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06
〈 206화 〉 재회(1)
* * *
엘프는 인간의 수십, 수백 배에 다다르는 삶을 산다. 마왕의 군세가 세상을 뒤엎고, 엘프의 영지를 짓밟기 전에 엘프를 다스리던 장로(??)는 칠천 년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카르디가 이제 막 백 살에 이르렀을 때, 카르디는 칠천 년을 살아온 장로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칠천 년의 삶.
그 길고도 긴 삶을 회고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무엇이냐고.
「열흘.」
그 질문에 칠천 년을 산 장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열흘’이란 답을 들려주었다.
「엘프의 영지에 찾아왔던, 한 인간이 머물렀던 열흘. 그 남자와 함께했던 열흘이 내겐 가장 소중하고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지.」
칠천 년을 살아왔으나, 기억에 가장 깊게 새겨진 건 인간과 함께한 열흘뿐이다. 그리고, 엘프의 생에 있어 열흘이란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고작 찰나의 순간이 가장 의미 있다고?’
그때의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의 카르디는 장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그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나중의 이야기다.
「아르미엘.」
찰나의 순간.
「고마워요.」
찰나이기에 가장 빛났던 순간.
수백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과거가 있다. 어느샌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떠본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라곤 잿더미로 변한 땅이다.
그러나 카르디는 그곳에서 다른 것을 본다.
카르디는 떠올린다.
수백년 전, 이곳이 불타 사라지던 그날을.
* * *
마왕의 토벌에 실패했다.
동료와 함께했던 여정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쌓아올린 수많은 업적도, 명예도 전부 무(無)로 돌아갔다.
자신만이 기억할 뿐이다.
‘오직, 나 자신만이.’
카르디는 지독한 고독감에 휩싸였다. 밤에도 잠이 들지 못했고, 그는 뜬눈으로 밤 날을 지새웠다. 마탑의 최상층에 처박힌 카르디는 폐인과 같은 삶을 보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무언가 답이 있으리라 믿었다.
‘금서, 금술, 금기.’
금(?)해진 모든 것들을 행하며, 카르디는 방법을 갈구했다. 당연하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독함 위에 무력함이 얹어졌다. 그렇게 마탑에 쳐박힌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탑주님.”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다.
겁에 질린 얼굴의 마법사는 말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누군가 왕국을 공격하고 있다고.
“백발에, 녹빛의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그러니까 스스로를 ‘성녀’라고 참칭하는 미치광이가···.”
그 말을 들은 카르디는 마탑을 뛰쳐나왔다. 마법사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그곳은 델로힘 교단의 성역이었다.
교단의 본교회가 위치한 곳.
글레리아가 나고 자란 곳.
성역의 초입부터 악취가 밀려들어 왔다. 시체의 썩은내가, 무언가 타들어 가는 악취가 사방에 가득했다.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으, 으아아아아!」
누군가의 비명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카르디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비명소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비명 사이에 섞여든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카르디의 입안을 바싹 마르게 만들었다.
「아학, 아하하학!」
즐겁다는 듯이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어딘가 익숙하고, 또한 그리운 목소리를 쫓아 카르디는 걷고 또 걸었다.
망가진 인간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다.
인간과 융합된 마수가 성역을 더럽힌다.
피비린내가 사방에 진동한다.
신을 모시는 곳이자, 성역이라 불리는 곳은 이미 지옥으로 탈바꿈한 뒤였다. 지옥이 되어버린 그곳을 카르디는 계속해서 걸었다.
뚜욱.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본교회의 앞이었다.
인간이었던 것들이 다만 구정물로 흘러내리는 그곳에서, 카르디는 자신이 잃어버린 동료를 마주했다.
“아학, 아하아···.”
피에 눌어붙은 백발.
광기로 번들거리는 녹빛 눈동자.
갈라져서, 메마른 웃음소리.
후둑, 후두두둑.
여인의 손가락을 따라 핏물이 떨어졌다. 흘러내린 핏물이 바닥에 고였다. 그 모습을 보는 카르디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
그녀를 바라보며, 카르디는 차마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한다.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린 그녀는,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한 힘으로 누군가의 삶을 모독하고 있다. 그녀의 발밑에서 썩은내가 진동했다.
터벅.
카르디가 걸음을 옮긴다.
그 걸음 소리에 여인 또한 반응한다.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
웃음소리가 잦아든다.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카르디를 바라본다.
“당신이군요, 아르미엘.”
글레리아는 환히 웃는다.
카르디의 표정은 일그러진다.
“글레리아, 너 도대체 무슨 짓을···.”
“무슨 짓이긴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구원이에요.”
「세상은 구원을 필요로 해요.」
“제대로 된 육체를 지닌 채 망가진 신을 믿고 있으니 아무리 기다려도 구원은 오지 않아요. 그러니 망가트려야죠. 망가진 신이 이들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신께 받은 기적으로 저는 고통 받는 이들을 구원하고 싶어요. 그게 제 바람이에요.」
“제게는 그럴 의무가 있어요.”
망가져 버린 신념.
망가져 버린 정신.
“저는 여전히 성녀니까요.”
빠득.
광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옛 동료를 바라보며 카르디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망가져 버린 옛 동료를 더는 볼 수 없었으므로.
카르디는 직감한다.
자신의 옛 동료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그곳에는 그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없었다.
“용서해라, 글레리아.”
카르디가 소매를 걷어붙인다.
로브 자락이 거세게 흔들린다.
“이게, 내가 너를 지키는 방법이니.”
개발 했으나, 쓰지 않기를 바란 주문을 쓰기 위해 카르디는 손을 뻗었다. 허공에 거대한 회로가 새겨졌다. 이윽고 하늘 위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태양이 땅 아래로 떨어졌다.
화염이 구정물을 불사른다. 불길은 글레리아가 행한 학살과 배교(?)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린다. 그러나, 배교자는 불타 죽지 않는다. 불길 속에서 그녀는 손을 휘두른다.
꿀렁.
죽은 마수들의 시체에서 새로운 마수가 태어난다. 잔불에 녹아들면서도 마수들은 카르디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수의 이빨은 기어코 카르디의 살점을 물어뜯는다.
그렇게 처절한 싸움은 이어졌다.
태우고, 물어뜯기고, 다시 불태우기를 반복한다. 그 끝에 결정된 승자는 카르디였다. 다리를 절며 카르디는 그을음이 묻은 교회를 향해 다가갔다.
“여전하네요, 아르미엘.”
교회의 기둥에 기대어 앉은 성녀는 미소 짓는다.
“여전히 당신다워요.”
“······.”
“아르미엘이 말했죠? 올바름을 잃지 말라고. 네 길을 망각하지 말라고. 망각한다면···.”
“내가, 바로 잡겠다고 말했다.”
“그래요.”
글레리아가 은은한 웃음을 흘렸다.
“그게 약속이니까요.”
「매일 계약, 계약! 마법사들은 계약으로 묶지 않으면 아무것도 약속 못 해요?」
카르디의 걸음이 멈췄다.
“계약이 아닌, 약속이요.”
「이건 약속이에요, 아르미엘. 우리 사이에 무슨 계약이에요? 너무 딱딱하잖아요.」
천천히 카르디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기둥에 기대어 선 글레리아와 시선을 마주한다. 망가졌음에도, 그녀의 기억은 온전하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더욱 비극적이게 다가온다.
“바로 잡아 준다면서요?”
글레리아가 질문을 던진다.
“방법을 찾는 게 마법사라면서요.”
그 질문에 카르디는 침묵한다.
“계약이 아닌 약속이라 안 되는 걸까요?”
“···아니다.”
방법을 찾으려 했다.
수많고 수많은 수단을 갈구해봤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많은 말이 카르디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 하나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다.
“내가···.”
글레리아를 앞에 두고, 카르디는 차마 불가능하다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한다. 결국 그가 쥐어짜 낸 것은 기약 없는 말에 불과하다.
“내가, 답을 찾겠다. 네가 약속을 기억하는 한, 나 또한 약속을 잊지 않겠다. 내가···.”
그 말에 글레리아는 미소 짓는다.
그녀는 그 어떠한 것도 묻지 않는다.
“그럼 기다릴게요.”
백년이 걸리든, 천 년이 걸리든 상관없다.
당신을 믿고 기다리겠다.
그렇게 말하는듯한 글레리아의 앞에서, 카르디는 다른 말을 입에 담지 못한다.
“······.”
그 말을 남긴 채 그녀는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무방비한 모습이다. 손가락을 한번 까딱이는 것 만으로 그 목숨을 끊을 수 있으나, 카르디는 끝끝내 그곳에서 글레리아를 죽이지 못한다.
우스운 일이었다.
대현자라 불리는 마법사를 속박한 것은, 수백 줄에 이르는 계약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강제하지 않은, 말과 말로 맺어진 허술한 약속이 대현자를 묶었을 뿐이다.
불지옥으로 변한 성역.
타들어 가는 왕국.
그 속에서 대현자는 고개를 숙인다.
고독함, 무력함, 그리고 허무함.
타락하지 않았을 뿐, 그 또한 망가져 간다. 그는 멍하니 왕국이 불타 사라지는 순간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므로.
“···결국.”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카르디는 다시 그곳에 선 채 과거를 바라본다.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군.”
“찾는 도중인 거겠지.”
중얼거림에 답하는 인물이 있다.
카르디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뒤를 따라 걷던 라니엘은 어느새 자신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아직도 찾고 있는 거 아니야?”
터벅, 하고.
그녀가 카르디를 앞질러 걷는다.
“인간의 수명을 넘어서까지 답을 갈구하고, 또 찾아낸 마법사가 있더라고. 비교적 최근에 본 거긴 한데···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거지.”
앞에 선 라니엘이 뒤를 돌아봤다.
“넌 아직 수명 다 안 살았잖아.”
“···엘프는 영원을 살아간다. 수명의 제한이 사실상 없는 것에 가까운···.”
“아무튼.”
라니엘이 미소 지었다.
“찾고 있는 도중이란 거지. 포기한 건 아니잖아.”
논리가 없는 억지와도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말에 카르디는 쓰게 웃고 만다.
“···그래, 그런 거겠지.”
어느샌가 멈춰 섰던 발걸음.
카르디는 다시 앞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2.
잿더미의 땅의 중심부.
고대 왕국, 아르카디아가 위치했다던 곳에는 해가 비추지 않았다. 별빛 또한 닿지 않았다.
저주받은 땅.
델로힘 교단에선 이곳을 그렇게 불렀다.
신의 분노를 산 결과 신에게 버림받은 곳이라고. 그렇기에 어떠한 빛도 이 땅을 비추지 않는다고.
“생각해보면 웃기네.”
내가 바닥을 가리켰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것은 델로힘 교회의 유적이었으므로, 내가 가리킨 것은 이 교회 그 자체였다.
“걔네 종교의 본(?) 교회가 여기에 있잖아. 이게 최초로 지어진 교단의 교회 아니야?”
“최초긴 하지. 증축에 증축을 거듭했을 뿐이고.”
“그리고, 여기가 성역이라며.”
“수백 년 전까지는 그랬지.”
“그럼 걔네는 자기네 성역을 저주받은 땅이라 말한 거야? 뭔 그딴 근본 없는···.”
제 근본을 부정하는 꼴이었다.
내가 어이없어 하고 있자니, 카르디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델로힘 교단은 허물 뿐일 거다. 주요한 기록, 지식, 성법서들은 아르카디아의 멸망과 함께 전부 이곳에 파묻혔으니까.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남아있지 않을 테고.”
델로힘 교단의 본교회.
그러니까, 종교의 발원지가 된 곳을 걸으며 나는 카르디의 말에 귀 기울였다.
“한때 델로힘 교단의 교리는 이곳저곳에 퍼졌고, 그곳의 문화에 맞춰 나름대로 변형이 가해졌다. 물론 그 뿌리는 아르카디아에 있었지만···.”
아르카디아가 이렇게 멸망해 버렸으니, 뭐.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르디가 어깨를 으쓱였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내가 기억하는 교단의 교리는 거의 남아있지 않더군. 네 말이 맞다. 지금의 델로힘 교단은 근본이 없다.”
과연.
“근본이 없으니 성녀란 년이 그 모양이지···.”
사라를 떠올리며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딜 가나 근본이 중요하다. 근본이 없는 것들은 어딘가 뒤틀려 있는 법이었으니.
“···도대체 당대의 성녀가 어떻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궁금하긴 하군.”
“글쎄다···.”
성녀, 사라.
그년이 어떤 인물이냐고 묻는 카르디의 말에 뭐라 답해줄지 고민하다가···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안 얽히는 게 좋아.”
말로 이루 설명하기 어려운 시발스러움이었으므로, 나는 구태여 길게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배교자는 타락해서 미쳐버렸다면, 걘 그냥 처음부터 미쳐있거든···.”
“···그 정도인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궁이란 엘프든, 성녀든 그냥 안 얽히는 게 최고야. 그년들이랑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다 보면,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
“내가 여태껏 봐왔던 모든 것들이, 적어도 이년들보단 아름답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거든.”
카르디가 무척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대로라면, 그런 인물이 대체 왜 성녀(??)라고 불리는 거지?”
그러게.
나도 그게 참 의문이다.
3.
현자와, 대현자를 적으로서 마주하고도 살아남은 전설의 용병은 오늘도 문을 지키고 있다.
“지루하군···.”
그것은 위업이나,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문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일주일 안에 이곳을 떠라.」
남자가 남긴 경고를 곱씹으며 용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뜸 그렇게 말해도 이곳을 뜨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까닭이다.
‘일주일안에 어떻게 정리를 해?’
이곳은 용병에게 있어 두 번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그런 곳을 대뜸 일주일 안에 뜨라니? 일단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렇게 갑작스레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갑자기 잿빛 황무지가 통째로 날아가면 또 몰라. 갑자기 자리를 뜨긴 무슨···.”
그리 중얼거리며 헛웃음을 흘리던 순간이다.
용병의 귀에 마차의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용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미친놈이 여기에 마차를 타고 와?’
잿빛 황무지에 대해 아는 마부들이라면, 이곳으로 마차를 몰 생각은 꿈에도 꾸지 않는다. 오직 잿빛 황무지의 허가를 받은 극히 소수의 마차만이 손님을 태우고 이리로 올테지만···.
‘오늘은 예약된 마차가 없다.’
용병은 칼자루에 손을 얹는다. 부러진 칼 대신 비싼 값을 주고 산 새 칼자루다.
“거기 멈춰라!”
용병이 말했고, 마차가 정말로 멈췄다.
용병은 칼을 쥔 채 마차로 다가갔다.
“허가받지 않은 마차는 안으로 들일 수 없소. 마부, 당장 마차를···.”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비키는 게 좋을 거요.”
마부는 용병의 경고에 쫄은 기색조차 없었다.
그것이 용병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안 그래도 며칠 전, 남자에게 두들겨맞으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용병은 눈을 부릅뜨며 마부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잿빛 황무지의 문지기가 우습소?”
“누가 타고 있는지 알면···.”
“누가 타고 있던!”
용병이 칼을 조금 더 들이밀었다.
“이곳에서 내려서, 걸어 들어가라 하시오. 잿빛 황무지의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마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답니다, 용사님.”
···용사님?
용병이 눈을 깜빡였다.
“마부, 방금 뭐라 하셨소?”
“내가 말했잖소.”
마부가 어깨를 으쓱였다.
“뒤에 타고 계신 손님이 누군지 알면, 그런 말 못할 거라고.”
용병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마차의 문이 열린다. 용병은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규칙이라 했나.”
훤칠한 키.
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어깨 갑주.
허리춤에 채인 것은, 상징과도 같은 별의 검.
“몰랐군. 이곳이 주인이 있는 땅이었나?”
가장 이름 높은 용사, 카일 토벤.
그가 문지기를 내려다본다. 그 싸늘한 시선에 용병의 안색이 조금 더 새하얘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