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95
〈 295화 〉 예언은 죽음을 가리킨다(7)
* * *
사라는 눈앞의 마법사를 본다.
잿빛 머리칼을 가진 마법사.
현자, 라니엘 반 트리아스.
외견은 많이 변했지만, 그 속에 들어찬 라니엘이란 인간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사라는 확신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저 마법사는 정말로 변치 않으니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해도 라니엘 만큼은 변치 않으니까. 언제나 올곧게 있으니까. 그 올곧음을 견딜 수 없어 내쳤던 게 아니던가.
‘그러니···.’
당연히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미쳤냐고 쏘아붙이며, 당장 꺼지라고 윽박지르리라 예상했다. 라니엘이라면 그럴 거라 생각했고, 그것이 당연하면서도 옳은 반응임을 사라는 알고 있다.
성녀는 신의 대리인이다.
용사는 신께서 보내주신 사도다.
교단의 교리에도 자신들은 신을 대리하여 인세에 구원을 가져다줘야 한다는 항목이 있다. 그것이 용사와 성녀의 의무이며, 책무이다. 책임에서 눈을 돌리고 살아간다 한들 그 책임마저 소멸되진 않는 법이다.
정론으로 살아가는 라니엘이다.
옛 동료는 분명 이번에도 그리하리라 생각했다.
“강요 안 해. 도망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그렇기에.
“죽기 싫다고 도망친 놈한테 강요해서 뭐해. 그러기도 지쳐. 몇 년 동안 소리 질렀는데 안 듣는 놈한테 내가 뭘 더 바라게?”
지금 이 순간, 사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눈앞의 소녀는 라니엘이 확실하다.
그러나 라니엘이라면 하지 않을 말을 한다.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한 인물에게서 사라는 낯선 일면을 발견한다. 그것에 놀라움을 느낄 틈도 없다.
“왜. 이상하냐?”
라니엘이 턱을 괬다.
“너한테 꺼지라 하고, 카일 멱살 잡아다가 앞에 세워놓고 검을 쥐라고 강요할 거 같았냐?”
사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라니엘은 그렇게 했었으니까.
「검을 들어.」
「들라고, 새끼야.」
「들라고. 네가 여기서 포기한다고 말하면, 나는 도대체 뭐가 되는 거냐? 너 하나 살리겠다고 내가 뭘 갈아 마신 지 아는 새끼가···.」
마왕과 조우한 이후, 라니엘과 카일은 무던히도 싸워댔다. 그 수많은 싸움에 사라는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네, 당신이라면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라는 각오를 다졌던 것이다.
한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안된다면, 몇날 며칠이고 따라다닐 각오를 하고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이토록 쉽게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사라가 당황하는 가운데, 라니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까지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예?”
“그냥, 그렇다고.”
라니엘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그녀 또한 지난 수년간 품고 있던 회의감에 어느 정도 답을 찾은 상태다. 결정적인 답을 준 것은 갈라할의 죽음이었고.
목숨을 걸고 재앙에게 맞서 싸우는 것.
그리하여 맞이한 최후는 아름답지만, 라니엘의 눈에는 마냥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다. 자신이 부르짖던 이상대로 살다가, 이상을 이루고 죽어버린 갈라할의 최후가 라니엘에게 회의감을 품게 했다.
그 최후는 과연 아름답고 숭고하다.
자신은 그리돼도 상관없다.
진심으로 라니엘은 그리 생각했다.
‘···그런 죽음이라면, 무언가를 이루고 또 남길 수 있는 최후라면 납득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삶을 타인에게 강요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것이 거칠고 거친 길을 걸어야 하는 고행임은 갈라할이 몸소 증명하지 않았는가.
“강요하지 말라잖아.”
라니엘이 중얼거렸다.
“그게 어찌 보면 유언인 셈인데, 고인의 유언은 들어줘야 할 거 아니야.”
내키지 않더라도 한 번 그리해볼 셈이다.
이미 한 번은 실패한 와중이다. 실패했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도 해야겠지. 사실, 라니엘 자신조차 이제 카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일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코.
그 개자식이 자신에게 한 짓거리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누가 누구 때문에 이런 길을 걷고 있는데, 자기만 이 길에서 발을 쏙 빼려 하다니? 용납할 수 없다. 없어서, 라니엘은 카일에게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기를 수년이다.
이제는 화를 내는 것조차 지겹다.
이런 짓거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마저 든다. 카일의 대체재를 찾아서 그런걸 수도, 어쩌면 자신 또한 마냥 옳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냥, 이제는 지쳤다.
지쳐서 카일의 곁을 떠났던 거니까.
“그냥 신경 쓰고 싶지가 않다.”
라니엘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어찌 보면 라니엘의 진심이다. 오랫동안 쓰고 있어서, 이제는 제 피부와 다름없어진 가면의 틈새에서 라니엘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몇 년동안 쪼아댔는데 말을 안 들어 처먹는 놈한테 강요해서 뭐하게. 그냥 알아서 해. 내가 그때 한 말 기억 안 나냐?”
라니엘이 피식 웃었다.
“나 없이 잘 먹고 잘 살아라. 내가 그랬잖아.”
라니엘이 자리 서 일어섰다.
“오든 말든 알아서 해. 난 처음부터 그놈이 없는 걸 전제로 답을 낼 생각이니까.”
그러니까, 너도 네 할 일 해라.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사라의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이다. 사라가 손을 뻗어서, 라니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뭐냐?”
“어쨌든, 당신은 가겠단 거잖아요.”
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가면 카일도 가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돼요”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라니엘을 돌아본다.
“라니엘.”
“뭐.”
“확실해요?”
“뭐가.”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거, 그리고 죽을 싸움에는 안 덤비고 도망칠 거라는 거.”
라니엘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대답했다.
“어.”
대답은 짧다. 언제나처럼.
“아, 진짜···!”
사라가 제 머리칼을 헝클어 트렸다.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뱉은 그녀가, 눈을 부릅뜬 채 라니엘을 바라봤다.
“시켜요.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갑자기? 너 미쳤니?”
“네, 미쳤어요. 당신도, 카일도 다 미쳐버렸는데 저라고 별수 있어요?”
사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지를 세워 라니엘을 가리키며 사라가 쏘아붙였다.
“뭐든지 시키라고요. 옛날에 했던 것처럼. 제가 보기엔 답도 없어 보이지만, 당신 눈에는 뭔가 보이는 거잖아요. 그렇죠?”
“내가 너보다 시야가 좀 넓긴 하지.”
“와, 싸가지 없어.”
사라가 이젠 지쳤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뚝, 하고 웃음을 그친 사라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하나만 약속해요.”
그녀가 말했다.
“카일을 죽게 두지 마요.”
무슨 수를 써서든 그렇게 해 달라.
“부탁할게요.”
사라는 라니엘에게 고개 숙여 부탁했다.
2.
사라는 곧장 전장으로 떠나지 않았다. 왕도 인근의 교회 하나를 빌려 사라는 온종일 그곳에서 눈을 감고 꿈을 꾸었다. 하루의 태반을 그녀는 신의 동상 앞에서 무릎 꿇은 채 보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반쯤 숙인다.
그렇게 기도를 올리듯이 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면 사라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적어요.”
그리 말하면 그녀의 곁에 기다리고 있던 사제들이 깃 펜을 움직인다. 사라는 그렇게 놓치는 것 하나 없이 예언을 구체화했다. 위치, 장소, 주변환경, 그리고 죽음의 칼의 움직임마저도.
사라는 그 모든 것을 보았다.
보고 온 것을 잠에서 깨면 구술했다.
그녀의 구술을 모으고 모아 만든 예언서는 지나치리만치 상세하다. 교단의 역사에도 이례 없는 일이나, 사라의 재능을 생각해보면 이상하진 않다.
이례 없는 재능을 타고난 아이.
향후 델로힘 교단의 수백 년을 책임질 희대의 성녀라는 말까지 나왔던 사라다. 그런 그녀가 온 힘을 다해 하나의 주제에 몰입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결과는 과연, 놀랍기 짝이 없다.
“······.”
매일같이 갱신되는 예언서.
그것을 받아보며 라니엘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정보를 모으고, 지형을 특정하고 쓸 수 있는 수단을 갈구한다.
“선배님, 관련 자료 찾았습니다.”
그 곁에는 칼트가 있다.
둘은 밤잠을 새가며 구체화된 예언에서 정보를 최대한 뽑아냈다. 그렇게 특정된 위치와 시간을 라니엘은 발음했다.
“26일 뒤, 북부의 케넬 평야.”
수백년 전, 최초의 예언과 장소가 겹친다.
그곳에 죽음의 칼이 나타난다는 걸 라니엘은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라니엘은 지도를 본다.
지도에는 제대로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라니엘은 케넬 평야의 인근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있다.
“북부의 성지.”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최초의 용사가 사용했던 성검이 꽂혀있는 곳.
수백년 전에 가니칼트는 그곳을 노렸다.
그리고, 초대 그레이스에 의해 저지당했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가니칼트는 다시 한 번 북부에 발을 들이고자 한다.
‘성검을 회수하기 위해서?’
정말 그것이 목적인가?
무언가 연관이 있으리란 것은 분명하다. 그리 고민하던 라니엘은 카르디를 찾아갔다. 그 고대의 엘프라면 무언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내 옛 동료들은 마경을 넘어올 수 없다.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을 테지?”
“그래. 뭔가 계약을 맺었다며.”
“가니칼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계약을 맺었다. 사실상 그놈은 그늘의 사도와 다름없으니.”
카르디가 지도를 펼쳤다.
케넬 평아를 가로지르는 선을 가리키며 카르디가 말했다.
“그 성지는 일종의 경계선이다. 계약의 증거이기도 하지. 넘을 수 없을 거다. 넘을 수 없어야 하지만···.”
그녀석이 작정한다면.
그리하고자 마음먹는다면.
“놓아버린 제 반신을 되찾고자 한다면, 별은 한 번쯤은 눈을 감아주려 할 거다. 가니칼트는 그 누구보다 별에게 총애받았던 존재니까.”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니까 문제다. 실제로 글레리아에게도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나?”
라니엘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밤의 도시에 쳐들어왔을 때, 배교자는 이게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그것이 정말로 별의 허가를 받은 것이었단 말인가?
“환장하겠네 진짜. 그럼 약화 된다거나 그런 건 없어?”
“그런 건 없을 거다.”
“···그럼 왜 진작 안 찾아갔는데?”
“가니칼트는 그럴 생각이 없었을 테니까.”
카르디가 말했다.
“녀석은 영락했지만, 제 긍지만큼은 잊지 않았다. 자신의 제자에게 주었던 검을 도로 회수할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겠지.”
“그럼 지금은···.”
“그늘이 바란 거겠지. 강하게.”
흑룡의 목이 떨어졌다.
스케발은 번번이 패배하고 만다.
그런 와중 배교자가 치명상을 입고 잠적했다.
수백년간 일어나지 않았던 이상 현상이, 몇년 사이에 연달아 일어났다. 그런 와중 그늘이 움직이려 한다는 것도 마냥 억측은 아니리라.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막아야지. 뭘 어떻게 해.”
“막을 수 있나?”
“일단 할 수 있는 건 죄다 해봐야지.”
한참을 침묵하던 카르디가 입을 열었다.
“죽지 마라, 라니엘.”
그 말에 라니엘은 웃음을 흘렸다.
“아직 못 죽어.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3.
북부는 교단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
추기경의 만행으로 인해 그리됐으며, 북부는 교단의 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사제들은 북부에 출입을 거부당했고, 결국 북부로 향한 것은 왕가에서 보낸 인물이다.
“하운드의 수장을 맡은 가더(Guarder), 칼트라고 합니다. 북부의 주인을 뵙습니다.”
검의 초인의 자리에 오른 인물.
제 앞에 고개 숙인 인물이 이룬 경지에 에랴흘은 내심 혀를 내두른다. 젊은 나이에 초인이 됐으며, 그 눈빛은 예리하기 짝이 없다.
“마음에 드는 사내로군.”
에랴흘이 만족스레 웃었다.
칼트는 전사들의 대접을 받으며 정보를 전달했다.
“예언자가 나타났고, 예언이 내려왔습니다.”
그 예언의 정보를 칼트가 설명하는 가운데, 전사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북부에서 신의 존재는 허상에 가깝다. 교단과 관련된 것에 불쾌함을 느끼는 가운데 전사들의 시선은 에랴흘에게 향한다.
저 자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하는가.
전사들은 시선으로 그리 물었으나, 에랴할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그렇게 칼트가 말을 마친 다음에야 에랴흘이 입을 열었다.
“종교쟁이들의 말은 믿지 않는다.”
하지만, 하고 에랴흘이 덧붙였다.
“선조의 말씀을 잊어선 안 되겠지.”
「예언이 죽음을 가리키는 날이 온다.」
「그날을 부정하지 마라.」
그레이스의 피를 잇는 이들에게 전해져 온 선조의 유지. 옥좌에 오르는 순간 전해지는 그레이스의 숙명을 에랴흘은 망각하지 않았다.
「죽음은 긍지를 잊지 않는 법이니.」
「그레이스는 죽음 앞에 긍지를 보여야 한다.」
「그것은나의 스승과 맺은 마지막 약조다.」
쿵!
에랴흘이 제 애병을 내려찍었다.
백야성의 연회장이 크게 울린다.
그것은 전사들에게 있어 긍정과 다름없다.
북부의 주인, 그레이스의 허가가 떨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