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22
〈 322화 〉 잿빛 마탑(5)
* * *
아들처럼 기른 제자가 나를 죽이려 한다.
로셀은 식겁하며 한동안 라니아를 피해 뒷걸음질쳤고, 한참의 실랑이 끝에 로셀은 결국 라니아에게 붙잡혔다. 당연하게도 라니아가 로셀의 머리에 강타를 꽂는 일은 없었고, 라니아는 로셀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한동안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 거였느냐?”
“그럼 달리 뭐가 있겠어요···?”
한숨을 쉬며 라니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애초에 제가 스승님을 왜 죽여요? 제가 스승님께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야··· 그렇지.”
로셀도 이성적으론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수상할 정도로 행동력이 넘치는 이 아이라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든 것 또한 부정할 수는 없다. 이상한 부분에서 판단이 빠른 아이니까.
“아니면, 스승님 혹시 저한테 뭐 잘못 하신 거 있으세요? 왜 이렇게 질색을 하신대.”
라니아가 짓궂게 웃었고, 로셀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라니아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야!”
“더운 날에 땀 뻘뻘 흘리고 온 제자 놈에게 커피 한잔 타주려던 스승에게 할 말이더냐, 그게.”
“어, 으음··· 죄송해요.”
라니아가 제 앞머리를 문지르며 배시시 웃었다.
로셀은 한숨을 내쉬며 라니아의 머리를 손등으로 툭툭 두들겼다.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한 기분이다.
“후우···.”
짧게 숨을 내뱉은 로셀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방금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가늘게 뜬 눈동자.
로셀은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 * *
라니아는 로셀에게 아는 것을 전부 털어놓았고, 한동안 이야기를 들은 로셀은 제 턱을 매만지며 침음을 흘렸다.
“···이유도, 원인도 설명해 주시지 않았다고?”
“네, 노골적으로 주제를 돌리려고 하시더라구요.”
로셀은 젊었을 적부터 장로를 보아왔다.
그때는 장로가 아닌 원로(??)였지만, 그때부터 크렌벨 엘레노아라는 마법사의 인품은 결코 변치 않았다. 무려 수십 년 동안.
‘생각이 깊으신 분이다.’
정보를 숨기고 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지.
“스스로의 명예에 집착하는 분은 아니시지. 거짓을 입에 담느니 차라리 침묵하고 마시는 분이시기도 하고. 생각이 워낙에 깊으신 분이니 그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구나.”
로셀이 찻잔을 기울였다.
차를 홀짝이며 로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장로께서 부탁하셨다고?”
“···네.”
“그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더냐?”
라니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쉽게 답하지 못하던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힘겨이 입을 열었다.
“···그럴 생각이에요.”
로셀은 라니아의 표정을 살폈다.
고뇌하고 망설이는 것 같으나, 그것은 장로를 제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부분이 아니다. 다른 부분에서 라니아는 고뇌하고 있었다.
“레스티, 그 아이가 신경 쓰이나 보구나.”
흠칫, 하고 정곡을 찔린 라니아가 어깨를 떨었다.
고개를 든 그녀가 로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그런 생각을 좀 했어요.”
라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에게 있어 장로님은, 제게는 스승님과도 같은 분 일거 아니에요. 아버지고, 은인이고, 스승이시죠. 그런 큰 사람이잖아요.”
자신의 삶을 바꿔준 스승.
마도(??)를 걷게 해주었고,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장만해준 은인. 그리고, 가족 없는 고아인 자신에게 아버지가 되어준 인물.
각별할 수밖에 없는 사이다.
그런 가족이 몇 년 만에 병상에서 일어났는데,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면··· 레스티가 무슨 기분을 느끼게 될까.
“전장을 경험하기 전의 저라면, 좀 망가질 거 같다는 기분이 들어요.”
제 곁에 서 있던 이를.
소중하다고 여긴 이를 잃은 경험이 없다면, 자신 또한 망가지고 말 테다. 라니아는 그렇게 확신했다.
‘애초에, 지금도 좀 그럴 거 같고.’
어느정도 정신적으로 완성된 지금조차 스승님이 죽는다는 상황을 가정하면, 소름이 돋곤 한다.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다.
그런 일을 레스티는 현실에서 겪어야 한다.
“그 애,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웃었어요.”
레스티가 환히 미소 지은 채 들뜬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던 순간이 자꾸만 떠오른다.
귓가에 메아리치는 목소리.
눈앞에 아른거리는 미소.
그것이 자꾸만 라니아의 속을 콱 틀어막았다. 답답함을 느끼며 라니아가 중얼거렸다.
“그걸 빼앗아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다름 아닌 자신의 손으로.
“쉽지 않은 이야기로구나.”
로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죽음을 부탁하시는 걸 보아하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 같고···.’
라니아가 장로를 죽이지 않는다면, 장로는 레스티의 눈앞에서 다른 무언가로 변하고 말 것이다.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어느곳을 선택하던 기다리는 것은 비극이다.
어느쪽으로 가던 참혹한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다. 멈추지 못하는 마차는 벼랑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선택은 네 몫이지만, 이 경우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구나.”
로셀이 두 손가락을 폈다.
“하나는, 레스티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전하거라. 내게 들려주었던 전부를 들려주거라. 진실을 직면하고 스스로 극복하게 하는 방법이지.”
정공법이다.
정도(??)이기에, 가장 어려운 길이다.
“둘은.”
로셀이 침음을 흘렸다.
권하고 싶은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어려운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릇된 길을 고르는 것이 정도를 걷다 망가져 버릴 사람을 구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속이거라.”
로셀이 말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자는 어딘가에 실존한다. 그렇게 그 아이를 속이거라.”
라니아에겐 가능한 일이다.
“복수심으로써 그 아이가 살게 만들어. 적어도 심지가 타오르는 동안은 망가지지 않을 테니까.”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때까지.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을 때까지.
그녀를 속이고 또 속여라.
“···그건.”
“추천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이런 길도 있다는 것만을 알아두란 이야기다.”
라니아가 침묵했다.
로셀은 한숨을 내쉬며 제 눈가를 쓸어내렸다.
“선택은 네 몫이다. 혹은,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조금 더 고민해 보자꾸나.”
로셀은 그리 말했고 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직감하고 있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음을.
아마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게 될 것임을.
2.
나는 잿빛 마탑의 앞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고민하는 사이 날이 밝았고, 나는 선택을 나중으로 미루었다. 당장 선택할 필요는 없겠지. 아직 시간은 한 달 가량 남아 있었으니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나는 잿빛 마탑의 안으로 들어섰다. 잿빛 마법사의 후계라는 신분의 특수함, 또한 자유로이 방문해도 좋다는 장로의 언질이 있었으므로 마탑을 방문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업무로 바쁜지 레스티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끼며, 나는 마탑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아, 왔는가?”
장로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어제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의자를 끌고 와 장로의 곁에 앉았다.
“내 제안은 생각해 보았느냐?”
“···아직 걸리는 것은 많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고 내가 조건을 덧붙였다.
“전부 말씀해주세요. 숨기는 것 없이.”
“숨겨야 할 이유가 있는···.”
“장로님이 아니더라도, 제가 알고 있는 비밀이 좀 많습니다. 숨겨야 할 정보도 잔뜩이고요. 허락을 맡기 전에 발설할 일은 없으니, 그냥 말씀하십시오.”
내가 쓰게 웃었다.
“내막을 들어야, 선택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무엇을?”
“레스티 엘레노아.”
움찔, 하고 장로의 몸이 굳었다.
“장로님이 돌아가시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아이가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생각 안 해보진 않으셨을 텐데.”
“······.”
장로는 침묵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차라리 그 아이에게 모조리 털어놓을···.”
“그건 안되네.”
장로가 내 말을 끊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장로는 괴로운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은 안돼. 그 아이에게···.”
“이유가 뭡니까.”
“그 아이는 분명 물어보고, 사실을 파헤치려 들 것 아닌가. 왜 내가 이런 저주를 품게 됐는지, 왜 내가 그것을 자신에게 숨기려 했는지··· 그 아이는 의문을 가지게 될 거야.”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장로에게 질문했다.
“그러면 안 됩니까?”
“안돼.”
“도대체 왜···.”
“그럼, 나는 모든 것을 말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것이 그자가 바라는 것이겠지.”
그자? 내가 눈을 깜빡였다.
장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자가 누구입니까?”
장로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장로가 힘겨이 입을 열었다. 그가 내게 부탁했다.
“말하지 않겠다고 약조해주게.”
“잿빛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요.”
“믿겠네.”
장로가 숨을 토해내고선 허리를 곧게 세웠다.
“나는 어느 그림자와 계약을 맺었다네.”
계약.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숨을 헛삼킬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 못한 존재의 이름이 튀어나온 까닭에.
“그림자는 스스로를 최초의 광인이라 소개했어.”
최초의 광인.
그늘을 만들어낸 미치광이.
장로는 그 존재와 계약했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
3.
레스티를 거두어들인 크렌벨 엘레노아는, 그 아이가 자신의 마지막 제자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재능있는 아이였고 빠르게 배우는 아이였다.
레스티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크렌벨은 레스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쳤고, 외로움을 잘 타는 그 아이에게 훌륭한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 아이를 크렌벨은 자식처럼 여겼다.
그 아이의 성장과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했으며, 훗날 레스티가 마탑주의 자리에 앉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크렌벨은 마탑의 내부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그 어떤 결계에도 붙잡히지 않은 채 마탑의 내부를 자유로이 오다녔다. 크렌벨은 그것의 뒤를 쫓았고, 그것이 레스티의 그림자에 숨어드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것은 사역마가 아니다.
그림자 따위가 아니다.
사이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다.
레스티가 잠든 사이에 크렌벨은 그 밑에 고여있는 그림자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무엇이길래, 이 아이를 쫓아다니는 것이냐고.
【거목이 될 씨앗에 기생하는 것이지.】
그림자는 기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거목이 되어버렸을 땐 늦고 말 테니, 지금부터 기생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만, 자네가 보기엔 어떠한가?】
크렌벨은 그림자를 치우고자 온갖 마법을 쏟아부었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림자는 붙잡히지 않았다. 정해진 형상이 없다. 마나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세상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다.
섭리의 바깥에 거하는 존재.
신(?)에 가까운 존재는 크렌벨의 귀에 속삭였다.
【소용없다네, 친구.】
그림자는 다시 레스티에게 스며들려고 한다.
사특한 존재가 레스티에게 깃들어, 그녀의 영혼을 좀먹으려 한다. 자신의 제자를, 딸과 같은 존재를 집어삼키려고 한다. 크렌벨은 그런 미래를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답을 찾으려 든다.
짧은 시간 크렌벨은 고뇌했고, 눈앞의 그림자에게서 무언가 익숙함을 느낀다. 그것은 오랜 세월 별과 거래하며 마나의 거래학을 연구했던 크렌벨 엘레노아였기에 발견할 수 있는 단서다.
그림자의 형상이, 그것을 이루는 본질이 별과 같다고 크렌벨은 생각한다.
반신반의하며 크렌벨은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언제나 하늘위의 별에게 거래를 청한 마법사는, 처음으로 땅을 기는 그림자에게 거래를 요청했다.
“거래한다.”
그림자가 움직임을 멈춘다.
천천히 레스티에게서 빠져나온 그림자가 크렌벨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형상을 가진 그림자에서 눈동자가 드러난다. 드러난 눈동자는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으나, 인간의 것은 아니다.
광인의 눈동자.
미쳐버린 이가 크렌벨을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인가?】
“거래를···.”
【오오, 물론이지. 거래를 바라는 이를 나는 결코 거부하지 않아. 물론 해주어야지.】
광인이 웃었다.
【조건을 말하라, 우매한 마법사야.】
수많고 수많은 거래를 해온 크렌벨이다.
그는 눈앞의 광인이 바랄만한 조건을 입에 담았다. 그 조건을 들은 광인은 웃었다.
【이 아이를 대신해, 네 영혼을 내게 주겠다고?】
“내 천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내게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
“아직 발아하지 못한 씨앗보다는, 나와 같은 고목(古?)에 기생하는 편이 당장은 더 가치가 높아 보이는군. 그렇지 않나?”
크렌벨은 제안했다.
“나는 잿빛의 장로다. 저 아이처럼 거목(巨?)이 될 수는 없으나, 당장은 저 아이보다 높은 성취를 이루었지. 당장은 내 몸에 기생했다가···.”
【네가 죽게 되면, 그때 몸을 갈아타라?】
“그래.”
【눈물겨운 희생이로군.】
그림자가 웃었다.
【마음에 들어. 확실히, 그편이 더 즐겁겠군. 하지만 조건을 덧붙이도록 하지.】
그림자가 손을 뻗었다.
뻗은 손가락의 끝은 눈을 감고 있는 레스티를 향해있다. 잠이 든 그녀를 가리키며 그림자의 입가가 쭉 찢어졌다.
【저 아이가 이 계약에 대해 묻는다면, 너는 모조리 답해주어야 할 것이야. 또한, 그 순간이 오면 나는 저 아이에게 이렇게 제안하지.】
이 노인은 너를 위해 희생했다.
네게도 기회를 주마.
이 노인을 대신하여, 네가 나를 받아들이겠느냐?
그 말을 들은 순간 크렌벨의 몸은 딱딱하게 굳었다. 레스티라면 분명 그 제안을 거부하지 않으리라. 기어코 계약을 맺고 말 것이다.
“그리··· 하지.”
허나 그 조건을 거부할 권리는 크렌벨에게 없다. 결국 크렌벨은 그 제안을 수락했다.
【계약은 체결됐다, 마법사야.】
천명(??)이 다할 때까지.
그것이 조건이기에 크렌벨은 자살하지 못한다. 병사하지도 못한다. 초월자와의 계약으로 일시적인 불사를 손에 넣는다. 그 대신, 주어진 수명이 끝이 올 때까지 이 그림자에게 갉아 먹히고 말리라.
‘그리고 언젠가 레스티 그 아이가 알게 되겠지.’
그렇기에, 크렌벨은 강수를 둔다.
그는 제 영혼에 스스로 상처를 입혔다.
천명을 갉아먹은 상태로 크렌벨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자신의 천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림자를 제 몸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
그렇게 벌어낸 4년의 시간.
흐릿한 의식 속에서 크렌벨은 바라고 또 바랐다. 그 4년의 시간 동안 부디 레스티가 성장하기를. 성장하고 성장해서, 그림자에게 기생할 틈을 내어주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 계획은 틀어졌지.”
장로가 앙상해진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죽는 그날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결국 37일을 남기고 일어나고 말았어. 내면에선 잠들어있던 그림자가 깨어나려 하고 있지.”
장로가 꾹 감고 있던 눈동자를 떴다.
그 절반이 검게 물들어있다.
“남은 한달남짓의 시간이 흐르면, 나는 완전히 잡아먹히고 말걸세. 그림자는 내 몸을 미끼 삼아 레스티를 사로잡으려 들 거고,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아.”
늙어버린 노인이 라니아에게 부탁했다.
“그러니, 레스티에게 알리지 말아주게.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는 그날··· 나를 죽여주게.”
라니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제자를 위해, 제 삶을 바친 스승이 자신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고. 그 선택이 희생으로 남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고 있다.
“아··· 진짜···.”
라니아가 제 눈가를 쓸어내렸다.
‘미치겠네, 진짜.’
어느곳으로 가도 비극만이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지금 하나의 길이 더 사라졌다.
남은 것은 기만, 혹은 가장 잔혹한 길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