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72
〈 172화 〉 광인, 그리고 악몽(2)
* * *
가을이 오고 낙엽이 진다.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클로에의 눈동자는 탁하다. 언제나와 같은 별빛이 아닌 근심과 걱정 따위가 그녀의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다.
“후우···.”
클로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엎어졌다. 여기저기 난잡하게 널린 학습지에 얼굴을 묻은 채, 클로에는 요 며칠간의 힘겨웠던 나날을 떠올려본다.
과제가 많다.
많아도 너무 많은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헤엄을 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일까? 산더미 같던 과제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다.
“정말, 이제 조금만 더하면···.”
끝이다, 클로에는 그리 중얼거리며 책상에 이마를 문질렀다. 과제든 뭐든, 일감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는 버릇 때문일까. 지난 사흘간 밤잠을 줄여가며 클로에는 과제를 수행했다.
‘7일간 나눠서 하면 좀 편하긴 하겠지만···.’
빨리 끝내고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 노력이 무의미하진 않았다. 클로에는 책상에 이마를 맞댄 채,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악몽 같은 과제의 탑.
요 며칠간 책상의 한구석을 점거하던, 종이로 이루어진 거대한 탑도··· 이제는 몇 층 남지 않았다. 차근차근 공략해 낸 덕분이다.
‘조금만 더 힘내보자.’
클로에는 마음을 다잡는다.
힘들긴 하지만, 성취감도 있었다. 클로에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과제를 제출하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던 라니아 교수님의 모습.
「벌써 이만큼이나 했어?」
제법인데, 라고 중얼거렸던 교수님.
그 칭찬을 곱씹으며 클로에는 활력을 되찾는다.
‘조금 힘들면 어때, 다 도움이 되는데!’
처음으로 들었던 특강.
그토록 고대하던 라니아 교수님의 수업이다. 수업을 듣고 나니 클로에는 신문에 실렸던 말들이 마냥 빈말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찬란한 별빛 속에서 빛나던 교수님.
윤기가 흐르는 잿빛 머리칼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푸르른 호수 같은 눈동자. 무표정이 별을 다루던 라니아 교수님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기품 넘치고, 보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는··· 매우 수준 높은 수업!’
그 기사는 사실이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뺨을 양손으로 챱챱, 두어 번 두들겼다. 퀭했던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빛이 돌아왔다.
“응, 열심히 하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클로에는 펜을 쥔다.
힘들긴 하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적응만 할 수 있다면, 아플리아의 생활도 그리 어렵지 않을 테지.
‘그리고, 말야.’
클로에는 최근 친해진 메이드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되새겼다. 첫 수업에 과제 폭탄을 투하하는 교수님들이 몇 있다는 이야기였다.
‘라니아 교수님도 그런 부류시겠지!’
필시 그럴 것이다.
클로에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제정신으로 이만한 과제를 낼 리가 없으니까.
2.
“괜찮겠습니까?”
아플리아로 향하는 길, 칼트가 내게 넌지시 물었다. 칼트는 뒤따라오는 켈르할름을 미심쩍은 눈길로 흘겨보고 있었다.
“물론, 아플리아 내에 하운드들이 배치돼 있긴 합니다. 유사시에 붙들어 둘 수는 있겠지만···.”
“글쎄다.”
붙들어 둔다, 라.
‘마법사 계열 초인이니까, 하운드들이 모이면 상대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하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마법사들이 하운드들 같은 백병전에 특화된 암살자들에게 약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켈르할름에겐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잠깐이나마 붙들 수 있다.
그건 켈르할름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소리였다.
“너, 켈르할름이 제약을 푸는 거 본 적 없지?”
“···제약 말씀이십니까?”
“응, 제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켈르할름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조건. 그것은 켈르할름이 광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지만··· 그것이 ‘제약’ 임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광기를 분리하는 대가, 거기에 얼마만큼의 제약이 드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 잘···.”
내가 손가락을 쫙 펼쳤다.
“청각, 시각, 촉각, 근력 저하.”
하나를 접고.
“마나 감응력의 퇴화. 다룰 수 있는 마나는 최대 마나의 절반뿐.”
둘을 접고, 셋을 접었다.
남은 손가락을 한꺼번에 접으며 나는 말했다.
“심지어 초인이 얻는다는 초감각마저 제한돼. 사실상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야. 지금 우리가 속삭이는 것도 켈르할름 귀에는 안 들릴 걸?”
“···그게 말이 됩니까?”
“더 말 안 되는 게 뭔지 알아?”
내가 쓰게 웃었다.
“저러고도, 배교자를 상대로 5초를 버텼다는 거.”
칼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칼트 또한 배교자와 마주한 적이 있었으니까. 칼트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그 괴물을 상대로 5초를말씀입니까?”
“어.”
몰려드는 마수들을 갈아버리며 1초를.
배교자가 벌리는 이계를 강제로 닫아서 2초를.
제 열 손가락을 공양해 다시 2초를.
찰나의 순간이 승패를 가르는 그곳에서, 켈르할름은 홀로서 5초의 시간을 벌어냈다. 그 의미를 전장 출신의 병사인 칼트가 모를 리가 없다.
“그걸 제약이 걸린 상태에서 해낸 거지. 그 제약이 풀렸을 때, 너 감당 되겠어?”
칼트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더더욱 안되는 거 아닙니까?”
그가 자신의 허리춤을 매만졌다.
그곳에는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일류 연금술사들이 제작한 저주의 단검이 걸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전장으로 돌려보내는 게···.”
“할 수는 있는데, 추천하진 않는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인 하나 더 병신 만들어봐야 좋은 것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건.”
“그리고, 당장은 걱정할 필요 없어.”
“예?”
나는 뒤를 돌아봤다.
내 뒤를 따라오는 켈르할름은 마치 인형과도 같은 모습이다. 일정한 보폭, 일정한 호흡. 나는 켈르할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네게는 말해줘도 괜찮겠지.」
「내 제약의 흔들림은 ‘호흡’을 통해 분간할 수 있다. 제약이 흐트러지면 호흡이 흔들린다. 마나가 사방으로 새어 나오지.」
「그것이 내가 마련해둔 ‘경고’다.」
언젠가 켈르할름에게 들었던 것.
제약을 전부 풀고, 광인(?人)이 되기 직전에 그가 털어놓았던 것들을 나는 떠올렸다.
‘호흡은 정상, 마나도 안정적.’
그것은 달리 말해, 그의 광기를 가둬둔 ‘껍데기’가 멀쩡하다는 뜻이었다.
“제약이 멀쩡하다면, 켈르할름이 문제 될 일은 없어. 그건 내가 보장해.”
광인(?人)이라는 이명과 달리, 켈르할름은 그리 문제시되는 초인은 아니었다. 다들 켈르할름의 악명에 겁을 먹기 일쑤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켈르할름은 다루기 쉬운 쪽에 속했다.
‘제약만 주의하면 되니까.’
나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여차하면, 여기서 제압할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문제없어. 당장은.”
“당장이란 말씀은···.”
“문제가 될 요소가 있긴 해. 그래서, 여기서 그걸 확실하게 해둘 생각이고.”
아플리아의 입구가 보인다.
바닥에 깔린 낙엽들이 바스러졌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칼트도, 뒤따라오던 켈르할름도 덩달아 멈추어 섰다. 내가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켈르할름.”
내 부름에 그가 나를 보았다.
잿빛의 눈동자와, 푸르른 머리칼.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색을 지닌 마법사를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너를 이곳에 들이는 건 상당한 위험을 동반해. 아플리아가 짊어지지 않아도 될 위험이지. 이 말에 동의해?”
켈르할름이 제 턱을 매만졌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동 원리 일곱의 둘, 나는 나 자신을 위험 요소로 여긴다. 해당 원리에 의거해 나는 네 주장이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짊어지지 않아도 될 ‘대가’를 짊어진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한정적으로 네 행동 원리에 항목을 추가할 권리를 요구해도 되겠지?”
대가와 권리.
마법사에게 있어 기본이 되는 개념이다.
“계약을 요구한다, 켈르할름.”
대가, 권리, 그리고 계약.
내 말에 켈르할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입을 여는 데까진 방금보다 조금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십 초가 흐르고 나서야 켈르할름이 입을 열었다.
“···네 의견은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네가 제안하는 ‘행동 원리’ 또한 타당하다면 네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좋다. 첫 단추는 끼운 셈이었다.
“천칭(Balance).”
나는 천칭을 불러냈다.
별빛을 머금은 천칭을 보는 순간, 켈르할름의 시선이 흔들렸지만··· 나는 그에 개의치 않고 요구사항을 천칭에 올렸다.
마법사와 마법사 간의 계약.
어긴다면, 그에 합당한 ‘페널티’를 받는다.
“···너는.”
내가 올린 조건을 확인한 켈르할름이 나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는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너는, 이상하군.”
그가 말했다.
“내 기억에 의거하자면, 나와 너는 초면이다. 나는 ‘라니아 반 트리아스’라는 마법사를 만난 적이 없다.”
“그렇겠지.”
“또한, 내 행동 원리와 제약, 그것을 수정할 수 있는 ‘계약’에 대해 아는 이는 손에 꼽는다. 그 항목에 당연하게도 너는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럴 거고.”
“···그런데.”
그가 나를 가리켰다.
“너는, 어째서 그 전부를 알고 있는 거지?”
“내가 트리아스니까.”
“···잿빛 마법사와 같은 혈통? 그것이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잿빛 마법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맞으나, 그건 나와 잿빛 마법사만의 계약이며, 타인에겐 발설할 수 없는 종류의···.”
“그래서.”
나는 켈르할름의 말을 끊어냈다.
“그래서,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수상해서, 이 조건이 함정 같아서, 그래서 계약이 꺼려진다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야. 나는 네게 계약을 강요하지 않아. 이건 어디까지나 제안이지.”
“······.”
“다만, 네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칼트가 제 허리춤에 손을 댔다.
나는 장갑을 쭉 끌어당겼다.
“여기서 너를 돌려보내야 하겠지.”
“···네게 그럴 권리가 있나?”
“권리 없이 대가만을 감수하는 건 호구들이나 하는 거지. 당신도 마법사니까 잘 알 거 아냐?”
그리고, 나는 호구가 될 생각이 없었다.
‘내가 후려치면 후려쳤지.’
떼먹히고 사는 건 별 하나면 족했다.
나는 켈르할름이 입을 열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줬다. 한참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마법사에게 있어 계약이란 언제나 신중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여전히.”
기울어진 천칭을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네가 수상하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고 켈르할름이 말했다.
“네 제안은 타당하군. 아플리아에 머무는 대가로 받아들일 만한 조건이다. 계약을 받아들이지.”
그가 천칭에 손을 뻗었다.
기울어진 천칭이 수평을 이룬다. 천칭이 빛으로 변해 절반은 내게, 남은 절반은 켈르할름에게 스며들었다. 계약이 맺어졌다는 증거였다.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걸음, 켈르할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아플리아에 온 걸 환영해, 켈르할름.”
악수를 청하듯 내민 손.
그 손을 바라보며 켈르할름이 중얼거렸다.
“너는, 특이한 인물이군.”
“너만큼은 아니지.”
“미치광이와 비교가 된다는 시점에서 너 또한 충분히 광인의 범주에 속한···.”
“쓰읍.”
내가 혀를 찼다.
이게 못 하는 말이 없네.
“트리아스 가(家)의 특징인가, 아니면 가문에 속한 이들이 이상한 것 뿐인가···.”
켈르할름은 마지못해 악수를 하며 무언갈 중얼거렸는데, 그닥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는 말이었다.
『계약은 맺어졌다.』
어찌 됐든, 계약은 맺어졌다.
켈르할름의 방문 뒤에 무슨 함정이 준비되어 있든 간에··· 계약이 맺어진 이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일은 없겠지.
‘앞으로 21일.’
3주, 켈르할름이 머물기로 한 시간.
긴 3주가 될 것이다.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다.
3.
마도구로 모습을 위장한 채 켈르할름은 아플리아에 머물기 시작했다. 그 방문 목적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운드들은 교대로 켈르할름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켈르할름의 정체를 아는 이는 극히 소수다.
소수의 인물은 피를 말리며 켈르할름의 행동거지에 시선을 둔다. 그렇게 하루가 흐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간다.
21일이 20일이 된다.
20일의 이른 아침, 아론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을 찾아온 방문자를 쳐다봤다.
“네가 이곳의 학장인가.”
광인, 켈르할름.
“무, 무슨 일이십니까. 켈르할름 공.”
모습을 위장하고 있다곤 하나, 아론은 일찍히 하운드들을 통해 그 정체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아론은 광인의 존재에 식은땀을 흘린다.
‘그가 왜 학장실에?’
아론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광인, 광인 켈르할름.’
광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그가 아플리아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아론은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칼 중 몇 개를 더 잃어야만 했다.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광인이 무표정이 말했다.
‘무엇을 요구하려는 거지?’
곳곳에 숨어 켈르할름을 감시하고 있는 하운드들 마저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리는 가운데, 광인이 입을 열었다.
“나도 수업을 하고 싶군.”
“···예?”
아론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수업, 말씀이십니까···?”
“그래, 수업.”
“수업을 어찌···.”
“이곳은 마학(??) 아카데미 아닌가?”
“맞긴 합니다만···.”
“그리고, 나는 외부에서 온 유능한 마법사로 위장 신분을 받았다고 들었다. 유능한 마법사가 왜 아플리아에 방문하겠나?”
강의를하기 위함이 아닌가? 무척이나 타당한 물음과 함께 켈르할름이 말을 마저 이었다.
“또한, 나는 내 마학적 지식이 이곳의 교수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부 맞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내 고국 아르티아의 총괄 책임자였다. 혹, 내게 교수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나? 문제 될 점이 있다면 말해주길 바란다.”
마학의 성지.
최초의 아카데미가 설립된 곳.
교육의 나라, 학원의 도시 아르티아.
‘그곳의 총괄 책임자.’
달리 말하면, 최고 교육자.
100년이 지났다곤 하나, 차마 그 자격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문제 될 건··· 없습니다만···.”
“그럼 정식으로 요구하겠다.”
켈르할름이 말했다.
“내게 강의를 배정해 줬으면 좋겠군.”
아론은 얼마 안 남은 몇 가닥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