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38
〈 338화 〉 주어진 시간(7)
* * *
비가 쏟아졌다.
밤낮으로 쏟아지는 비는 멈출 생각이 없다.
귀를 기울이면 수많은 소리가 들려온다.
쏟아지는 비가 이파리에 튕기는 소리,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울리는 소리, 교회의 창을 두들기는 소리.
그리고, 사라의 기도 소리.
수많은 소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카일은 여전히 명상을 계속하고 있다. 하룻밤 동안 바뀐 게 있다면, 내려두었던 성검을 다시 손에 쥔 것뿐이다.
“······.”
성검을 손에 쥔 채 카일은 떠올린다.
떠올리는 것은 내면의 벽.
···본래 용사는 내면의 벽을 인지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용사로서 각성한다는 것은 별빛으로 벽을 허물어트리는 일이요, 편법을 써서 성장 한계를 부서트리는 일이었으니까.
본래 인지하지 못할 것.
존재하지도 않을 벽.
하지만, 죽음의 칼과의 재회에서 카일은 내면의 벽을 인지했다. 그것은 용사로서의 카일 토벤이 아닌, 인간 카일 토벤이 가지고 있던 벽이다. 별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여긴 겁쟁이였던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던 굳건한 벽.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베어냈다.
벽을 베고 그날 카일은 초인이 됐다.
지금 카일은 벽의 너머에 서 있다. 제 앞에는 광활히 펼쳐져 있는 평야가 있다. 그 평야의 위에서 카일은 꿈에서 보았던 풍경을 떠올린다.
최초의 용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그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그 경지는 얼마나 걸어야 닿을 수 있는가.
한때는 그 경지가 자신이 만들어낸 망상이자 허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도저히 닿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편법을 쓰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 경지가 보인다.
바람이 불어오는 평야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상처투성이에 외팔인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카일을 기다리고 있다. 카일은 남자와 자신 사이에 놓인 거리를 가늠해봤다.
‘···멀다.’
멀고도 험하다.
여전히 갈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보인다.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보이므로 실존하는 경지다.
실존하기에, 분명히 닿을 수 있는 경지다.
“······.”
카일이 감았던 눈을 떴다.
내면의 벽은 사라지고 시간은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에서 카일은 제 손에 쥐어진 검을 바라봤다. 한 자루의 검. 이 한 자루의 검으로 자신은 위업을 이루어내야만 하리라.
마음은 어느 때보다 고요하다.
몸은 어느 때보다 가볍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이 모두가 라니엘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계약이란 점이다. 카일은 알고 있다. 라니엘이 ‘이딴 식’의 계획에 동의할 리가 없다는 것쯤은.
그녀가 동의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
카일은 그것을 억지로 라니엘에게 떠넘길 것이다. 멋대로 그녀를 살릴 것이다. 빚을 갚는다는 명분 하에 내린 이기적인 선택이다. 그렇기에, 카일은 조금이지만 망설인다.
망설임, 그리고 흔들림.
그것을 떨쳐내고자 카일이 명상을 거듭하던 와중이다. 비가 쏟아지는 바깥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가볍지만, 동시에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거대한 기척.
그 기척이 교회의 문을 두들겼다.
카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교회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문 앞에 선 인물과 마주한 순간 카일의 몸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넌?”
카일의 물음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라니엘 반 드라고닉이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야. 카일.”
그녀가 아프게 웃었다.
2.
카일은 눈앞의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13년 뒤의 미래에서 찾아온 라니엘이라고 소개했다.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그 터무니없는 말을 신뢰하게 할 만큼 그녀가 가진 존재감은 거대했다.
인간이 아니다.
별에게 선택받은 이 또한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
그것을 인간은 경의를 담아 신(?)이라고 부르곤 한다. 별을 모시기 위한 낡아해진 교회. 그곳에 별도 그늘도 아닌 또 다른 신이 앉아있다.
“너는···.”
카일이 질문했다.
“별과 같은 존재인가?”
“존재의 계통으로 따지자면 비슷하긴 해. 근본적으로는 다르긴 하지만··· 음.”
설명하기 어렵네.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은 배시시 웃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그녀는 카일과 대화하는 동안 줄곧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대화 자체가 즐겁다는 듯이.
“사실 그렇게 어렵게 볼 것도 없어.”
여전히 웃으며 미래의 라니엘이 말했다.
“나는 그냥 허울뿐인 신이야. 애초에 내게 기도하는 신자는 단 한 명도 없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그냥, 나를 믿는 사람이 없거든. 내가 좀 못났나 봐. 내게 기도 올리는 사람이 없다?”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에서 카일은 위화감을 느꼈다. 라니엘이 거짓을 입에 담을 때, 혹은 허세를 부릴 때 자주 짓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확신하기는 어렵다.
라니엘과는 조금은 다른 웃음이었으니까.
애초에, 눈앞에 앉아있는 여인은 카일이 알고 있던 라니엘의 모습은 아니다. 라니아의 모습과도 거리가 제법 있는 편이다.
사락.
어깨위에서 흔들리는 단발의 머리칼은 더는 잿빛을 띠지 않는다. 차라리 백발에 가깝다. 가느다란 속눈썹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 또한 번들거리는 푸른빛을 잃은 지 오래다.
공허한 푸른 눈동자.
텅 비어버린 거 같은 그 시선을 마주한 채 카일은 침묵했다. 라니아와 비교했을 때 눈앞의 그녀는 그리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다. 두른 분위기 탓에 큰 차이가 있다고 느껴질 뿐이다.
‘···이상하군.’
카일은 눈매가 조금 더 가늘어졌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알고 있는 라니엘이 아니다. 13년의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엇을 겪었길래 라니엘이 저렇게 변했는지 카일로선 알 수 없다. 짐작할 수도 없다.
“···13년 후의 미래에서 왔다고 했나?”
“그게 가능하냐고 묻고 싶은 눈치네.”
“신 같은 존재가 되면 그런 것도 가능한가 보군.”
“아니?”
라니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신이라고 해서 그리 거창한 건 아니야. 너희와 똑같이 섭리에 얽매이지. 오히려 더 강하게. 그러니··· 내 몸이 이런 거 아니겠어?”
라니엘은 제 양손을 카일을 향해 쫙 펼쳤다. 그 손바닥은 흐릿했다. 당장에라도 흩어질 것처럼.
“금기를 거슬렀어. 가장 큰 금기를. 그 대가가 이거지.”
세상에 간섭할 수 없다.
육체는 무너지고 있다.
라니엘은 쓰게 웃으며 제 손을 감췄다. 정해진 섭리를 거슬러 회귀(回?)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막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법이다.
“···네 말대로라면.”
그리고, 카일은 질문했다.
“그만한 대가를 지면서까지 과거로 돌아올 이유가 무엇이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냐고.
왜 이 시간대로 회귀해 온 것이냐고.
그리 묻는 카일에게 미래의 라니엘은 곧장 답하지 못했다. 가느다란 숨결을 내뱉은 그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였으니까.”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모든 게 꼬였으니까.”
그녀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모든 게 망가졌으니까.”
흔들리는 잿빛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비어버린 눈동자는 더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거 알아, 카일?”
차마 카일을 마주 바라볼 수 없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채 카일에게 말했다.
“···너는 너보다 내가 용사에 더 어울린다고 말했어. 13년 전의 그날, 이곳에서 너는 내게 별을 넘기며 그렇게 말했었지.”
용사에 어울리는 이가 있다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라니엘, 너다.
“하지만 그건 틀렸어.”
라니엘의 입가에서 메마른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실패했어, 카일. 처참하게. 아주 처참하게 실패했지. 지키고자 했던 것을 지키지 못했고, 이루고자 했던 것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고개 숙인그녀를 카일은 보았다.
“내 세상이 어떻게 된 줄 알아? 그래, 미안해. 아깐 거짓말을 했어. 내 세상은 멸망했어 카일. 내게 기도를 올리는 신도가 없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실패했으니까.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말했다.
“내 세상은 잿더미가 됐어.”
카일은 말없이 라니엘을 보았다.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자신이지만, 카일은 지금 그녀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그녀는 말하고 있다.
이곳에 앉아있는 자신이 아닌, 그녀가 겪었던 시간대의 카일에게 고해를 하고 있었다.
“네가 바라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야. 네가 바랐던 것처럼 신(?)도 되어봤지만··· 결국에 나는 완벽해질 수는 없었어.”
라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봐 카일.”
그녀가 제 양팔을 쫙 펼쳤다.
그제서야 카일은 눈치챘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용사의 정복이란 것을. 그리고,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똑같다는 것을.
“내가 용사로 보여?”
네가 바랬던 완벽한 인간으로 보여?
카일은 차마 그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나는 실패자야. 추하기 짝이 없는 실패자.”
그 말 또한카일은 부정하지 못한다.
“왜 과거로 돌아왔냐고 물었지? 나는 네게 부탁하려고 이곳에 왔어. 너를 설득하기 위해서.”
그녀가 말했다.
애원하듯이 말했다.
“내게 별을 넘기지 마, 카일 토벤.”
비어버린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렀다.
공허한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땅으로 떨어졌지만, 땅을 적시지는 못한다. 형체 없이 바스러질 뿐이다. 작은 흔적을 남기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냥, 나를 이곳에서 죽게 내버려둬.”
그녀가 애원했다.
그리고, 카일은···.
3.
카르디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창밖을 바라봤다. 밤이 깊었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흘려 들으며 카르디는 며칠 전 마주했던 인물을 떠올렸다.
13년 뒤의 미래에서 온 라니엘.
신이 되어버린 인간.
그녀는 시간을 거스르는 금기를 저질렀지만, 그녀라 하여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녀는 말했다. 자신이 간섭할 수 있는 시간대는 카일의 계약이 수행되는 시간뿐이라고.
죽음의 칼 가니칼트와의 조우.
그리고 마지막 시련을 통과하려는 지금.
라니엘은 전자를 거쳐 후자의 시간대에 도착했고, 지금 이 순간 계획을 수행하려고 한다. 그녀가 말한 계획을 카르디는 떠올렸다.
「카일은 나를 살리기 위해 계약을 맺었어.」
「나는 그 계약을 막을 거야.」
「이 자리에서 나는 죽어야 해. 반드시 그래야만 해. 살아봤자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계속해서 실패할 뿐이야.」
그녀는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끝에 맞이하는 미래는 멸망이야.」
「내 세상은 잿더미가 됐어. 그 미래를 반복해선 안 돼. 그러니, 바꿔야겠지.」
나보고 라니엘을 죽이라는 거냐?
아니면, 너가?
그렇게 묻는 카르디에게 라니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런 가혹한 부탁을 할 생각도 없으며··· 자신은 이 시간대에 그리 크게 간섭할 수 없다고.
「애초에 카일이 계약을 파기해야 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카일을 설득해야지.」
설득.
「나는 카일을 설득할 거야.」
「네가 행한 계약의 끝은 이렇다고. 나는 실패했고, 나를 살려봤자 의미가 없다고. 나는 네가 생각한 것만큼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며 보여줄 거야.
「실패한 나를.」
「처참하게 망가진 나를 보고 나면.」
「그럼, 무언가 생각이 바뀌지 않겠어?」
그것이 유일한 답이다.
그리 말하는 미래의 라니엘을 카르디는 착잡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설득에 실패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카르디는 그렇게 질문했다.
그 질문에 라니엘은 두 번째 계획을 들려주었다. 거기까지 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기어코 세워둔 두 번째 계획을. 그 계획을 듣고서 카르디는 라니엘에게 협조를 약속했다.
확신했으니까.
그 계획이 쓰이게 될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설득이 될 리가 있나.”
시간이 흐른 지금.
창밖을 바라보며 카르디는 중얼거렸다.
“안 될 거다. 라니엘.”
카르디는 마주했던 카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각오를 다진 이의 얼굴이었고.
또한, 오래전 옛 동료에게서 보았던 얼굴이기도 하다. 최후의 순간 자신에게 부탁하던 가니칼트 또한 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해라, 카르디.」
「방법은 이것뿐이다.」
빌어먹을 칼잡이 새끼들.
그리 중얼거리며 카르디가 쓰게 웃었다.
“···그놈도 말은 더럽게 안 처먹었으니까.”
* * *
카일은 라니엘을 보았다.
그녀는 눈물 흘리며, 천천히 의자에서 내려와 카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고해하듯이. 자신의 죄를 알리듯이 그녀는 카일에게 빌었다.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라고.
나는 실패했을 뿐이라고.
결국에, 나는 무너지고 말 거라고.
“그냥, 나를 이곳에서 죽게 내버려 둬.”
라니엘이 애원했다.
그리고 카일은 입을 열었다.
“일어서라.”
카일이 라니엘의 팔을 잡아당겼다.
무릎 꿇은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내가 아는 너는, 이딴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일어서라, 라니엘 반 트리아스.”
드라고닉이 아닌 트리아스.
라니엘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일어서라.』
그것은 라니엘이 몇 번이고 카일에게 던졌던 말이었으므로. 그것을 돌려받게 된 지금, 미래에서 온 라니엘의 이성은 끊어지고 만다.
“네가.”
라니엘이 말했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아는데?”
그리 말하는 라니엘을 보며 카일은 쓰게 웃었다.
카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역할이 반대가 됐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