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23
〈 323화 〉 판을 엎어라(1)
* * *
“나는 이 일을 그 아이가 알지 않기를 바라.”
크렌벨 엘레노아.
“광인이 바라는 대로 그 아이가 나를 대신해 희생하려 할 상황이 두렵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이전의 문제이지.”
잿빛의 장로이자, 레스티의 스승.
“그 아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해.”
그가 내게 말했다.
“자신 때문에 내가 죽게 됐다고, 나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려 하지 않기를 바란단 뜻이야. 죄책감과 책임감에 그 아이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
나는 입을 다문 채 장로의 말을 들었다.
장로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상처가 많은 아이야.”
나도 알고 있다.
“나는 그 아이가 더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 나의 죽음으로 상처 입긴 할 테지만, 그 상처가 곪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
장로가 쓰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레스티는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였으며, 오랫동안 고독함을 느꼈던 아이다. 하물며 장로로서는 알 수 없을 테지만, 장로가 병상에 누웠던 몇 년의 세월 동안 레스티는 철저하게 고립됐어야만 했다.
자신을 지지해주는 이 하나 없다.
자신을 봐주는 이 역시 없다.
내 그림자가 드리워있던 마탑에서 그 아이는 끊임없이 나와 비교당했을 것이다. 자존감도, 자신감도 모조리 갉아 먹혔으리라.
‘이제야 겨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을 텐데.’
그 아이가 멈춰 서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한번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 또한 장로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 하여 쉽게 결정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후우.”
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뿐이다.
장로는 자신의 희생을 레스티가 모르기를 바란다.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은 아니다. 나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국, 이 또한 기만 아니겠습니까.”
정곡이었다.
진실을 엄폐하고, 거짓으로 기만한다.
그것은 결코 옳은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럴 테지.”
“그래도, 속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희생을 아무도 모르게 되더라도?”
장로가 웃었다.
“알아주기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네.”
그 희생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들, 장로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 아이의 스승이자, 아버지야.”
장로가 당연한 걸 이야기하는 듯 말했다.
“부모란 자식을 위해선 기꺼이 희생하는 법이지. 아니, 이건 희생이 아니야. 부모로서의 책임이지.”
나는 책임을 졌을 뿐이야.
장로는 그렇게 말했다.
“자네에겐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됐군.”
늙고 병들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인간.
자신의 죽음이 아름다워지길 바라는 노인이 나를 보았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이의 눈동자였다.
“부디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
라니엘은 복잡한 심정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이야기를 듣고 나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속이 얹힌 것만 같았다. 괜스레 제 가슴팍을 꾹꾹 눌러대며 라니엘은 한숨을 내 쉬었다.
마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공원이 하나 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 혹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라니엘은 차기 마탑주 시절 종종 그 공원을 정처 없이 걷곤 했다. 이번에도 그리해볼 생각이었다.
라니엘은 공원을 걷는다.
걷다 멈춰선 그녀는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지고 노을이 진다. 그마저도 오래가진 않는다. 금세 하늘은 검어지고 숨어있던 별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별, 그리고 그늘.
그늘을 만들어 낸 최초의 광인에 대해 라니엘은 생각한다. 자신이 그 광인을 죽일 수 있는가? 당연하게도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
‘불가능했었지.’
아르카디아에서 경험한 사실이다.
그늘을 삼키는 마나가 통하기는 하지만, 그 효과는 미약할 뿐이다. 지금 장로의 몸에 심어진 구정물이 완전히 개화(?花)한다면 라니엘 또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니 개화하기 전에 죽여야 하는 것이겠지.
‘불사성을 얻었다고 했나.’
장로는 말했다.
계약이 맺어진 순간, 자신은 반쪽짜리 불사를 손에 넣었다고. 불로는 아니지만 불사(死). 장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장로를 죽일 수 있는 것은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흐르고, 그 수명이 다하는 찰나의 순간뿐이다.
그림자가 완전히 장로를 집어삼키려는 그 순간 라니엘은 장로를 죽이게 될 것이다. 싹을 틔우는 그림자를 장로의 영혼과 함께 불태워버리리라.
“후우···.’
라니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미지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지금 이순간, 라니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놈을 떠올린 순간 라니엘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아이 씹···.”
머릿속에 그놈이 떠올랐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낀 라니엘은 제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카일 그 새끼가 왜 생각나는데.’
카일 토벤, 초인의 자리에 오른 용사.
지난번 가니칼트와의 접전에서 카일은 완전히 개화했다. 그 녀석이 보이던 움직임을, 가니칼트와 호각으로 맞부딪치던 그 장면을 라니엘은 잊지 못한다.
그토록 그녀가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카일이 개화하기를.
다시 한번 검을 잡아주기를.
검을 쥐고 일어서서 용사가 되어주기를.
라니엘은 바라고 또 바랐었다.
심지어 카일에게 쫓겨나고 나서조차 라니엘은 그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사라에겐 후회만 할 뿐, 집착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집착했지. 엄청나게.’
우습게도, 갈라할의 죽음으로 그 집착을 내려놓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카일은 변했다. 웃지 못할 이야기에 라니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만 있음 또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그리 생각하며 라니엘이 중얼거렸다.
“카일 그 새끼는 뭐 하는 거야, 대체.”
고룡의 마법사와 함께 간 이후, 카일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카일에게선 서신 한통이 도착했을 뿐이다.
「몸을 추스를 생각이다.」
「당분간은 수련에 매진할 생각이고.」
「내게 남은 마지막 시련을 대비하기 위해선, 힘을 축적해야 할 테니까. 기다리지 마라. 때가 되면 알아서 나올 테니까.」
그렇게 편지가 도착했을 뿐이었다.
그 시련이 무엇인지 카일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라니엘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선택 해야 하는데···.”
결국 이도 저도 못한 채 라니엘은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잠옷으로 갈아입고선 하루를 마무리 지으려는 순간이다.
번쩍.
테이블에 올려둔 마도구가 반짝였다.
특정한 인물들과 연결된 편지지.
그것을 본 순간, 라니엘이 이불을 걷어차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혹시 카일에게서 편지가 도착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에 라니엘은 편지지를 확 낚아챘다.
「교수, 내일 시간 괜찮나?」
카일에게서 도착한 편지는 아니었다.
내심 실망하며 라니엘은 내용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번 보도록 하지.」
제 1 왕녀 르뤼엘에게서 도착한 편지였다.
3.
해가 중천에 뜬 여름의 오후.
늘어지는 오후의 햇살이 별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련된 정원을 비춘다. 잘 가꿔진 꽃과 나무가 싱그럽게 빛나는 정원의 한구석에는 티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다.
별궁에 놓인 정원을 사용하는 이도, 사용할 수 있는 이도 한 명밖에 없다. 이 정원의 주인이 제 머리칼을 한번 쓸어넘겼다.
사락.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의 머리칼이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평소에는 은빛으로 보이나, 햇살을 받을 때면 그녀의 머리칼은 금빛으로 빛나곤 했다.
금빛을 머금은 은색의 머리칼.
도도한 금색의 눈동자.
제 1 왕녀 르뤼엘이 탁, 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이로군 교수.”
그녀의 맞은편에는 라니아 반 트리아스가 앉아있다. 라니아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한 달쯤 전에 만나뵙지 않았나요?”
“그것은 공적인 자리에서가 아닌가. 보는 눈이 많다. 편히 이야기를 나눌만한 곳은 아니었지.”
차를 홀짝이던 르뤼엘이 화두를 던졌다.
“그나저나, 잿빛 마법사의 후예라니. 확실히 그대가 비범하긴 했지.”
“그렇습니까?”
“미친개라 불리는 내 앞에서 그대처럼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거든.”
사실이 그렇다.
미친개라 불리는 자신 앞에 대부분의 이들은 바닥을 기기 바쁠 뿐이다. 저자세로 바닥을 기면 뭐라도 하나 던져주리라 생각하는 들짐승들뿐.
그런 이들에게 질릴 대로 질린 르뤼엘에게, 눈앞의 라니아라는 인물은 제법 자극적인 인물이었다.
“지금은 더하지. 가장 높은 위치에 앉고 나니, 내게 뭐라도 받아먹으려는 놈들이 산더미처럼 달려들어. 하루하루가 피곤할 따름이야.”
그래서일까.
그리 중얼거린 르뤼엘이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그대와 함께했던 뜨거운 여름날이 기억나는군.”
미친개와 미친년이 함께한 여름날의 추억.
눈에 띄는 대로 일단 잡아 족치고 봤던 그날을 르뤼엘은 종종 떠올리곤 한다. 몹시 즐거운 기억이었으니까.
라니아가 헛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여전하십니다.”
“변치 않는게 내 장점이니까.”
르뤼엘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맞은편에 앉은 라니아를 흘겨봤다. 좀 전부터 다른 곳에 생각이 가 있는듯한 얼굴이다. 다른 이가 저런 모습을 보인다면 곧장 자리를 파(?)할 테지만, 눈앞의 교수는 예외다.
오히려 생각 없이 일단 지르고 볼 거 같은 저 교수가 고민을 한다는 점에 르뤼엘은 신경이 쓰였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로군.”
“···그래 보이나요?”
“부정하지는 않는군.”
르뤼엘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본녀와 담화를 나누며 다른 생각을 한다라, 본래라면 이 자리를 엎어버릴 테지만··· 교수 그대만큼은 예외지. 오히려 궁금하군.”
그녀가 제 몸을 라니아를 향해 살짝 기울였다.
테이블 위에 르뤼엘의 은빛 머리칼이 물결쳤다.
“어디 한번 이야기해 보아라.”
본녀가직접 상담해 줄 테니.
그리 말하는 르뤼엘에게, 라니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남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저 왕녀님이라면, 뭔가 다른 방법을 제안해주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서.
“그게 말입니다, 좀 복잡한데···.”
구체적인 내용은 모조리 생략했다.
대략적인 맥락만을 이어붙여, 라니아는 두서없이 설명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라니아의 설명이 끝난 후, 르뤼엘은 테이블을 툭툭 건드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왠 빌어먹을 잡것이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 강요하고 있다, 그 소린가?”
“비슷합니다.”
“그 잡것을 잡아 족치는 건 불가능하고?”
“아쉽게도 불가능하네요.”
흠, 하고 르뤼엘이 제 턱을 매만졌다.
그리 고민하던 르뤼엘은 이상하다는 듯 미심쩍은 눈길로 라니아를 흘겨봤다.
“교수, 내가 못 보던 사이에 좀··· 얌전해진 것 같구나?”
“얌전해져요? 제가?”
라니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흘겨보던 르뤼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의 그대 같지 않단 말이다. 중요한 사람과 연관된 이야기라 했던가? 그대의 판단이 좀 흐릿해진 것 같기도 하군.”
판단이 흐릿해져?
라니아가 르뤼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르뤼엘은 팔짱을 낀 채 제 몸을 뒤로 젖혔다.
“교수. 요즘 들어 느끼는 것이긴 하나, 내게 선택을 강요하려는 잡것들이 참 많다. 교묘하게 정보를 숨기고, 장난을 쳐가며 내 시야를 좁히려 들지.”
뜬금없는 이야기이나, 관련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라니아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르뤼엘은 팔짱을 낀 채 입가를 틀어 올렸다.
“잡아 족치기엔 애매한 놈들이지. 그 뿌리를 도려내기엔 역사가 긴 귀족 놈들이거든. 자기들이 죽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으니 본녀에게 그리 장난을 치려 하는 것이겠지.”
그런 잡것들을.
죽이지는 못할 쓰레기들을.
“그런 놈들을 본녀가 어찌 엿먹이는 줄 알고 있는가?”
“아뇨···?”
“추측해 보아라.”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물은 몹시 좋은 선택이긴 하지. 일단 물이 들어가면 답이 나오거든. 본녀도 종종 애용하긴 하나, 이 경우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르뤼엘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
“그놈들이 가장 싫어할 법한 일을 하는 거지.”
“싫어하는 일이요?”
“그래. 선택을 강요하는 놈들을 엿먹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아예 선택을 안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아예 상상도 못한 선택을 해버리는 거지. 두 개의 길을 강요받는다고 했나? 모조리 집어치워라. 어디로 가든 후회할 뿐이다. 그럴 바에 아예 판을 엎어버리자는 것이지.”
정해진 길을 모조리 엎어버려라.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골라라.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것이야말로 그놈들이 원하는 일이 아닌가? 좆같은 놈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쏘냐. 본녀는 남 좋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다 좆까라 하라지.”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뒤에서 판을 짜는 놈이 있다면, 본녀가 왜 그 판 위에서 놀아줘야 하지?”
르뤼엘이 손가락을 휙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죄다 엎어버려라.”
엎어버린 판을 구둣발로 짓밟아버려라.
“좆같은 놈이 좆같게 굴면, 이쪽도 좆같게 구는 것이 정도(??) 아니겠느냐?”
르뤼엘이 천박하게 웃었다.
이 나라의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여인이 지을 웃음은 아니다. 숨김도, 꾸밈도 없이 드러내는 날것의 웃음.
천박한 웃음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라니아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든다. 르뤼엘을 바라보던 라니아는 제 눈가를 쓸어내리며 웃음을 흘리고 만다.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왕녀님.”
“오히려 좋군. 답이 없어 보이는 판을 엎을 때야말로 쾌감이 느껴지는 법 아니겠나.”
사고방식이 다르다.
그 호쾌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 앞에, 고민하던 자신이 오히려 바보 같다고 느껴진다. 웃음을 흘리던 라니아가 후, 하고 짧게 숨을 내뱉었다.
어느쪽을 골라도 후회할 것이다.
짜여진 판은 엎어버려라.
‘말이 쉽지.’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당장 주어진 선택 외에 다른 길이 무엇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 결국에 르뤼엘 또한 상황을 제대로 모르기에 던질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르뤼엘이 무심하게 던진 말은 라니아의 뇌리에 계속해서 맴돌고 있다. 그 말을 곱씹으며 라니아는 눈을 감았다 떴다.
좁아졌던 시야가 확 트인 느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