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01
〈 201화 〉 잿더미의 땅(1)
* * *
아플리아를 덮쳤던 사건으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여전히 아플리아는 휴교 중이었지만, 나흘 뒤면 학사도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이 주간의 방학 덕에 커리큘럼이 다소 빡빡해지긴 했지만, 그리 극적인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저번 학기랑 비슷비슷하니까.’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던 학사일정이 망가졌음에 아론 학장이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갈수록 뒤로 후퇴하는 앞머리와 훤해지는 이마가 조금 마음 아프긴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탈모는 마법으로도 고칠 수 없는, 섭리에 닿은 질병인 것을···.
「자네는 머리숱이 풍성해서 좋겠군···.」
내 스승님을 볼 때마다 그리 중얼거리는 아론 학장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찰랑이는 머리칼이 의자의 등받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으음.”
개학이 나흘 정도 남은 지금, 나는 마나 거래학 교수실에 앉아 있었다. 한 달간의 휴가를 가기에 앞서 준비해놔야 할 게 조금 있는 탓이었다.
‘그걸 준비하려고 들르긴 했지만.’
정작 머릿속은 다른 생각들로 가득했다.
“···잿더미의 땅.”
그래, 뭘 더 말할까. 지금 내가 떠올리고 있는 것은 잿더미의 땅에 대한 정보였다.
‘잿더미의땅.’
황야가 되어버린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곳.
만물이 색(色)을 잃어, 다만 잿빛이 되어버린 그곳이 바로 고대의 왕국이 위치했던 장소였다. 지금이야 잿더미밖에 남지 않았지만···.
‘한때는 가장 번영했던 곳.’
인류사의 황금기라 불리는 시대가 있다.
그 시대에 대한 모든 서술이 두루뭉술하게 뭉개져 있긴 하지만, 그 중심에는 고대의 왕국이 있다는 사실 만큼은 알 수 있었다.
고대의 왕국.
인류사의 황금기를 선도했던 국가.
이름도, 역사도, 그 크기 또한 알 수 없지만··· 가끔 발견되는 유적으로나마 고대 왕국의 위용은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거대한 탑의 흔적.
각지에서 발견된 마학(??)적 유적.
유적에서 출토된 수많은 마도구들의 파편.
지금의 기술력으로는 만들 수도, 범접해 볼 수도 없는 것들이 그 유적들에는 가득했다. 오죽하면 마법사들 사이에 이런 말이 돌겠는가. 인류의 마학 역사는 고대 왕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초기화 된 셈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렇기에.
수많은 마법사가 고대 왕국의 기술력을 복원하고자 혈안이 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실패했고, 시간이 흐른 지금 그런 마법사들이 남은 건 ‘잿빛 마탑’ 뿐이었다.
“고대 왕국의 기술력 복원.”
그것이 바로 잿빛 마탑의 숙원이었다.
한때 잿빛의 차기 마탑주 자리에 앉아있던 나였기에, 이 한 줄의 문장이 가진 무게감은 잘 알고 있다.
‘유적을 뒤지고, 마도구 파편에서 회로를 추출해서 복원하고··· 그걸 기반으로 회로를 복원하고.’
내가 밤을 새워가며 했던 게, 바로 그런 일들이었으니까. 그 시기에도 나는 ‘잿더미의 땅’에 관심을 가지곤 했다. 고대 왕국이 위치했다고 추측되는 곳이 바로 그 잿더미의 땅이었으니까.
하지만, 실패했다.
내가 차기 마탑주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세 번의 탐사를 나갔고, 세 번 모두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잿더미의 땅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곳곳을 배회하는 오염된 마수들.
완전히 오염되어 버린 토지.
그곳을 건너려면 나조차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지금이야 모르겠지만 당시의 나로선 무리였다. 그렇기에, 그곳은 여전히 미지로 남은 곳이었다.
‘그런 곳을, 카르디는 가자고 말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떠올린다.
며칠 전에 카르디가 내게 말했던 것들을.
「잿더미의 땅.」
나와 함께 갈 필요가 있다는 곳.
「수백 년 전 잿더미가 되어버린 나의 고국, 아르카디아.」
내가 언제나 의문을 가져왔던 그곳을, 카르디는 자신과 함께 가자고 말했다. 지금에 와서 그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아르카디아.”
그 이름을 곱씹으며 나는 중얼거린다.
“···이번엔 또 뭘 말해주려고?”
카르디의 과거.
지금은 재앙이 되어버린, 옛 용사들의 이야기.
혹은, 고대 왕국이 멸망한 보다 상세한 이유.
내가 줄곧 물어봤지만 카르디가 답해주지 않았던 것들을,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으으음···.”
그렇게 내가 눈을 감은 채 침음을 흘리고 있을 무렵이다. 똑똑, 하고 누군가 교수실의 문을 두들겼다. 내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약속했던 시간이 돼 있었다.
교수님, 벨노아 입니다.
라크입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내가 말했다.
“들어와.”
교수가 잠시 휴가를 내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 해봐야, 사실 별거 없었다.
“과제 받으러 왔구나?”
문제를 내는 것.
그러니까, 과제를 던져주는 것.
“시간 맞춰왔네. 일단 거기 앉을까? 과제가 좀 많아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거든.”
벨노아와 라크를 향해 내가 해맑게 웃었다.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만든 과제인 만큼, 저 아이들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하리라.
2.
“···너도 알고 있었다고?”
“방학 동안 알게 됐다.”
벨노아는 눈을 깜빡이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는 라크가 있다. 그 손에는 편지 하나가 들려있었는데, 그건 벨노아도 얼마 전에 받은 것이었다.
「발신인 : 라니아 반 트리아스.」
아플리아의 악몽에게서 온 편지.
그 편지에 적힌 이야기를 몇 줄로 요약해보자면, 아래와 같았다.
「내가 한 달 정도 아플리아를 비워야 하는데, 그동안 놀지 말고 훈련이라도 하고 있어라.」
「훈련과 과제에 관한 걸 설명해 줄 테니 마나 거래학 교수실로 찾아오도록.」
여기까지는 평범하다.
과제와 훈련이란 말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얼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법한 내용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오는 문장이었다.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 훈련은 말없이 따라올 거라 믿는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아플리아의 악몽이라 불리는 교수의 정체가, 잿빛 마법사 라니엘임을 너는 알고 있으니··· 말없이 훈련을 따르란 소리다.
‘무려 잿빛 마법사님이 알려주는 훈련.’
배틀 메이지 클래스를 전공하는 벨노아에게 있어, 잿빛 마법사란 존재는 대선배와도 같다. 그 어떤 스승보다도 가장 위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클래스의 창시자.
가장 이름 높은 마법사.
그만한 이름을 걸고 ‘훈련 방법’을 알려줄 테니 군말 말고 따라 해라. 편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벨노아에겐 거부권이 없었다.
‘그래서 교무실로 가고 있었는데···.’
벨노아는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무래도, 이 편지를 받은 건 자신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교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도, 나뿐만이 아닌 것 같고.’
자신의 옆을 나란히 걷는 소년.
라크를 흘겨보며 벨노아가 질문했다.
“그래서, 넌 어떻게 알게 됐는데?”
“방학 중에 검귀, 드라카와 마주할 일이 있었다. 거기서 교수님이 초인을 제압하는 걸 보고 깨달았다.”
“그건··· 모를 수가 없긴 하네.”
초인을 제압할 수 있는 마법사.
그런 마법사가 어디 둘씩이나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벨노아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자니, 라크 또한 벨노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벨노아 너는 언제쯤 알게 됐지?”
“조별 과제쯤이지.”
“아, 네가 실종됐을 때를 말하는 건가?”
“어. 그때 좀··· 말도 안 되는 거랑 마주했는데, 그걸 교수님이 상대하는 걸 보고 눈치챘지.”
“말도 안 되는 것?”
“배교자.”
“그건··· 확실히 그렇군.”
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를 공감대가 형성되는 가운데, 둘은 교수실의 문 앞에 도착한다. 흡사 던전의 입구와도 같아 보이는 문 앞에서 둘은 마른침을 삼켰다.
똑똑.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자리에 앉아있는 라니아 교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잿빛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고, 푸른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그녀가 무척이나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과제 받으러 왔구나?”
상냥한 웃음 속에서 벨노아와 라크는 몹시나 거대한 불안감을 느낀다. 저 웃음의 뒷면에 숨어있을 악몽을 떠올리며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툭툭.
제 옆자리를 가리키며 그녀는 아름답게 웃는다.
“시간 맞춰왔네. 일단 거기 앉을까? 과제가 좀 많아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거든.”
과제가 좀 많아서,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 한마디에서 둘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다. 허나, 피할 수는 없다. 피할 수 없기에 운명이리라. 도축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된 기분으로 둘은 라니아의 옆자리를 향해 걸음을 내디딘다.
유난히도 걸음이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3.
“지난번 아플리아에도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그때 너희들도 악몽에 빠졌었잖아?”
설명에 앞서, 라니아가 다른 주제를 꺼낸다.
그 주제는 라크와 벨노아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둘은 라니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갑자기 잠에 들었고···.”
“깨니까 상황이 끝나 있었습니다.”
열흘쯤 전 아플리아를 덮쳤던 사건.
상황에 대해선 아플리아에 상주 중이던 ‘특수한 인물’과 세 명의 학생이 협력하여 해결했다고 알려졌을 뿐··· 자세한 상황설명이 있지는 않았다.
“혹시 그, 특수한 인물이란 게···.”
벨노아의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라니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 맞아. 나하고 둘 더 있긴 하지. 학생들 쪽이야··· 아예 밝혀졌으니 알 거라 생각하고.”
“역시···.”
그 말에 라크가 깊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마치 감복했다는 듯한 모습에, 벨노아와 라니아는 라크를 슬쩍 흘겨봤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라크가 눈을 빛내며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위대한 잿빛 마법사님이십니다.”
그것은, 얼마 전 수업에서 ‘누군가’ 자신의 업적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며 뱉었던 문장이다.
“듣기로는 재앙이 찾아온 모양인데, 위대하신 잿빛 마법사님께서···.”
그것은 한마디로 끝나지 않는다.
‘위대한’ 이란 수식언을 빼먹지 않는 라크의 말에 라니아가 두 눈을 부릅뜬다. 그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야, 야···.”
벨노아는 라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른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라크에게 속삭였다.
“그만해··· 교수님 놀려서 뭐 하게···.”
“응? 놀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뭐?”
라크가 눈을 깜빡인다.
무척이나 순수하게.
“잿빛 마법사님이 위대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실제로 위대하시지 않나? 교수님은 언제나 옳은 말씀만을 하신다, 벨노아.”
“······.”
“교수님의 말을 의심하는 건 좋지 않다. 스승에겐 언제나 존경심과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게 좋은 제자의 덕목이지.”
맞는··· 말이긴 하다.
맞는 말이긴 한데···.
“···놀리는 게 아니라고?”
“교수님을 내가 왜 놀리지. 존경하는 분인데.”
“진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 녀석, 진심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기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수업에서 라니아 교수님이 저런 말을 뱉을 때도 라크는 교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때, 애 반응이 어땠더라.’
벨노아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오.」
감탄사를 내뱉던 라크.
「과연.」
진심으로 깨달음을 얻은듯한 표정을 짓던 라크의 모습을 떠올린 시점에서, 벨노아는 그만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그때의 자신은 그런 라크를 바라보며 ‘진실을 모르기에 저런 반응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 알고도 나온 반응이었단 말인가.’
다른 의미로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놀라울 정도로 순수한 라크의 모습에 벨노아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만다.
“······.”
벨노아는 말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그곳에는 귓불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라니아가 있다. 라니아는 푹 숙인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한다.
‘본인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부끄럽다는 자각은 있으시구나.
“아, 아무튼.”
그녀가 고개를 휙 들고, 헛기침을 내뱉은 다음 설명을 다시 시작했다. 여전히 얼굴은 붉었지만, 아무래도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작정한듯싶었다.
“그 악몽에 빠트리는 주문 자체가, 별빛이 없거나 초인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면 저항하긴 힘들긴 한데··· 그래도 정신의 각성 계열 수련을 하면 좀 나아질 거야. 이건 그에 관련한 건데···.”
그녀가 훈련 계획을 나열한다.
꽤 빡빡하게 짜인 일정이었다. 단계적으로 늘려가는 수련법이었는데, 이건 벨노아도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수련 과정이었다.
‘아, 이거 정식 기사들의 커리큘럼에 나온···.’
완수하면 도움이 되긴 하리라.
빡빡하긴 하지만, 못할만한 건 아니었다. 벨노아가 수련 계획을 눈에 담고 있는 가운데, 라니아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건 원래 내가 가르쳐 주려던 스톡(Stock)의 활용법인데, 이건 일단 눈에 익힌다는 느낌으로 과제만 하고 있어봐. 한 달 뒤에 내가 돌아와서 제대로 가르쳐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과제를 벨노아와 라크 쪽을 향해 밀었다. 손과 손을 통해 ‘건네준’게 아니라, 테이블 한쪽 구석에 쌓인 종이를 손으로 ‘밀어서’ 준 것이다.
“어···.”
벨노아가 눈을 깜빡인다.
쌓인 종이의 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종이의 탑과 라니아를 벨노아는 번갈아 바라봤다.
“이걸 다요?”
“응. 한달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제가 교수님 수업만 듣는 건 아닌···.”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학생의 마음을 알면 아플리아의 악몽이란 별명이 붙을 리도 없다. 벨노아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과제를 주섬주섬 나눠서 챙기기 시작했다.
“할 수 있지?”
“···해보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벨노아는 힘없이, 라크는 힘차게 답한다.
라니아는 차마 라크와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응··· 하고 작은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위대하신 교수님께서 내주신 과제이니···.”
“그만, 제발 그만 라크···.”
인간의 순수함 앞에 아플리아의 악몽은 굴복하고 만다. 새빨개진 얼굴로 라니아는 둘을 쫓아내듯이 교수실 밖으로 내보냈다.
“야, 라크···.”
“뭐지 벨노아?”
“너 쫌··· 쫌 대단하다···.”
밖으로 떠밀리듯 쫓겨난 벨노아는, 악몽을 물리친 인간에게 진심 어린 감탄을 보낸다.
“뭐가 말이지?”
정작 라크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