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58
〈 158화 〉 가을, 신학기(1)
* * *
여름은 준비의 계절이다.
뜨거운 무더위 아래, 잠시 쉬어가며 다가올 가을을 준비한다. 아플리아 아카데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나긴 방학 동안 아플리아의 학생들은 달콤한 휴식을 맛본다. 이처럼 달콤할 수가 없는 휴식이다.
과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밤마다 찾아오는 악몽에 겁낼 필요가 없다.
마음 편히, 그리고 여유롭게.
한 학기 동안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보상을 받는 기분 마저 든다. 모여서 여행을 가고, 그간 읽고 싶었던 마학 서적을 탐닉하는 등···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방학 기간을 보내게 된다.
“볼 필요 없어요.”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구차한 변명입니다. 읽을 가치도 없는 서류에요. 그건 적당히 정리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아, 거기 계층별 2분기 성과는 수치화해뒀으니 따로 공지해 주세요.”
그 누구보다도 바쁘게 방학을 보내는 이가 있다.
“연금학 랩은 성과가 부진하네요. 이쪽은 익월 예산 삭감이 결정됐으니 함께 전달해주세요. 삭감한 만큼의 예산은 마공학 랩으로 옮기면 될 것 같군요.”
잿빛 마탑의 최상층, 차기 마탑주의 집무실.
그곳에 앉은 소녀는 미간을 짚은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꿀꺽.
그녀의 지시를 받는 마탑의 총괄 비서는 마른침을 삼킨다. 그럴 수밖에 없다. 눈앞의 소녀의 손짓 한번, 말 한마디에 각 계층의 명운이 결정된다. 수많은 일류 마법사들이 웃고 울게 된다.
“네, 이상입니다.”
차기 마탑주, 레스티 엘레노아.
그녀가 제 보랏빛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을 마쳤다. 벌써 며칠째 밤샘 업무 중임에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피곤한 기색조차 없다.
‘···갑자기 사람이 변했어.’
그 변화에 놀라워할 틈도 없다.
미친 듯이 몰아닥치는 업무에 총괄비서 또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단기간에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몰라볼 정도로.
‘적응하기가 어렵다.’
비단 총괄 비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잿빛 마탑의 모든 계층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레스티 엘레노아. 차기 마탑주의 자리에 앉은 몇 년 동안 그녀는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실상 차기 마탑주의 자리는 공석과도 같았다. 그러기를 삼 년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몇달 전 꽤나 충격적인 발표와 함께··· 차기 마탑주는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마탑을 관리하기 시작한다.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소란 속에 크고 작은 사건이 몇 있었다.
그녀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려는 마법사들이 많았다. 그 자리는 잿빛 마법사님의 자리다. 한낱 네가 앉아도 될 자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마법사들이 원로를 중심으로 궐기했지만···.
「하베르트 원로의 은퇴.」
중심이 된 원로가 마탑에서 쫓겨났다.
하베르트 원로가 관리하던 파벌은 완벽히 해체됐다. 자연스레 불만의 목소리는 사그라들었다. 그쯤에서 다들 눈치챈 것이다.
‘한평생 마탑을 위해 봉사한 원로조차 쫓아낼 수 있을 ‘무언가’를 가진 마탑주.’
그녀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있다.
그것이 자신들을 향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불만은 남았다. 그러나, 그걸 대놓고 표출할 만큼 용기 있는 마법사는 없었다.
공포로 인한 침묵.
허나, 공포 정치라는 게 으레 그렇듯 오래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모두가 눈을 부릅뜬 채 저 건방진 마탑주가 실수하기만을, 물어뜯을 틈이 생기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차기 마탑주는 실수하지 않는다. 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 중이다. 오히려 마탑의 전반적인 실적이 근 몇 년 만에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 시점부터, 그녀에게 든든한 지지자가 생겨났다.
「나는 차기 마탑주를 지지하겠소.」
잿빛 마탑의 가장 오래된 원로.
질레온 원로가 그녀를 보좌한다. 마탑의 가장 큰 파벌이 현 차기 마탑주의 뒤를 봐준다.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그녀는 마탑을 집어삼키고 있다.
총괄 비서는 그 모든 걸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눈앞의 소녀에게 경외심마저 느낀다. 그것은··· 오래전 저 자리에 앉아있던 마법사에게 느꼈던 감정이기도 하다.
‘···잿빛 마법사, 라니엘 반 트리아스.’
그분 또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
모두가 그분을 무시했으나, 그분은 언제나 제 역할에 충실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마탑은 이미 그분의 손안에 떨어진 뒤였다. 불만을 가지던 이들도 압도적인 실적 앞에 침묵했다.
그리고, 지금.
그때와 같은 역사가 반복되고자 한다.
‘전환점.’
그 중심에 레스티 엘레노아가 있다.
총괄 비서는 집무실에 앉은 소녀를 흘겨보았다.
차게 식은 눈동자와 서늘한 목소리.
쉬지도 않고 업무를 처리하는··· 마치 기계와도 같은 소녀. 총괄 비서의 시선에 그녀는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비춰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그녀를 흘겨보던 찰나다.
차가운 목소리가 집무실 안에 울렸다.
“뭘 그렇게 보시나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려가 보세요.
그렇게 말하는 레스티의 지시에, 총괄 비서가 집무실을 나서려는 순간이다. 그녀의 귓가에 전음이 울렸다. 마탑의 로비에서 회신을 타고 온 전음이었다.
총괄 비서님, 그··· 차기 마탑주님을 뵙고 싶다는 손님분이 있으십니다.
방문자가 누구길래 자신에게 직접 회신을 쏜단 말인가? 예정된 손님은 없을 텐데. 총괄 비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방문자의 신원을 물은 찰나다.
“······!”
들려온 대답에 비서의 눈동자가 커진다.
비서는 곧장 차기 마탑주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 차기 마탑주님.”
“무슨 일이죠?”
“차기 마탑주님을 뵙고 싶다는 손님이 한 분 계십니다.”
“약속은 없을 텐데요.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을 만큼 여유롭진 않습니다. 돌려보내 주세요.”
“그게, 쫓아내기는 조금 힘든 분이라···.”
레스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누구인지 말해보라는 듯한 제스처다. 그 물음에 총괄 비서가 답했다.
“로셀 원로님이 따님분과 함께 방문하셨습니다.”
움찔, 하고 레스티의 어깨가 떨렸다.
보다 정확하겐 ‘따님’이란 단어에.
그녀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비서를 보았다. 그 눈동자가 평소와는 다르다. 비서가 느끼기를, 기계와도 같던 소녀의 얼굴에···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났다.
기대감, 그리고 기쁨.
비서는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눈을 잠시 감았다 뜨자 그곳엔 평소와 같은 무표정을 돌아온 소녀가 있었다. 그녀가 짧게 기침하며 말했다.
“접견실로 안내해주세요.”
묘하게 들뜬 목소리였다.
2.
“잘 이야기하고 오거라. 나는 그만 가보마.”
“스승님께선 함께 안 가세요?”
“내가 마탑에 오래 있어 봐야 좋은 것 없다. 방해만 되겠지. 그리고, 그 아이도 너와 단둘이서 이야기하는 편을 더 좋아할 것 같구나.”
스승님과는 마탑의 입구에서 헤어졌다. 처음부터 나를 통과 시켜주시기 위해 오신 듯 싶었다.
“···아!”
그렇게 로비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총괄 비서가 내려왔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저 사람도 오랜만에 보내.’
내게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한때 내 비서를 맡았던 인물이기도 하니까. 그녀가 묻는 간단한 질문에 답한 뒤, 나는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마탑을 올랐다.
“접견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마탑에 발을 들인 것은 오랜만이었다.
근 몇 년 만에 찾아온 잿빛 마탑이지만···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시설이 크게 변한 것도 아니었고, 오가는 마법사들의 얼굴도 익숙했으니까.
···저분이?
로셀 원로님의 따님분···.
아플리아 아카데미에 교수를 하고 계신다는?
중간중간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진다. 하기야, 스승님의 제자 겸 양자인 입장이니 마법사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
역시 소문대로 미색이···.
확실히 외모가 시선을 끄는···.
내가 휙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째려보자, 지나가던 마법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여유로운 분들이 많네요?”
“···네?”
내 말에 총괄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쯤이면 분기가 끝나갈 무렵 아니던가요?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결산해서 실적을 정리할 기간일 텐데··· 저렇게 여유롭게 떠들 시간도 있나 봐요?”
나 때는 안이랬는데.
다들 연구실에 처박혀 있느라, 복도에는 오가는 사람 하나 없었는데.
‘하여간 요즘 것들은···.’
나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마탑의 기강이 무척이나 해이해졌음에 나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저들에게 날리고 싶은 일침이 한가득하거늘,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꾹꾹 참아 눌렀다.
“···마탑에 대해 굉장히 잘 아시는군요?”
“···스승님께 들은 게 좀 있어서요.”
내 말에 총괄비서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기시감을 느끼는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애써 모른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기를 한참.
“차기 마탑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잿빛 마탑의 최상층.
마탑주의 집무실의 옆에 붙은 접견실 앞까지 나를 안내한 총괄비서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나는 가볍게 노크하고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접견실에 앉아있는 소녀.
언제나 입고 있던 교복이 아닌, 잿빛 마탑의 상징에 새겨진 로브를 입은 레스티가 나를 향해 환히 미소 지었다.
“라니아 교수님.”
“오랜만이네. 레스티.”
방학 이후 처음으로 보는 얼굴이다.
고작 두 달가량의 방학이었지만 조금 낯선 느낌이 든다. 그것이 꼭 내 기분 탓만은 아닌 듯 싶었다.
‘좀 바뀌었네.’
두른 분위기가 바뀌었다.
예전처럼 수그리고 다니는 모습이 아니다. 아무쪼록 좋은 변화였으므로,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바쁜데 찾아온 거 아닌지 모르겠네.”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는 추세라 괜찮아요. 일을 조금 빨리 끝내뒀거든요.”
나는 레스티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마탑주의 집무실 옆에 마련된 접견실은,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접견실의 구석에 놓인 소파를 보며 쓰게 웃었다.
‘저것도 그대로구나.’
업무로 밤을 새우고, 접견실의 소파에 몸을 한껏 구기고 잠을 잤던 게 엊그제 같다. 아무렇게나 로브를 던져두자 스승님이 소파 옆에 달아둔 옷걸이조차 그곳에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곳에 걸린 옷은 다르다.
새로운 잿빛 마탑의 문양이 새겨진, 새로운 마탑주의 여벌 로브. 그것이 지난 몇 년간 잿빛 마탑에 찾아온 변화였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장로를 하나 쫓아냈더라.”
“많이 거슬리는 장로분이셨거든요.”
거슬리는, 이라.
레스티의 입에서 들으니 제법 신선한 단어였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해준 자료는 도움이 많이 됐나 봐?”
“···네, 정말로.”
레스티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목걸이 줄을 잡아당겨, 줄 끝에 매달린 작은 직육면체를 옷 바깥으로 꺼냈다.
“정말로, 많은 도움이 됐어요.”
“쓰기 어려웠을 텐데.”
“어렵긴 했지만··· 여태까지 해왔던 일에 비하면, 쉬운 일이었거든요.”
내가 마련해 두었던, 장로들을 찌를 비수.
라니아의 이름을 빌려 레스티에게 전해준 것.
그것을 꾹, 쥔 채 레스티가 말했다.
“질레온 원로를 끌어들이고, 다른 원로 간 갈등을 조장하고··· 그들이 서로를 물어뜯도록 자료를 조금씩 흘렸어요.”
나는 레스티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저는 다른 원로들의 등을 살짝 밀었을 뿐이에요. 굳이 제가 나설 필요도 없었어요.”
그건, 내가 생각한 것관 다른 방법이었다.
내가 정면으로 들이받아 허물어트리는 성격이라면··· 레스티는 그 반대였다.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판을 짜는구나.’
그게 이 애의 성격이겠지.
나를 닮았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차이가 난다.
“잿빛 마법사님과는 다르네.”
“그런가요?”
“그분은 일단 들이박고 보는 분이셨으니까.”
한때는 판을 짜기도 했지만, 일단 귀찮아지면 들이박고 봤다. 굳이 이것저것 수를 따지느니··· 때려 부수고 뒤처리를 하는 게 더 빨랐으니까.
“뭐,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나는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개인적으로 네 안부를 물을 겸 방문한 것도 맞지만··· 학사 측에서 전달 사항이 있거든.”
내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아플리아 아카데미의 총학장, 아론의 상징과도 같은 문양이 새겨진 편지는··· 일종의 서류였다.
“본래 아플리아에서 학생의 편의를 봐주는 경우는 드물지만, 네 경우가 경우다 보니 스승님이 학장님께 따로 말씀을 드렸거든.”
“따로 말씀이라 하면···.”
“학사측에서 네 편의를 봐주겠단 거지.”
나는 편지를 펼쳤다. 이리저리 양식에 맞춰 포장하느라 빙빙 둘러 표현한 편지였지만···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았다.
“모든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졸업 요건은 상황에 따라 최대한 배려해주겠다. 기초 교양 과목만 수강해도 졸업할 수 있게 편의를 봐주겠다.”
차기 마탑주를 겸직 중인 학생이다.
애초에, 대부분의 과목에서 교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학생이기에··· 학사 측에게선 꽤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이례적인 특혜였다.
“요컨대, 2학기부터는 강의를 좀 여유 있게 짜도 된다는 거야. 차기 마탑주 업무에 지장이 안가는 정도로 편의를 봐주겠단 거고.”
편지를 레스티 쪽으로 밀며 나는 질문했다.
“어떻게 할래? 선택은 네게 맡길게.”
“······.”
레스티는 말없이 편지를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툭, 하고 내뱉었다. 무척이나 가벼운 목소리로.
“괜찮을 것 같아요.”
“···바쁠 텐데?”
“사실, 그렇게 바쁘지도 않아요.”
레스티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이야 기반을 다지느라 바쁜 거지만, 그것도 거의 끝물이고··· 애초에, 저는 개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전대 차기 마탑주인 라니엘님께선, 이 자리에 앉아있는 기간 동안 마탑주로서의 업무만이 아닌··· 온갖 개인 연구와 계층별 연구에 참여, 주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레스티는 말을 이었다.
“아직은 그분과 견줄 수 없지만.”
레스티의 눈동자에는 백금색 빛무리가 고여있다. 개화(?花)하기 시작한 그녀의 재능이자, 더이상 그녀가 숨기지 않는 재능.
“모두에게 인정받으려면,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선 안 되겠죠. 뒷말이 나오지 않게 다른 학생들과 같은 과정을 거쳐 졸업할 생각이에요.”
“개인 연구는?”
“다니는 동안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요. 저번 학기에도 한번 해봤는데, 생각보다 할 만 했어요.”
“그래, 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괜찮다면, 이건 필요 없겠지.”
내밀었던 편지를 돌려받으며, 나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학기 초의 레스티와 비교해보면 눈앞의 소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열심히 하는구나.”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으니까요.”
레스티가 말했다.
“교수님께서 그러셨잖아요. 후회할만한 일을 하지 말라고.”
언젠가 내가 들려줬던 말을, 레스티는 제 입으로 발음했다.
“지금 열심히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하여간.”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스티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더 밝아지고, 잘 웃게 되고··· 말도 더 잘하게 된 레스티는 접견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 로브.”
나는 레스티의 로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
“···감사해요, 교수님.”
“그래, 개학하면 보자.”
그녀의배웅을 받으며 나는 접견실을 나왔다. 최상층에서 내려가기 전에, 나는 유리창 너머로 차기 마탑주의 집무실을 흘겨보았다.
한때 내가 앉아있었던 곳.
이젠 저 아이가 앉게 된 곳.
모든 게 익숙한 마탑이지만, 집무실만큼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분 나쁜 낯섦은 아니었다. 나는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라크도, 벨노아도, 레스티도.’
저마다의 길을 따라 성장하고 있다.
교수로서의 충실감을 느끼며 나는 마탑을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보람찬 직업이었다. 교수라는 것은.
이제 곧 9월이다.
다가올 2학기를 그리며 나는 끝나가는 여름의 거리를 걸었다. 마냥 덥지만은 않은 하루였다.
3.
길지만 짧았던 여름 방학도 끝나간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다가오는 아플리아의 개학을 앞두고 학생들은 신학기를 준비한다.
“열심히 배우고 오십시요, 도련님!”
“라니아 아가씨께도 안부 꼭 전해주십시오! 다음에 백야성에 오실 때는 더 다양한 함정을···!”
“음, 알겠다.”
상의를 탈의한 근육질 전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라크는 수도로 향한다. 설원을 가르며 움직이는 마차 속에서, 라크는 신학기의 다짐을 세운다.
‘이번 학기는 수석 자리를 빼앗는다.’
벨노아를 이긴다.
방학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성장했다. 라크는 제 라이벌의 모습을 그리며 도전적인 미소를 짓는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나? 아일라.”
“네, 르뤼엘 언니. 새 학기가 시작되니··· 슬슬 기숙사로 가볼까 해요.”
“그래, 편지는 되도록 많이 넣어라. 네 일정을 확인하는 것도 내 업무의 일환이니.”
“···그냥 언니가 받고 싶은 게 아니구요?”
“아직도 그 정신··· 아니, 그 교수의 말을 마음에 두고 있나? 잊어라. 헛소리를 즐기는 교수다.”
“언제는 믿을만한 교수라면서요?”
“누구나 실언을 한다. 그 교수는 실언이 좀 많은 편이다.”
르뤼엘의 배웅을 받으며 제 4 왕녀, 아일라도 기숙사로 향한다. 제 언니의 독특한 일면을 알게 된 아일라는 방학 동안 르뤼엘과 거리를 꽤 좁혔다.
“방학 동안 가르쳐주셔서 감사해요, 르뤼엘 언니.”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군.”
상아탑의 명예 기둥 중 하나.
회로학에 관해서는 어지간한 마학회의 학자보다 박식한 르뤼엘이다. 그녀에게 특별 과외를 받은 아일라는 이번 학기 회로학 수석을 노려보기로 한다.
“그럼 가볼게요.”
아일라를 태운 마차가 출발한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플리아에서의 만남을 고대한다. 다양한 인연과 다양한 경험. 이젠, 1학기에 쌓아둔 만남을 수확할 차례였다.
“영감, 그럼 우리도 가볼게.”
“드디어 가는 거냐? 빨리 나가봐라. 이젠 징글징글하다 이 녀석들아.”
지겹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 카르디를 뒤로하고, 벨노아는 짐을 챙겨 일어선다. 그 손에 들린 건 제 짐만이 아니다.
“클로에, 빨리 가자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곧이어 가게 창고의 문이 열리고, 클로에가 머리를 묶으며 뛰쳐나온다. 아플리아의 교복을 입은 그녀가 가게 밖으로 나가기 직전, 카르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방학하면 또 올게요, 영감님!”
“되도록 오지 말고 편지로 보내라. 이 좁아 터진 곳에 왜 자꾸···.”
“자꾸 그러면 주말에도 찾아올 거예요? 가자! 벨노아!”
클로에는 잰걸음으로 벨노아의 옆에 선다.
꿈에 그리던 아카데미의 생활이다. 제 소꿉친구와 함께 아카데미 생활을 하게 된 가운데, 클로에는 무척이나 들뜬 기분으로 걸음을 옮긴다.
“···되게 들떠 보인다?”
“기대되잖아!”
전혀 기대할만한 일이 아닌데.
지옥을 맛보게 될 텐데.
너, 악몽한테 찍혔는데······.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벨노아였지만, 벨노아는 제 소꿉친구의 꿈을 깨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들은 직접 경험하는 편이 좋을 테니까.
“그래, 가자.”
준비의 계절인 여름이 끝났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다가온다.
아플리아 아카데미는 물들어가는 낙엽 사이로 개학을 알렸다. 2학기의 시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