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9
〈 29화 〉 옛 인연(1)
* * *
마계와 인계가 맞닿은 협곡.
키르멜트 협곡에는 피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사단과 마왕군이 맞부딪친다. 마인과 마수들의 시체가 쌓인다. 그 위로 기사들의 시체가 쌓인다.
쌓인 시체는 다시 흑마법사, 혹은 주술사들의 주문을 위한 제물로써 공양 된다. 피비린내만이 남은 협곡에서, 기사들은 어제는 동료였던 이의 유골과 검을 맞댄다.
키르멜트 협곡의 기사들은 무표정하다.
무표정 할 수밖에 없다.
최전선, 마경이라 불리는 생지옥.
그곳을 지키는 기사들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요, 전장에서 구를 만큼 구른 이들이었으니까.
동료를 베는데 거침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하루를 다시 견뎌낸다.
그러나.
“레미아.”
오늘 밤만큼은 달랐다.
“쏴라.”
화살 비가 쏟아진다.
달빛 아래 쏟아지는 화살은 정확하게 마왕군 만을 솎아낸다. 한발의 화살에 최소 둘의 마왕군이 꿰뚫린다.
통.
가볍게 활시위를 튕기는 소리.
협곡에 선 엘프의 금발이 흩날린다.
“사라.”
한차례 생긴 여유.
만신창이인 기사들은, 자신들의 사이로 걸어오는 여인을 바라본다. 새하얀 법의 차림의 여인, 그녀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린다.
그녀를 중심으로 빛이 퍼진다.
그 따스한 빛에 기사들은 여인의 이름을 떠올린다.
성녀, 사라.
이어서, 협곡에 선 엘프의 이름 역시 떠올린다.
신궁, 레미아.
그리고, 그 시선은 자연스레 앞으로 향한다. 누군가 협곡에서 뛰어내린다. 그가 기사들의 앞에 선다.
스릉.
별빛을 벼려낸 듯한 한 자루의 검.
그 상징적인 검이, 그의 정체를 대변한다.
용사, 카일.
그가 칼을 휘둘렀다.
빛의 참격이 협곡을 양단한다.
“오, 오오···.”
“오오오오오!”
용사의 등장에,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용사란 그런 것이다. 그 존재만으로 기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린다.
아군의 수는 중요치 않다.
전장에 용사가 함께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용사가 우리와 함께한다!’
기사들이 일어섰다.
‘별이 우리와 함께한다!’
창칼을 들어 올렸다.
달빛 아래, 기사들은 진군했다. 그들의 진군에는 용사가 함께한다.
하룻밤에 불과하지만.
그날 키르멜트 협곡은, 인류의 손을 들어주었다.
*
“아, 옷에서 냄새 나는 것 같아요. 으으! 이래서 언데드가 싫다니까!”
“내 말이. 달빛 화살도 제대로 수거 못 했어. 이래서 키르멜트 협곡에 오기 싫은 건데.”
용사파티를 위해 준비된 숙소.
“오늘 따라 더 오래 걸린 것 같지 않아요?”
“그렇긴 해. 카일과 함께하면… 한 시간도 안 걸려서 끝나지 않았나?”
“오늘은 거의 밤을 새웠죠?”
“···응.”
사라와 레미아는 카일의 눈치를 살폈다.
카일은 말없이 성검을 닦고 있었다.
그의 눈치를 봐 말하고 있진 않지만, 사라와 레미아는 이렇게까지 싸움이 지체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현자, 라니엘.’
얼마 전 파티를 떠난 마법사.
그들은 마왕군과 싸우는 내내 그 마법사의 빈 자리를 몇 번씩이나 느껴야만 했다.
화살이 먹지 않는 와이번이 나타날 때.
흑마법사들이 언데드를 일으킬 때.
주술사들이 공양을 하려 할 때.
그들은 라니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그가 박수를 치고,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정리될 문제였다.
‘그러니, 별 어려울 것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흑마법사들을 틀어막기 위해, 사라는 막대한 신성력을 써야만 했다. 와이번을 꿰뚫기 위해 레미아는 아끼던 달빛 화살을 꺼내야만 했다.
그리고, 주술사들.
그 빌어먹을 주술사들의 공양을 막기 위해 카일은 부상을 각오하고 마왕군 사이로 뛰어들었다.
‘더 큰 문제는···.’
그러고도, 피해를 완전히 줄이지 못했다는 것.
죽은 기사들이 나왔다.
평소와 비슷할 정도로.
전장의 피해를 얼마나 줄였는가. 그것이 곧 용사파티의 평가로 이어지기에, 사라와 레미아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또, 그 마법사네요.’
그 또한, 라니엘의 부재 탓이다.
본래 카일이 홀로서 전장을 헤집는 동안, 라니엘은 전선을 도맡았다. 기사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카일이 돌아올 때까지 전선을 붙잡아 두었다.
전장을 무대 삼아 광범위 하게 날뛰는 카일.
그를 보조할 수 있는 건 라니엘 뿐이었으니까.
기사들이 용사의 움직임을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억지로 용사를 따르려던 기사들은 오히려 짐이 되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쯧.”
레미아는 짧게 혀를 찼다.
“괜찮아. 어차피 곧 죽을 놈이었으니까.”
“그렇긴 하죠. 결국에는 이렇게 됐을걸요.”
그들도 라니엘이 유능한 마법사임은 알고 있다.
그가 빠지면 이런 일이 일어날 거란 걸 모르고 쫓아낸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됐을 거다.’
그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라니엘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싸움 도중 몇 번씩이나 피를 토할 만큼, 그 상태는 나날이 악화되어갔다.
‘곧 죽거나, 폐인이 될 놈.’
그래서 버린 거다.
“흐응.”
사라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입가를 틀어 올렸다.
“게다가, 지금쯤 개고생하고 있을걸요?”
그녀는 기억한다.
“제 힐이 없으면, 한 달마다 찾아오는 ‘주기’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한 달에 한 번.
라니엘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던 날을.
2.
“어 뭐야, 씨발.”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곤 기겁했다.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아, 오늘이던가?”
나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심장의 한편을 좀먹은 저주가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퉷.”
피를 뱉어보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어쩐지 목이 좀 칼칼하더니.’
나는 로브를 풀어헤쳤다. 그리곤 가슴팍에 스톡해 둔 주문에 손바닥을 맞댔다.
재(Ash).
잿빛 마나가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서큐버스년과 싸우면서 가닥을 잡았던 주문, 저주를 삼키는 마나다.
쿵, 쿠웅.
심장이 크게 뛴다.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쿨럭, 컥. 퉷.”
몇번 피를 게워내고 나니, 검게 물들었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물론, 저주를 완전히 없앤 건 아니다.
‘그냥, 억눌렀을 뿐이지.’
일정량 이상 내 몸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차오르는 저주를 처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안 된단 말이지···.’
잘 쳐줘 봐야 현상 유지다.
당장은 저주를 억누르는 데 문제가 없어 내버려 두고 있긴 하지만···.
‘앞으로 어찌 될진 모르는 일이지.’
저주에 대해선 밝혀진 게 하나도 없으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만나러 가는 게 맞나.”
때마침 안식일이기도 했다.
아마 내일모레까지, 아플리아에 출근할 일은 없을 거다.
‘이참에 갔다 오긴 해야겠네.’
아무래도, 미뤄놨던 일을 해야 할 날이 온 것 같았다. 나는 옷차림을 정리하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신발장에는 두 개의 신발이 놓여있다.
하나는 스승님이 사주신 단화, 다른 하나는 내가 본래 신던 군화였다.
‘또 뭘 시킬 거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군화를 신었다.
“스승님?”
“왜 그러냐, 라니엘.”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어딜 가느냐?”
“음···.”
나는 말했다.
“옛 친구 보러요.”
*
내가 친구라 부를만한 사람은 몇 없다.
애초에 인간관계가 워낙 협소했고, 친하게 지냈던 애들은 거의 다 죽은 탓에, 남은 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카일도 그중 하나긴 했는데.
이젠 또 아니게 됐고.
아무튼 간, 남은 한 명의 친구.
내가 처음으로 사귄 이종족의 친구를 만나러 나는 왕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레미아 그년이 발작했었는데.’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뭐? 은발의 엘프?
엉. 은발의 엘프.
내가 사귄 첫 이종족 친구.
그 엘프의 머리칼이 유난히도 독특해, 나는 레미아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엘프들은 거의 다 녹색 아니면 금발이었으니까.’
그래서 은발의 엘프도 있냐고 나는 물었고.
그 질문에, 레미아는 발작을 했었다.
거짓말하지 마, 건방진 인간. 네가 그분들을 어떻게 만나? 전설에서나 나오는 분들인데.
아니, 내가 만났다는데 왜 니가 지랄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란 거야. 하! 그럼 그 이름이 뭔데? 보나 마나 알리가···.
카르디.
···뭐?
카르디라고 하던데.
네가 그 분을 어떻게···.
그 반응으로 보아, 평범한 인물은 아니란 거겠지.
‘대단한 사람이긴 했어.’
전투적인 분야가 아니라, 그 지식적인 분야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연금술사니까.’
나는 지금 그 엘프의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왕도의 깊은 곳, 으슥한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낡고 허름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음.”
그 앞에 멈춰서, 나는 문을 몇 번 노크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약초 냄새가 확 풍긴다.
“이 낡고 허름한 가게에 무슨 일이지?”
새하얗게 센 백발의 노인이 날 바라본다.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피부는 쭈글거리지만 그것은 꾸며진 늙음이다. 나는 노인의 눈을 마주 바라봤다.
짐승의 것을 닮은, 누런빛의 눈동자.
그 눈동자만큼은 총기를 잃지 않았다.
“흐응.”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봤으면서, 장난치긴.”
“·····.”
“딱 보면 알 거 아냐, 카르디.”
“흠.”
노인이 미소 지었다.
“모른 척 해주는 이 배려를 몰라보는군.”
노인의 마른 손가락이 툭, 테이블을 두들긴다.
이윽고 노인의 모습이 변했다. 새하얗게 센 머리칼은 윤기가 흐르는 은발로, 쭈글쭈글했던 피부가 매끈하게 변한다.
그 변화는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노인에서 청년으로 변한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귀한 손님이 오셨군.”
“귀한 건 모르겠고, 그리운 손님이긴 하지?”
“그것도 맞겠군, 라니엘.”
나는 쓰게 웃었다.
하긴,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영혼도 꿰뚫어 보는 인물인데.’
이 엘프는 첫 만남부터, 아직 개화하지도 않은 카일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 미래를 점쳤었으니까.
“오랜만이야, 카르디.”
“인간의 기준에선 오랜만이긴 하겠군.”
나는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소문은 들었다. 하루도 끊이질 않고 네 이야기가 들려오는 걸 보면, 꽤나 화려한 5년을 보낸 것 같더군.”
“바쁘게 살긴 했지.”
“그 검은 재앙의 목을 땄다는걸 보면, 무던히도 마법을 휘둘러댄 듯 싶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나는 가게를 쓱 둘러봤다.
“너도 여전하네.”
5년간 변한 게 없었다.
가게는 여전히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다. 이곳이 왕국의 슬럼가 깊은 곳에 위치한 탓이다.
“넌 이런 칙칙한 곳이 좋냐? 정신병 걸릴 것 같은데. 보는 내가 다 우울하다, 야.”
“잿더미가 된 옛 고향이 떠올라서 딱 좋더군.”
“하여간, 독특하다니까.”
잠깐 대화가 끊겼다.
카르디가 침묵한 탓이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한번 닦았다.
“그래서, 라니엘.”
닦은 안경을 다시 쓴 카르디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잡담이야, 일이 끝난 후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니 본론부터 들어가도록 하지.”
그가 내 심장을 가리켰다.
입을 열었다.
“그 심장.”
그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는, 카르디의 온화한 목소리와는 달랐다.
“그 저주, 그 모습, 그 영혼의 변질.”
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 뭐가 되려는 거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