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8
〈 28화 〉 첫 수업(4)
* * *
강연이 끝났다.
한 시간의 강연이었다. 한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레스티는 그 한 시간이 한순간처럼 느껴졌다.
눈을 감았고, 눈을 떴다.
수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생각이 제대로 정리가 되질 않았다. 무언갈 보았다. 무언갈 느꼈다. 그런 애매한 감상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보았다.
가장 완벽한 마법을.
보았으므로 깨달았다.
어떤 식으로 자신의 마법을 갈고 닦아야 할지.
‘신기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요 몇 년간 그녀가 잊고 살았던 두근거림이었다.
‘재밌어.’
마법이 재밌다.
무언갈 배운다는 게 즐거웠다. 이렇게 느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차기 마탑주의 자리에 오른 뒤로 마법은 레스티에게 있어 의무와도 같은 것이었다. 재밌다기보단, 해야 하는 것.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레스티에게 있어서, 마법이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마법이 재밌었다.
당장 조금이라도 더 회로를 그려보고 싶었다. 수업에서 들은 걸 잊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기분 좋은 고양감이 들었다.
‘조금 더, 듣고 싶어.’
뭐라도 좋으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
레스티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대강당을 뜨는 이들로 통로는 붐볐다. 기사들이 안내하고 있지만, 제대로 통제되진 않는다.
하지만, 레스티는 아플리아의 학생이다.
외부인들의 행렬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외부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길을 따라 걸었다. 발걸음에 괜스레 속도가 붙었다.
“괜찮았나요? 스승님?”
“썩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뭘 가르쳐 준 것 같진 않은데. 그냥 주문만 주구장창 읊었지 않나요?”
“그걸 보고 배움을 얻지 못한다면, 마법사란 이름이 아까운 족속들이겠지. 그거면 충분했다.”
두 명의 인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셀 원로와, 방금 전 단상에 서 있던 여인.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 이름을 곱씹으며, 레스티는 그녀의 앞에 섰다.
“응?”
이윽고, 그녀가 자신을 바라본다.
눈을 마주친다.
꿀꺽.
레스티는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니아 교수님···.”
“라니아 교수님!”
그러나, 그 말은 끝맺지 못한다.
라니아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비단 레스티 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학생이, 교수가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아.”
멈춰있는 레스티를 지나쳐서, 그들은 라니아에게로 다가간다. 그 행렬에 끼지 못한 레스티는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마법을···.”
“원소 마법학 교수, 엘네스요. 진심으로 감탄했소. 어찌하면 그런···.”
칭찬이 이어진다.
아직 식지 않은 열기를 풀어내듯, 그들은 라니아를 둘러싼 채 그녀의 이름을 연달아 외쳤다.
저 인파를 뚫고 접근해 볼까.
레스티는 그렇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이거야 원.”
익숙한 문양의 로브가 보인 순간, 레스티는 무의식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물러선 건 레스티 뿐만이 아니었다.
“저분들은···.”
“저 로브, 잿빛 마탑···.”
모여든 학생과 교수들도 웅성거리며 자리를 비킨다. 그렇게 갈라진 인파 사이로, 그들이 로셀의 곁으로 향했다.
“역시, 로셀 자네의 제자답군. 실로 기본에 충실한 강의였어.”
“뭐야. 자네도 왔는가?”
재의 문양을 새긴 로브.
그 로브에 새겨진 문양은 화려하다.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닌, 잿빛의 꼭대기에 위치한 이들에게만 허락된 문양이다.
“자네의 제자의 첫 수업 아닌가? 자네의 친우로서, 같은 원로로서 이건 기본적인 예의지.”
“말은 잘하는군. 라니엘이 떠난 뒤로 연락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노친네 주제에.”
“아하하!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군.”
잿빛 마탑의 원로.
“마탑의 마법사들도 강의를 듣고 자네의 양녀를 만나겠다고 난리를 쳤지만··· 당장은 물러 둔 상태라네. 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어 보였으니까.”
“우리들 조차 당장 회로를 그리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리는데, 그 젊은이들은 또 어떻겠는가?”
그것도 한둘이 아니다.
잿빛의 여섯 원로 중 셋이 이 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존재에 레스티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라니아 양이라고 했던가.”
“예, 라니아 반 트리아스입니다.”
원로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기본부터 되새긴다니, 확실히 새로운 접근이었어. 젊었을 적, 이제 막 마도에 올랐을 때를 떠올리게 하더군.”
그녀의 수업을 칭찬한다.
“극점의 연속적인 형성, 기본에 충실한 정말로 아름다운 마법이었어.”
그녀의 경지를 칭찬한다.
그 칭찬이 이어질수록, 레스티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원로들이 거북했다. 특히나,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저 원로는 더욱더.
전 차기 마탑주의 반의반 만큼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군. 너무나도 실망스러워.
이런 반푼이가 차기 마탑주라고? 장로도 늙었나 보군. 쯧, 이래서야······.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들의 모습을, 그 싸늘한 시선을 레스티는 기억한다.
툭.
뒷걸음질 치던 레스티는 누군가와 부딪쳤다. 노트를 떨어트렸다. 필통을 떨어트렸다. 지퍼가 열린 필통에서 쏟아진 펜들이 바닥에 튕기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
레스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원로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쯧.
짧게 혀를 차는듯한 소리.
원로들의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마치 오물을 본듯한 시선으로 레스티를 한번 훑어보고는, 그들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잠깐의 시선.
들릴 듯 말 듯 한 혀를 차는 소리.
이곳이.
이곳이, 마탑이었다면 레스티도 그 반응에 무덤덤했을 것이다. 마탑의 안에선 질리도록 받아온 시선이었으니까.
그러나, 이곳은 마탑이 아니었다.
“···뭐야?”
“방금 잿빛 원로가···.”
원로들의 노골적인 혐오를 목격한 이들이 있다. 학생들 사이에 불온한 공기가 감돈다. 교수들이 자신을 곁눈질한다.
그 시선에.
레스티는 고개를 떨구었다.
흥분이 가라앉았다.
두근거리던 심장은 차게 식는다.
레스티는 노트를 줍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2.
강연이 끝나고 수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학생과 교수는 물론이고, 잿빛 마탑의 원로들 까지.
‘좀 의외긴 하네.’
그 엉덩이 무거운 원로들이 아플리아까지 찾아올 거라곤 생각을 못 했으니까.
‘오랜만이긴 해.’
거의 한 5~6년 만에 보는 거던가?
그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현역 때는 거지 같았던 늙은이들도 조금 반가워질 줄 알았다.
근데, 아니더라고.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 노인네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몰려드는건 반가움이 아닌 좆같음이었다.
‘저 늙은이는 아직도 저 지랄이네’
무례하다고 말 할 수도 있지만, 저 늙은이가 내가 차기 마탑주때 했던 지랄을 감안하면··· 무례는 커녕 이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지도 모를···.
최소한의 품위는···.
사사건건 내 출신으로 물고 늘어지다가, 내가 실적으로 찍어 누르니 입을 다물었던 노친네들.
‘1년만 더 있었어도 싹 물갈이 해버리는 건데.’
그 점이 좀 아쉽긴 했다.
“후우···.”
나는 짧게 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줄 서 있었다. 그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정작 내가 만나고 싶었던 인물은 보이질 않았다.
잿빛의 주인, 현 마탑주.
잿빛의 장로(??).
스승님 다음으로 내가 존경하는 분.
‘하긴, 워낙에 바쁘신 분이니까.’
급기야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스승님.”
“왜 그러냐, 라니아.”
“다 쳐내면 안 될까요. 슬슬 귀찮은데.”
“···하루 정도는 네가 참거라. 네가 인정을 받기 위한 무대였으니까.”
스승님께 속삭여 보았으나, 이번만큼은 안되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쫌!”
그때였다.
“쫌 비켜봐요!”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당신이 뭔데 비키라 말라···.”
“나 몰라요? 당신이 나보다 마법사 오래 했어? 나보다 잘났어??”
“아니, 순서를···.”
“아, 비키라니까!”
인파를 헤치고 누군가 내게 다가오려 한다.
근처를 지키고 있던 기사가, 보다 못해 소란의 중심지로 가봤지만···.
이내 난처한 얼굴로 돌아올 뿐이었다.
“무슨 소란인가.”
“그게, 백색 마탑주께서···.”
스승님이 물었고, 기사가 답했다.
결국 난동을 부리던 여인 한 명이 순서를 무시하고 내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 백색! 품위가···!”
“당신은 닥치고 있어요, 흑색! 우리가 어디 기다릴 짬이에요? 한시가 급해 죽겠는데!”
안절부절못하는 흑색 마탑주를 대동한 여인이 내 앞에 섰다. 그 얼굴이 낯이 익었다.
‘아, 그 사라 닮은년.’
그리고, 내 단화에 구두 자국을 낸 여자.
그것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목소리에 날이 섰다.
“···뭡니까?”
“그···.”
잠시 내 눈치를 보던 백색이 입을 열었다.
“저···번엔, 미안했어요?”
“예?”
“그, 미안했다구요. 당신을 무시한 거. 이렇게까지 수준 높은 마법사일 줄 몰랐단 소리예요.”
뭐 어쩌란 거지.
“그, 당신?”
“예.”
“당신이 원하면, 백색 마탑에, 제 전용 비서 자리를 내주지 못할 것도 없···.”
“크흡.”
어디선가 들려온 웃음소리.
나는 고개를 쓱, 옆으로 돌렸다.
“큽, 크흡···.”
스승님이 입가를 가린 채, 웃음을 참고 계셨다.
“···뭔가요, 로셀?”
“비서, 비서라 했는가 백색?”
“그런데 왜요? 내가 뭐 못 할 말이라도 했나요?”
“마나로 육체를 재구성하면서도, 그 노안만큼은 못 고쳤나 보군.”
그 말에 백색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렇게 1초, 2초···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듯, 백색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뭐, 뭣! 로셀, 당신 말 다 했어?!”
“가자, 백색. 추태 부리지 말고···.”
“아, 이거 놓으라고!”
“미안하네, 내가 미안하네······.”
결국 흑색이 백색의 목덜미를 붙잡고 질질 끌고가며, 상황은 일단락 됐다.
“···뭐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나는 외부의 마법사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교수들이나 학생들의 간단한 질문을 받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사람들은 좀 남아있었으나, 한 번씩은 다 인사를 나눈 사람들이다.
“학생들은 교실로, 외부인들은 기사의 안내를 받아 돌아가도록 하시오.”
스승님이 그리 말씀하시자, 그제서야 인파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남은 교수들은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스승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니아.”
그 인파를 가리키며, 스승님이 물으셨다.
“너도 갈 테냐?”
“예?”
“내일은 공강이기도 하니, 오늘 가볍게 식사를 하자더구나. 네가 가겠다면 나도 가도록 하마.”
“전 안 갈래요.”
“그럴 것 같았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스승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로브를 툭툭 털고,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걸이가 자꾸만 급해졌다.
“어디 들려야 할 곳이라도 있더냐?”
“음.”
스승님의 물음에 나는 답했다.
“카페 폐점 시간이 얼마 안 남았거든요.”
“···뭣?”
“요 며칠, 강연 준비하느라 못 들렸단 말이에요.”
내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다.
요 일주일간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으니, 오늘은 꼭 들려야만 했다.
“···집에도 커피는 많지 않더냐? 그, 왜. 네가 얼마 전에 사 왔던 고급···.”
“제가 타니까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그곳 커피가 그리 맛있더냐?”
“네.”
내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스승님께서 굉장히 묘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셨다.
“···그래, 어서 가 보거라.”
3.
멍하니 서 있던 레스티는,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바닥에 떨어진 펜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잘 집히지 않았다.
데구르르.
손끝에서 미끄러진 펜이 바닥을 굴렀다. 조금 더 먼 곳으로 굴러간다.
“···후우.”
레스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뭐 하는 짓이람.
이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건만. 정작 몸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자꾸 왜 그럴까.”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그런 시선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이전 차기 마탑주에 비하면, 자신의 실력은 보잘것없을 테니까.
라니엘 반 트리아스.
그녀 이전의, 차기 마탑주.
그 전설적인 마법사는 사실상 마탑주나 다름없었다. 그가 차기 마탑주로 머물렀던 2년간, 잿빛 마탑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백 년이 넘는 잿빛의 역사 속, 가장 찬란했던 2년.
그 순간을 기억하는 이들이, 지금의 잿빛 마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레스티를 혐오한다.
시기와 질투가 아니다.
혐오다.
그들에게 있어, 차기 마탑주란 라니엘이다. 언젠가 돌아올 그분을 위해 남겨둬야 하는 자리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레스티는 그 자리를 꿰찬 찬탈자에 불과했다.
‘나한테 왜 그러는데, 도대체?’
레스티는 그들의 시선이 싫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장로가 그리 바랬다.
네게는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싫다. 정말.’
데구르르.
레스티는 멍하니 바닥을 구르는 펜을 보았다. 하염없이 구르던 펜의 끝이 툭, 하고 누군가의 발끝에 맞닿았다.
“·····.”
레스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잿빛 머리칼.
푸른 눈동자.
‘라니아 반 트리아스.’
레스티는 무심코 탄식을 내뱉었다.
“아.”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레스티는 숨을 헛삼켰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많았다.
그러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
가늘게 뜬 눈.
그 날카로운 시선이, 레스티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로셀 원로의 시선과 같다.
다른 원로들의 시선과 같다.
자신의 밑바닥을 꿰뚫어 보는듯한 그 시선에, 레스티는 숨을 죽였다. 고개를 숙여 그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그녀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단화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윽고 사락, 하고 로브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거.”
말소리가 들렸다.
레스티는 고개를 들었다.
“네가 그린 거야?”
그녀가 무릎을 굽힌 채, 자신과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한 권의 노트가 들려있었다.
“···네.”
레스티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흥미롭다는 듯한 눈치.
“잘 그렸네.”
“…네?”
“잘 그렸다고.”
촤라락, 그녀가 노트를 빠르게 넘겼다.
“하나도 안 빼먹고 다 그렸네?”
만족스러운듯한 목소리였다.
“다들 넋 놓고 있던데, 네가 제일 열심히 들었네.”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펜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곤 빈 페이지에 무언갈 그리기 시작했다.
사락.
새하얀 종이 위를 펜이 춤추듯 움직인다. 곡선에서 직선으로, 직선에서 다시 곡선으로 이어진다.
얼핏 보기에 그 과정은 난잡하다.
그러나, 난잡함 속에 완성되는 문양은 정교하다.
‘···회로?’
완성된 문양은 회로였다.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다중의 회로. 이윽고 펜을 멈춘 그녀가 레스티에게 노트를 넘겼다.
“이걸 다 따라 그린 것 보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곤 묻는다.
“풀 수 있지?”
레스티는 그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 눈동자는 여전히 싸늘한 푸른빛이다. 그러나, 레스티는 그 안에 담긴 기대를 보았다.
“다음 수업에 보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리를 떴다.
“······.”
레스티는 노트에 그려진 회로를 보았다.
복잡하다. 하나가 아닌, 여럿의 회로가 섞인 모양새다. 그러나, 마냥 꼬아뒀을 뿐인 회로는 아니다.
난제의 회로들과는 다르다.
얽히고 섥힌 실타래처럼 푸는 데 시간을 요구로 하는 회로가 아니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매듭지어진 회로.
그 방법만 안다면 당장이라도 풀 수 있는 회로.
‘풀 수 있지?’
그 말 한마디가 레스티의 귓가에 맴돌았다.
어렵다.
어렵지만, 도전할만하다.
레스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을 뻗어 주운 펜은, 더이상 바닥을 구르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