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19
〈 219화 〉 재앙이 할퀴고 간 흔적(6)
* * *
고대의 왕국 아르카디아의 심처.
광인의 거처였으며, 여정의 시작을 알렸던 이곳에서 카르디는 과거를 떠올린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됐다.
새로운 왕의 즉위식.
누구보다 찬란히 빛났던 여인이, 왕의 자리에 오르던 그날 비극은 시작됐다.
‘검은 홍수.’
해와 별을 가린 구정물.
하염없이 쏟아지는 검은 비.
범람하는 검은 홍수.
온 나라를 휘감고, 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키던 검은 홍수는 왕녀의 희생으로서 막아냈다. 막아냈으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릇을 얻은 재앙은 보다 명확한 형태로 인세에 제 존재를 드러냈다.
마왕(?王).
별에게 버림받은 이들의 왕.
모든 마수를 거느린 자.
별을 끌어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이
온 세상을 할퀴어 저주하는 왕이 탄생한 가운데, 그 악명이 나날이 높아져 가는 가운데··· 그에 대적할 용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모여든 용사들은 마왕의 탄생에 주목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단순히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야.」
「존재해선 안 될 것을, 누군가 만들어냈다.」
대현자의 추측 아래 조사는 시작됐고, 그들은 아르카디아의 심처에서 진실을 마주한다. 한 명의 광인이 만들어낸 지옥 앞에 용사들은 신음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옥의 앞에서 맹세한다.
「고통받는 이를 구원 하기 위해서.」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각자의 신념을 품은 채, 스스로에게 맹새한 각오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여정에 나섰다. 그러므로, 여정이 시작된 곳은 이곳이었고···.
“여정의 끝에 돌아올 곳도 이곳이어야 했지.”
그 끝도 이곳이어야만 했다.
이곳으로 돌아와, 마침표를 찍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찍히지 못했다.’
여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야기는 방치됐다.
“······.”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지옥의 앞에서 대현자는 침묵한다. 여정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마침표는 찍히지 못했으며, 수많은 것들이 변하고 말았다.
‘이야기는 망가졌고, 그들은 길을 잃었다.’
지금에 와선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저 지옥만이 수백 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이곳에 존재할 뿐이다.
그래.
그때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이것만은 남겨두었지.”
재앙으로 변해 돌아온 인류의 영웅.
그들은 아르카디아를 휩쓸었고, 그들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의 끝에는 이 지옥이 있다. 그들은 이 지옥을 품은 왕성만큼은 건들지 않았다.
마치, 경고하듯이.
마왕의 기원에 누구도 다가가지 말라는 듯, 이 땅을 죽음의 땅으로 바꿔가면서까지, 그들은 인류에게 경고를 남겼다.
‘하지만···.’
터벅.
‘이제, 누군가는 알아야만 하지 않겠나.’
턱.
카르디는 들려오는 걸음 소리에 고개를 든다.
그곳에는 결계를 넘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인간이 하나 있다. 그녀는 인간의 몸과, 인간의 수명으로 수백 년동안 감춰진 진실에 발을 들이민 인간이다.
라니엘 반 트리아스.
결계를 빠져나온 그녀가 걸음을 멈춘다.
그녀가 짧게 숨을 뱉으며 카르디를 바라본다.
푸른 눈동자에 맺힌 것은 확신이다.
‘무언가를 깨달았고, 이해한듯한 눈동자.’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채 카르디는 입을 열었다.
“···왔나.”
카르디는 직감한다.
또다시 그녀가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섰음을, 그리하여 자신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생겼음을.
“전부 이해한 모양이군.”
카르디는 쓰게 웃으며 묻는다.
“들을 테냐?”
그 물음에 라니엘은 고개를 끄덕인다.
카르디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서 이야기하지.”
들려 줄 이야기가 많았다.
2.
“야, 카르디.”
걸음을 옮기려는 카르디를 내가 불러세웠다.
카르디는 뒤를 돌아봤고, 나는 결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안에서 그림자를 봤어.”
들어야할 것을 듣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었다.
“저 결계의 너머에, 그 끝에 놓인 옥좌에 그림자가 앉아있더라.”
“···그림자?”
“최초의 광인, 이름 잃은 자.”
내 말에 카르디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만을 돌려 나를 바라보던 카르디가, 몸을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 했지?”
“저 안에 그림자가 있었고, 그림자가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했다고. 최초의 광인, 이름 잃은 자.”
나를 바라보는 카르디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그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불가능하다니?”
“가니칼트의 검으로 베었다. 글레리아가 불러낸 성화(?火)로 그 영혼을 불태웠을 텐데. 벨리알과 내가 그곳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곳에서 광인의 영혼은 불타 사라졌다.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리 중얼거리며 카르디가 제 입가를 매만졌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네가 적색 궁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그 그림자가 뭐라고 말했지?”
내가 결계의 안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설명은 그리 길지 않았고, 내 말을 다 들은 카르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것 같군.”
“그럼···.”
“어떠한 수단으로 살아남았는지, 그곳에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마주한 그림자는 그 미치광이가 맞을 거다.”
미치광이, 최초의 광인.
“···그늘을 만들어 낸 광인.”
“그래, 그 존재가 배후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아플리아에서 벌어졌던 사건도 얼추 앞뒤가 맞는군. 걸리는 게 조금 있었는데 말야.”
“걸리는 것?”
“스케발, 그 녀석 혼자서 생각해낼 만한 계획이 아니었으니까.”
카르디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스케발의 이야기를 할 때면 카르디는 언제나 그랬다. 왠지 모르게 한심한 녀석을 이야기하는 듯한 말투로 카르디는 스케발을 표현하곤 했다.
“너, 어째 스케발을 되게 저평가하는 것 같다? 아니, 실제로 좀 저평가 받을만하긴 한데···.”
“생각의 방향성이 다채롭지 않은 녀석이니까. 막히면 돌아갈 생각을 안 하고, 변절 같은 같잖은 수만을 떠올리니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양 그 꼴이지.”
“어···.”
“그러니 너한테 허구한 날 처맞고 다니는 것 아니겠나?”
그게 그렇게 되나?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카르디가 앞을 가리켰다.
가면서 이야기하자는 손짓이었다. 카르디가 앞장서 걸었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림자가 삼 년이라고 말했다고 했나?”
“응. 삼년.”
삼년 안에 자신을 죽여라.
혹은, 대항할 무언가를 만들어라.
그림자는 그런 식으로 내게 말했다. 어째서 내게 그것을 알려준 지는 모르겠지만··· 삼 년이란 시간은, 일찍이 나도 염두에 뒀던 기간이었다.
‘인류의 암흑기.’
불이 꺼진 시대.
모든 용사들이 교체되는, 일정한 기간을 주기로 반드시 찾아오는 시기.
“불이 꺼진 시대가 찾아오는 기간이로군.”
“···그런 셈이지.”
“그 시기가 오기 전까지, 네가 바라는 것을 이루려면··· 지금보단 많은 것을 알아야 하겠지.”
목표가 명확해진다.
해야 할 일이 구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한다. 나는 로브에 넣어둔 성배를 꾸욱,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쪽으론 내가 도움을 줄 수 있겠군.”
걷고 걸은 끝에 우리는 적색궁을 빠져나왔다.
폐허가 된 아르카디아의 중심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 그곳에 바로 선 채 카르디가 나를 돌아봤다.
“그늘의 기원과, 그늘의 이해.”
두 번째 계약에 닿는 데 필요한 조건.
“답을 한번 들어보도록 할까.”
3.
얻어낸 답을 증명해라.
증명해야 진실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고통 속에서 발생하는 원망.”
카르디의 물음에 라니엘은 입을 연다.
자신이 찾아낸 답을 말하기 위해서.
“무언가 죽어가며 내지르는 비명. 죽지도 살지도 못한채, 영원히 고통받으며 내뱉는 저주.”
비명에는 기원이 깃든다.
강렬한 갈망에는 힘이 깃든다.
“별은 기원에 답하는 존재야. 무언가를 강하게 바랄 때, 별은 그 바람에 답하지. 누군가에겐 그게 기도 일 거고, 또 누군가에겐 그게 거래이겠지.”
마법사든 성직자든 본질은 같다.
바라기에 기원하고, 바라기에 무언가를 지불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누군가의 바람은 그것만으로 재화가 될 수 있어. 하나로는 모자라겠지만, 그것이 수십, 수백만이 된다면··· 막대한 가치를 지니게 돼.”
수십, 수백만의 죽음.
라니엘은 그것을 목격했다.
죽음의 경계에서 그들은 저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기원은 원망(??)이었다.
“할퀴고, 물어뜯고, 끌어내리기 위한 원망. 그것의 방향성을 별에게 한정 지을 때 태어나는 게···.”
별을 끌어내리기 위해.
별을 망가트리기 위해.
그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왕(王).
“그늘이자, 마왕이야.”
마왕(?王).
“정답이로군.”
라니엘의 답에 카르디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그 지경에 이르면서까지 별을 원망하는지 깨달았나?”
“···어느 정도는.”
적색궁의 끝.
열쇠로 열고 들어간 그곳에서 라니엘은 보았다. 그곳에 놓인 것은 제단이었고, 제단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원한이 고여있었다.
그 원한을 품은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으면서 라니엘은 바닥에 깔린 죽음에 다시 주목했고, 그 과정에서 라니엘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의 시체.
그것과 뒤섞인, 인간을 닮았되 인간이 아닌 것들.
“별에게 버림받은 이들.”
어느 역사서에선 그들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그들은 이렇게 불린다.
“마족.”
별에게 버림받았고, 육신에 별을 품을 수 없다.
빛의 아래서 살아갈 수 없게끔 태어난 그들은 인간들에 의해 마족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들에겐 별을 원망할 이유가 충분할 테니까.”
“···그래, 그들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카르디가 한숨을 내뱉었다.
“모든 것은 균형을 이룬다. 인간과 엘프와 같은 빛 아래서 살아가는 이들과 균형을 이루는 것은, 별에게 버림받은 이들이었지.”
하지만, 하고 카르디는 말했다.
“인간에겐 신이 있지만, 그들에겐 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발생하는 불균형함.
“별 아래 살아가는 이들에겐 고룡의 마법사가, 별에게 사랑받는 이들이, 별빛을 몸에 품은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겐 없었다. 그들은 하염없이 구석으로, 다시 구석으로 밀려났지.”
계속해서 한쪽으로 기울여지는 균형.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신(?)의 존재를 갈망했다.”
“···영원히 고통받는 일이 있더라도?”
“그렇더라도, 그들은 신을 바랐지. 그 바람에 답한 것은 별이 아닌 인간의 삶을 산 광인이었고.”
별에게 버림받은 이들의 기원.
그 기원을 엮어낸 건 별 아래 살아가는 인간.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지.”
결국에는 그런 이야기였다.
“모든 게 균형을 이루고자 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찌 보면, 별이 오랜 세월 외면해 왔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야 터진 것일지도 모르지.”
라니엘은 침묵했고, 카르디는 말했다.
“이게 마왕의 기원과, 그 진실이다.”
바랐기에 태어난 존재.
그 한 줄의 문장을 라니엘은 곱씹었다. 그 한 줄의 문장에서 그녀는 잡힐 듯 말 듯한 무언가를 느낀다.
“수백 년만이로군.”
라니엘이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리는 가운데, 카르디가 엷은 미소를 흘렸다.
“두 번째 진실에 닿음에 축하한다. 얻은 깨달음을 곱씹는 것은 네 몫이겠지. 그리고, 이건···.”
카르디가 허공에 손을 그었다.
별빛이 모여들고 하나의 천칭이 떠오른다.
“너와 같은 진실에 닿았을 때,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참고해두면 좋겠군.”
천칭에는 열쇠가 놓여있다.
카르디는 열쇠를 들어 올려 라니엘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뭐긴. 보이는 그대로 열쇠다.”
“아니, 그러니까 어딜 여는 열쇠냐고.”
카르디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가 들어 올린 손끝이 가리킨 것은 남쪽이다.
‘남쪽은 마탑이 늘어선 곳이라 하지 않았나?’
라니엘이 기억하는 대로였다.
카르디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면, 무너진 탑의 잔해들이 성벽의 너머로 드문드문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쌓아올린 탑을 여는 열쇠다.”
대현자가 쌓아올린 탑.
라니엘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녀의 생각을 긍정하듯 카르디가 웃어 보였다.
“최초의 잿빛 마탑이지.”
“이걸 나한테 주는 건···?”
“그 안에 있는 게 네게 도움이 될 거다. 까다로운 조건을 돌파해 진실에 닿은 이에겐, 마땅한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 법이지.”
그 보상이 무엇인가?
라니엘이 그렇게 묻기도 전에 카르디가 답했다.
“안에 있는 건 전부 가지고 나와도···.”
카르디는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몹시도 강렬한 시선을 느낀 까닭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이라곤 한 명밖에 없었다.
“······.”
카르디가 말없이 라니엘을 흘겨봤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타들어 가듯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그 눈동자에서 카르디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마치, 보물 상자를 앞에 둔 도굴꾼과도 같은 눈동자다.
“···전부, 가지고 나와도 좋다.”
카르디가 꺼림칙함을 느끼며 말을 끝맺은 순간이다.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라니엘이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 그것만으로 완성된 주문이 그녀의 손을 타고 바닥으로 늘어졌다.
사슬(Chain).
챠륵, 소리를 내는 사슬을 바라보는 카르디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아니, 잠깐. 이제 내 발로도 걸을 수 있···.”
“뭐해? 안 잡고.”
“아니.”
“빨리 가자.”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인 모습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