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36
〈 336화 〉 주어진 시간(5)
* * *
별이 저택을 비춘다.
비추는 빛 아래서 엘프의 빛바랜듯한 은색 머리칼이 반짝였다. 카일은 제 앞에 서 있는 엘프를 보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자신은 변했지만, 이 엘프는 눈곱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역시 레미아와는 다르군.’
신비스러우며, 불변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자신의 동료에게선 신비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눈앞의 엘프에게서 카일은 일종의 신성함마저 느낀다. 그 정체를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래.”
카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카르디.”
“내 이름을 알고 있군. 내 고국에서 마주했을 때 알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대현자, 카르디 반 아르미엘.”
“역시 그런 것 같지는 않군.”
그리 중얼거리며 카르디가 쓰게 웃었다.
“다 떠올렸나?”
“어쩌다 보니.”
“어디까지 알고 있지?”
“전부.”
수정 구슬에 담긴 카르디의 기억.
그 전부를 카일은 보았다. 카르디의 정체, 그가 했던 여정 등등··· 군데군데 빈 공간은 존재하나 대부분의 내용을 알고 있다.
“별과의 계약이 흐릿해졌을 때,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그대로 초인이 되니 기억을 잃지도 않게 됐고.”
“우연한 일이로군.”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지.”
카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정이돌아온 카일은 더이상 제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가볍게 웃으며 카일은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모든 건 그때 시작됐지. 내가 용사를 꿈꿨던 것도, 그 끝에 이런 계약을 맺게 된 것도··· 전부 거기가 시작점이었어.”
카일이 카르디를 보았다.
“기억은 지워져도, 그 모든 걸 잊어버렸어도 무의식중에 남아있던 거겠지.”
고대의 대현자를 바라보며 카일이 말했다.
“대현자가 맺은 계약이 무엇인지, 마(?)를 베어내는 검이 무엇인지 말야.”
“···그런것 같더군.”
카르디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제 고국, 아르카디아에서 카일과 마주쳤을 때 카르디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카일이 별과 맺은 계약은 자신이 맺었던 것과 본질이 같은 거라고.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맺은 계약.
타인에게 부과되어야 할 ‘시련’을 대행하는 계약. 카르디와 카일이 맺은 것은 그런 계약이었다.
“지금부터 계약을 이행할 건가?”
“그래야겠지.”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디가 왜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카일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 계약은 카르디의 계약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러니, 카르디라면 알고 있을 테지.
지금부터 자신이 무엇을 할지.
그러니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닐까, 하고 카일은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라니엘은?”
“재워뒀다.”
일이 더 쉬워지겠군.
카일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카르디는 그 걸음을 막는 대신 옆으로 한 걸음 빗겨 섰다.
“막지는 않는군.”
“막는다고 막아지겠나.”
카르디는 쓰게 웃었다.
카일은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소파에 앉은 채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로셀에게 고개를 숙인 뒤, 카일은 열린 방문 앞에 섰다.
그 너머엔 라니엘이 잠들어있다.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카일이 뒤를 돌아봤다.
빗겨 서 있는 카르디를 바라보며 카일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르디, 너는 지금부터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을 테지.”
“물론,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답할 수 있는··· 아니, 네겐 전부 답할 수 있겠군. 얼마든지 물어봐라.”
카일이 숨을 골랐다.
그가 칼자루를 매만지며 말했다.
“···가능할 것 같아 보이나?”
주어 없는 물음.
맥락으로 그 문장의 의미를 읽은 카르디는 짧게 숨을 내뱉으며 답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천천히 숨을 뱉으며.
최초의 용사의 동료로서.
그리고 일찍이 같은 계약을 맺은 대현자로서 카르디는 머나먼 후배에게 조언했다.
“그 무엇도 믿지 마라.”
믿을 게 있다면.
“믿을 것은 오직 너 자신이다.”
그것은 오직너 자신 뿐일 테니.
“네 자신을 믿고, 네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행해라. 그것이 곧 정답일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카르디가 카일을 향해 고개 숙였다.
“미안하다.”
“······.”
“이런 길을 고르게 해서, 내가 답을 찾지 못해서, 너희에게 짐을 떠넘기게 되어서···.”
정말 미안하다.
그리 말하는 카르디에게 카일은 그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나는 용사로서, 영웅으로서··· 그런 거창한 마음으로 앞에 서는 게 아니야.”
카일은 웃었다.
“그저, 빚을 갚으려 하는 것뿐이지.”
빚지고는 못 사는, 저 빌어먹을 녀석의 성격이 옮아버리고 말았으니까. 이건 카일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다. 그 누구에게도 사과받을 일도, 감사를 받을 일도 아니다.
탁.
카일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직후, 한줄기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불어온 뒤 방 안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별만이.
은은히 빛나는 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2.
마경(??).
최전선을 경계로 갈리는 마경의 범위는 일정하지 않다. 인류의 전선이 확대 될 때면 그 경계선 또한 뒤로 후퇴하는 법이었으니까.
전진과 후퇴.
확대와 축소.
인류의 땅이었다가, 마의 땅이기를 반복한 땅이 수많고 수많지만··· 그렇지 않은 땅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주로 재앙이 휩쓸고 간 땅들이 그 예시다.
죽음이 다녀간 검의 무덤, 갈라트릭.
배교자가 더럽힌 구정물의 도시, 아르티아.
폭풍이 휩쓴 모래 지옥, 카테나.
그리고.
모든 재앙의 근원이 된, 재의 왕국 아르카디아.
이러한 땅들은 결코 정화되지 않는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마경으로 남아있었고, 그 누구도 그곳으로 감히 그곳에 다가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적긴 하죠.”
사라가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턱을 괸 채 입을 열었다.
“재앙이 휩쓴 곳이야 그렇다 치고, 마왕이 다녀갔다고 알려진 곳은 정말 손에 꼽잖아요?”
그녀가 손을 쫙 펼쳤다.
“수백 년의 역사 중에서, 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이니 뭐···.”
사라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다섯이 전부 각각의 국가인 게 웃지 못할 이야기지만요. 하기야, ‘그런 게’ 무언갈 파괴하기로 작정했다면··· 뭔들 못 부수겠어요?”
아직도 잠이 들면 악몽처럼 찾아오는 것.
그때 보았던 구정물의 파도를 떠올리며 사라는 몸서리쳤다. 어깨를 떠는 사라를 보며 카일은 쓰게 웃었다.
“두렵나.”
“당연히 두렵죠. 무서워 죽을 거 같은데요.”
“그럼···.”
“돌아가라고 할 생각이면 말하지 마요.”
사라가 딱 잘라 말했다.
“이미 결정은 내린 거고, 끝까지 가겠다고 저는 분명히 말했어요.”
“···고맙다.”
“그런 건 다 끝나고 나서 말해요.”
한숨을 내쉰 사라가 카일을 바라보았다.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카일.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카일을 보고 있자면, 오래전 여행의 시작점이 떠오르곤 한다.
카일을 지독히도 못살게 굴었던 자신과.
그런 자신을 기꺼이 구해주러 온 카일.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건 한순간이다.
한순간의 감정, 한순간의 실수로 사람의 인생은 어디까지고 떨어지고, 어디까지고 망가지는 법이다. 그런 의미로 사라의 인생은 카일 덕분에 참 예쁘게도 망가진 셈이다.
‘모시던 신도 배신하고.’
나쁜짓도 해보고.
‘교단의 늙은이들이 하지 말라는 건 다 해봤지. 정말, 원 없이 즐기긴 했어.’
하지 말란 것도 다 해봤다.
그러니, 사라는 이 짧은 인생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동화 속 성녀와 같은 존재가 되지 못했단 거겠지.’
영웅담 속의 성녀.
영웅과 함께 위업을 이루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숭고한 여인. 딱히 자신이 그런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한 번쯤은 꿈꿔본 적이 있긴 하다.
피곤하기만 할 테지만요.
그리 중얼거리며 사라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인물.
동화 속의 영웅처럼, 한평생 피곤한 삶을 살아온 인물을 흘겨보며 사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라니엘 반 트리아스.
사라의 옆에서 잠이 들어있는 그녀는 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깨지 않는다. 눈을 감은 채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을 뿐이다. 사라는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녀의 몸 상태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다.
망가지다 못해 시체와 같은 상태다.
카일의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는 라니엘을 증오한 사라지만, 이런 상태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도 옅어지는 법이다.
‘어찌 됐든···.’
라니엘에게 목숨을 빚진 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까. 사라는 한숨을 쉬며 손을 뗐다.
“거의 다 와 가네요.”
순식간에 풍경이 지나간다.
마부 없이 신성력으로 움직이는 교단의 마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다. 스쳐 지가던 풍경은 어느 순간부터 일정해진다.
색을 잃은 숲.
숲 사이로 난 거친 오솔길을 달리던 마차는 어느순간 멈춰 섰다. 마차가 멈춰선 곳은 오래된 교회다. 델로힘 교단의 성지에 위치한 교회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크기의 교회.
색을 잃은 숲에 놓인 교회 또한 색을 잃은 모습이다. 회색으로 변해버린 교회의 문을 여는 카일을 뒤로하고, 사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색(無色)의 숲.
우거진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이 숲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사라는 알고 있다. 저 너머에는 오래전 멸망한 왕국의 터가 있다.
셀레프 왕국.
600년 전, 하룻밤 사이에 멸망해 버리고만 왕국. 이 옛 왕국의 터는 마경의 한복판에 위치해있음에도, 근처에 마왕군은 커녕 흔하디흔한 마수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다.
‘···당연히 그렇겠지.’
셀레프 왕국을 무너트린 것은 마왕이니까.
마왕이 휩쓸고 간 곳은 그 어떠한 생명도 잉태하지 못하게 된다. 별빛이 닿지 않는 땅이 된다. 영원토록 오염된 땅. 별에게 거부 받은 땅.
오직 검은 풀만이 자라나는 곳.
마경(??).
진정한 의미의 마경이 저 너머에 있다.
하지만, 숲 너머의 저 땅은 사라와 카일에게 있어 단순한 ‘마경’으로서 표현될 수 없는 곳이다. 그들에게 있어 저곳은 실패의 상징과도 같다.
“···카일.”
“그래.”
“오랜만이네요.”
“그래, 4년 만이지.”
카일이 칼자루를 매만졌다.
“다시 돌아왔군.”
셀레프 왕국의 터.
검은 풀이 자라나 들판이 된 곳.
세간이 검은 들판이라 부르는 곳.
4년 전 이곳에서 그들은 마왕을 마주했다.
3.
색 잃은 교회.
그 안으로 들어온 카일과 사라는 그만 쓰게 웃고 말았다. 마왕과 마주하기 직전, 그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4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흔적을 더듬으며 그들은 안으로 향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카일과 사라가 멈춰 섰다.
그들의 시선은 교회의 끝자락에 놓인 제단에 향했다. 그것은 4년 전에는 없던 것이다.
모든 것이 낡았지만, 저 제단만큼은 새것과 같다. 색을 잃은 것들 속에서 제단은 분명한 색을 가지고 있다. 그 이질적인 제단으로 카일은 라니엘을 안아 든 채 걸어갔다.
제단에 라니엘을 눕혔다.
그 순간 카일의 귀에 별이 속삭인다.
【계약을 이행하라.】
지겹도록 들은 목소리.
하지만, 지금만큼은 반가운 그 목소리에 카일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래.”
이행하지.
카일이 그리 중얼거린 순간이다.
범람하는 별빛과 함께 천칭이 카일의 앞에 나타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