸 수 있는 건··· 최초의 성녀님 뿐일 테니까.”
지금조차 그렇다.
이만한 성물과 제물을 준비했음에도 회생의 기적은 요원하다. 방금 막 죽은 시체를 들고 와도 살릴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적인 것이겠지.’
추기경이 제단을 훑었다.
성물을 통해 만들어지는 제단은 과연, 금술을 시행하기에 덧없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역으로 꽂힌 십자가를 보며 그가 턱을 매만졌다.
“흠.”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부족하군.”
부족했다.
추기경이 담담히 말했다.
“제물이 부족하다.”
“예? 그러나, 이 정도면 정확히 맞아떨어질 거라고 본교회에서······.”
“맞아떨어지는 것으론 부족하다. 기적을 행사하는 현장이다. 부족함이 있어선 안 되지.”
“하지만, 당장 조달하기는 어렵습니다. 추기경님. 못해도 열흘 정도의 시간은······.”
“왜 어렵나?”
그가 시선을 돌렸다.
쿠락트 산맥의 초입에 선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산맥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추기경이 그 마을을 가리켰다.
“넘쳐흐를 정도로 있지 않나, 저곳에.”
성기사가 침묵했다.
추기경의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차분한 눈동자 속에 담긴, 절제된 광기에 성기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당장 준비해오면 되겠습니까?”
“그래 주면 좋겠군.”
성기사가 질문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추기경이 답했다.
“많을수록 좋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