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37
〈 337화 〉 주어진 시간(6)
* * *
4년 전, 셀레프 왕국의 옛터.
그곳에서 카일 토벤은 마왕을 마주했다.
검은 들판이 펼쳐진 그곳을 건너는 도중, 갑작스레 하늘이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먹구름이 꼈다고 생각했지만, 그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두워진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툭, 투둑.
그것은 빗방울이었다.
검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떨어지고 떨어진 빗방울은 무너진 왕국의 잔해를 적셨고, 땅이 갈라져 만들어진 고랑을 타고 흘렀다. 흐르고 또 흘러서, 한줄기의 강을 이루었다.
쏴아아아아아!
비는 계속해서 쏟아졌다.
고작 비를 좀 맞았다고 추위를 느낄 용사의 육체가 아니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멀쩡한 것이 바로 용사의 육체다. 하지만, 그날 비를 맞으며 카일은 추위에 떨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카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라와 레미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은 두 번째 걸음마저 내딛지는 못했다. 더는 도망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끽, 끼긱. 끼기긱.
무언가 비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틀림은 거대해졌고, 뒤이어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메아리쳤다. 그것은 누군가의 비명 같기도, 손톱으로 무언가를 할퀴는 것 같기도 한 기이한 음색이었다.
끽■■. ■■■■긱.
그리고 그것이 나타났다.
■■. ■■■■■■■■■■■■■■■■■■■■.
땅을 흐르는 구정물에서 손아귀가,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정물에서 다시 손아귀가, 그렇게 지천(??)으로 솟구친 손아귀가 하나의 형체를 이루었다.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일어났다.
찰나의 순간 나타난 존재.
그 존재를 마주한 순간 카일은, 그 자리에 서 있던 모두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이 만마의 주인이라고. 별의 대척점에 선 존재라고.
그러니까.
【■■■■, ■■■■■■.】
마왕(?王)이라고.
쿠구구구궁!
검은 구정물의 파도가 밀려든다.
손아귀가 내려 찍힐 때마다 땅이 뒤흔들리고 구정물이 비산했다. 닿는 모든 걸 집어삼키는 검은 파도 앞에 카일은 성검을 쥐었다. 무엇이라도 해보기 위해 성검을 쥐었으나···.
“···아?”
성검은 답하지 않는다.
별빛이 꺼진 성검은 그저 날이 좀 잘 드는 명검에 불과하다. 빛이 사라진 것은 성검만이 아니다. 제 육체에 감돌던 별빛도, 조언을 들려주던 별의 목소리도 모조리 사라졌다.
용사라는 존재를 이루는 요소.
카일에게 있어선 전부인 그것.
별이 카일의 곁을 떠났다.
그 자리에서 카일은 한낱 인간으로 전락했다. 인간으로 떨어진 용사는 특별함을 잃었다. 용기도 잃었다. 긍지도, 자긍심도 모두 잃었다. 그 순간 혼자가 된 카일은 공포에 질렸다.
딱, 따닥.
카일의 윗니와 아랫니가 미친 듯이 맞부딪쳤다.
공포 속에서 정신이 뒤흔들린다. 승리를 상징하던 용사는 그 자리에 없다. 그곳에 있는 건 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쟁이일 뿐이다.
카일은 꼴사납게 도망쳤다.
성검을 떨어트리고, 등을 돌리고,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다. 그 어느 때보다 추한 뜀박질로 밀려드는 구정물에게서 벗어났다.
달리고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가, 카일은 제 등 뒤에서 솟구치는 섬광에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기절해버린 사라와 레미아를 대신해 앞으로 나아가는 라니엘이 있었다.
“바친다.”
라니엘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내 수명의 절반을.”
그 목소리를 카일은 똑똑히 들었다.
범람하는 그늘에 맞서, 범람하는 별빛을 똑똑히 보았다. 듣고 보았으므로 카일은 깨달았다.
‘나는 도망쳤지만.’
라니엘은.
‘저 녀석은.’
언제나 답을 찾으려 하는, 현자는.
‘여전히, 여전히 도망치지 않고서···.’
그곳에서 다시 답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신화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괴물의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딛고 있다. 뒤돌아 도망치는 자신과 달리 앞으로.
빛이 범람했다.
범람하는 빛에 카일의 발밑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순간 카일은 비참함마저 느끼지 못한다. 질투도, 동경도, 선망도 느끼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느낀 건 공허함과 허탈함이다.
챠르르르르륵!
별을 머금은 거대한 사슬이 솟구쳤다.
솟구치는 사슬이 구정물을 묶는다. 마왕의 움직임을 틀어막았다. 신과 같은 존재를 라니엘은 기어코 그 자리에 묶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가.”
카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부서 무언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 * *
그렇게 그들은 마왕에게서 도망쳤다.
마왕에게 도망친 직후, 라니엘은 수명을 갈아 넣은 대가로 쓰러졌다. 신을 잃은 사라는 망가졌다. 공포에 질린 레미아는 제 살갗을 할퀴었다. 그리고 카일은, 홀로 막사 바깥으로 나왔다.
깊은 밤.
별이 카일을 비추었다.
별의 아래에서 카일은 멍하니 제 손바닥을 보았다. 몇 번이고 검을 휘둘렀던 손. 언젠가는 라니엘처럼 누군가로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휘둘렀던 과거가 떠올랐다.
과거는 현재에 이른다.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지만 카일은 가장 중요한 순간 도망쳤다. 추한 몰골로.
“······.”
카일은 제 발밑을 보았다.
메마른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지만, 카일의 눈에 땅은 질척한 늪으로 보였다. 자신을 믿고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의 피가 늪을 만들었다.
늪의 위를 걷는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샌가 자신은 늪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책임이 카일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순간 쌓이고 쌓여온 의심이 카일을 집어삼켰다.
마왕(?王).
자신이 보았던 그것을 벨 수 있는가? 그것은 애초에 벨 수 있는 존재인가?
내게 가능한 일인가?
수십 년을 수련하면 가능할까?
수십년에 다시 수십 년을 수련한다 하여, 내가 꿈에서 보았던 그 검격을 재현할 수 있나? 아니, 애초에 그건 실존하는 경지인가?
사실 전부 나의 망상이 아니었을까?
모든건 꿈이고, 결국에 나는 닿지 못할 경지를 꿈꾸고 있었을 뿐인 게 아닌가?
수많은 의문이 카일을 좀 먹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이 카일을 완전히 집어삼키려는 무렵이다. 쿨럭, 하고 마른기침 소리가 막사의 안에서 들려왔다. 뒤이어 철퍽, 핏덩이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가능합니다.
육체적인 부상이야 치료할 수 있지만, 이건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영혼 그 자체가···.
사제들의 웅성거림.
피를 토해내며 죽어가는 라니엘.
한 번에 너무 많은 힘을.
가질 수 없는 것을.
아마도, 오늘 밤을 넘기기가 힘들 거라고.
별의 힘은 애초에···.
카일이 눈을 감았다.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갔다. 사제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음 소리도, 라니엘이 피를 게워내는 소리도, 사라가 겁에 질려 기도를 읊는 소리도, 레미아가 제 살갗을 할퀴는 소리도···.
그 모든 게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현실과 유리된듯한 기분을 느끼며 카일은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내가 도망친 자리.
의무를 던지고 도망치고만 전장.
그곳에서 라니엘은 카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했다. 라니엘이 목숨을 걸었기에,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라니엘에겐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녀석은···’
녀석은, 완벽한 존재였다.
‘닿을 수 없는 완벽한 존재.’
자신은 결코 라니엘처럼 될 수 없다.
카일은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하.”
카일은 더는 라니엘을 시기하지 않는다.
질투하지도 않았다.
라니엘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동경도 선망도 하지 않게 됐다.
그저, 라니엘을 하나의 완벽한 존재로 여겼다.
그것은 숭배이자 우상에 가깝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우상이 죽음으로 달려가는 가운데··· 카일은 선택을 내렸다.
카일이 감았던 눈을 떴다.
“······.”
카일은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별을 바라보며 카일은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계약이다, 대가를 받아라.」
무의식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기억.
잊히고 지워진 기억 속에서 누군가는 별에게 거래를 요구했다. 별은 그 요구에 답했다. 그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카일은 입을 열었다.
“···나는.”
2.
“나는 용사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아.”
카일이 말했다.
잠에 든 라니아의 앞에서, 떠오른 천칭의 앞에서 카일이 쓰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용사 같은 존재가 아니야.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고 포기하지 않아서, 결국 위업을 세우고 마는 그런 용사가 될 수 없어.”
동화 속의 영웅들.
“나는 그저 분에 넘치는 힘을 받았을 뿐인 애송이지.”
동경했지만 자신은 그리되지 못했다.
“별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 그저 과분한 힘을 받아서, 그것이 내가 이루어낸 것이라 착각하고 휘두르기만 했을··· 애송이.”
자신의 길을 돌아보면 그렇다.
카일은 신의 앞에서 고해하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 내게 이 힘은 과분해.”
그날 계약을 맺었던 날과 똑같은 말을 카일은 입에 담았다.
“이 힘은 더 어울리는 이에게 가야 해. 나 같은 겁쟁이가 아닌··· 언제나 목숨을 걸고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걸 쌓아온 영웅에게.”
그날 카일의 소망을 들은 별은 이렇게 답했었다. 네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선, 너는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영혼은 정해져 있다.】
범인은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면서부터 별에게 선택을 받은 이 만이 별빛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네가 바라는 이에게 별빛을 양도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카일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과거의 대현자가 맺었던 계약을 카일은 알고 있다. 평범한 인간의 영혼을 ‘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혼으로 변질하는 방법이 그곳에 있었다.
‘시련.’
시련을 치르는 것.
세상의 규율을 흐트러트릴 만큼의 대가를 시련으로서 지불하고··· 섭리를 비틀 권리를 얻는 것. 그날 자신이 받은 시련을 카일은 떠올렸다.
【죽음을 물리쳐라.】
하나는, 죽음의 칼을 물리치는 것.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게 저항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외면한 위업을 이루어라.】
자신이 도망쳤던 장소에서, 자신이 외면했던 위업을 이루는 것. 달리 말하자면 마왕에게 대적하는 것. 그것이 카일에게 주어진 시련이었다.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을 카일은 갈구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감정을 바치기도 하고, 별의 힘을 빌려 영웅의 일격을 재현해 내보려고도 했다.
그런 시행착오 끝에 카일은 여기에 도착했다.
“···이 힘을 얻어야 할 사람은.”
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은.
“내가아니라, 너다 라니엘.”
카일은 그리 중얼거리며 웃었다.
떠오른 천칭에 카일은 자신의 별빛을 올렸다. 수년간 모아온 별빛을, 한 줌만 남긴 채 모조리 천칭에 올렸다. 이것은 본래의 계획과 다르다.
본래대로라면 카일은 별의 힘을 빌려 영웅의 일격을 재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젠 이 힘은 자신에게 필요 없음을 카일은 알고 있다.
‘그 일격은···.’
별의 힘을 빌려 재현하는 것이 아니니까.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니.
천칭이 기울었다.
죽음으로 다가가던 라니엘의 육체에 별이 깃들었다. 아직 그녀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진 못하지만, 죽음으로부터 라니엘은 멀어지기 시작한다.
“······.”
카일은 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한 줌의 별빛.
성검을 쥘 수 있을 만큼의 별빛만이 남아있다.
‘···가볍군.’
몸이 가볍다고 카일은 느꼈다.
가벼움 속에서 카일은 천칭을 기울였다. 마지막 남은 계약을 완수하기 위해서.
“시련을 치르겠다.”
카일이 말했다.
별이 카일의 소망에 답했다.
라니엘의 심장에 잠든 씨앗이 크게 박동하고, 일대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미끼와 같다. 마왕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째깍, 하고.
카일의 귀에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의식 중에 카일은 제게 남은 시간을 깨달았다.
“···삼일.”
사흘뒤, 마왕이 나타나리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흘이다. 카일은 천천히 숨을 내뱉고선 교회의 한구석에 앉았다. 사라는 카일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그저 기도를 올릴 뿐.
교회의 내부에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카일은 성검을 풀어 바닥에 내려두었다. 바닥에 내려둔 성검을 바라보며 카일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용사가 아닌 인간.
한낱 인간.
인간이 된 카일 토벤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련과 마주할 준비를 한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 다가옴에 카일은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만다.
“···이걸로.”
카일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빚을 갚을 수 있겠군.”
쏴아아.
비가 쏟아졌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카일은 눈을 감았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날카롭게 다듬기 위해서.
3.
뚜벅.
쏟아지는 비를 뚫고 누군가 걷는다.
그녀의 모습은 흐릿하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딜 때 풀은 밟혀 눌리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를 뚫고 지나간다. 그곳에 존재하되,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대에서 벗어난 존재다.
이 땅에 내려와선 안 되는 신(?)이다.
신은 걷고 걸어서 낡아해 진 교회에 도착했다. 멸망해버린 세상의 신이자, 마지막 존재가 되어버리고만 여인은 교회의 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그녀의 입가에 쓰디쓴 웃음이 걸렸다.
13년 뒤의 미래에서 온 라니엘.
더는 라니엘 반 트리아스가 아닌, 라니엘 반 드라고닉이라 불리게 된 여인이 교회의 문을 두들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