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88
〈 188화 〉 각자의 무대(2)
* * *
인간성을 버린 지 수백 년이다.
한때는 인간이었으나,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된 고대의 리치는 지난 수백 년간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하여.’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을 보았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위업을 이루어 내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을 볼 때마다 스케발은 의문을 느꼈다.
‘저들은 초월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가.’
인간을 벗어난 길.
‘배교, 배반, 변절, 타락.’
너무나도 쉽게 벽을 허물어트리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수단들. 수명의 제약에서 벗어나, 나약한 육신을 버리고 초월에 닿을 방법.
수많고 수많은 인간들.
나약한 인간들은 타락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인간이되, 인간을 넘어선 그들은 결코 제 의지로 타락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어째서.’
범인(凡人)보다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음에도, 타락을 통해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음에도··· 그들은 인간으로 남기를 고집한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는가.’
더럽혀지고, 망가지고, 그리하여 미쳐버릴지언정, 그들은 인간으로 살아 다만 인간으로 죽기를 선택한다.
비효율적인 선택.
우매하기 짝이 없는 결심.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다.』
고대의 리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스케발은 조금 전 광인이 사라진 곳을 살핀다. 마지막의 순간 광인은 그늘을 삼킨 채 자신을 이계(??)에 유폐했다.
『어리석은 선택이로군.』
스케발은 광인의 계획을 꿰뚫어 본다.
이계에서의 시간의 흐름은 현세와는 다르다.
시간의 흐름이 가속하고, 때로는 꼬인 채 굽이치기를 반복한다. 그 흐름 속에서 그분의 편린을 저 자신과 함께 마모시키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한낱 인간이?’
이계에서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버틴다.
그분의 편린을 삼킨 채, 광기의 속에서.
인간의 몸으로 그것이 가능하리라 믿은 것인가.
『불가능한 일이지.』
스케발은 서서히 돌아오는 제 육신을 확인한다. 뼈와 뼈가 이어 붙는다. 검은 마나가 뼈를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엮어내고 있다.
드득, 드드득.
그렇게 완성된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그분의 편린은 현세에 존재하고자 한다.’
한낱 인간이 이계에 붙들어 둔다 한들, 영원히 붙들어 둘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에는 풀려날 것이다. 지금도 풀려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끼긱.
허공에 나타난 비틀림.
그 비틀림을 향해 스케발이 손을 뻗었다.
‘그 인간은 그릇으로서의 완성도가 높지 않다.’
다른 그릇을 찾아 담아내야 한다.
오른손으로 비틀리는 공간을 벌린다. 왼손으로는 제단에 마나를 불어넣어 의식을 다시금 거행한다. 그렇게 스케발이 마나를 끌어 올리려는 순간이다.
『······.』
스케발의 손가락이 멈춘다.
그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어디에?』
제단의 위에 올려두었을 제물.
신을 담기 위한 그릇의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2.
짙은 마기(??)가 요동치는 아플리아.
칼트는 정화 장치에 의존한 채 걸음을 옮긴다. 은밀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칼트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익숙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 막힘은 없다.
건물과 건물의 틈.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
기(?)를 감추고, 호흡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며 칼트는 고대 리치의 시선을 피해 움직이고 있었다.
‘운이 좋다.’
칼트는 그렇게 생각한다. 진심으로.
아플리아에 발을 들이밀었을 때, 칼트가 본 것은 스케발과 대치하고 있는 광인이었다.
‘광인, 켈르할름.’
스케발의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광인이 스케발의 시선을 끌고, 막대한 양의 마나를 사방에 퍼뜨린 덕분에 칼트는 제 정체를 들키지 않고 잠입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었나.’
또한 칼트는 보았다.
광인이 허공에서 솟구치는 알 수 없는 그림자를 삼키고 구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마법적 분야에 무지한 칼트라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켈르할름이 그릇이 되었다.’
제 몸을 바쳐 희생했다.
그것은 칼트가 듣지 못한 방법이었다.
「하나는 희생시켜야 한다.」
이곳에 오기 직전 엘프에게 들었던 파훼법.
「그것은 막을 수 없다. 막을 수 없기에,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곳에는 세 개의 그릇이 있을 테지.」
세 명의 학생.
별에게 축복받은 아이들.
「하나를 버려라.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중 하나를 희생시켜라.
엘프는 그렇게 말했고, 칼트는 선택을 할 준비를 마쳤었다. 무언가를 희생시켜야만 하는 상황은 전장에서도 몇 번이고 마주한 적이 있다.
가혹한 선택.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결정짓는 것.
끔찍한 일이고, 하기 싫은 일이나 그것을 해야만 하는 때가 있었다. 이번 또한 그러하리라. 칼트는 그렇게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광인이 자신을 희생했다.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채, 그는 스스로가 제물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엘프는 하나를 버리라 말했으나, 광인은 그 누구도 버리지 않았다.
‘타인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것.’
그것은 숭고한 희생이다.
칼트는 속으로 광인에 대한 평가를 고친다.
‘···존경할만한 인물이다.’
존경과 감사함, 그리고 각오.
칼트는 광인의 희생을 헛되이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릇 중 하나를 희생해라. 하나만을 제단에 남겨두란 소리다.」
일찍이 엘프에게 지시받은 세 가지의 조건.
그중 하나를 켈르할름이 대행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남은 조건을 이루기 위해 움직일 뿐이다.
「별의 축복과 관련된 아이들을 확보해라.」
스텔라(Stella), 아일라.
차기 용사, 클로에.
와쳐(Watcher), 레스티.
세 명의 신원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가 있다. 칼트는 소란을 틈타 세 명의 아이를 제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숨기는 데 성공했다.
‘두 가지 조건의 달성.’
남은 조건은 무엇인가.
칼트가 건물의 뒤편에 숨은 채, 호흡을 가다듬는다. 요동치는 마기(??) 속에서 정화 장치에 의존해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마지막 조건.
그것을 칼트가 떠올리려는 순간이다.
『쥐새끼가 하나 숨어들었구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칼트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건물의 벽면을 깨부수며 날아든 뼈 말뚝이 방금까지 칼트가 서 있던 위치에 틀어박혔다.
파바바바박!
솟아오른 뼈 말뚝에서 거리를 벌리며, 칼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하늘을 부유하는 존재가 있다. 인간의 얼굴 가죽으로 이루어진 로브가 어둠 속에서 펄럭였다.
『제물은 어디에 있지.』
반들거리는 검은 안광.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구정물.
사방에서 요동치는 마기.
‘고대 리치, 스케발.’
넷의 재앙 중 하나.
잿빛 마법사의 출현 전까지는, 전장의 악몽이라 불리던 수백 년을 살아온 고대의 마학자.
「마지막 조건은··· 네게 가능할진 모르겠군.」
그 존재를 앞에 둔 채, 칼트는 엘프에게 들은 마지막 조건을 다시금 되새긴다.
「스케발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라.」
재앙을 상대하라.
「녀석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날 때까지.」
재앙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라.
몇 초일지, 몇 분일지 알 수 없는 시간을.
그것이 칼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후우.”
칼트가 짧게 숨을 뱉으며 물러선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는다. 뽑아 든 것은, 하운드(Hound)의 장비인 단검이 아니다. 잘 갈아진 한 자루의 장검이다.
전장 시절 그가 사용했던 무기.
그것을 쥔 채 칼트는 눈을 가늘게 뜬다.
칼끝이 향하는 곳은 공중에 뜬 고대 리치 스케발이다. 칼트는 각오를 다진다.
『우스울 지경이로군.』
곧이어 주문이 쏟아진다.
범람하는 주문의 파도 앞에 칼트는 꾸욱, 하고 칼자루를 강하게 쥔다.
3.
“설명해. 전부.”
코앞에서 번들거리는 푸른 눈동자.
다시 눈을 감을 것 같지는 않은 그 눈동자 앞에, 카르디는 짧게 숨을 뱉었다.
“놔라. 놔야 설명할 거 아니냐.”
라니엘이 손을 놓는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선 카르디는, 약품들을 올려둔 탁자에 등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용케도 정신을 차렸군.”
“쉬고는 싶은데, 쉴 만한 상황이 아니니까.”
카르디가 물수건을 건넸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라니엘이 물수건을 받아든다. 그녀가 불안정한 호흡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물수건으로 제 몸을 닦기 시작했다.
“···일어나 있을 만한 상태는 아닐 텐데.”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일어나 있을 만하니까 일어난 거고, 움직일 만 하니까 움직이는 거지.”
거짓말이었다.
카르디의 눈에는 엉망이 된 라니엘의 내부가 보인다. 마나의 흐름은 꼬여있고, 마나가 흐르는 통로는 한창 수복되는 와중이다.
‘일어나긴커녕···.’
정신을 차리는 것조차 고역이리라.
그러나 카르디는 굳이 라니엘의 말이 거짓임을 꼬집진 않았다. 그 대신 질문을 던졌다.
“진통제, 필요하나?”
“됐어. 감각 무뎌져.”
“무뎌지면 어떻다고 그렇지.”
“몰라서 묻냐?”
그녀가 창밖을 가리켰다.
“가야 할 거 아냐.”
“······.”
“그러니까, 빨리 설명이나 해.”
카르디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별과 그늘의 법칙성을 아나?”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진다는 거?”
“그것 말고 말이다. 너, 내 고향. 잿더미가 된 왕국의 이름은 알고 있나?”
“모르지. 어디에도 안 나와 있으니까.”
“그럼 자세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또 그거야? 하고 묻는듯한 라니엘의 눈초리에 카르디는 제 미간을 짚었다.
“나도 답답하다. 맘 같아선 저 제단이고 뭐고 다 설명해주고 싶단 말이다. 별과 그늘. 왕(王)의 자격을 잃은 저주가 단순한 현상이 되어버린···?”
카르디가 눈을 크게 떴다.
발음에 마나가 실리지 않았다. 제약이 혀뿌리를 얽매는 감각이 없었다.
“라니엘.”
“뭐.”
“방금, 내가 뭐라 했지?”
“왕의 자격을 잃은 저주가, 단순한 현상···.”
“그 말이 들리나?”
“들리니까 말했겠지.”
카르디가 제 목을 매만졌다.
평소에 걸려있을 수많은 금언(??)의 제약이 지금은 느슨해져 있었다.
“···하.”
카르디의 입가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상황이 상황이니, 이번만큼은 허락하겠단 건가.’
그게 아니라면···.
“······.”
카르디는 말없이 눈앞의 소녀를 흘겨봤다.
‘벌써 거기까지 근접했단 뜻인가.’
무의식중에 그 법칙을 이해한 것인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르디는 느슨해진 제약의 정도를 파악했다.
“■■의 ■■. ■■■■. ■■.”
몇 번의 확인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왕은 왕(王)의 자격을 잃었다. 그것은 설명해 주었을 테지?”
라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디는 말을 계속해서이었다.
“완벽한 존재, 완벽한 그릇에 담긴 신(?)이 되어버린 존재. 우리는 신이 담길 그릇을 그곳에서 베었다. 그렇게 그것은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지.”
설명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제약이 혀뿌리를 옭아매려 한다. 카르디는 별이 허락하는 선에서 설명을 이었다.
“네 말대로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 되어버렸다. 완전한 존재에서 불완전한 존재로 격하됐다. 태초에 그늘이 태어났을 때 그러했듯이.”
그렇기에.
“그늘은 새로운 그릇을 찾는다. 별빛이 모여드는 곳에 그것은 그림자처럼 기생하기 시작했다. 내가 ■■■ ■■가 아닌, 편린이 말야.”
“···편린?”
“그래, 편린. 온전해지기 위해 자신을 담아낼 그릇을 찾는 것이지.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 그릇이란 게.”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별과 관련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냐?”
카르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과 그늘은 근본적으로 유사한 존재다. 그렇기에, 별을 담은 그릇은 그늘을 담을 수 있지.”
“그럼, 저건.”
라니엘이 창밖의 검은 결계를 가리켰다.
“그늘을 그 아이들에게 담겠다고, 저 지랄을 하고 있다는 거지?”
“정확하다.”
“그 현상이란 게, 이렇게 아무런 전조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따지면 전장에서 진작···.”
“조건이 있다. 이건 말해줄 수 없군.”
카르디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 너머에 숨은 별의 위치.
그것을 헤아리며 카르디가 말을 이었다.
“일정한 시기, 일정한 조건, 그리고 나 또한 알 수 없는 모종의 조건이 갖추어지면··· 이 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
“막을 방법은?”
“없다.”
카르디가 단언했다.
“한번 이 현상이 일어나고, 그늘이 그 자리에 나타난 순간부터 막을 방법은 없다. 누군가는 희생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날아갈 뿐이니까.”
“······.”
“이미 그렇게 전달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냥개.
그에게 전달한 조건을 카르디는 라니엘에게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라니엘이 침대의 턱을 붙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몸으로 어딜···.”
“가야지.”
“지금 가도 늦었을 거다. 흑색 마탑주가 왕가에 상황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더군. 정 갈 것이라면, 곧 저곳으로 향할 기사들과 합류하는 편이···.”
“늦긴 뭐가 늦어.”
비틀거리면서도 라니엘은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선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너, 칼트 그 녀석으론 무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지금?”
“······.”
카르디는 침묵했다.
침묵은 긍정을 의미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본 사냥개는 초인이 아니다. 별에게 축복받은 인물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범인(凡人)에 불과하며, 카르디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재앙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인 인물이었다.
‘자살행위에 가까운 조건.’
그것을 알아듣게 설명했음에도, 그 사냥개는 기어코 결계를 향해 달려갔다. 지금쯤이면 결판이 나고도 남았으리라.
“아닐걸.”
그러나, 라니엘은 그 추측을 부정한다.
“너는 모를 텐데 말야.”
라니엘이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칼트 그놈, 가니칼트를 상대로도 한번은 버텼던 놈이야.”
* * *
주문이 범람한다. 파도가 덮쳐든다.
파도의 앞에서 칼트는 검을 휘둘렀다. 땅을 박차고 도약에 도약을 거듭했다. 벨 수 있는 것을 벤다. 베지 못할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핏!
주문에 스친 팔뚝에서, 종아리에서 핏물이 튄다. 자잘한 상처가 많아지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치명적이진 않다. 칼트는 끊임없이 선택한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저울에 올리고 계산하기를 반복한다.
칼트는 초인이 아니다. 별에게 선택받은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한낱 인간이기에, 그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선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다.
‘많이 해본 일이다.’
전장에서 칼트는 라니엘의 곁에 섰다.
용사의 곁에서 그들의 싸움을 보좌했다.
초인과 재앙이 전력을 다해 맞부딪치는 곳. 인간을 벗어난 이들의 무대. 그런 무대의 위에서 칼트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발버둥 쳐 왔다.
‘눈앞에 있는 것은 재앙.’
칼트는 자신의 상대를 바라본다.
광인과의 싸움에서 그 육신이 망가진 고대의 리치나, 그럼에도 그것이 재앙임은 변함이 없다. 약화된 존재여도 자신에게는 벅차다.
인간의 몸으로 재앙을 상대한다.
불가능한 과업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칼트는 주문을 베어내며 바닥을 구른다.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면서 주문에서 도망친다. 자신은 한 자루의 검(?)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내는 검의 초인이 아니다. 그 부족함을 칼트는 인지하고 있다.
‘모자람, 부족함.’
알고 있기에, 그것을 메꾸기 위한 수단을 갈구한다.
칼트가 품속에서 마도구를 꺼내 집어던졌다. 일회용 마도구들이 크고 작은 폭발을 낳는다. 그것이 주문을 막아내며 칼트에게 시간을 벌어다 준다.
‘그러니.’
손에 잡힌 것은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시험관.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쓴다.’
초인의 육체를 강화하는 물약.
초인만이 견딜 수 있게 설계된 도핑제.
아직은 개발 중에 있는 그것을, 칼트는 뽑아 든다. 시험관 끝에 달린 바늘을 제 목덜미를 향했다.
푹!
칼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제 목덜미에 박아넣었다. 혈관을 타고 도핑제가 흐르기 시작한다.
쿵, 쿠웅!
거세게 심장이 뛴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고, 육체는 더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내뱉은 숨에선 열기가 느껴진다.
“후우···.”
숨을 뱉으며 칼트가 고개를 든다.
『같잖기 그지없군.』
재앙의 시선에는 같잖은 수작질.
그러나, 인간으로선 목숨을 건 저항.
‘시간을 번다.’
바라는 것은 승리가 아니다.
병사는 제 목적을 망각하지 않는다.
* * *
“버티고 있을 거야. 분명히.”
그 눈동자에 깃든 건 동료를 향한 신뢰가 아니다.
그것은 확신에 가깝다.
“···그래서, 저곳으로 가겠다고?”
“그래야지.”
“그 몸으로?”
라니엘은 답한다.
“내가 가야 하니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는 그렇게 답한다.
“내가, 해야 하니까.”
단호한 목소리.
카르디는 설득의 여지가 없음을 직감한다.
턱.
처음의 한걸음은 비틀거린다.
그러나, 두 번째 걸음부터 그녀는 비틀거리지 않는다. 고통을 인내한 채 그녀는 망가진 육체에 강화 주문을 걸기 시작한다.
“···라니엘.”
카르디는 그녀에게 충고한다.
“미리 말하지만, 너는 그늘을 담는 순간 죽는다. 설마 너 자신을 그릇으로 삼을 생각이라면···.”
“자살하러 가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라.”
틱, 티딕.
그녀의 몸 위로 스파크가 튄다. 망가진 육체에 강화 주문을 건 반동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또한 인내한다. 인내하며 주문에 주문을 덮어씌운다.
“그렇다고, 누구를 그릇으로 삼을 생각도 없어. 셋 다 내가 점찍어둔 애들인데, 내가 왜 줘야 하는데?”
“그럼, 무엇을 하겠다고···.”
“야, 카르디.”
그녀가 카르디를 돌아봤다.
“네가 말했지. 불완전해졌다고.”
“···그렇지.”
“불완전하고, 저곳에 있는 건 그 편린이라고, 네가 그렇게 말했지?”
“그렇게 말했다.”
“그럼 됐어.”
라니엘이 제 손바닥을 쫙 펼쳤다.
손바닥에 새겨진 것은 어지러이 얽히고설킨 선의 집합이다. 도저히 회로라고는 부를 수 없는 기이한 도식. 그것을 보이며 라니엘이 미소 지었다.
“수백 년 전, 대현자는 완전한 마왕도 잡아 족쳤다는데.”
난잡한 도식 위로 피어오르는 것은 잿빛 마나다.
그것을 가리키며 그녀가 장난스레 웃었다.
“불완전한 마왕의 편린 정도는 잡아 족쳐야, 현자의 이름도 좀 살지 않겠어?”
저주의 성질을 띤 마나.
그것을 본 카르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마왕한테 패배하고 4년이다, 카르디.”
그녀가 산발이 된 머리칼을 가지런히 묶어 내린다. 피투성이가 된 케이프 대신, 벽에 걸린 마탑주의 코트 하나를 꺼내 입는다.
“마법사는 언제나 답을 찾아야 하지.”
그녀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게 내가 찾은 답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