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07
〈 207화 〉 재회(2)
* * *
델로힘 교단 최초의 교회.
멸망한 왕국에 위치한 교단의 본(?) 교회는 내 상상을 아득히 넘어선 규모였다. 이만한 규모의 종교적 건축물을 나는 여지것 본적이 없었다.
“···별의 신전보다 더 큰데?”
교단의 총본산인 성국(?國)에 위치한 신전도 이만한 규모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나는 카르디를 뒤따라 걸으며 교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금이 간 벽.
무너져 내린 벽.
수백년을 방치된 교회에는 잿더미가 쌓여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잿가루가 바람에 흩날렸다. 그곳에서 기도를 올리는 신도도,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도 이 교회에는 없었다.
하지만, 신성함은 남았다.
신의 말씀을 옮겨 적은듯한 고대의 문자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단순히 글자만을 나열한 건 아니었다. 배열과 행을 꼬아가며 배치된 글자에서 나는 신비함 마저 느낀다.
그리고, 신비함에서 신성함은 탄생하는 법이다.
별을 믿지 않으며, 델로힘 교단을 하수구에 고인 오물 덩어리 정도로 생각하는 나조차도··· 이 교회에선 모종의 신성함을 느낀다.
“···대단하네.”
더럽혀지고 망가진 교회였으나, 세월의 흐름조차 교회에 남은 신성함까진 지우진 못한듯싶었다.
“네 시대의 델로힘 교단은 어땠어?”
“신을 믿되, 믿음을 강요하진 않는 이들이었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카르디가 말했다.
“독특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교리는 언제나 인간의 구원이었다. 그 구원을 해석하는 방법이 제각각이긴 했지만 말이다.”
카르디가 쓰게 웃었다.
“거의 다 온 것 같군.”
그가 걸음을 멈췄다.
불현듯 불어온 바람에 잿가루가 흩날렸다.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도로 가라앉는 잿가루의 모습은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아 보였다.
“이곳이다.”
흩날리는 잿가루 속에서 카르디가 나를 돌아봤다.
“이 문의 너머에 지하로 향하는 길이 있다. 그곳에 성배는 안치되어 있지.”
시야에 들어온 것은 굳게 닫힌 문이다. 문의 양옆에는 거대한 석상이 놓여있었고, 그들의 손에 들린 검이 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교차하여 문을 가로막은 거대한 검.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장갑을 쭉, 끌어내렸다. 저 석상은 이미 북부에서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지금 보이는 것에 비하면 크기가 한참 작긴 했지만.
“부수면 되는 거지?”
내가 주먹을 꽉 쥐자, 카르디가 질린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부수긴 뭘 부수지? 그냥 열면 되는데.”
“···열면 된다니?”
“황야에서 내가 석상들을 괜히 활성화했을 것 같나? 이건 장치다. 애초에 부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고.”
카르디가 툭툭, 석상을 두들겼다.
“별의 힘을 가진 존재, 그러니까··· 성녀 혹은 용사가 아니라면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치니까.”
“···그래?”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뒤늦게 문을 둘러싼 미약한 별빛이 보였다. 문에 새겨진 회로가 별빛과 공명을 하고 있었다.
‘···이거.’
몇번 본적이 있다.
카일의 성검(??)이 아니면, 부술수 없게 만들어진 스케발의 제단이 이런 구조를 띠고 있었다.
“···스케발의 제단에서 본 것 같은데.”
“그 녀석이 이걸 흉내 낸 거겠지. 다만, 완벽히 흉내 내진 못했을 거다. 이걸 만들기 위해서는 글레리아의 신성력이 필수적인 요소였으니까.”
카르디가 교차한 검의 중심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열쇠 구멍을 닮은 작은 홈이 하나 뚫려 있었다.
“이곳에 별빛을 불어넣어야만 문이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외의 꼼수는 통하지 않지.”
스케발의 제단을 부쉈을 때처럼, 카일의 성검을 흉내 내는 것으론 부족해 보였다. 내가 교차한 검의 중심에 뚫린 구멍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열게? 너도, 나도 별빛은 없잖아. 수명을 태우면 만들 수 있긴 한데···.”
“보통은 열 수 없지. 보통은.”
하지만, 하고 카르디가 말했다.
“나는 가능하다.”
그가 구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천천히 오른쪽으로 손목을 돌렸다.
“내가 이 장치의 설계자니까.”
끼릭, 하고 석상에서 뭔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디는 구멍에서 손을 뺀 채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두 석상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궁, 쿠구구궁.
석상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석상에 쌓인 잿더미와 함께 돌가루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문을 지키던 석상이 천천히 움직인다.
문의 앞에서 교차한 칼이 움직인다.
땅을 향해 비스듬히 내려둔 칼끝이, 바닥이 아닌 하늘을 향한다. 그렇게 두 석상은 하늘과 수직이 되도록 검을 들어 올렸다.
끼릭.
다시한번 무언가 맞춰지는 소리가 울린다. 이번에 소리가 울린 것은 굳게 닫힌 문이었다.
“열렸군.”
카르디가 짧게 말했고,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릴 때는 자그마한 소음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그리고 고요히 문은 열렸다. 마치, 수백 년에 이르는 세월의 흐름을 빗겨가기라도 한 것처럼.
“내려가지.”
열린 문의 너머에는 지하로 향하는 나선형의 계단이 놓여있다. 별다른 횃불이나 빛을 만들기 위한 주문은 필요 없었다.
‘···별빛.’
새어나오는 별빛이 길을 밝혔으므로.
2.
교회의 지하는 거대한 공터였고, 그 공터에는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둥은 교회를 떠받치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그곳을 장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수가 총 삼십하고도 일곱 개였는데, 나로서는 삼십칠 개의 기둥이 무슨 의미를 가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신성한 숫자라고 생각해라. 깊게 알아봐야 그닥 쓸모 있는 건 아니니.”
카르디는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기둥들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발밑에는 별빛이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새겨진 회로를 따라 별빛은 흐른다.
‘마치, 북부의 성지처럼.’
그리고 회로를 따라 시선을 올려보면, 그곳에는 흘러나오는 별빛의 근원이 있다.
‘···잔.’
하나의 잔.
인간의 손을 본뜬 석상의 위에 올려져 있는, 백금색의 잔. 그 잔에서 별빛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잔을 바라보았다.
“저게 성배다.”
카르디가 말했다.
“별빛을 담는 그릇이기에, 성배(??)이며··· 성녀가 빚어낸 잔이기에 성배(??)이지.”
별을 담는 신성한 잔.
“라니엘, 성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잔의 앞에 선 카르디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배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별의 시련에 대해선?”
“그건 알고 있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의 시련.’
별의 무구를 지니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시련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카일이 설명해 준 적이 있었으니까.
「나는 협곡이었다. 별이 열어주는 이계(??)로 들어선 순간부터 내 앞에 성검이 놓여 있었다. 빛이 나지 않는 성검이. 그리고 그것을 쥔 순간부터, 검을 든 망령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온갖 종류의 망령을 죽이고, 또 죽이며 협곡을 탈출하는 것. 그것이 카일에게 주어진 시련이었다.
「시련이 끝나니, 성검에 드디어 빛이 일더군.」
그 시련을 극복했을 때 카일은 성검을 다룰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다른 용사들의 것도 대부분 비슷했다.
성창의 갈라할도.
비굴의 데스텔도 마찬가지였다.
이계로 들어선 순간 빛이 나지 않는 무기가 바닥에 꽂혀있고, 시련을 극복한 순간 무기에서 별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렇다면 설명이 쉽겠군.”
카르디가 성배를 건드리며 말했다.
“과거, 별의 시련을 경험하고 난 가니칼트가 나와 글레리아의 앞에서 말한 적이 있다. 별의 시련은 초인이 되는 과정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용사이기 이전에 초인이었던 그 녀석 만이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던 거겠지.”
용사이기 이전에 초인이었던 검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그건,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무언가를 잃어야만 초인이 된다.
그것이 내가 아는 초인의 기본적인 개념이었다.
‘하지만··· 가니칼트는 아니었어.’
내가 북부의 탑에 기록된 기억 속에서 보았던 가니칼트는 완벽한 인간이었다. 무언가를 잃지도, 놓치지도 않은 완전한 인간.
“잃어야만 초인이 되는 거 아니었어?”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가니칼트는 말했다.”
“···쉬워?”
“그래.”
카르디가 말했다.
“녀석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초인이 됐다. 녀석이 말하기를, 제 내면에 존재하는 벽을 인지하고, 그것을 형상화해 베어냈다고 하더군. 녀석은 심검(心?)의 경지에 이르면 된다고 말했다.”
“···심검이 뭔데?”
“모른다. 나도 심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건 포기했다. 워낙에 애매한 개념이었으니까.”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대신, 나는 다른 것에 주목했다.”
카르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면의 벽을 형상화하는 것.”
그가 성배를 움켜쥔다.
회로를 타고 흐르던 빛줄기가 멈춰 섰다.
“형상화하고, 실체화하여 현실에 구현시키는 것.”
그것이.
“별의 시련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더군.”
시련의 정체라고, 카르디는 말했다.
“나는 그것을 흉내 내고자 했다. 글레리아의 축복을 활용하고, 특정한 매개를 통해 별의 시련을 임의로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지.”
카르디가 성배를 들어 올린다.
빛줄기가 요동친다. 회로를 타고 흐르던 빛줄기가 성배를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별빛이 피어오르고, 범람한다.
“그렇게 만들어낸 마도구가 이 성배다.”
잔에 별빛이 담긴다.
찬란히 빛나는 별빛이 담긴 잔을 나는 보았다.
“제 안에 존재하는 벽을, 단 한 번이라도 목격한 이에게 이 성배는 반응할 거다. 그들에게 시련을 제공하겠지.”
“···그걸 극복하면.”
“내면의 벽을 허물고 초인이 되는 거지. 아무것도 잃지 않고서.”
꿀꺽, 하고 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상상 이상인데.’
아무것도 잃지 않고 초인이 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이 성배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머릿속으로 세워둔 계획을, 한참이나 앞당길 수 있는 물건이었다.
“가져가라.”
카르디가 내게 성배를 건넨다.
빛이 고인 잔은 백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런 유적에 방치 돼 있는 것보단, 네가 가지고 가는 게 훨씬 좋을 테니까.”
나는 멍하니 카르디를 바라보았다.
그가 만들어 냈다는 성배는, 섭리를 비트는 것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나로서는 그 구조가 어떻게 된 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물건.
“야, 카르디.”
“뭐냐.”
“너··· 도대체 뭐하던 놈이냐?”
오늘따라 눈앞의 이 엘프가 유난히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내 시선에 카르디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전(?) 대현자이지. 그냥 현자와 달리 앞에 대(大)자가 붙은 만큼, 뭔가 다르지 않겠나?”
대현자와, 그냥 현자의 차이인가. 내가 헛웃음을 흘리며 카르디가 건네는 성배에 손을 뻗었다.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좀 주지 그랬어?”
“주고 싶어도 못 준다. 진실에 근접하지 않은 이들은 가질 수 없는 물건이니까. 아르카디아라는 지명을 듣지 못하는 이가 쥔다면, 흩어져버리고 말지.”
나는 성배를 손에 쥐었다.
성배는 흩어지지 않았다.
“너니까 쥘 수 있는 거다.”
카르디가 은은한 웃음을 흘렸다.
“아직 스무 살 남짓한 애송이 주제에, 진실에 다가선 너니까 쥘 수 있는 물건이란 소리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나는 나의 여정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에 웃음을 흘렸고, 카르디는 이것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껍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쉭.
어디선가 한발의 화살이 날아든 것은.
3.
“발자국이 남아있어.”
“···이전에 들렸다던 용사들이 아닌가?”
“아냐. 일, 이주일 된 발자국이 아니라 하루 이틀 밖에 안된 발자국이 남아있어.”
이미 누군가 지나간 길이다.
그것도, 비교적 최근에.
엘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탐색능력을 지닌 레미아이기에, 그녀는 누군가 지나간 흔적을 눈치챈다.
“그리고, 마수의 시체도 있지.”
레미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마수의 시체에 주목한다. 무언가로 뭉갠듯한 모습의 시체였다.
“내가 먼저 탐사하고 올게.”
“···괜찮겠어?”
“문제없어. 마수들 시체가 깔끔하지 않잖아. 둔기로 짓이긴 거 같은데··· 그런 거에 내가 당하겠어?”
레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둔해 빠진 놈들에게 안 당해. 사라? 축복 좀 내려줄래?”
“네, 잠시만요.”
사라가 주문을 읊는다. 완성된 주문이 별빛으로 변해 레미아의 몸에 녹아든다. 축복은 잿더미의 땅에 넘쳐흐르는 마기를 거부하고, 육체를 고양시킨다.
“됐어요, 레미아.”
“고마워.”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레미아가 툭툭, 발끝으로 땅을 두어 번 건드렸다.
레미아는 앞을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교회다. 그 교회의 안으로 흔적이 이어져 있었다. 교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레미아가 뒤를 돌아봤다.
“천천히 와. 내 몫까지 보물 챙기는 거 잊지 말고.”
“알았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고, 레미아가 땅을 박찼다. 엘프는 바람과도 같이 달린다. 그런 이야기가 괜히 나도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레미아는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고 교회의 안을 내달렸다.
금색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린다. 엘프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레미아는 거대한 문을 발견한다. 문의 안으로 흔적은 이어져 있다. 그녀는 미끄러지듯 열린 문의 안으로 들어섰고, 나선 계단의 난간에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계단의 아래.
거대한 공터.
‘저깄다.’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레미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등에 매달아둔 화살통에 손을 뻗는다. 한발의 화살을 화살대에 매긴다.
‘두 명.’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까지 보이진 않지만··· 그들이 손에 쥔 것을 레미아는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백금색의 빛이 새어나오는 잔이다.
‘저게 성배?’
성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물건이다.
이곳에 온 목적이 눈앞에 있다. 저것을 저 도굴꾼들에게서 빼앗아 카일에게 전해주면, 오늘 밤은 재미를 좀 볼 수 있으리라.
핥짝, 하고 레미아가 제 입술을 핥는다.
‘한발이면 충분해.’
무방비한 적을 꿰뚫는데 여러 발의 화살은 필요 없었다. 레미아는 신궁(??)이라 불리는 엘프였고, 그녀는 제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쭈욱.
세계수의 가지로 엮은 활대가 구부러진다. 활시위가 팽팽해지나, 그 위에 얹혀진 화살촉은 흔들림이 없다. 레미아는 무표정이 활대를 기울인다.
노리는 것은 성배를 쥔 여자.
움직임이 없는 목표물을 꿰뚫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다. 레미아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쏘아진다.
쉭!
화살은 목표물을 향해 빨려 들어간다. 화살촉이 여자의 가슴팍을 꿰뚫는 미래가 훤히 그려진다. 오차는 없었다. 시야의 사각에서 쏘아진, 반응할 수 없는 일발(一?)이었다.
그 순간이다.
레미아의 예상을 깨고, 여자가 움직인 것은.
한순간 잔상을 흩뿌리며 움직인 여자의 손이, 자신에게 날아들던 화살을 움켜쥔다. 그 움직임은 일견 부드러웠으며, 조금의 낭비조차 없었다.
콰직.
여자가 움켜쥔 화살을 부러트린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 시선은 정확히 레미아를 향한다. 어둠 속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둘 사이의 거리는 멀었지만, 둘의 시선은 정확히 서로를 바라본다.
“와.”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자다.
“미친년이네?”
담백한 목소리가 공동에 울린다.
레미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레미아는 낯선 여자에게서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