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96
〈 296화 〉 예언은 죽음을 가리킨다(8)
* * *
“그래서, 별다른 조언은 없냐?”
걸쭉한 녹차를 휘휘 젓던 카르디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녹차의 향기조차 맡기 싫다는 듯 코를 움켜쥐고 있는 라니엘이 있다.
“조언?”
“응, 조언.”
라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칼 공략법이라던가, 약점이라던가, 뭐 그런 거 있잖아.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니야?”
“있겠나?”
카르디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괴물 같은 놈한테 약점 같은 게 있을 리가.”
“그래도 찾아보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글쎄. 적어도 수백 년 동안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더군.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지.”
“쩝···.”
괜스레 라니엘이 입맛을 다시는 와중, 카르디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지금은 나은 편일 거다.”
“뭐?”
“그놈, 몸 절반을 마수로 대체하지 않았나. 아마도 마수의 왕의 시신을 수습해서 글레리아가 이어붙인 모양이던데···.”
“마수의 왕?”
“우리가 활동할 시절 재앙이라 불렸던 마수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마수.
인간을 삼키고, 인간의 뼈를 모아 제 몸을 치장하던 존재. 그것은 마수였으나 스스로가 지성을 갖춘 인간이 되기를 바랐다.
“그늘에서 태어났음에도 인간의 언어로 대화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또 질투하는 마수였다. 제 가죽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인간의 살을 끼워 넣은 마수.”
“···인간을 사랑해?”
“뭐라 설명하긴 어려운 녀석이었다. 마지막엔 검을 쥐고 가니칼트와 합을 주고받기까지 하더군. 가니칼트 녀석의 말에 의하면 초인과도 같았다던데.”
마수가 초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라니엘이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카르디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이 좀 샜는데, 어찌 됐든 그 마수의 왕의 살점으로 절반을 채운 게 지금의 가니칼트란 소리다.”
“···그럼 용사일 시절보다 더 쌔진거 아냐?”
“그건 아닌 것 같더군.”
카르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했지 않나. 그놈 원래는 오른손잡이였다고.”
“아.”
“마지막 일격을 휘두른 건 왼손이었지만, 그놈이 창안한 검법은 대체로 오른손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그러니 지금은 전성기에 비하면 약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약···해? 그게···?”
칼 한번 휘둘러서 협곡을 날리는 게?
그리 중얼거리는 라니엘을 보며, 카르디는 마왕과 싸울 당시의 가니칼트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건 지금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카르디는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란 이야기다. 위력적인 측면에서야, 지금이 더 강할지도 모르지.”
“에휴···.”
라니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략법을 조언해달라니까, 옛 동료 자랑을 하고 있네. 야, 내가 지금 그 괴물을 막으러 가야 한다니까? 응원은 못 해줄 망정 겁을 주고 있어.”
“미안하게 됐군.”
조언, 조언이라.
그리 중얼거리던 카르디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무언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라니엘이 눈을 빛내며 카르디를 흘겨봤다.
“뭐 생각난 거라도 있어?”
“조언이라 하긴 어렵지만, 있긴 하군.”
“뭔데?”
카르디가 턱을 괸 채 말했다.
“과거, 가니칼트에게 제자 하나가 있었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그레이스라고.”
북부의 주인, 그레이스.
가니칼트에게 제 재능을 인정받은 소년.
또한, 가니칼트의 검을 양도받았던 검사.
“그 녀석이 성지에검을 반환하며 글귀를 남겼더군. 나도 나중에 확인한 거긴 하지만···.”
수백년 전에 스쳐지듯 보았던 글귀다.
그러나, 엘프는 보고 들은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카르디가 기억을 더듬어 글귀를 발음했다.
『죽음은 결코 긍지를 잊지 않는다.』
『죽음 앞에 긍지를 보여라.』
『죽음은 가장 고결한 검사이니.』
그레이스가 죽기 직전 남긴 글귀.
그것을 중얼거리며 카르디가 덧붙였다.
“그렇다더군. 내가 검사의 마음가짐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어 이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가 휘휘 젓던 녹차를 내려두었다.
“가니칼트는 언제나 무언갈 바랐다. 용사일 시절부터 그는 무언갈 간절히 바라왔고, 끝내 그것을 찾지도, 누군가에게 들려주지도 못한 채 영락했지.”
“그게 뭔데?”
“나도 모른다. 모르지만···.”
카르디가 소용돌이치는 찻잔을 보았다.
걸쭉한 가루가 침전하는 것을 보며 카르디가 중얼거렸다.
“자신이 바라는 걸 갖춘 이에게, 가니칼트는 경의를 표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녀석은 마수의 왕의 앞에서도 검을 세운 채 그리했었지.”
『묻겠다. 너는 검사인가?』
『인간, 나는 검을 쥐었다. 발톱을 뽑고, 마수의 팔을 뜯은 채 네 앞에 서 있다. 오직 너만이 나의 적수다. 그렇다면, 나는 검사인가?』
『그렇다면, 검사로군.』
짧은 문답.
그 문답을 나누었을 때 가니칼트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감정을 제 얼굴 위로 드러냈다. 제 동료에게 결코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를 하면서까지.
“···뭐, 그렇다는 거다.”
과거를 추억하던 카르디가 짧게 숨을 뱉었다.
“마셔라.”
“이걸? 내가?”
“너 말고 또 누가 있지?”
묽게 탄 녹차를 라니엘의 앞에 내려두며 카르디는 손짓했다. 라니엘은 질색하며 제 몸을 뒤로 뺐다.
“마셔라.”
“싫어. 내가 이걸 왜 마셔.”
“묽게 탔다. 마셔라.”
“아니, 싫다니까?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려.”
“몸에 좋은 거다. 마셔라..”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라니엘은 결국 녹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몸에 좋은 것과 별개로, 그 맛은 과연 끔찍했다. 한동안 녹색을 띈 것을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2.
“···아니, 진짜 건강 음료였네?”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니엘이 눈을 깜빡였다. 며칠간 밤샘을 하느라 피곤했었는데, 정체불명의 녹색 음료를 마시고 나니 피곤함이 싹 가셨다.
‘···카르디한테 부탁해서 좀 싸올까?’
그 맛이 워낙에 끔찍하여 다시 입에 댈 생각은 없지만, 야근으로 고생하는 부하에게 선물로 주기는 적당하리라. 라니엘이 슬쩍 시선을 옮겨 제 앞에 앉은 부하를 바라봤다.
“야, 칼트.”
“예, 선배님.”
“너 요즘 막 피곤하고 그러지 않냐?”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칼트가 미소 지었다.
“세 시간 이상 자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납니다. 이러다가 과로사로 죽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에는 북부로 출장까지 갔다 오니, 진짜로 죽을 맛입니다. 진짜로요.”
“그렇지?”
라니엘이 턱을 괸 채 말했다.
“그러니, 넌 이번 토벌전 때 쉬어라.”
“그렇죠, 쉬긴 쉬어야··· 예?”
칼트가 눈을 깜빡였다.
라니엘은 서류를 쓱쓱 넘기며 칼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을 던질 뿐이다.
“쉬라고. 휴가 좀 써서 며칠 푹 자.”
라니엘이 피식, 웃었다.
“일 년에 재앙 세 번 막아내서 가더(Guarder)가 됐는데, 네 번 막아내면 또 뭐가 되려고?”
고개를 든 그녀가 펜으로 칼트를 가리켰다.
“쉬어 임마. 괜히 올 생각 하지 말고.”
“···전력을 소집 중인 거 아니었습니까?”
“소집이야 대피하는 북부 주민들 지키는데 쓰일 거고, 죽음의 칼을 상대하는 건 소수 정예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죽음의 칼 앞에 숫자는 무의미하다. 수많은 기사들을 준비해보아야, 칼질 한 번에 싹 쓸려나갈 뿐일 테니까.
“나, 카일, 사라, 그리고 귀쟁이. 이 넷이서 간다. 더 필요 없어. 방해만 될 뿐이야.”
“···하지만.”
“까놓고 말할까?”
라니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면 넌 죽어.”
“······.”
“넌 쿤텔 아저씨 상대하려고 초인 된 거잖나. 목적에 충실해라. 괜히 엄한데에 목숨 버리려 하지 말고.”
칼트가 말없이 라니엘을 바라봤다.
바라보다가, 그가 툭 하고 내뱉었다.
“선배님, 혹시 죽으러 가십니까?”
“뭐 임마?”
라니엘이 눈을 부릅떴다.
“이 새끼가 지금 부정 타게 뭐라는 거야?”
“아악!”
빡! 라니엘이 칼트의 관절을 깠다.
칼트가 비명을 지르며 제 무릎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어찌나 새게 깠는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니, 분위기가 그렇잖습니까! 사람이 안 하던 일을 하면 죽는다고 하기도 하고···!”
라니엘이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하면 한 대 더 얻어맞을 것이 분명했기에, 칼트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에휴···.”
라니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죽어. 안 죽으니까, 너 할 거나 잘하고 있어. 죽고 싶어도 이대로는 못 죽는다.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떠올리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지만.
“카일 그놈이 있으면, 대체로 어떻게든 된다. 쓸 수 있는 수가 몇 배는 많아지는 거니까.”
“···카일 님에 대한 평가가 꽤 좋군요?”
“뭐래? 난 원래 그놈 고평가했어.”
라니엘이 짓궂게 웃었다.
“고평가했으니, 내가 그 지랄을 몇 년간 한 거지.”
최강의 용사, 카일 토벤.
파티에서 나온 지 1년하고도 몇 개월의 시간이 더 흐른 지금, 라니엘은 다시금 카일과 같은 전장에 서게 된다. 그 사실에 라니엘은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물음.
그 질문에 라니엘은 쓰게 웃으며 답한다.
“글쎄.”
그녀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번엔 제대로 대화를 나눠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몇년동안 그놈이랑은 대화란 걸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서로가 언성을 높여가며 제 말만을 해대는 것을 대화라 부를 수는 없으리라.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뭔가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니엘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3.
“안 통할걸요.”
“뭐?”
“당신이 뭘 기대하는진 모르겠는데, 카일 그 사람하곤 이야기 안 통할 거라고요.”
북부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사라가 말했다.
“마왕과 조우한 이후로, 그리고 당신이 아예 파티에서 떠나버린 이후로 카일은 좀 이상해요. 도저히 그 속내를 모르겠단 말이에요.”
카일은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변해버리고 말았다.
“무표정해요. 인형 같아요. 가끔 보고 있으면 소름 끼치기도 한다구요. 옛날처럼 웃는 일이 거의 없어요. 꼭 감정이 죽어버린 것처럼.”
“···그런 것 치곤 내 앞에선 되게 감정적이던데? 나랑 언성 높이면서 싸우는 거 많이 봤잖아.”
“당신하고 관련된 일에서만 그렇죠.”
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이 감정을 드러내는 건, 당신하고 관련된 일밖에 없어요. 아, 맞아. 생각난 건데 저번에 줬던 그 팬던트는 대체 뭐에요?”
“알아서 뭐하게?”
“에휴, 됐어요. 알려주지 말아요 그냥.”
“잿더미가 된 고향에서 주운 거야. 일종의 유품 같은 거고.”
순순히 답해줄지는 몰랐는지, 사라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라니엘을 흘겨봤다. 라니엘은 뭐, 하고 쏘아붙이며 말을 이었다.
“왜 나한테 줬는진 모르겠던데. 뭐 마법적 처리가 된 것 같지도 않고.”
“···그래요?”
“그래서, 너는 말도 안 통하는 놈하고 몇 년이고 붙어 다니고 있는 거냐?”
“그렇죠?”
“안 피곤하냐? 너 피곤한 거 싫어하잖아. 난 네가 제일 먼저 놓아버릴 거라 생각했는데.”
흥, 하고 사라가 코웃음을 쳤다.
“저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레미아와는 달리 순애보거든요? 절대 안 갈아타요. 같이 늙어 죽을 거라고요.”
“은근히 귀쟁이 돌려 까는 거 같다?”
“당신 인성이 베베 꼬여서 그렇게 들리는 거에요. 전 레미아와 사이 좋다고요.”
사라가 팔짱을 낀 채 미소 지었다.
“그러는 당신은, 사귀는 사람 없어요? 여전히 동정 마법사죠? 이제는 처녀 마법산가?”
“뒤지고 싶니?”
“없는 것 같네요. 인생을 손해 보고 사네.”
“난 자발적 독신이야. 애인 사귈 시간에 회로 하나를 더 그리고, 연구 하나를 더 진행한다고. 연애는 인생의 낭비야. 네가 손해 보고 사는 거겠지.”
언젠가 나눴던 대화들이다.
라니엘은 말이 되는 것 같기도, 개소리인 것 같기도 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사라는 비웃음으로 맞받아친다. 그러다가 문득 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사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지랄 맞네요, 정말.”
턱을 괸 채 그녀가 창밖을 바라본다.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라니엘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사라가 입을 열었다.
“라니엘.”
“뭐.”
“카일한테 집착해요?”
“하겠냐?”
“심신이 피폐해진다거나, 그러진 않아요?”
“미쳤다고 내가.”
“후회는?”
“······.”
잠깐의 뜸을 들인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후회는 하지. 조금.”
조금.
그렇게 말하는 게 제 딴에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것 같아, 사라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난 후회 많이 했어요.”
“네가? 지랄하네.”
“누가 당신 때문에 후회했대요?”
사라가 고개를 돌렸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가 말했다.
“내가, 당신처럼 돼야 했었다고. 카일에게 당신 같은 존재가 하나 더 필요했다고. 그런 후회를 한다고요.”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아무리 노력해봐야 자신은 그리될 수 없음을 사라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없어.”
동정 마법사 같으니라고.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 그런 외모를 가지고도 남자 하나 안 꼬이는 거지. 그리 중얼거리며 사라가 코웃음을 쳤다.
“이 시팔련이 진짜.”
라니엘은 손을 뻗어 사라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마차 안에 꺄아악, 하는 사라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