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43
〈 143화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1)
* * *
교회의 바깥으로 나온 순간, 라니엘은 이변을 느꼈다. 혓바닥이 딱딱하게 굳는듯한 느낌이다. 라니엘은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벌렸다.
“···뭐야?”
별과의 계약이 맺어졌을 때의 이질감.
그것은 일종의 ‘제약’이었다. 라니엘은 제약이 걸린 부분을 더듬었다.
“배교자, 글레투스는···.”
최초의 성녀다.
뒷말은 발음되지 않았다. 다른 재앙들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저 교회 안에서 얻은 지식을, 라니엘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이게 카르디가 말한 제약이구나.’
카르디가 자세한 사정을 들려줄 수 없다며, 매번 운운하던 ‘제약’이 무엇인지 얼추 감이 잡혔다. 과연, 몹시 까다로운 제약이었다.
‘조건을 충족한 존재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실.’
라니엘은 그 조건이 무엇인지 별에게 물었다.
「최초의 계약자가 정의한 ‘쿠락트의 연구시설’에 발을 들이는 것이 조건이다.」
“그럼, 연구시설에 발을 들이는 조건은?”
「죽음의 칼, 혹은 배교자에게서 별의 잔재를 빼앗아라. 최초의 계약자는 별의 잔재를 ‘그늘의 검’과 ‘델로힘의 팔’로 정의 내렸다.」
“···허허.”
미친 엘프 같으니라고.
라니엘은 그리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교회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라니엘도 알고 있었다.
‘그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제약을 걸어야 성립이 되는 거래였던 거겠지.’
본래 맺어진 계약의 틈새를 찾는 것은 어렵다.
어려운 것을 행하기 위해선, 보다 까다롭고 번거로운 방법을 골라야 했을 테지.
“······.”
라니엘은 제 손에 들린 열쇠를 보았다. 배교자의 팔에서 카르디가 끄집어냈던 열쇠.
‘처음 문을 열 때는 열쇠를 썼지만.’
지금은 열쇠가 없어도 문을 열 수 있었다.
‘열쇠는 딱히 필요가 없었던 거네.’
열쇠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조건을 달성했다는 상징.
어째서 상징이 열쇠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가? 그녀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열쇠의 주인인 글레투스와 카르디만이 알고 있겠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네.”
라니엘은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걷다 보니 매섭게몰아치는 눈 폭풍이 시야에 잡혔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곳은 쿠락트 산맥의 정상뿐이다. 산을 내려가기 위해선 다시 저 눈보라를 건너야만 했다.
“후우···.”
라니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산을 오르는 건 그녀에게도 고단한 일이었다. 다시 한번 눈보라를 뚫고 내려갈 것을 생각하면 한숨만 새어 나온다. 그러나, 발걸음이 무겁진 않았다.
‘무의미한 발걸음은 아니었으니까.’
잊혀진 역사를 보았다.
카르디가 말하고자 한 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다음’을 받았다.
‘그들이 남긴 가능성.’
앞길을 밝힐 등불.
과거의 현자가, 수백 년의 세월을 각오하고 안배해두었을 미래를 위한 가능성. 자신이 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꾸욱.
라니엘은 품 안의 목함을 쥐었다.
그녀의 품 안에는 두 개의 목함이 있었다. 하나는 재앙으로 변한 배교자의 팔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초의 성녀의 팔이었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져 온 것들.
그것을 쥔 채 라니엘은 생각한다.
‘아직, 모든 걸 알지는 못했다.’
카르디는 편지에 이것을 ‘세 번째’ 계약이라 적었다. 그렇다면, 앞선 첫 번째와 두 번째 계약은 무엇인가?
그들이 타락한 이유는 또 무엇이고.
마왕이란 존재의 정체는 또 무엇이며.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그들이 머물렀던 왕국은 또 무엇인가.
알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아직 모르는 것은 많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라니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대라 불리던 시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과거와는 다르다. 그녀는 지금에서야 모든 일의 출발점에 선 기분이었다.
‘막막한 길을 해치며 걷는 게 아니다.’
갈 길은 멀다.
하지만, 걸어야 할 길이 보인다.
그것은 수백 년 전의 누군가 한번은 걸었던 길이며, 언제일지 모를 다음을 위해 남겨둔 길이다.
‘···멀고 험하지만.’
길이 있다면 걷지 못할 것은 없었다.
자신으로서 불가능하다면 다음으로, 다시 다음으로 이어 걸으면 될 뿐이다. 과거의 용사와 과거의 엘프가 그러했듯이.
“후우.”
짧게 숨을 뱉은 라니엘이 고개를 든다.
그녀는 눈보라 속으로 한걸음, 크게 내디뎠다.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2.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나?”
“아, 라크 도련님.”
평소라면 단련을 하고 있을 전사들이 부단히도 움직인다. 그 모습에 위화감을 느낀 라크는 전사 하나를 불러세웠다.
“그게 말입니다···.”
에랴흘의 열세 전사 중 제 3석.
매의 눈, 오야칼이 라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시점에서 라크는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이상했다.
‘···열세 전사들 뿐이다.’
어딘가를 향할 채비를 하는 전사들, 그들 모두가 열세 전사에 속한 이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분위기도 평소와는 달랐다.
“······.”
전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차갑게 식은 기류가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그들은 말없이 제 신발에 징을 감고 있었다. 이윽고, 잠깐의 뜸을 들인 오야칼이 말을 이었다.
“하멜른 마을에 습격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라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오야칼은 제 관자놀이를 짚으며 설명을 이었다.
“하멜른 마을은,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변방의 마을입니다. 쿠락트 산맥의 인근에 위치한 마을이라 마력 통신도 제대로 닿지 않죠. 그래서 습격하기엔 제격이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하고 오야칼이 말했다.
“그곳의 주민들이 늙거나, 일선에서 은퇴한 이들이라곤 하지만··· 그들 또한 전사입니다.”
“그건···.”
“습격자는 그들을 우습게 본 것이겠지요.”
오야칼이 미간을 좁혔다.
“어젯밤,노인 하나가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부상을 입은 상태로 눈 폭풍을 건너느라, 그 노인은 도착과 동시에 명을 달리했지만···.”
오야칼이 빠득, 이를 갈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전한 말이 있습니다.”
일선에서 물러선 전사.
그러나, 전사의 피를 타고난 노인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 정보를 전하는 데 성공했다.
“습격당했다.”
마을이 공격당했다고.
“새하얀 갑옷을 입은, 성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마을을 습격했다.”
“···성기사들이?”
라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 턱을 매만지던 라크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뭐라 하시지?”
“겁대가리를 상실한 종교쟁이들에게 북부의 무서움을 보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페일리아 부인께선 ‘증거’를 모아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째서 증거를 모으는가.
정치에는 무지한 라크였지만, 제 아버지의 성격을 생각해보자면··· 그 이유를 짐작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께선 성도로 향할 준비를 하고 계신가 보군.”
“예,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그런 인물이었다.
북부의 전사들은 굴욕을 잊지 않는다. 복수를 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에랴흘 반 그레이스는 상대가 누구든간··· 제것을 건들면 언제나 물어뜯을 준비가 된 전사였다.
“오야칼.”
“예, 도련님.”
“지금 열세 전사가 향하는 곳은 하멜른이겠지?”
“그렇습니다.”
음, 하고 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겠다.”
“···도련님께서요?”
“방해된다면 따라가지 않겠다.”
오야칼이 잠시 침묵했다.
방해가 되는가? 그건 아니었다. 라크는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전사다. 열세 전사에 준하는 실력을 갖췄다.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도 그러셨지만···.’
북부로 돌아온 뒤, 특히 최근 일주일간 라크는 몰라보게 강해졌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오야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 같아선 허락하고 싶다.’
하지만, 위험이 따르는 행군이다.
단순히 자신이 판단할 문제는 아니었다. 오야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공께 여쭈어봐야 할···.”
“다녀와라.”
오야칼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야칼과 라크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전사들과 함께해도 좋다, 라크.”
그곳에는 백곰의 가죽을 어깨에 두른 에랴흘이 서 있었다. 전사들이 그를 향해 살짝 고개 숙였다. 에랴흘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짓을 하고선 말을 마저 이었다.
“북부의 주인이 될 이는, 언제나 전사들과 함께해야 하지. 다만 군림할 뿐인 군주는 북부에 필요 없다. 함께하는 전사야말로 북부의 주인이다.”
그가 라크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그들에게 북부의 무서움을 보이고 와라.”
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랴흘은 만족스레 웃고선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성도로 간다. 그 빌어먹을 종교쟁이들에겐 이번 기회에 할 말이 제법 많을 것 같군.”
그 말을 끝으로 셋의 전사를 호위로 대동한 에랴흘은 마차에 올랐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대공이 떠나자 오야칼은 입을 열었다.
“도련님.”
준비를 마친 전사들.
그 전사들의 대표로 오야칼이 질문했다.
“따라오실수 있겠습니까?”
전사들 중 가장 발 빠른 이들이 모였다.
변두리의 마을까지 최단 거리로, 쉴 새 없이 달리게 될 것이다. 따라오지 못하는 이를 챙길 여유는 없다. 그렇기에, 오야칼은 질문한 것이다.
따라올 수 있겠냐고.
그 질문에 라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3.
쿠락트 산맥의 정상을 휘감은 눈보라.
그 눈보라를 뚫고 나온 라니엘이 짧게 숨을 뱉었다. 내뱉은 숨이 하얗게 일었다.
“어으.”
부르르, 몸을 떤 라니엘이 제 팔뚝을 쓸어내렸다. 옷자락에 묻은 눈송이를 털어냈다.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가는 게 더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속도가 붙긴 하는데··· 속도가 주체가 안 되네.’
발을 헛디뎌 바닥을 구를 뻔했다.
라니엘은 한숨을 내쉬며 짧게 기지개를 켰다. 여기서부턴 눈보라가 좀 덜했다. 유해진 환경에 자연스레 긴장이 풀렸다.
터벅.
라니엘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번째 걸음을 내디디려던 순간이다. 움찔, 하고 라니엘의 몸이 떨렸다. 라니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
등허리가 곤두선다.
전장에서 단련된 직감이 경종을 울린다.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이 작은 소음을 잡아낸다.
스겅.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도신이 엷게 진동하는 소리다.
라니엘은 공기의 흐름을 읽는다. 무언가 공기를 밀어내며 다가오고 있다.
‘노리는 곳은···.’
목.
라니엘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몸을 비틀었다. 그녀과 움직임과 동시에, 무언가 그녀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서걱.
투둑, 하고 라니엘의 머리칼의 끝자락이 끊어졌다. 스쳐 지나간 것은 검이었다. 무척이나 예리하게 갈린 날카로운 검(?).
시야의 사각.
긴장이 풀린 한순간의 틈.
그 틈을 노리고 찔러든 절묘한 공격이다. 그 공격이 빗나갔음에도, 상대는 당황치 않는다. 수평으로 휘둘러진 검의 궤도가 비틀린다. 자세가 틀어진 라니엘을 쫓아 칼끝이 움직인다.
틀어진 자세, 불균형한 발디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순간 이어진 추가타에 반응할 수 없다. 그러나, 라니엘은 검사가 아니다. 굳이 자세를 잡을 필요가 없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강타(Smite).
스톡된 주문이 빛을 뿜는다.
카아앙!
위로 치솟은 섬광이 칼날을 쳐낸다. 섬광은 한줄기가 아니다. 대여섯 발의 섬광이 의문의 습격자를 노린다. 그는 칼을 휘둘러 섬광을 쳐낸다.
캉, 카앙!
하나의 섬광에 한걸음.
총 다섯 걸음을 물러선 그가 고개를 든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야.”
드러난 습격자의 얼굴.
그것을 본 라니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짓거리냐?”
그녀는 눈앞의 습격자를 바라본다.
저 좆같은 면상을 모를 리가 없다. 라니엘은 벌레라도 씹은 듯 표정을 구겼다.
‘검귀, 드라카.’
그렇게 불리는 존재가 입을 연다.
“글쎄.”
드라카가 칼끝을 아래로 내린다. 넝마와 같은 옷깃을 가볍게 턴 그가, 짧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그가 내렸던 칼끝을 다시 들어 올린다.
그 칼끝은 라니엘을 향한다.
“은퇴한 거 아니었나? 잿빛 마법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