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24
〈 324화 〉 판을 엎어라(2)
* * *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문득 라니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좁아진 시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가 없다. 좁아졌던 시야를 깨운 것은 우습게도 상황의 바깥에 있는 왕녀의 한마디였다.
판을 엎어라.
그 말을 곱씹으며 라니엘은 걷는다.
걸음을 옮기며 라니엘은 넓어진 시야로 상황을 파악한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뇌한다. 이 상황에 있어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장로의 죽음?
은인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것?
‘그건 아니지.’
본인이 죽음을 바라고 있다.
자신이 다만 자신인 채로 죽기를 바라고 있으므로, 라니엘은 그 부탁을 기꺼이 들어줘야 하리라. 그것에는 그 어떠한 가치판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수행하면 될 뿐이다.
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 뒤에 얽힌 일이다. 레스티라는 아이와 얽힌 일. 이제 막 성장하는 아이에게 닥쳐올 영향. 그것을 걱정하여 라니엘은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건데···.
“첫단추부터 잘못 끼웠네.”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라니엘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결정을 지으려 했다. 떠올려보면 우스운 일이다. 자신이 언제부터 그랬다고.
기만이다.
판단은 스스로 내리는 것.
그로인한 후회도, 책임도, 그 무엇도 결국엔 자기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결코 타인에 의해 대리될 수 없다.
탁.
라니엘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곳은 잿빛 마탑의 앞이다. 요 며칠간은 장로를 만나러 이 탑에 들렸지만, 오늘은 아니다.
“라니아 교수님?”
라니엘은 레스티를 본다.
외면하고 있던 소녀를 똑바로 마주 바라본 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안녕, 레스티.”
라니엘이 쓰게 웃었다.
“네게 말해둬야 할 게 있다. 시간 괜찮아?”
최초의 광인은 자신이 던진 선택지 위에서 장로와, 그와 얽힌 이들이 고뇌하길 바란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하는 길 앞에서, 고뇌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즐기고 있으리라.
이에 라니엘은 결정한다.
광인이 제일 싫어할법한 일을 선택하자고.
그것이 설령, 가장 잔인한 길이더라도.
2.
레스티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을 찾아온 라니아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레스티가 알고 있는 라니아는 신비스럽고, 때로는 장난스럽기는 하나··· 결코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은 아니었다.
가벼운인물.
무언가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한듯한 인물.
어찌보면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던 자신의 옛 모습과 닮았다고 느꼈다. 어렸을 때의 자신과 같다고. 그러나, 지금 눈앞에 선 라니아를 보며 레스티는 큰 위화감을 느낀다.
무겁다.
올해로 스물둘이 된 교수가 아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한 누군가 제 앞에 앉아있다.
“레스티.”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레스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에 앞서, 하나 물어볼까 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그러나 무게를 담아서.
“내 조언이 도움이 됐니?”
뜬금없는 말이다.
주었던 조언이 워낙에 많았던 터라, 레스티는 잠깐 고민했으나··· 다음에 이어진 말에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레스티는 깨달았다.
“후회는 없었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라.
그것은 레스티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한마디다. 그 한마디가 있었기에 지금이 있다. 레스티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스티가 웃었다.
“도움이 됐어요. 정말 많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눈앞의 교수는 언제나 자신에게 조언해 주었고, 도움을 주었다. 크고 작은 도움들은 레스티가 나아가는 길을 보다 명확하게 해주었다.
“제게는 교수님이 스승님이나 마찬가지인걸요.”
“교수니까 스승이 맞지 그럼.”
“그런 의미의 스승이 아니라···.”
레스티가 부끄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장로님과 같은, 존경하고 모시고 싶은 스승님이요. 제게 라니아 교수님은 그런 분이세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렇게 여겨준다니 하는 말인데, 레스티?”
라니아가 질문했다.
“지금부터 내가 네게 부탁을 하나 할 건데,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 이건 내가 네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 될 거야.”
라니아는 상대에게 입힌 은혜를 앞세워 무언갈 부탁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것이 처음이었다.
“들어주겠니?”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레스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니아는 짧게 숨을 내뱉고선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그녀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결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쓰디 쓴 진실이다.
전부를 알리지는 않는다.
라니아는 레스티가 삼켜야 할 것을 쪼개고 쪼갰다. 몇 번에 걸쳐 삼킬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녀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
이야기를 들은 레스티가 침묵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니아를 마주 바라봤다. 그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으나, 벌어진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 말, 전부 진실이에요?”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숨기는 건 있다는 뜻이군요.”
레스티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부탁하셨으니까, 묻지 않을게요. 숨기시는 데 이유가 있다고 믿을게요. 여태까지 언제나 제게 도움이 되는 말만을 들려주셨으니까, 이번에도 믿을게요.”
쌓아온 관계가 있다.
자신이 두 번째로 모시게 된 스승의 말을 레스티는 신뢰하고자 한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나, 라니아의 말이기에 믿어보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가 감았던 눈을 뜬다.
그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레스티가 라니아를 보았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이지만, 소녀는 결코 눈물 흘리지 않는다.
“선택은 제가 해도 되는 거죠?”
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라고 말해준 거야.”
레스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니아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하던, 자신이 해야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레스티.”
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레스티가 뒤를 돌아봤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그녀에게, 라니아는 한마디를 던질 뿐이다.
“후회 없을 선택을 해.”
그것은 언젠가 그녀에게 던졌던 말이었다.
* * *
크렌벨의 의식은 불분명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잠에 들었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이번에도 그렇다. 크렌벨은 힘겨이 상반신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얼마나 잠을 잤던가.’
알 수 없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장로는 제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의자에는 레스티 엘레노아가 앉아있었다.
“레스티? 언제부터 와 있었느냐?”
“···조금 전에요.”
목소리가 잠겨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어깨가 축 처져 있다. 크렌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스티를 불렀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
“말해 보아라. 무슨 일이 있었길래···.”
“라니아 교수님께 들었어요.”
움찔, 하고 장로의 몸이 떨렸다.
“···무엇을?”
“한 달 뒤에, 장로님께 주어진 시간이 끝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레스티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다.
“주어진 시간이 끝난다. 수명이 다한다. 장로님께 남은 시간은 한 달 밖에 안 되는데···.”
레스티가 숨을 삼켰다.
“장로님께선 수명이 다한 뒤로도 다른 형태로 살아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육체를 그대로 간직한 채··· 다른 무언가가 된 채 살아계실 거라고.”
장로가 숨을 헛삼키는 가운데, 레스티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장로님께선 그걸 바라지 않으신다고.”
그러니까.
“올바른 죽음을 바라고 계신다고···.”
사실인가요.
그렇게 물을 필요는 없다.
장로의 표정이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기에.
“전부 사실이군요.”
“···미안하구나 레스티.”
“왜 제게 숨기셨는지, 왜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는지, 왜 그렇게 되는지 묻고 싶지만··· 정말 묻고 싶지만, 묻지 않을게요.”
물어선 안 된다고 말했으니까.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고 말했으니까.
레스티는 눈물을 삼킨 채 입을 열었다.
“그래서, 부탁하셨다고 하셨죠?”
장로는 자신을 죽여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했다. 그 부탁을 받은 것은 잿빛 마탑의 전 차기 마탑주인 라니엘 반 트리아스다. 라니아는 그렇게 레스티에게 말해주었다.
「잿빛 마법사는 장로의 부탁을 이행할 거야.」
「하지만, 네가 바란다면.」
「그 역할을 남겨둘 수는 있어.」
선택해라.
장로의 마지막 부탁을 타인에게 떠넘길 것인지, 혹은 스스로의 손으로 매듭지을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레스티 자신이다.
“······.”
레스티는 잠시동안 침묵한다.
제 눈가를 소매로 닦아낸 뒤, 레스티는 결연한 목소리로 장로를 향해 말한다.
“그럴 필요 없어요.”
레스티가 장로를 똑바로 바라봤다.
“장로님께서 마지막으로 바라시는 게 있다면, 그걸 들어주는 건 저여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매듭은 자신이 짓고 싶다.
그래야만 후회하지 않을 거 같다.
“······.”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레스티의 앞에서, 장로는 그만 숨을 헛삼키고 만다. 장로가 걱정하고, 또 염려하던 레스티는 그 자리에 없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선 것은, 장로가 기억하는 어리고 미숙했던 레스티가 아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는 이미 어엿한 한 명의 마법사다. 자신이 보호해줘야 할 어린아이가 아닌, 완성된 한 명의 인간.
“아하.”
장로는 웃음을 흘렸다.
“이것 참···.”
그러고보면, 자신이 잠든 지 4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했던가. 4년.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한 명의 아이가 어른이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잘 자라주었구나, 레스티.”
장로가 아릿한 웃음을 흘렸다.
늙어버린 노인이 팔을 들어 올렸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가락이 레스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레스티는 고개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괜찮다. 더 말할 필요 없어.”
장로가 말했다.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이미 어른이 됐구나. 시간 참 빠르지.”
자신의 시간은 4년 전 멈춰버렸다.
이 아이의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성장한 아이를 바라보며 부모는 웃는다.
“그래, 레스티.”
아버지가 웃었다.
“네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려무나.”
3.
며칠 뒤, 라니아는 자신을 찾아온 레스티를 마주했다. 장로가 눈을 뜬 이후로 하루하루가 기쁘다고 노래했던 소녀는 그 자리에 없다.
그곳에 있는 것은 마법사다.
“결정했어요.”
레스티가 라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알려주세요.”
라니아는 그날 말했었다.
네가 네 손으로 장로의 바람을 이루어주겠다고 결정한다면, 그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삶에서 벗어난 존재를 끊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방법을, 알려주세요.”
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간 미루고 미뤄둔 것.
와쳐(Watcher), 맥락을 읽는 이.
그 재능을 완전히 개화시킬 시기가 왔음을 라니아는 직감한다.
시간이 흐른다.
그 어느 때보다 길어질 한 달의 시간이.
* * *
“······.”
크렌벨은 몽롱한 눈동자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입에서, 코에서, 눈에서 피가 흐른다.
검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진다.
‘시간은 아직 남았거늘.’
열흘의 시간이 남아있을 텐데, 크렌벨은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느낀다. 제 몸이 그림자에게 잡아먹힘을 직감한다. 허나, 왜인지 모르게 크렌벨의 의식은 흐릿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선명해진다.
그 사실에 크렌벨은 두려움을 느낀다.
‘어째서?’
그림자에게 잡아먹힌다.
광인이 제 몸을 빼앗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의식은 송두리째 날아가 완전한 죽음을 맞이할 거라 크렌벨은 예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크렌벨의 착각이다.
그림자는 몸을 빼앗지 않는다.
크렌벨의 의식을 빼앗지도 않는다.
그저, 동화될 뿐이다.
크렌벨은 자신의 가치관이 변해감을 느낀다.
오랫동안 지켜온 신념이 흔들린다. 제 의식을 선명하게 유지한 채, 그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제정신인 채로 서서히 광기에 물들어감을 크렌벨은 느낀다. 그것은 끔찍한 공포다.
기억이 뒤섞인다.
성격이, 가치관이, 근간이 뒤섞인다.
자아를 유지한 채 광기에 물드는 것은 크렌벨이 상상한 것 이상의 공포다. 크렌벨은 손을 뻗어 제 입가를 매만졌다. 피가 흐르고 있지만 제 입가는 호선을 그리고 있다.
귓가에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메아리치는 웃음소리는 익숙하다.
크렌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창가를 바라봤다. 창문에 비춘 자신은 웃고 있었다. 기이하게 뒤틀린 입가는 제정신인 인간의 것이 아니다.
광인의 것이었다.
광기가 크렌벨의 귓가에 속삭였다.
선지자로서의 책무를 다하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