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15
〈 215화 〉 재앙이 할퀴고 간 흔적(2)
* * *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밟고 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절반이 무너져 내렸다 한들 성벽은 거대했고, 성벽을 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투두둑.
무너진 성벽의 끄트머리에 서서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카르디는 말했다. 성벽을 넘으면 아르카디아의 수도가 있을 거라고.
“···야 카르디.”
내가 카르디를 불렀다.
나보다 한 박자 늦게 성벽을 올라온 카르디가, 로브에 묻은 먼지를 털며 답했다.
“뭐냐.”
“여기가 수도라고?”
“그래. 아르카디아의 중심부이지. 한때 왕성이 있었던 곳이고, 수도라 불렸던 곳이 맞다.”
“···이게?”
내가 성벽의 너머를 가리켰다.
“여기가, 수도였다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폐허다.
땅은 쩍쩍 갈라져 있으며, 건물이나 탑 따위의 파편이 공중에 붕 떠있었다. 공중에 뜬 잔해들은 약간의 미동조차 없었다.
‘마치,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그런것들이 수백이고 수천이다.
나는 숨을 헛삼키며, 시선을 더욱 아래로 향했다. 파편의 아래, 갈라진 땅의 틈새. 그곳에선 무언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안개.
마치 먹구름을 닮은, 회색빛의 안개.
틈새에서 새어나온 짙은 안개가 땅바닥을 기고 있었는데, 안개에선 주기적으로 섬광이 번뜩였다.
콰릉!
섬광이 번뜩이고, 잠깐의 차이를 두고 굉음이 섬광을 뒤따랐다. 천둥소리가 고막을 을렸다. 난데없이 울린 천둥소리에 내가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번개?”
땅에서 하늘을 향해 번개가 쳤다.
푸르지도, 하얗지도 않은 시꺼먼 번개. 한줄기의 검은 섬광이 하늘을 향했던 잔상이 허공에 길게 남아있었다.
상식을 벗어난 광경이다.
섭리가 통하지 않는 장소다.
나는 손을 쭉 뻗어 성벽의 너머에서 존재하는 마나의 흐름을 읽었다.
‘마기(??).’
짙은 마기가 사방에 진동한다.
마기에 집어삼켜 진 마나의 흐름은 몹시도 날카로웠는데, 마나의 배열이 흐트러지는 순간 한순간에 휩쓸려 갈가리 찢길게 분명했다.
‘마나가 없는 카르디면 몰라도···.’
내게는 제법 까다로운 환경이었다.
“하···.”
마경(??).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르카디아의 수도라는 이곳에 진동하는 짙은 마기는, 내게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므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좀이 쑤시는 기억.
그 기억을 더듬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욱신거리는듯한 환상통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검은 들판.’
마왕과 마주했던, 끝없이 펼쳐진 들판.
그곳 또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것들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죽음을 체감하게 된다는 점이 그러했다.
‘다른 점이라곤···.’
내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왕이 없다는 점이겠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마왕을 마주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하늘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을 집어삼킨 검은 구정물.
빛을 가린 알 수없는 무언가.
그날, 우리가 들판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하늘에선 비가 내렸고, 하염없이 쏟아진 검은 빗방울은 초원에 새겨진 고랑에 고이기 시작했다.
구정물이 고이고 고여 만들어진 덩어리.
하늘에서 쏟아져 만들어진 무언가의 형상.
『■■, ■. ■■■■■■.』
알 수 없는 소음을 내던 그 구정물 덩어리가, 정말로 다행히도 이곳에는 없었다.
주변이 어둡긴 했지만, 그건 별빛이 이곳에 닿지 않기 때문이지, 하늘을 삼킨 무언가가 이곳에 존재하는 까닭은 아니었다.
“왜, 상상 이상인가?”
내가 마른침을 삼키고 있자니, 카르디가 농담을 던졌다. 나는 쓰게 웃으며 카르디를 바라봤다.
“어. 수도 풍경이 몹시도 전위적인걸. 건축가가 남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나 봐?”
“너만 하겠나.”
“뭐?”
피식,카르디가 웃음을 흘렸다.
“그럼 가도록 하지.”
성벽에서 도약해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 떠 있는 파편 위로 착지했다. 콰릉, 하고 연달아 울리는 천둥소리를 배경 삼아 도약에 도약을 거듭했다.
탁.
카르디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내 시야는 안개에 휘감긴 거대한 성을 향했다.
‘고대의 왕궁.’
마경으로 변해버린 고대 왕국의 중심에 위치한 왕성. 북부에서 보았던 백야궁(白??)을 닮았으나, 그보다 몇 배는 거대한 왕성.
안개에 휩싸인 그곳이 목적지이리라.
‘그리고···.’
저곳에 도착하게 된다면.
‘뭐라도 알 수 있겠지.’
카르디가 내게 말해주려는 것.
내가 두 눈으로 보고 깨달야아 하는 것.
그것이 저 왕성에 있으리란 사실은 분명했다.
2.
델로힘의 본교회를 빠져나와, 잿더미의 땅을 벗어나려 하는 순간이다. 카일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보았다.
“······.”
하나의 왕국이 멸망한 흔적.
그 흔적이 이어진 곳에는 거대한 성벽이 있다. 아주 먼 곳에 있지만, 카일은 그 성벽의 너머에 있을 ‘무언가’에게서 꺼림칙함을 느낀다.
등줄기를 타고 무언가 기어오르는듯한 감각.
목이 타들어 가는듯한 감각.
그것은 오래전에 느껴봤던 감각이다. 카일은 그 감각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마왕.’
그 괴물과의 조우에서 느꼈던 감각이었으니까. 카일은 괜스레 성검의 칼자루를 매만졌다.
“카일, 뭐해?”
“···아무것도 아니다.”
앞장서 걷던 레미아가 뒤를 돌아본다.
카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감각이 느껴지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저 성벽의 너머까지 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카일, 있잖아.”
그렇게 다시 걸음을 옮기자, 레미아가 총총걸음으로 카일의 곁에 다가왔다. 그리곤, 카일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라, 기분 엄청 나빠 보이는데.”
“···그런가.”
“뭐라도 해줘야 할걸. 그때처럼 방치하면 몇 주고 삐쳐있을 거 같은데.”
카일이 앞을 바라봤다.
씩씩거리며 건물의 잔해를 깨부수듯이 나아가고 있는 사라의 뒷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노력은 해보겠다.”
“사라는 단순하니까, 뭐라도 하나 사주면 될걸? 사는 김에 내 것도 하나 챙겨줘.”
그리 말하곤 레미아는 잰걸음으로 카일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어느새 한참 앞서 간 사라의 곁에 도착한 레미아는, 사라의 목에 팔을 걸곤 그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거리는 멀고, 그 목소리는 작지만··· 예민해진 카일의 청각은 작은 소리도 정확하게 붙잡아 냈다.
「말은 잘해놨어. 뭐 가지고 싶다고 티 내면 카일이 아마 사줄 거야. 그러니까, 이참에···.」
「···정말요?」
「응. 뭐 생각해둔 거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흑색 마탑에서 디자인이 진짜 예쁜···.」
「그 아무런 기능도 없는데, 디자인이랑 천 감만 좋다는 그거?」
···이번 토벌 보상금은 또 죄다 털리겠군.
“후우···.”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칼자루를 매만졌다.
눈을 감으면, 조금 전 마주했던 소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갈비뼈를 부러트리고, 정강이를 아작낸 소녀의 모습.
라니엘과 닮은 소녀.
그러나, 별은 라니엘이 아니라고 말하는 소녀.
그 소녀의 정체가 카일은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더이상 관여해봤자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직감만이 강하게 들 뿐이다.
‘잿빛 머리칼, 푸른 눈동자.’
특징적이나, 녀석과는 닮지 않은 외모.
외모를 제외한 그 모든 게 녀석과 닮은 소녀.
『다르다.』
몇번을 물어도 별은 그렇게 답할 뿐이다. 성검의 칼자루를 매만지던 손을,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너를 대체할 용사파티의 양성.」
소녀가 마지막에 남긴 말.
라니엘이 세우고 있다던 계획이 카일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카일이 떠올린 것은 우습게도, 지난 5년간 줄곧 느꼈던 감상이었다.
여전하다.
정말로, 변하지를 않는다.
그녀석은 이 지경이 와서까지도 마왕을 잡을 생각을 하고 있다. 제 수명의 절반을 갈아 넣고서도, 그러고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던 그 마왕을··· 녀석은 진심으로 토벌하고자 한다.
몽상이 아니다.
망상 또한 아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을, 녀석은 전부 이루어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고대 리치를 주문으로 꺾었으며, 마법사의 약점을 극복한 클래스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언제나, 언제나 그랬지.’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칭송하지만, 카일 제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특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신만의 능력이 아님을.
잿빛 마법사, 라니엘 반 트리아스.
별에게 선택받지 않았음에도, 특별한 축복을 타고나지 않았음에도, 종족적인 강점을 타고나지 않았음에도 경지에 오른 녀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업적임을 카일은 알고 있다.
녀석은 꺾이지 않는다.
결코 꺾이는 법이 없었다.
죽음의 앞에서도 녀석은 언제나와 같았다.
‘나와는 달리, 나와는 다르게.’
그것이 카일을 괴롭게 했다.
카일은 무심코 들어 올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말끔하나, 한때는 이 손바닥에 굳은살이 잔뜩 배겨져 있을 때가 있었다.
흉터가 남지 않는 용사의 육체에, 흉터가 남을 때까지 훈련을 반복했던 나날이 있었다.
지금은 먼 옛날이 되어버린 그날을 떠올리며 카일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수십 줄의 문장으로 꾸며봤자, 결국에는 놀랍도록 단순한 이야기였다.
‘나는 변했고.’
녀석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줄곧 변하지 않고 있다.
카일은 그 사실이 가증스러우면서도 또한 기껍다.
“그래야지.”
그래야, 너니까.
그것이 내가 봐왔던 너니까.
“너는, 그래야만 하니까.”
카일은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은 허공을 맴돌다 바스러졌다. 단지 별만이 그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3.
“너, 아까는 기세 좋게 뛰지 않았냐?”
“그랬었지.”
“난 그래서 네가 이런 마경에서도 뛰어다닐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이야, 마나는 다 사라졌어도 육체 능력은 남았구나? 역시 대현자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감탄했었는데.”
“애석하게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라니엘은 차게 식은 눈길로 카르디를 바라봤다. 지금 카르디는 라니엘이 쥔 사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대현자의 위엄이 사는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상황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았다.
기세 좋게 도약을 거듭하던 카르디는, 왕성을 코앞에 두고 발을 헛디뎌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대로 미끄러지는 카르디를 라니엘이 사슬로 휘감아 대롱대롱 매달아둔 상황이었는데···.
“야, 카르디···.”
사슬에 매달린 카르디를 내려다보며 라니엘이 몹시도 애잔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엄청 초라해 보여···.”
사실이었기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카르디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육체 능력의 문제는 아니다. 엘프 특유의 육체 능력도 있고, 단련을 거듭한 결과 초인에는 못 미쳐도, 그와 유사한 경지에 까진 올랐으니까. 발을 헛디디는 멍청한 일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러는데?”
“···계약의 영향이다.”
또 그거야?
자신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라니엘의 눈빛에, 카르디는 약간의 초라함을 느끼며 답했다.
“계약의 페널티다. 나는 마왕과 관련된 것에 개입하고자 하면, 한없이 무력해지니까 말이다.”
“···너 그냥 쪽팔려서 아무 말이나 하는 거 아니야? 그냥 발 헛디딘 거지?”
“아니다.”
그 목소리가 몹시도 진지했기에, 라니엘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가 말없이 사슬을 잡아당겨 낚시하듯이 카르디를 끌어올렸다.
“아무래도, 뭔가가 있는 것 같군.”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가 된 심정을 느끼며, 카르디는 왕성 쪽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들어서려는 순간, 보다 정확하겐 왕성에 쳐진 결계에 개입하려는 순간··· 몸에서 힘이 쫙 빠지고 말았다.
‘저 안에 무언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들렸던, 수백년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저 왕성의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불안하군.”
“어, 진짜로 불안하다. 나 설마 너 업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지?”
둘은 서로 다른 이유로 불안함을 느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