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89
〈 189화 〉 각자의 무대(3)
* * *
재앙을 상대로 시간을 번다.
칼트는 그와 비슷한 일을 과거에 한번, 이미 해 본 적이 있었다. 전장에서 은퇴하기 직전의 일이다. 그날의 기억을 칼트는 더듬었다.
가장 두려운 재앙.
명확한 형태를 지닌 죽음.
‘죽음의 칼, 가니칼트.’
긍지 높은 검사, 검(?)으로 삶을 노래하는 검의 초인조차 죽음 앞에선 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살아생전 무엇을 쌓아왔던 간 죽음의 앞에선 전부 무(無)로 돌아갈 뿐이다.
지독한 허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공허함.
「아, 아아아. 아아아아···!」
죽음이 나타난 곳마다 인간들은 주저앉는다. 제 삶의 끝을 직감하고 포기하고 만다. 저항할 수 없기에 재앙이다. 받아들여야 하기에 죽음이다.
그러나.
「너는 검을 놓지 않는군.」
가끔씩, 죽음에 저항하는 이가 나타나는 법이다.
「묻겠다.」
칼트가 그랬다.
칼트는 죽음의 앞에서 검을 들어 올렸다. 일전에 그에게 검(?)을 알려주었던 쿤텔이 그러하듯이, 그는 죽음의 칼에게 검을 겨눈다.
「너는 검사인가?」
두려움에 이를 맞부딪치면서.
다가오는 죽음에 공포를 느끼면서.
그럼에도, 검은 놓지 않은 채.
「검사라면 검사긴 한데 말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질문에 답한다.
「그 전에 기사입니다.」
그때, 자신이 무엇을 했던가.
무엇을 하였기에, 죽음의 칼을 한 번이나마 받아낼 수 있었던가. 칼트는 과거를 떠올리며 눈을 뜬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또 다른 재앙이다.
‘고대 리치, 스케발.’
가히 전장의 악몽이라 불릴만한 마법사다.
발을 디디는 곳마다 함정이 가득하다.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망설임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후우···.”
칼트가 숨을 뱉었다.
한 번의 숨을 내쉬는데도 검을 휘둘러야 했으며,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야 했다. 내뱉은 숨은 뜨거웠으며, 쉬지 않고 칼을 휘두른 팔은 뻐근하다.
후두둑.
한번 호흡을 가다듬자 피가 쏟아진다. 상처는 벌어졌으며, 한쪽 팔에는 이미 감각이 없다.
‘쓸 수 있는 모든 걸 썼음에도.’
닿지 못한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힘을, 인위적인 수단으로 손에 넣었음에도 턱없이 모자라다. 칼트는 숨을 몰아쉬며 뒤로 도약했다.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은 없다.’
강자는 얼마든지 여유를 부려도 된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생각이 곧장 행동으로 이어져야 했기에 칼트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언제까지 도망칠 셈이냐?』
재앙이 인간을 조롱한다.
재앙은 손가락을 한번 까딱이는 것만으로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고대 리치의 비웃음이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도망치고 또 도망치어서.』
스케발이 손가락을 까딱인다.
집채만 한 화염구가 땅 아래로 떨어진다. 피할 수 없는 공격임을 알기에, 칼트는 눈을 부릅뜬 채 칼을 휘두른다.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있을듯싶으냐?』
서걱.
칼트의 검이 화염을 가른다. 칼이 그리는 궤적은 깔끔하다. 허나, 여전히 인간의 검이다. 반으로 갈라진 화염은 흩어지지 않은 채 칼트를 집어삼킨다.
투확!
마도구에 의지해 칼트가 화염을 헤치고 나온다. 그러나 그 몸에는 그을음이 가득하다. 손가락의 피부가 녹아내려 칼자루와 하나가 된다.
‘칼을 놓치는 일은 없겠군.’
오히려 좋다, 그렇게 생각하며 칼트는 제 몸을 채찍질한다. 주문이 칼트의 뒤를 추격한다. 땅바닥이 융기한다.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목숨을 노린다.
스겅.
휘두른 칼날이 땅을 베어 가른다.
용사와 고대 리치의 접전에서 보았던 방법을, 칼트는 조잡하게나마 따라 해본다. 융기한 땅을 베어내고 발판 삼아 도약을 거듭한다.
용사와 같은 움직임은 아니다.
도핑제를 복용했다 한들, 칼트의 움직임은 초인의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렇기에, 칼트의 동작은 조잡하다. 용사처럼 완벽하지 않다.
핏.
상처가 늘었다.
검을 휘두른 팔이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칼트는 멈추지 않는다. 완벽하리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기에, 그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다.
‘다음.’
초인과 같은 초감각은 없다.
용사와 같은 뛰어난 육체 능력도 없다.
‘다음, 다시 다음.’
그렇기에 칼트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본능에 모든 걸 맡기지 않는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여 움직인다.
‘온다.’
고대 리치의 손가락에서 시선을 놓지 않는다.
자신의 선배, 잿빛 마법사 라니엘은 말했다.
「모든 마법사의 시작은 손이야.」
손.
「손가락을 튕기거나, 까딱이거나, 팔을 휘두르지. 너는 그게 ‘무슨’ 주문인지까진 이해하지 못해. 하지만 모든 마법사에겐 버릇이 있거든.」
버릇.
「나는 손가락을 튕기는 거. 그리고, 대부분의 마법사는 손가락을 휘두르는 방향에 있지.」
버릇과 방향을 읽는다.
스케발이 손가락을 휘두른다. 아래에서 위로. 칼트는 곧장 벽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파바바바박!
말뚝이 솟아오른다. 솟아오른 위치에 이미 칼트는 없다. 그는 공중에서 몸을 뒤틀며 칼을 휘둘렀다.
스겅.
스케발의 손동작에서 다음을 본다. 다음을 보고 행동하는 칼은 빠르다. 스케발의 주문이 사출되려는 순간, 칼트의 검이 회로를 베어 가른다.
‘가능하다.’
조금씩이지만 요령이 생긴다.
하지만, 느긋하게 상대법을 파악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으니까.
“···윽.”
칼트는 약발이 떨어져 감을 느꼈다.
몸에 조금씩 고통이 돌아오고 있다. 내부서부터 날뛰던 불길이 조금씩 사그라듦을 느낀다.
‘온전한 내 힘이 아니니까.’
온갖 마도구와 도핑제.
인위적인 수단을 빌려 도달한 경지는, 금세 흐트러지고 만다. 몸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간다.
『······.』
그에 비해 재앙은 어떠한가.
그저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다. 한정된 시간에 다급함을 느끼는 기색은 전혀 없다.
‘얼마나 버텨야 하지.’
칼트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한다.
‘앞으로 얼마를 더 버텨야 하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칼트는 결심을 다진다.
뿌득.
발목의 뼈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낸다. 칼트가 자세를 낮게 낮추었다. 바닥을 기듯이, 혹은 힘을 모으듯이. 그것은 화살을 쏘기 직전의 활대를 연상케 하는 자세다.
‘시간을 끄는 건 불가능하다.’
재앙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허나, 한가지 확실한 건··· 그보다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동나고 말 것이란 사실이다.
‘결판을 내야 한다.’
버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다른 답을 찾는다.
『···하.』
스케발 또한 칼트가 두른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계속해서 도망치던 사냥개가, 궁지에 몰려 제 이빨을 드러낸다.
‘같잖기 그지없군.’
그가 팔을 들어 올린다.
어둠 속에서 회로들이 검게 타오른다.
번쩍!
그것이 빛을 뿜는 순간, 칼트가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가운데, 칼트는 전력을 다해 질주한다.
2.
옛날 생각이 난다.
문득 라니엘은 그런 생각을 한다.
땅을 박차고 아플리아로 향하는 지금, 그녀는 과거의 일을 떠올린다. 전장 시절의 기억이다.
죽음의 칼과의 두 번째 조우.
그것은 갑작스레 일어났다. 카일을 선봉에 세워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던 시기. 그 시기에, 죽음은 갑작스레 나타났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절벽의 틈새.
일자로 뻗어있는 길.
그곳에 죽음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땅 아래로 떨어진 죽음의 칼은 인간의 군세를 양단했다.
쿵, 쿠웅, 쿠우우웅!
한 번의 휘두름으로 협곡이 무너져 내렸다.
그 사실을 듣고, 급히 후열로 향했던 라니엘과 카일은 각오를 다져야만 했다. 이곳에서 모든 기사들을 희생시킬 각오. 혹은, 자신들의 죽음.
용사와 현자조차 죽음을 직감했다.
달린다고 하여, 구해낼 수 있는 기사가 남아 있으리란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무너진 협곡의 돌벽을 박살 내고 발을 내디딘 그곳에, 라니엘이 예상했던 참혹한 장면은 없었다. 그곳에서 그저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선 기사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칼트.”
죽음의 칼 앞에서 피를 게워내며, 그럼에도 눈을 부릅뜬 채 그곳에 서 있던 기사. 죽음의 칼이 그에게 건네는 말을 라니엘은 기억하고 있다.
「묻는다.」
비틀린 짐승의 손에서 검을 놓고, 인간의 손으로 검을 쥐며 죽음은 인간에게 질문했다.
「이름은 무엇이지.」
그것은 죽음이 인간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자신의 검을 한 번이나마 받아친 인간에게 표하는 경의. 그것은 곧 칼트가 죽음의 칼의 일격을 버텨냈음을 의미했다.
‘어떻게 버텼는지 모른다.’
그곳에서 칼트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해서 죽음의 칼의 일격을 버텨내며 시간을 벌었는지··· 라니엘은 알지 못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순간 칼트는 무언가를 버렸다.
버림으로써 죽음의 검을 받아냈다.
받아냄으로써, 자신이 올 시간을 벌어냈다.
“이번에도.”
라니엘은 지붕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누군가밟은 흔적이 있는 길을 따라 그녀는 시계탑에 도착한다. 시계탑의 벽에 찍혀있는 발자국에 발을 얹으며, 라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 결계.
“이번에도, 버티고 있겠지.”
어떻게든, 또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그렇기에 자신은 가야만 한다.
그가 벌어낸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도록.
탁.
라니엘이 시계탑을 박차고 도약한다. 공중에서 팔을 뒤로 젖히고, 주먹을 꽉 쥔 채 그녀가 결계를 노려본다. 주먹에 실리는 것은 중첩된 주문.
분쇄(Smash).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충격이 결계를 뒤흔들었다.
3.
질주한다.
한걸음 한걸음에 전력을 다하여 땅을 박찬다. 칼트는 몸에 남은 힘을 쥐어짜 내며 걸음을 내디뎠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육체가 가속한다.
한걸음.
쏟아지는 주문을 향해 몸을 날린다.
어느 것은 베고, 어느 것은 베지 못한다.
몸에 상처가 늘어간다. 피가 쏟아진다.
다시 한걸음.
지면이 융기한다. 뼈 말뚝이 솟아오른다. 발을 내디딜 곳이 사라지나, 자신이 걸음을 내디딜 곳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스겅.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버리고.’
핏물이 튄다.
‘선택한다.’
일격을 허용함으로써 일보를 내디딘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칼트는 무언가를 버린다. 버리지 않고서 나아갈 수 없음을 아는 인간이기에, 무언가를 버림에 있어 칼트는 가감을 두지 않는다.
‘버릴 거라면, 확실하게 버린다.’
쏟아지는 말뚝을 벨 시간은 없다.
한쪽 팔을 내준다. 내주며 다시 나아간다.
축 늘어진 팔을 내버려 둔 채, 칼트는 남은 한 손으로 검을 쥐고선 계속해서 앞으로 향한다.
‘아아.’
칼트는 떠올린다.
과거의 경험을.
‘그때도 이랬다.’
가장 두려운 재앙을 마주했을 때.
죽음의 검을 받아쳐야만 했을 때.
그때도 자신은 이런 식으로 움직였다.
‘몸 성히 받아낼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처음부터 버릴 생각으로 움직인다.
줘야 할 것은 확실하게 준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므로.
‘그때 내준 것은 심장.’
마기를 정화할 수단. 혹은, 생명의 전부.
성녀의 기적으로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칼트는 전장에서 은퇴해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무엇을 내줘야 하는가?
거리가 완전히 좁혀졌다.
칼트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허공에 뜬 고대의 리치를 바라본다.
‘약화된 상태.’
일찍이 광인과의 접전으로 고대 리치의 육체는 금이 가 있다. 광인이 마지막에 사용한 주문의 여파가 곁에 남아, 아직도 스케발의 마나를 좀먹고 있다.
그렇기에 성립된 싸움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만들어낸 무대의 위에서, 칼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다.
‘노리는 곳은 두개골.’
검은 구정물이 흘러내리는 눈구멍.
그 안에 들어차 있을 라이프 베슬.
‘꿰뚫는다.’
노릴 것을 분명히 하며, 칼트가 자세를 잡는다. 그러나 결정적 일격을 노리는 것은 칼트 뿐만이 아니다. 스케발 또한 사냥개가 접근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번쩍.
한순간에 완성된 주문.
날카로운 뼈 말뚝이 칼트의 머리를 노린다. 피할 수는 있으나, 피하게 된다면 자세가 흐트러져 처음부터 다시 시도해야 하리라.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칼트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내줄 것을 결정한다. 칼트가 고개만을 살짝 옆으로 비튼다. 왼쪽 눈에 뼈 말뚝이 박힌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머리가 뒤로 젖혀짐에도 칼트는 멈추지 않는다.
한순간 밀려오는 고통.
그것은 도핑이 끝이 났음을 알리는 신호다.
하지만 칼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오히려 몸이 가볍다고 느낀다. 아직도 도핑이 끝나지 않았다고 그는 착각한다. 착각 속에서 그는 움직였다.
떠올리는 것은 검의 초인, 쿤텔.
긍지 높았으나, 재앙의 사역마로 영락하고말았던 초인.
칼트는 그와 마주했던 경험을 떠올린다. 그때 보았던 한없이 아름다운 일격을 흉내 낸다.
‘아름다운 움직임, 완벽한 검격.’
칼트의 팔이 움직인다.
빠르지는 않다. 무겁지도 않다.
칼끝은 가벼우나 확실한 궤적을 그린다.
그것은 분명한 초인의 영역에 닿은 검(?)이다.
스릉.
칼날이 움직인다. 힘에 끌려가지 않는다. 완벽한 통제하에 그려지는 것은 검로(??)다. 검이 그리는 길은 매끄럽다. 기이한 궤적을 그리는 길은 처음부터 정해두었던 목적을 향해 빨려 들어간다.
검은 눈구멍.
왼쪽 눈을 잃은 칼트는 스케발의 오른쪽 눈구멍을 향해 검을 내지른다. 고대의 리치가 두개골을 보호하기 위해 짜올린 주문은 초인의 영역에 닿은 검(?) 앞에 의미를 갖지 못한다.
푸욱.
주문을 찢고 칼끝이 스케발의 라이프 베슬에 처박힌다. 스케발의 검은 안광이 크게 흔들렸다.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스케발이 비명을 내지르며 팔을 휘두른다.
팔에 얻어맞은 칼트가 맥없이 튕겨 나간다. 바닥을 몇 번이고 굴러, 건물의 벽에 처박히고 나서야 칼트는 멈췄다.
『감히, 감히, 감히!』
스케발의 안광이 분노로 떨린다.
칼끝은 분명히 스케발의 라이프 베슬에 닿았다. 그러나, 완벽히 관통하진 못했다. 고대의 리치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팔을 들어 올린다.
『너 따위가, 한낱 인간 따위가···!』
스케발이 주문을 짜 올리려는 순간이다.
“쿨럭, 커흡···.”
피를 토하고, 눈에 꽂힌 말뚝을 뽑아내며 칼트가 고개를 든다. 그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다. 죽음을 앞둔 자의 표정은 아니었다.
“···하.”
그는 웃음을 흘리며 스케발의 너머를 바라본다.
쩍, 쩌적.
아플리아를 에워싼 검은 결계에 균열이 퍼진다. 이윽고 유리창이 깨지듯 결계의 한 부분이 박살 난다.
파삭!
박살 난 틈으로 들어오는 것은 햇빛이다.
햇빛 아래 잿빛의 머리칼이 반짝인다. 결계가 박살 남에 뒤를 돌아본 스케발은 그녀와 눈을 마주한다.
가증스러운 잿빛 머리칼.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푸른 눈동자.
『잿빛···!』
스케발이 주문을 짜올리는 것보다 먼저, 라니엘이 스케발의 두개골을 움켜쥔다. 그녀는 별다른 주문을 쓰지도 않는다.
콱.
한 손으로는 두개골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그 눈구멍에 박힌 칼자루를 쥔다. 한낱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 꽂아 넣은 일격. 그것의 의미를 결정짓는 건 자신의 역할이리라.
“칼트.”
라니엘이 말한다.
“수고했다.”
쥔 칼자루를 그대로 밀어 넣는다.
칼끝이 스케발의 라이프 베슬을 완전히 관통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