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30
〈 330화 〉 집결(3)
* * *
비틀린 회로가 부유한다.
그것은 라니엘이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회로요, 얕은 지식으로나마 알고 있는 회로다. 그러니까, 고대에 만들어진 아르카디아의 회로.
인류의 역사에서 지워진 마법.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만 주문.
인류가 잃어버린 고대의 마도(??)가 지금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의 마법사로서 이 상황에 감탄하고 싶긴 하나, 그럴 수 없음을 라니엘은 안다. 라니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성가신데.’
고대의 회로.
스케발을 상대하며 몇 번 마주하긴 했지만, 지금 떠오른 회로는 스케발의 것보다 완성도가 높다. 뿌리는 같으나 뻗어 나간 가지의 수가 다르다.
예측이 안 된다.
예측이 안 되니,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고대의 회로가 어떤 방향으로 ‘어떤식’으로 함정을 만들어놨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렇기엔, 상태가 좋지 않다.’
이곳까지오며 수많은 마수를 불태웠다.
스케발과의 교전을 빨리 끝내고자 무리해서 마나를 끌어다 썼다. 심장에 새긴 회로를 과열시키느라 마나는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
라니엘은 침묵했다.
상대는 최소 4개의 클래스를 다룰 줄 아는 마법사다. 상대의 한계를 아직 알 수 없다. 떠오른 저 회로가 무슨 작용을 할지도 알 수 없다.
미지(??).
아직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을 상대로 무슨 수를 골라야 하고, 자신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을 라니엘은 도출한다. 빠르게 움직인 라니엘의 눈동자는 최상층의 한가운데에서 꿈틀거리는 씨앗을 발견한다.
“미친 새끼.”
무심코 라니엘이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광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 고맙군.”
직후 회로가 차례로 빛을 뿜었다.
섬광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라니엘은 가볍게 옆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다. 이어서 팔을 뻗었다. 뻗어서, 이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단서를 라니엘은 붙잡았다.
숨을 죽이고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소녀.
레스티 엘레노아를 라니엘은 붙잡았다.
2.
레스티 엘레노아는 혼란스럽다.
방금 자신이 무엇을 들은 건가.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젖히고 라니아 교수님이 나타났을 때만 해도 레스티는 안심했다. 라니아 교수님이 있다면 무엇이든 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뒤이어 이어진 광인의 말에 레스티는 침묵했다.
「라니엘 반 트리아스.」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잿빛 마법사.」
라니아가 아닌 라니엘.
후예가 아닌 잿빛 마법사.
광인은 분명 그리 말했지만, 라니엘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긍정과 같았다. 레스티는 라니엘의 옆모습을 흘겨봤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라니아 교수님이, 라니엘 님이라고?
레스티는 한순간 그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라니엘과 오랜 세월 비교를 당하며 천대받아왔던 레스티다. 그 속에서 싹튼 앙금이 없다면 거짓이리라. 지금에 와서야 많이 희석됐지만···.
여전히, 레스티 엘레노아는 잿빛 마법사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진 않다.
레스티에게 있어 라니엘 반 트리아스는 언젠가 넘어서야 할 벽이다. 하지만 라니아는 레스티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가. 제 두 번째 스승이 되어준 인물이다. 또한 생명의 은인이다.
그 간극 사이에서 레스티가 당황한다.
숨을 헛삼킨 채 레스티가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와중이다. 콱, 하고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교수님?”
라니아였다.
라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레스티의 팔을 끌어당겨 그녀를 들쳐 안았다. 그리곤 탁, 하고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다.
번쩍!
직후 섬광이 터져 나왔다.
형상을 알 수 없는 주문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간다. 라니엘은 직감으로 주문을 회피한 채 벽을 타고 달리기 시작한다.
마탑의 최상층.
모든 벽이 허물어져 거대한 공동이 된 그곳을 내달리며, 라니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땅이 뒤흔들리고 지형이 뒤바뀐다. 마탑은 마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쿠구구구구궁!
마석과 마석의 이음매.
마탑의 전체까진 아니더라도, 이 최상층의 마석 만큼은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라니엘은 알고 있다. 그 연결을 지금 해제한다.
마석과 마석이 분리된다.
마나의 흐름을 타고 마석들이 부유한다.
무너진 바닥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천장이 무너져 내려 햇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부유하는 지면을 밟고 밟으며 라니엘은 주문을 회피한다.
키이이이잉!
열선이 스쳐 지나간다.
수십 발의 송곳이 머리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그 모든 것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하며 라니엘은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레스티.”
레스티는 라니엘을 올려다본다.
“십 초 뒤에, 떠오른 마석들을 전부 제자리로 맞출 거야.”
라니엘은 앞만을 보고 달리고 있다.
“그때가 기회야.”
그녀가 크게 도약했다.
공중에서 사슬을 내걸며 착지한 라니엘이 짧게 숨을 돌렸다. 레스티를 보았다.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레스티를 보았다.
“미친 짓이긴 한데, 이것밖에 답이 없다.”
라니엘이 무언가 말했다.
그것을 들은 순간 레스티가 눈을 크게 떴다. 미친 짓이었다. 최소한, 이런 상황에서 쓸만한 수단은 아니었다.
“···진심이세요?”
라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티는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갑작스레 알게 된 진실에 레스티는 눈앞의 여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 혼란스러웠거늘···.
“널 믿는다.”
라니엘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레스티는 머릿속이 깔끔해짐을 느낀다. 푸르스름한 눈동자. 수많고 수많은 눈동자 중 오직 저 눈동자만이 자신을 봐 주었다.
「할 수 있지?」
「믿는다.」
잿빛의 차기 마탑주가 아닌, 레스티 엘레노아라는 한 명의 인간을 봐주었던 눈이다. 언제나와 다를 바가 없는 그 눈동자에서, 레스티는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 또한 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보내준 믿음에 답하는 것.
레스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니엘이 웃음을 흘렸다.
“고맙다.”
라니엘이 발을 굴렀다.
떠올랐던 마석들이 한순간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듯 맞춰지는 마탑의 구조가 광인의 시야를 가린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을 때.
레스티는 땅을 디디고 섰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부릅뜬 레스티의 눈동자에 백금색의 고리가 겹쳐진다. 하나, 둘, 셋.
“···저건?”
한순간 광인이 당황한다.
눈동자에 겹쳐진 백금색의 고리는 셋.
마법사의 신과 같은 눈동자를 개안(??)한 소녀의 앞에 광인은 숨을 헛삼킨다.
그리고, 광인은 또 다른 사실을 깨닫는다.
라니엘 반 트리아스는 눈을 감고 있다.
자세를 낮춘 채 그녀는 감은 눈을 뜰 생각을 하질 않는다. 가늘게 뜬 광인의 눈동자에는 라니엘이 사용한 주문이 보인다.
시야공유.
서머너가 사역마와 자신의 시야를 연결하듯, 라니엘은 레스티와 시야를 연결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광인은 깨닫는다.
레스티가 한쪽 눈을 감는다.
라니엘은 한쪽 눈을 뜬다.
“이야 씨팔.”
라니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느낌이구나?”
주륵.
라니엘의 코와 눈에서 피가 흘렀다. 와쳐의 재능이 없는 이가, 별의 시야를 탐했다. 그 대가를 치르듯이 라니엘의 눈동자에 핏발이 선다.
허나 눈을 감지는 않는다.
부하를 견뎌내며 라니엘이 한걸음 내디딘다.
“넌 뒤졌어.”
3.
와쳐(Watcher)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때려 박는다. 이 시야를 인간의 몸으로 오래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길어봐야 10초 남짓.’
그것이 레스티와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다.
라니엘은 그 사실을 곱씹으며 움직인다.
한걸음 내디딘 순간 몸에서 미친 듯이 잿가루가 솟구쳤다. 라니엘은 그 10초에 모든 것을 걸고자 다짐한다.
남은 마나를 모조리 불태운다.
잿빛으로 화(?)한 마나를 두른 채 라니엘이 달리기 시작한다. 광인의 회로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빛난다. 좀 전까진 이해할 수 없는 고대의 회로였으나··· 지금의 라니엘에겐 아니다.
‘보인다.’
보이는 순간 이해가 된다.
라니엘은 빛을 뿜는 회로를 향해 손을 뻗는다. 분명 처음 본 회로이나, 그것의 구조를 라니엘은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다.
구부린 손가락을 갈고리 걸듯 회로에 걸고, 그대로 잡아당긴다.
촤라라라락!
회로가 해체된다.
하나의 회로를 해체한 순간, 라니엘은 요령을 터득한다. 곧장 지식을 활용한다. 수십 다발의 강타를 라니엘은 사방으로 사출한다.
콰직!
회로의 핵심에 강타가 처박힌다.
쳐박힌 강타에 담긴 잿빛 마나가 회로의 완성을 방해한다. 단숨에 수십 개의 회로가 무력화된다. 남은 회로가 라니엘을 노리고 빛을 뿜지만···.
그 궤적이, 그것이 움직이는 길이 와쳐의 눈에는 전부 읽힌다. 각막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라니엘은 눈에 더 힘을 준다.
감지마라. 전부 보아라. 이해해라.
광인이 사역마를 있는 대로 불러모은다.
솟구친 기사들이, 구정물로 얽힌 용()이 괴성을 내지르나 그것이 오래가진 못한다. 그들 사이를 잿빛의 인영이 스쳐 지나간다. 뒤늦게 콰아아앙 소리를 내며 폭발이 뒤따른다.
“···광전사 같군.”
광인은 그리 중얼거리며 뒤로 도약한다.
괜히 자신이 대마법사라 불린 것이 아님을 입증하듯, 광인은 동시에 네 분류의 주문을 다룬다.
사령술, 주술, 원소주문, 소환술.
죽어나간 이들의 원혼을 주술로 공양하고, 치환된 마나로 특대의 원소주문을 터뜨린다. 소환수를 흩뿌려 라니엘의 발길을 묶어둔다.
완성된 주문은 천벌.
콰르르르르르릉!
하늘위에서 떨어진 거대한 섬광이 마탑의 천장을 깨부순다. 마탑에 몇 겹으로 발린 저항 주문이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섬광은 라니엘의 몸을 집어삼킨다.
최고위 마법이다.
일대를 섬멸하는 주문에 몇 개의 제약회로를 걸어 범위를 한정시켰다. 허나, 그 섬광을 꿰뚫고 튀어나오는 이가 있다.
피를 흩뿌리며.
제 몸을 신경 쓰지 않으며.
오직 앞만을 보고 달리는 마법사가 있다.
그 핏발선 눈동자에서 광인은 모종의 광기를 느낀다. 마나를 저항하는 잿빛 마나 하나만을 믿고 최고위 주문을 맨몸으로 뚫어낸 것이다.
거리가 좁혀진다.
광인은 쯧 혀를 차며 형체를 흐트러트리고자 한다. 광인은 본래 형체 없는 그림자다. 잠시 육신을 버리고 도망치면···.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다.
콱, 하고.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역마가 광인의 몸을 물어뜯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자신에게 사역마의 물리적인 공격 따위 통하지 않는다. 그리 생각한 광인은 그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허나, 그것은 실착이다.
광인이 두 눈을 부릅뜬다.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진다. 자신을 물어뜯은 늑대의 이빨. 그곳에는 잿빛 마나가 일렁이고 있다. 광인은 눈을 부릅뜬 채 라니엘의 뒤편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본다.
잿빛 마법사만이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 그 마나를, 미약하지만 저 소녀도 다루고 있다.
늑대의 이빨에 흐르는 잿빛 마나가 광인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 자리에 붙들어둔다. 그림자로 변하지 못한 광인은 헛웃음을 터뜨린다.
“허···.”
어느새 거리는 완전히 좁혀졌다.
코앞까지 다가온 잿빛 마법사가, 피를 흩뿌리며 손아귀를 뻗어오고 있다. 잿빛 마나가 휘감긴 그 손아귀가 드디어 광인에게 닿는다.
“잡았다.”
라니엘이 웃음을 터뜨린다.
광인의 머리를 움켜쥔 채, 라니엘은 바닥을 향해 광인의 머리를 내려찍는다. 모으고 모은 마나를 한순간에 터뜨린다.
재는 재로(Ashes to Ashes).
한순간의 섬광.
천벌이 꽂혔을 때보다 더 눈부신 섬광이 일대를 매우고, 굉음이 그 뒤를 따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바닥이 무너져내린다.
지면이 터져나가고 아래 계층을 향해 두 사람은 추락한다. 광인은 넝마가 된 제 육체를 수습하려 하나 좀처럼 수습이 되지가 않는다. 빌어먹을 잿빛 마나가 재생을 방해한다.
‘하지만···.’
일격에 모든 걸 쏟아부은 잿빛과 달리, 자신에겐 남은 마나가 있다. 광인이 자신과 함께 추락하는 잿빛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다.
잿빛은 웃음을 흘리고 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그녀는 웃고 있다.
숨겨둔 수가 있나? 없을 텐데?
그리 생각하던 와중, 제 시야가 좁아져 있음을 광인은 깨닫는다. 시야의 바깥에서 누군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가더(Guarder), 칼트.
그가 추락하던 라니엘의 몸을 받은 채, 미끄러지듯 착지한다. 그와 달리 지면에 꼴사납게 쳐박힌 광인은 천천히 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어.”
그리곤, 광인은 헛웃음을 흘린다.
초인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일어선 라니엘.
그녀를 보호하듯 몇몇 인물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그들의 영혼이 가진 색채를 읽으며 광인은 광소를 터뜨린다.
라크 반 그레이스.
도끼를 바닥에 꽂은 채 그는 허공을 움켜쥐고 있다. 주인의 부름에 답하듯 최초의 용사가 쥐었던 성검이 라크의 손아귀에 쥐어진다.
벨노아 반 드라고닉.
태초의 신과 계약한 소년의 곁에는 메마른 바람이 맴돈다. 그 발밑으로는 광인의 것과는 본질이 다른 탄생의 그림자가 맴돌고 있다.
스텔라, 아일라.
별에게 사랑받는 그녀의 주변에는 별의 축복이 깃든다. 광인의 그림자는 아일라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자신을 막기 위해 탄생한 생명에게 광인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두 개의 광채를 지닌 용사.
“용사, 클로에.”
성류의 용사 클로에.
“가세하겠습니다.”
다음을 이끌어갈 이들이 집결했다.
판은 뒤엎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