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44
〈 144화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2)
* * *
드라카는 오랜 세월 검을 휘둘러왔다.
그는 수많은 적과 싸웠다. 수많은 강적을 보았다. 보고 또 보았다. 수십 년의 세월을 드라카는 오직 한 자루의 검만을 든 채 견뎌왔다.
‘인생의 태반을 검(?)과 함께했다.’
훌륭한 검사는 실전의 경험으로부터 완성된다. 그런 의미로 드라카는 이미 완성된 검사였다.
완성된 검사, 검의 초인.
그리고, 검의 초인은 결코 잊지 않는다.
자신과 한 번이라도 검을 맞부딪쳐 본 상대를.
“······.”
키잉.
도신이 얕게 떨린다.
떨리는 칼날을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며 드라카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소녀가 서 있다. 그녀를 바라보며 드라카는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지.”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겹치는 게 많다고는 생각했다. 수상한 것도 한둘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드라카가 제 손가락으로 칼날을 튕겼다.
지잉, 하고 칼날이 부르르 진동한다.
“이건 아무래도 말이 안 되는군.”
그렇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일격을 막은 것도 모자라, 다음의 일격에 대응까지 한다라.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
“초인이 죽일 각오로 휘두른 검, 그걸 반응하고 피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되던가? 하물며, 마법사로 한정한다면··· 한 명밖에 없지.”
검을 휘두른 순간 드라카는 확신했다.
‘분명히 목을 베었을 검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린 일격이다.
상대가 방심한 순간을 노린 완벽한 기습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피했다.’
피한 것도 모자라 반격까지 날렸다.
그 순간 저 소녀가 보여줬던 움직임이 드라카의 눈앞에 다시 재생된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드라카는 다시 한번 확신한다.
‘똑같다.’
호흡, 순간적인 움직임, 주문의 선택.
그리고, 사소한 습관마저도 전부.
그가 아는 ‘잿빛 마법사’와 한치도 다름없는 선택이었다. 전투의 습관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지 않나?”
그렇기에, 드라카는 확신한다.
눈앞의 소녀가 잿빛 마법사임을.
“잿빛.”
소녀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으나··· 드라카가 보기에 그것은 긍정이었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설산을 오르던 드라카는 저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소녀는 막힘없이 산을 올랐다. 그리고, 드라카로선 오를 수 없었던 산의 정상을 휘감은 눈보라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검을 휘두르기 전부터 의심은 했다.
의심이 확신으로 뒤바뀌었을 뿐이다.
‘어쩌다 저런 모습이 됐는가?’
드라카로선 알 수 없다.
드라카는 마학에 무지하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은 수백 가지를 넘게 알고 있으나, 그는 마법이란 학문을 탐구하지 않았다.
알지 못하기에, 그는 제 감을 믿는다.
“제법 우스운 꼴이 됐군.”
피식, 드라카가 입가를 비튼다.
“그 이름 높은 현자께서··· 은퇴 후 한다는 짓이 겨우 이건가? 할 게 어지간히도 없나 보군.”
“그렇게 말하는 너는, 뭐 대단히 할 게 있어서 이런 설산에나 올랐나 봐?”
“글쎄, 네게 수상함을 느껴 쫓아왔을 수도 있지.”
라니엘이 미간을 좁혔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너는 시간 낭비하는 건 곧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니까. 무언가, 목적이 있으니까 여기로 온 거겠지.”
몇 번이고 맞부딪쳤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너, 여기에 뭐가있는지 알아?”
“···알고 있다.”
“아니, 넌 몰라.”
라니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몰라. 알 리가 없지. 그냥 얼추 감을 잡은 거야. 여기에 뭔가 있을 거라고.”
“···꼭, 너는 알고 있다는 눈치로군.”
그녀가 제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한번 맞춰볼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린다.
들어 올린 손가락은 드라카의 목덜미를 향한다. 보다 정확히는, 그가 목에 걸어둔 성녀의 뼛조각으로.
“성유물과 성유물은 서로 공명하지. 별과 관련된 것들은 다 그래. 성검끼리도 공명하니까. 그렇다면, 네가 그 뼛조각을 가지고 뭐를 찾으려 했는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최초의 성녀의 유해.”
그녀가 말했다.
“붙은 전설은, 기적의 행사.”
그녀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그것을 찾아 뭘 할 것인가···.”
그녀가 드라카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것은 답을 찾은 자의 웃음이다. 반개(半?)한 푸른 눈동자는 꿰뚫듯이 드라카를 바라본다.
“왜,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냐?”
그 한마디에 드라카는 헛웃음을 흘린다.
전부 다 들통났다. 드라카는 한 손으로 제 눈가를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또, 너로군.”
또, 잿빛 마법사다.
눈앞의 소녀, 잿빛 마법사는 어떠한 인물인가. 몇 번이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인물이다. 몇 번이고, 드라카의 계획에 변수가 된 인물이다.
꾸욱.
드라카가 제 목에 걸린 성녀의 뼈를 쥔다.
소녀를 향해 기울어진 뼈가 진동한다. 어느 때보다 강하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최초의 성녀의 유해.”
드라카가 손가락으로 라니엘을 가리켰다.
“네가가지고 있는 거겠지.”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
“내게 넘겨라.”
“줄 것 같아?”
“아니, 그럴 것 같진 않군.”
바람이 불어온다.
눈 섞인 바람에 드라카의 옷자락이 흔들린다. 라니엘의 잿빛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낀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둘은 동시에 한걸음, 서로에게 다가섰다.
“너는 내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지.”
“그딴 정신 나간 방식을 누가 이해해줘?”
“그래, 나 또한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드라카는 라니엘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다 쉽고, 효율 좋은 길을 두고 라니엘은 언제나 먼 길을 돌아갔다. 드라카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라니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언제나 드라카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이든 희생시키고, 소모시켜 목적을 이루려 하는 검귀는 라니엘의 눈에 마왕군이나 다름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을 안다.
그렇기에, 인간은 반목한다.
턱.
다시 한걸음 가까워진다.
“···몇 번이고 죽일 기회는 있었지.”
“너만 그랬겠냐?”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선다.
라니엘의 몸 위로 잿빛 마나가 피어오른다. 검귀의 칼끝에 검기가 서린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둘의 호흡은 흐트러짐이 없다.
턱, 하고 다시 한걸음.
그렇게 피아간의 거리가 열 걸음 아래로 떨어졌을 무렵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참 좋은 장소야.”
잿빛 마법사가 쭉, 장갑을 끌어 내린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군.”
검귀는 칼을 고쳐 잡는다.
그들은 몰아치는 눈바람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본다. 주변을 둘러보면 새하얀 눈뿐이다. 목격자는 없으며, 사람의 발길이 닿지도 않는 곳이다.
“사람 하나 묻어도, 티도 안 날 테니까.”
열 걸음의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진다.
주문이 빛을 뿜는다.
칼끝이 눈보라를 가르며 일선(一?)을 긋는다.
투확!
솟구치는 눈발 너머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푸르른 눈동자와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서로의 색(色)을 비춘다.
“죽여주마, 잿빛.”
검과 주문이 맞부딪친다.
한순간이지만 눈보라가 걷혔다.
2.
“거의 다 왔습니다. 준비하십시오, 도련님.”
“음, 알겠다.”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탁, 하고 땅을 박찬 오야칼이 뛰어오른다. 날렵한 움직임으로 나무를 붙잡고 올라선 그가 눈을 가늘게 뜬다. 시야가 순식간에 확장된다.
“확인.”
그가 괜히 매의 눈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초인에 가까운 시력으로 오야칼은 마을을 돌아다니는 성기사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들은 마을을 경유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당장 보이는 수는 서른 남짓이다. 허나, 향하는 방향을 보아 더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야칼의 말에 전사들이 잠시 멈추어 선다.
그들이 짧게 숨을 뱉으며 오야칼을 바라본다.
“인력을 나누지. 셋은 마을 방향으로.”
오야칼이 판단을 내린다.
이곳에 도착한 열세 전사는 총 여덟이다. 인력을 나눠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남은 다섯은 저들의 본거지로 간다.”
산맥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야칼은 불길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살짝 시선을 돌려 라크를 보았다.
“도련님은 그럼 어느 쪽으로···.”
“오야칼.”
라크가 오야칼의 말을 끊었다.
그 목소리가 제법 다급했다.
“그곳이 아니다.”
라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전부, 저곳으로 가야 한다.”
그가 가리킨 방향은 성기사들이 향하는 곳과 정반대의 방향이다. 그곳을 바라보는 라크의 눈에 핏발이 섰다. 라크의 직감이 경종을 울린다.
“···저곳에.”
라크가 말했다.
“저곳에 있는 것이, 완성되게끔 둬선 안 된다.”
있어서는 안 될 것.
거슬러선 안 될 무언가를 거스르는 것.
그것이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3.
초인과 초인, 혹은 그에 준하는 이들끼리의 싸움은 단순한 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들이 쌓아온 기술에 의해 승패는 갈린다.
과거, 한 번이지만 쿤텔과 드라카는 결투를 한 적이 있었다. 승리를 따낸 것은 쿤텔이다.
「내가 이기긴 했지.」
하지만, 이라고 쿤텔은 말했다.
「이게 결투가 아니고, 서로를 죽이려고 했던 싸움이라면··· 승리를 확신하진 못하겠어.」
쿤텔의 검과 드라카의 검은 다르다.
드라카의 검은 오롯이 죽이기 위한 검이다. 지키고 막아내기 위한 동작은 그의 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기더라도, 두 팔 성히 이기진 못할 거야.」
쿤텔은 그렇게 단정 지었다.
드라카는 그런 인물이었다.
패배하더라도, 상대에게 완벽한 승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겨주질 않을 인물.
「그러니까, 검귀(??)인 거겠지.」
* * *
카아아앙!
주문과 칼날이 맞부딪친다.
그러나, 울리는 것은 쇳소리다. 캉, 카앙하는 쇳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진다. 새하얀 눈밭 위로 두 명분의 발걸음이 어지러이 찍힌다.
촤악, 눈보라가 흩날린다.
카앙, 쇳소리가 크게 울린다.
한걸음 뒤로 밀려난 드라카가 칼을 아래로 찍듯이 휘두른다. 바닥에 깔린 눈발이 투확, 하고 튀어 오른다. 몰아치는 눈보라에 섞인 눈발이 라니엘의 시야를 가린다.
촤아앗!
눈보라를 가르며 드라카의 검이 라니엘을 노린다. 드라카의 검은 거칠다. 쿤텔의 부드럽게 모든 걸 베어내는 검과는 다르다. 찢고, 헤집는 검이다.
촤악!
눈보라가 칼끝에 베인다.
틱, 티딕 하고 갈라지는 눈송이 사이로 새하얀 목덜미가 보인다. 살갗에 칼날이 파고들려는 순간이다.
강타(Smite).
주문이 빛을 뿜는다.
카앙! 검이 위로 튀어 오른다. 걷힌 눈보라 사이로 라니엘의 모습이 드러난다. 시야가 가린 것을 이용한 건 드라카 뿐만이 아니었다.
쿠웅.
그녀가 바닥을 찍는다.
걷히는 눈보라 사이로 라니엘이 주먹을 휘둘렀다. 꽉 쥔 주먹에 스톡(Stock)된 주문이 빛을 뿜는다.
분쇄(Smash).
땅이 뒤집힌다. 바닥에 쌓인 눈발이 공중으로 솟구친다. 무형의 충격파는 닿는 모든 걸 갈아버리며 드라카를 덮친다.
“······”
충격파를 앞에 둔 드라카의 눈동자는 고요하다. 그는 튕겨 나가는 칼을 억지로 붙잡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빙글.
튕겨나간 검과 함께 드라카가 공중에서 몸을 뒤튼다. 드라카는 검의 초인이다. 검의 초인이란, 어떠한 상황,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완벽한 검’을 선보일 수 있는 존재다.
키이이잉!
칼끝이 요란스레 진동한다.
눌러 담은 검기(??)가 해방의 순간을 기다린다.
서걱.
드라카가 공중에서 검을 휘두른다.
휘두름은 한 번이나, 휘두름이 만들어낸 결과는 한번이 아니다.
촤아아아아아아악!
그물처럼 펼쳐진 검기가 무형의 충격파를 가른다. 주문을 찢어발긴 검기가 라니엘을 덮친다. 라니엘이 쿵, 하고 바닥을 굴렀다.
쩌억!
검기를 맨주먹으로 후린다.
단순히 마나를 두른 주먹으로 검기를 박살 낸다. 드라카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지랄맞군.’
드라카는 눈살을 찌푸린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도대체가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 같지가 않다. 수십 개의, 그것도 저마다 모양이 다른 검을 쥔 소드마스터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어느 수를 쓸지 예상이 안 간다.’
애당초 마법사란 놈들은 하나같이 성가시다.
그나마 붙으면 무력해진다는 것이 약점이나··· 저 지랄 같은 잿빛에겐 그조차 약점이 되지 않는다.
투콱!
머리 바로 옆으로 손아귀가 스쳐 지나간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기에 피할 수 있었다. 드라카는 검을 휘두르며 거리를 벌린다.
‘···세상 어느 마법사가, 검의 초인과 백병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압도당한다.
육체 능력에서 압도당한다. 기술로 비등한 싸움을 끌고 가고 있긴 하나··· 승기를 잡기란 불가능하다.
‘···아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다음을 생각한다면 그건 아껴 놔야 한다.
단순히 눈앞의 잿빛을 죽이는 게 끝이 아니다. 성녀의 유해를 탈취해서 제단으로 향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제단에서, 교단과 다시 맞부딪칠 각오도 해야겠지.’
그렇기에 힘을 비축해야 한다.
결국, 드라카는 선택을 내린다.
“후우.”
드라카가 짧게 숨을 뱉는다.
가벼워진 몸으로 그가 눈밭을 박차고 뛴다. 그 뒤를 라니엘이 추격한다. 라니엘이 손가락을 튕긴다.
촤르르륵!
허공에서 사슬이 사출된다.
수십 다발의 섬광이 드라카를 노린다.
사방에서 주문이 덮쳐든다. 덮쳐드는 주문을 앞에 두고, 드라카는 미끄러지듯 눈밭 위로 착지한다.
‘난검(?).’
그가 칼을 비스듬히 잡는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두 번 휘두른다.
촤아아아아악!
칼끝에서 터져 나오는 검기가 채찍처럼 설산을 할퀸다. 사방에 검흔이 어지러이 찍힌다. 주문을 찢어내고, 사슬을 끊어낸다.
‘제 1식.’
칼끝이 진동한다.
진동하는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이다.
투확!
눈보라를 뚫고 그녀가 손을 뻗는다.
드라카의 검이 완전한 궤적을 그리기 이전에, 라니엘이 칼날을 붙잡았다.
키이이이잉!
칼끝에서 해방되려는 검기를, 라니엘은 맨손으로 붙잡아 억누른다. 그녀의 장갑이 찢어진다. 촤악, 하고 핏물이 흐르나, 라니엘은 그에 개의치 않는다.
우득.
한 손으론 드라카의 검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론 주먹을 쥔다.
사락.
꽉 쥔 그녀의 주먹의 틈새로 잿가루가 날린다.
라니엘의 전투법을 드라카는 알고 있다. 저 잿가루가 무엇인가? 잿빛 마법사의 상징이다.
‘폭발.’
그녀가 잿가루를 쥔 채 주먹을 휘두른다.
틱, 티딕하고 점화된 잿가루가 당장이라도 폭발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드라카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처음부터, 그걸 노렸다.’
드라카가 칼을 비틀어 빼낸다.
빙글, 몸을 돌리며 칼을 아래로 내려쳤다. 드라카를 향하던 잿가루가 검기에 휘말려 눈밭에 파묻힌다. 전부는 아니다. 일부는 남아 드라카의 몸에 닿는다.
콰아아아아앙!
“커흡!”
일부이나, 그 위력은 우습게 볼 게 못 된다.
드라카의 팔이 찢긴다. 검을 쥔 손가락이 뚜둑, 하고 꺾인다. 피부가 그을린다.
파바바바박!
이윽고 바닥에 처박힌 잿가루가 폭발한다.
일대가 뒤흔들린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설산을 후려친다. 설산이 진동한다. 진동에 드라카와 라니엘의 자세가 동시에 흐트러졌다.
튀어 오른 눈보라가 가라앉았을 때.
라니엘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드라카를 본다.
“···너.”
그녀는 드라카의 손을 보았다.
너덜너덜해져 축 늘어진 팔이 무언가를 쥐고 있다.
“잿빛, 그거 알고 있나?”
드라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드라카는 오랜 세월 전장을 누볐다.
가장 강한 초인은 쿤텔이었으나, 가장 많은 전장을 경험한 초인은 드라카였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드라카는 온갖 전장에서 검을 휘둘렀다.
‘전장에서 중요한 것은 판단이다.’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을 판단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다. 그리고, 드라카는 언제나 판단을 해왔다. 저 자신의 가치에 대해 그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드라카는 판단을 내린다.
“나는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드라카가 손에 쥔 것을 꾹, 누른다.
동시에 콰아아아앙! 하는 폭발음이 귓가를 메웠다.
쿵, 쿠웅!
사방에서 폭발음이 울린다.
바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진다. 라니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드라카가 누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직접 본 적이 있었으니까.
‘···점화 장치.’
배교자를 유인하고, 마을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렸을 때 드라카가 사용한 장치다. 화약석을 동시에 폭발시키는 점화 장치.
쿵, 쿠우웅!
연달아 울리는 폭음 사이로 드라카가 입을 연다.
“이것만으로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드라카가 입가를 틀어 올렸다.
“방금 네가 충분히 뒤흔들어 준 덕분에 충분하겠군.”
그가 점화 장치를 아무 데나 던진다. 푹, 설산에 박힌 장치를 발로 밟으며 드라카가 미소 지었다.
“잿빛, 너도 전장의 경험은 제법 많겠지.”
하지만, 하고 드라카가 말한다.
“밀려드는 눈사태 속에서 싸워본 적이 있나?”
“···하.”
“없다면.”
콰각, 콰가가가각!
새하얀 파도가 태양을 가린다. 덮쳐드는 눈사태 속에서 드라카는 입가를 비틀었다.
“지금, 경험해보는 게 좋겠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쓸 수 있는 건 뭐든지 쓴다.
그것이, 드라카의 방식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