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02
〈 302화 〉 죽음에 맞서는 방법(1)
* * *
죽음의 칼, 가니칼트.
가장 두려운 재앙이 모습을 드러낼 때면 기이한 바람이 불어오곤 했다. 썩고 부패의 향을 간직한 바람. 누군가는 그렇게 표현하곤 하지만···.
그렇다하여, 그것이 악취라는 뜻은 아니다.
악취가 아니다. 냄새라기에도 애매하다.
그것은 죽음의 향기다.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이 풍기는 향기. 모든 생물체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공포를 일깨우는 바람.
사락.
그러므로, 불어오는 바람은 죽음이다.
죽음이 온다.
가장 두려운 재앙이, 온다.
움찔.
라크가 어깨를 떤다.
그 몸이 딱딱하게 굳고,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린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른다. 윗니와 아랫니가 딱, 따닥 소리를 내며 맞부딪친다.
“비켜.”
콱, 하고 라크의 어깨를 라니엘이 움켜쥔다.
라크를 제 등 뒤로 밀치며 라니엘이 눈을 부릅떴다. 공포를 느끼는 것은 라니엘도 마찬가지나, 그녀에게 있어서 이것은 처음 느껴보는 공포는 아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라니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잊지 않는다.
라니엘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푸르게 번뜩이고, 그녀가 낀 장갑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회로의 열기를 견디지 못한 장갑이 재가 됐다. 푸른 마나가 사방에 피어오른다.
‘어디야.’
라니엘은 이를 악문 채 주변을 살핀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 죽음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 존재감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예언은 빗나갔고, 이 자리에 죽음의 칼이 나타났다. 라니엘은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한줄기의 바람이 스쳐 지나갔을 뿐, 죽음의 존재가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나를 끌어 올린 채 한참을 기다려 보아도 상황은 변치 않는다.
“······.”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라니엘은 라크를 끌고 뒷걸음질친다. 그렇게 뒤로 몇 걸음이나 내디뎠을까. 갑작스레 바람이 몰아쳤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여전히··· 지독하게도.」
끊어지고 메아리쳐 울리는 목소리.
「이성을 잃으셨으면, 영락하셨으면··· 좀 약해지셔도 되는 것 아닙니까. 스승님. 여전히 무식하게도 강하십니다. 정말, 빌어먹게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울리는 목소리를 라니엘은 알고 있다. 일전에도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으니.
‘···쿠락트 산맥, 탑으로 향하는 길.’
마나의 흐름이 꼬이고 꼬인 곳.
과거에 그 길을 지나갔던 이들의 흔적을 현재에서 엿볼 수 있는 곳. 그곳에서 겪었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스승 같으니라고.」
라니엘이 앞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머나먼 과거, 이 길을 걸었던 누군가의 환영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에서 숲으로, 숲에서 성지로 이어지는 길을 누군가 걷고 있다.
새하얀 백발.
붉은 핏물과도 같은 눈동자.
라크와 닮은 누군가의 환영.
그는 피를 토하며 걸음을 옮긴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며 그는 성지로 향한다. 그 손에 쥐어진 대검이 바닥을 끄는 소리만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구멍이 뚫린 기이한 형상의 대검.
그것은, 성지의 중심에 꽂혀있는 가니칼트의 검이다. 라니엘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누구의 환영인지 문득 깨닫고 만다.
‘그레이스 가문의 시조.’
라니엘의 뒤에 서 있던 라크 또한 저 인물을 알아본다. 백야성에 남아있는 초상화에서 본 적이 있다. 제 가문의 시조인 위대한 그레이스.
“···그레이스 님?”
라크가 그리 중얼거린 순간이다.
우연일까, 어쩌면 필연일까. 환영 또한 고개를 돌려 라크를 돌아봤다. 그 시선은 라크를 향하지 않는다. 아마도 과거 그 자리에 서 있을···.
「스승님.」
라크가 어깨를 떤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제 뒤에 무엇이 서 있을지 알 것만 같았다.
「저는 검사였습니까?」
인간의 질문에 죽음이 답했다.
「검사는 아니다.」
「그렇습니까.」
「검사는 아니나, 긍지를 아는 전사로군.」
그 대답에 그레이스는 웃는다.
시원하게, 더 없이 만족했다는 듯이.
「칭찬 고맙수다, 스승.」
그 말을 끝으로 그레이스는 다시 앞을 본 채 성지로 걸어간다. 죽음은 인간을 쫓지 않는다. 칼을 한번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죽음의 기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라니엘은 당황한다.
지금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왜 성지에서 쿠락트 산맥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그녀는 제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이다.
“가야 합니다.”
라크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말했다.
“저는, 저곳에 가야 합니다.”
라니엘이 말릴 틈도 없다.
라크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쿵, 쿠웅 라크이 심장이 요란스레 박동 친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라크가 걸음을 내디뎠다.
“잠깐···!”
그 팔을 라니엘이 붙잡는 것보다, 몰아치는 눈폭풍이 라크를 집어삼키는 것이 더 빠르다. 한순간 몰아친 눈폭풍이 라크를 집어삼킨다.
화악.
폭풍이 걷혔을 때 라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2.
“···성지가 라크를 집어삼켰다고?”
에랴흘 반 그레이스, 북부의 주인은 눈을 깜빡였다. 그 앞에 선 라니아는 자신이 겪은 일을 에랴흘에게 전부 설명했다.
성지에 눈보라가 몰아친 것을.
성지가 과거의 환영을 비춘 것을.
그 환영이 그레이스 가문의 시조이며, 라크가 그 뒤를 홀린 듯이 뒤쫓아갔음을··· 전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에랴흘은 침묵했다.
그러기를 잠시, 에랴흘이 입을 열었다.
“교수.”
“예.”
“그대는 성지에 들어갈 만한 능력을 지니지 않았나? 혹은, 이곳에 온 용사 또한.”
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이나 카일은 성지의 끝에 별 어려움 없이 도달할 수 있다. 저번에도 한번 해본 일이다. 하지만···.
“일전에 북부에 방문했을 때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성지를 포함한 그 일대의 공간이··· 굉장히 불안정합니다.”
“···공간?”
“설명해 드리기 어려우나, 일대의 공간이 뒤섞여있습니다. 앞을 보고 성지로 뛰어들었는데,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오게 되더군요.”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흐름도 모조리 뒤섞여 있다. 마치 잿더미의 땅처럼. 분명 앞을 보고 십분 남짓을 걸었거늘 눈보라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는 한나절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대화가 오갔다.
대화의 끝에 에랴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레이스 님의 환영을 보았다 했나?”
“예, 라크를 조금 닮은듯한···.”
“라크는 시조님의 환영을 뒤쫓아 간 것이고?”
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랴흘은 제 턱을 매만졌다.
“라크의 선택임은 확실하나?”
“맹세코.”
“그렇다면, 나 또한 그대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건 내 직감이긴 하나···.”
에랴흘이 중얼거렸다.
“별문제는 없을 것 같군.”
본래부터가 지나치리만치 감이 좋은 라크다.
그 라크가 제 발로 성지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에랴흘은 제 아들의 판단을 신뢰했고, 에랴흘의 직감 또한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북부를 수호하셨던 선조의 환영이다.
그 환영이 후대를 성지로 이끌었음에, 악의적인 의도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전사들을 그 앞에서 대기시키도록 하지. 교수, 그대는 그대가 할 일을 하여라.”
죽음을 대비하는 것.
그것을 위해 저 마법사가 북부에 왔음을 에랴흘은 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지 또한.
“가보아라.”
* * *
백야성에서 빠져나온 라니엘은 곧장 전사들과 함께 성지로 향했다. 성지에는 매서운 눈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으며, 여전히 일대의 공간은 꼬여있다.
“······.”
더이상 환영이 나타나는 일도, 무언가 변화가 있지도 않는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고요하나··· 그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라니엘로선 알 수 없다.
문득 라니엘이 품에서 성배를 꺼냈다.
성배가 요란스레 흔들리고 있다.
흔들림이 향하는 곳은 성지의 중심이다. 성배는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반응한다. 마치, 성지에 존재하는 무언가와 반응하듯이.
흔들리는 성배, 성지의 중심에 꽂힌 검.
라니엘은 문득 과거를 떠올린다.
작년에 성지의 중심에 도착했을 때, 라니엘은 그곳에 꽂힌 성검을 잡으며 무언갈 떠올렸다. 그것은 인간이 죽음에게 저항할 수단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희박해서.
그 가능성은 지금으로선 실현할 수 없기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
“···영혼의 충돌.”
라니엘은 그것을 중얼거렸다.
북부의 성지, 그 중심에 꽂힌 검에는 가니칼트의 영혼이 서려 있다. 파편에 불과하다곤 하나 그것은 분명한 가니칼트의 영혼이다.
영혼과 영혼의 충돌.
성검이 품은 별빛과, 죽음이 쥔 검이 품은 그늘을 충돌시킨다면··· 한순간이지만 그늘을 무효화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라니엘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
성검은 허락받지 않은 이의 손길을 거부한다.
그곳에 담긴 가니칼트의 혼은, 오롯이 그레이스의 핏줄만을 허락한다. 자신도, 카일도, 그 어떤 검의 초인도 그 검을 손에 쥐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그레이스의 핏줄만이 가능한 일.
그렇기에 라니엘은 라크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언젠가 라크가 초인이 되어서, 그 검을 쥘 수 있게 된다면··· 실낱같은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까. 그 검을 쥐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카일이 벽을 허물고 초인이 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카일을 대체 할 수 있는 존재는 라크다. 라크가 초인이 되어 성검을 쥔다.
그것이 라니엘이 떠올렸던 죽음을 상대하는 법이다. 저항할 수 없는 재앙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에게 인간이 맞서는 법. 하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직 부족하니까.”
초인의 경지는 멀고도 험하다.
라크는 아직 초인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었지만···.
구웅, 구우웅.
흔들리는 성배를 바라보며 라니엘은 침묵한다.
현자, 라니엘 반 트리아스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해 왔다. 그것에 우연과 행운 같은 요소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철저한 계산,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계획.
차기 마탑주 시절부터 굳어진 버릇이다.
중요한 실험이나 국면에 있어 변수나 운 같은 것에 기댈 수는 없는 법이므로. 하지만, 수년간 전장을 경험한 라니엘은 알고 있다.
‘변수.’
언제나 변수는 일어난다.
좋은 쪽이로든, 나쁜 쪽이로든.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기사가 갑작스레 굴복하는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겁에 질려 매번 도망치기만 했던 기사가 이를 악물고 강적을 향해 달려드는 일도 일어나곤 한다.
그 변수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갈라할 또한 그 변수의 일환이었으니까.
그런 변수를 계획에 넣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라니엘은 ‘어쩌면’이란 가정하에 하나의 계획을 떠올린다.
“······.”
입을 다문 라니엘이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이 향하는 곳은 케넬 설원이다.
그날 케넬 설원에는 조금 다른 형태의 회로가 새겨졌다. 그것은 물리력을 동반하지 않은 주문이요, 가니칼트에게 통할 리가 없는 주문이다.
그러나 라니엘은 그것을 새겼다.
혹시 모를 변수가 일어난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기 위해서.
3.
시간은 흐른다.
흐르고 흘러, 예언의 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북부에선 피난의 행렬이 이어진다. 성녀의 이름 아래 모인 성기사들이 피난을 돕는다. 그곳에는 이제 막 제 존재를 알리고 있는 어린 용사 또한 함께한다.
이어지는 피난 행렬은 길고도 길다.
재앙이 북부에 찾아온다.
죽음을 상징하는 가장 두려운 재앙이 북부에 나타나거늘, 감히 그것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하는 이들은 없다. 대부분의 전사조차 자리를 뜬다.
하지만, 자리를 지키는 이도 있다.
“나는 북부의 주인이다.”
에랴흘 반 그레이스.
“위대한 그레이스의 이름을 이어받은 전사로서, 나는 결코 이 땅을 버릴 수 없어. 시조의 유언에 따라 죽음 앞에 긍지를 보여야겠지.”
북부의 주인은 백야성을 지킨다.
그 곁에는 북부를 뜨지 않은 열세 전사가 남아있다. 그들은 에랴흘 앞에 고개를 조아린다.
“내 아들놈을 놔두고 떠날 수도 없는 일이고.”
피식, 하고 에랴흘이 웃는다.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죽음에 저항한다. 전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제 주인과 어린 주인을 내버려 둔 채 이 땅을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리고.
모두가 떠난 곳.
그 누구도 감히 다가서지 않는 곳.
“준비는 됐냐.”
그곳에서 죽음을 막아서기 위해 바로 선 이들이 있다. 네 명의 인간은 설원에서 죽음에 맞설 준비를 마친다.
“사라.”
“지금부터 기도문을 외울 거니까 말 걸지 마요. 집중해야 하니까.”
성녀가 입은 법의가 바람에 펄럭였다.
평소에는 꺼내 들지도 않는 석장을 쥔 채 성녀가 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레미아.”
“···네가 명령하는 건 아니꼽지만, 위대한 구원자의 말씀이니 따를 거야. 걱정 마.”
신궁이 달빛 화살을 허공에 늘어놓는다.
그녀가 가진 달빛 화살이 달밤 아래 찬란히 빛난다.
“카일.”
“그래.”
그리고, 용사는 성검을 쥔다.
“준비는 끝났다.”
백금색의 칼날이 찬란히 빛난다.
오랜만에 본 용사의 성검에 현자는 웃음을 흘린다. 그 빛은 과연 승리의 상징이리라.
성녀, 사라.
신궁, 레미아.
용사, 카일 토벤.
현자, 라니엘 반 트리아스.
검은 폭풍, 흑룡의 목을 베었으며.
고대 리치, 스케발을 몇 차례고 격퇴했고.
배교자, 글레투스를 토벌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수백년의 역사 동안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몇 차례고 이뤄낸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죽음에 맞서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다. 물론 그들에겐 옛날과 같은 긍지도, 옛날과 같은 고결함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곳에 서 있다.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저마다가 품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것이 비틀렸을지언정, 자신만큼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기 위해.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맞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