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73
“난 또 무슨 큰일인가 했네.”
“용사님께서 주신 경고를 어겼으니, 이것도 충분히 큰일···.”
“지타판, 내가 말하는 큰일은 그런 게 아니야.”
라니아가 쓰게 웃었다.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거. 그걸 말하는 거야. 난 또 교단이 어디 마을 하나에 장난이라도 친 줄 알았네.”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없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거면 돼. 이런 건 굳이 직접 안 와도 돼.”
어깨에 힘을 푼 그녀가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잿빛의 머리칼이 라니아의 손가락 사이 사이로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지타판.”
“···예.”
나지막히 부르는 라니아의 목소리에 지타판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타판은 라니아란 존재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쓰게 웃으며 라니아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교황 자리에 앉힌 건, 네가 대단히 신실하다거나 신성술에 뛰어나서가 아니야. 그 사실은 알고 있지?”
“예, 잊지 않고 있습니다.”
“눈치가 빠르고 말이 통해. 광신도가 아니며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고 있지.”
그 점을 라니아는 높게 샀다.
“그날 교단을 무너트리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겐 아직 종교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서일 뿐이야.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할 테니.”
그날에도 들었던 말이다.
폐허가 된 교단의 본교회 앞에서 라니아는 지타판에게 지금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예나 지금도 라니아는 ‘아직’ 이란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하고 있었다.
“아직은, 말이야.”
라니아가 턱을 괸 채 말했다.
그리곤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준비는 잘 되고 있니?”
목적 없는 물음.
그 물음에 지타판은 곧장 대답했다.
“···현재 잿빛 마탑의 마탑주와 협력하여 연구 중에 있습니다.”
“성과는?”
“타격을 입힐 수 있음은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유의미한 타격은 불가능할듯합니다. 결정적인 출력 부분에서 문제를 겪고 있다고···.”
“그래도 완성되어가곤 있나 보네.”
라니아가 툭 던졌다.
“앞으로 길어도 2년이야.”
약속된 기한.
“2년 뒤면 교단은 필요 없어질지도 모르겠네. 그때가 되면 괜찮은 직장이라도 하나 소개해줄까?”
라니아가 피식 웃으며 찻잔을 홀짝였다.
그녀가 보기에 지타판은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부하였기에 제 아래에 둬도 괜찮겠다 싶었다.
“영, 영광이지만··· 그건 그때 가서 다시···.”
“그래, 뭐. 생각은 해놔 봐.”
차를 홀짝이며 라니아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장에 가로막혔다곤 하나 라니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
머나먼 곳, 하늘 위에서 느껴지는 시선.
별의 시선을 느끼며 라니아가 웃음을 흘렸다. 교황과 같은 자리에 앉아 금기 중의 금기, 배교(背敎)를 작당할 날이 올 줄이야.
‘오래 살고 볼일이야.’
라니아는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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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지타판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용사께선 이번 사건을 그리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듯하였으며, 자신의 빠른 대처에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 사실에 지타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군.’
한숨 돌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타판은 마주 앉은 라니아를 흘겨봤다. 그녀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찻잔을 탁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지타판, 요즘 교단은 좀 어떻지?”
“어떻냐··· 라고 물으신다면.”
지타판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교단내 대부분의 세력은 저를 따라 움직이나, 일부 세력은 아직 흡수가 덜 됐습니다. 옛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세력인데···.”
머뭇거리던 지타판이 말을 끝맺었다.
“그날, 용사님께서 교단을 벌하실 때 그 자리에 없던 이들입니다.”
이번에 성녀, 나티다에게 접촉을 시도한 것도 그들의 소행이었다. 주기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쫓아내고 있다곤 하나 그 뿌리가 제법 깊었다.
“그래?”
흠, 하고 제 턱을 매만지던 라니아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잿빛의 머리칼이 사락 하고 그녀의 쇄골을 따라 흘러내렸다.
“엎어줄까?”
가벼운 말투, 가벼운 몸짓.
하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의 진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녀로서는 가볍게 말했을 테지만, 지타판은 제 등골이 쭈뼛 곤두섬을 느꼈다.
“아니, 아닙니다.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이오니 직접 강림하지 않으셔도···.”
“강림이라니.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신이라도 된 기분인데.”
“···실언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지타판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평소에도 라니아를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다 보니 그만 실언이 나오고 말았다. 라니아가 재밌다는 듯 쿡쿡 웃음을 흘렸고, 지타판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빨리 돌아가고 싶군.’
마치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다.
빨리 본교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지타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용사님께선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며, 앞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아, 그래.”
“그럼···.”
저는 이만 교단으로···.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지타판이다. 그런 지타판을 보며 라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벌써가게?”
움찔.
“조금 더 이따 가지?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지타판이 슬쩍 라니아를 흘겨봤다. 순수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다. 정말로 쉬다 가 라는 의도로 말했을 터다. 하지만 이곳은 마경이며 전장터였다. 무엇보다 라니아가 있었다.
‘절대로 쉴 수 없는 곳인데?’
지타판이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쥐어짰다.
사회생활에는 도가 튼 지타판이다. 최대한 부드럽게, 그리고 상대방을 치켜세우며 자리를 파할 방법을 찾으며 지타판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용사님께서도 담당하고 계신 전선으로 어서 가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용사님의 시간은 억만금과도 같아, 제가 감히 그 시간을 빼앗는 것이 죄송스러울 지경입니다.”
본인 스스로 생각해도 그럴싸한 명분이다.
지타판이 속으로 주먹을 콱 쥐며 ‘이건 된다!’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 무렵이다.
“전선에? 굳이? 여기서도 되는데?”
“예?”
“응?”
라니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아, 너는 모르겠구나? 그리 중얼거리며 씨익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타판?”
“예, 예에···.”
“따라와 봐.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
* * *
라니아의 뒤를 따라 지타판이 도착한 곳은 고성의 꼭대기였다. 이야기를 나누던 접견실에서 계단을 몇 단만 오르면 도착하는 곳.
“저기 보여? 지타판?”
난간에 걸터 선 채 라니아가 손가락으로 지평선의 너머를 가리켰다. 지타판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가 가리킨 위치를 보았다.
“예, 보입니다.”
크고 작은 언덕과 마경의 지형.
그 너머에 펼쳐진 드넓은 전장은 ‘라니아 반 트리아스’가 홀로서 담당하고 있는 전선이다. 기사들 사이에선 잿빛 땅이라 불리는 곳.
“저기가 내가 맡고있는 전선인데 말야.”
라니아가 지타판을 돌아보며 웃었다.
“여기까지는 범위가 닿거든.”
···여기까지 범위가 닿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지타판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이다. 라니아가 ‘아’ 하고 짧게 탄식을 뱉었다.
“때마침 오네.”
그녀가 전장을 가리켰다.
아주 작은 점으로 보이지만, 마수들의 행렬이 몰려오는 것이 지타판의 눈에도 보였다. 지타판이 식겁하며 라니아를 돌아봤다.
“어, 어서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루에도 몇 번이고 오는 건데 호들갑은.”
정작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도 된다니까.”
그녀가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지평선의 너머를 향했다. 쭉 뻗은 그녀의 검지 손가락에 틱, 티딕하고 무언가 튀어 오름을 지타판은 보았다.
그것은 회로이자, 선이다.
머나먼 곳까지 이어진 선.
선과 이어진 검지 손가락을 휙, 하고 라니아가 가볍게 휘둘렀다.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닌 동작인지 지타판은 알 수 없었지만···.
“···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지타판은 보았다. 일대의 마나가 뒤흔들림을. 저 멀리 전장의 하늘 위에 어두운 구름이 요동침을.
그리곤, 번쩍.
구름이 번쩍이고, 멀리 떨어진 이곳에까지 닿을 섬광이 일대를 후려쳤다. 섬광이 잦아들 적 잠깐의 시간을 두고 뒤따른 우렛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귀를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지타판이 앞을 보았다.
지타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 멀리 떨어진 전장.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곳에 푸른 섬광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섬광의 존재는 뚜렷하게 보였다.
콰릉!
굉음과 함께 떨어지는 거대한 기둥.
나무의 뿌리를 닮은 빛의 가지.
하늘을 찢으며 땅에 내리꽂히는 푸른 섬광은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운다. 막대한 열기를 간직한 빛줄기가 땅에 닿을 적, 그곳에 있던 것은 모조리 재로 변했다.
그 과정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하나의 섬광이 남긴 잔상이 사라지기도 채 전에, 또 다른 섬광이 흔적을 덧씌웠다. 그것이 수차례고 반복되자 지평선이 푸르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콰릉!
구름이 섬광을 토하고 뒤늦게 굉음이 울렸다. 땅과 하늘을 잇는 푸른 번개가 지상을 휩쓸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그 과정은 자연재해에 가까웠고, 종교적인 관점에선 가히 천벌에 가까웠다.
‘이게 무슨···.’
하늘이 땅 아래의 악한 것들에게 내리는 심판. 그야말로 천벌(天罰)이다. 신성력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그저 술식과 술식이 짜여 만들어진 인위적인 기적이나··· 그 압도적인 위력을 바라볼 적 지타판은 신의 존재를 느껴야만 했다.
고대에 존재하던 최고위 주문.
하늘의 벌을 형상화하여 만들었다 하여, 지어진 주문의 이름은 천벌(Judgment).
몇겹으로 겹쳐진 거대한 회로를 준비하고 고위 마법사 여럿의 보조를 받아야 사용 가능한 주문. 그래야 할 주문을 라니아는 손가락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는, 성장했다.
초인의 자리에 오르며 그녀는 주문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조금 더 많은 수를 동시에 다룰 수 있게 됐고··· 그런 라니아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전선에 거대한 회로를 새기는 것이었다.
스톡(stock)의 원본이 되는 주문.
주문 각인(Spell-Engrave).
그것은 마탑을 만드는 것에 가까운 행위다.
라니아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그녀가 담당하는 전선을 요새화시켰고, 그 결과 그녀가 맡은 전선은 곧 그녀만을 위한 마탑이자 공방이나 마찬가지였다.
번쩍.
수 천에 가까운 회로를 새겨둔 채 라니아는 그 모두를 제 통제 아래 뒀다. 통제 범위 안에만 있다면 라니아는 손가락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저장된 주문을 즉시 발현시킬 수 있었다. 초인의 자리에 앉았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여기까진 신호가 닿는 범위거든.”
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번쩍, 하고 섬광이 또다시 일대를 휩쓸었다. 이 전위적인 광경 앞에 지타판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뭐란 말인가?’
전장에서 마법사는 고급인력이다.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법사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지타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달라서 이질적이었다.
일개 개인이 부릴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지타판은 불현듯 깨달았다.
그날 본교회에서 보여줬던 힘은 그녀가 지닌 것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함을. 동시에 지타판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딱딱, 이를 맞부딪치며 지타판이 라니아를 흘겨봤다. 그녀는 무표정이 손을 튕기고 있었다.
따악, 소리가 울려 퍼지면.
콰릉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 광경을 보여주는 것인가, 하고 지타판은 고민했다. 단순히 힘을 과시하기 위함은 아니리라. 힘을 과시하는 데는 이유가 따르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설마···.’
고민한 끝에 지타판은 하나의 결론에 닿았다. 지타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건, 이건 경고다!’
2.
‘마수의 왕을 마주할 때 회로를 다 해체해버리고 올 걸 그랬나.’
손가락을 튕기며 라니아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마수의 왕과 마주쳤을 때는 전장에 회로가 남아있는 탓에 그녀는 회로를 통제하는데 연산능력의 태반을 소모하고 있었다. 이게 아니었다면 어쩌면 붙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에휴···.”
의미가 없는 가정이다.
게다가 온전한 상태였더라도 못 잡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큼 까다로운 적이었으니까. 한숨을 쉬며 라니아가 쓱 팔을 내렸다. 생명감지 회로를 돌려봐도 느껴지는 생명은 없었다. 잿가루만이 가득할 뿐이다.
“봤지?”
라니아는 지타판을 돌아봤다.
개쩔지 않냐? 그런 뜻을 담은 물음이었지만 그 물음을 지타판은 다른 식으로 해석했다. 그렇기에 지타판이 보인 행동은 라니아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헉, 허어억···.”
숨을 몰아쉬면서.
지타판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라니아를 보았다.
‘···얘 왜 이래?’
라니아가 기대했던 반응은 ‘와, 대단하십니다.’ 같은 감탄과 칭송이었으나···.
“잘, 잘···잘하겠습니다.”
지타판은 대뜸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잘하겠습니다. 눈에 거슬리지 않게,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그리고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정말로.”
그는 라니아가 보여준 이것을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지타판의 머릿속에서 지금의 풍경은 이렇게 해석되고 있었다.
내가 교단에 간섭하지 않는 것은.
너의 잘못을 넘어가 주는 것은.
너를 믿어서가 아닌, 수틀렸을 때 손짓 한 번으로 모두 지워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암묵적으로 제시하고자, 주의와 경고를 주고자 힘을 과시하는 것이리라. 공포감은 말뿐인 협박으로 조성되는 것이 아니다. 폭력과 실질적인 결과가 뒤따랐을 때 공포감은 완성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타판의 공포가 완성됐다.
겁에 질린 채 그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은 반복했다. 그런 지타판을 보며 라니아는 눈을 깜빡였다.
“어, 어엉?”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에게 공포감을 조성한다는 생각 따위 없었다. 협박? 경고? 그게 다 무어냐. 내버려둬도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굳이?
‘그냥 좀 자랑하려 한 건데.’
이것 봐라? 대단하지 않냐? 내가 이렇게 큰 사람이다···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한 행동이나, 그 행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었다.
“그, 그래.”
잘해봐. 영문도 모른 채 라니아는 지타판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지타판은 이를 딱딱 맞부딪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3.
숲속에서 으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비를 서던 병사는 눈을 깜빡이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쫓아 걸었다. 으적, 으적 하고 무언가를 씹어 삼키는 소리가 숲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에도 불구하고 병사는 긴장하지 않았다.
그가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이곳은 최전선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마경도 아니었으니까. 평범한 숲에서 살아가는 마수가 뭐 얼마나 강하겠는가. 어지간한 마수들을 때려잡을 실력이야 병사에게도 있었다.
그렇기에 병사는 생각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도착한 병사는 보았다. 사방에 널브러진 마수의 시체를. 한입 베어 물고 뱉어낸 듯한 살점을. 길게 늘어진 핏자국을.
그리고.
마수를 사냥한 흔적을 지우듯이 땅을 파 마수의 시체를 집어던지는 어느 짐승을, 병사는 보았다. 병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딱, 따닥 하고 병사의 윗니와 아랫니가 세차게 맞부딪쳤다.
“허, 허억···.”
자신의 두 세배는 돼 보이는 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선 기이한 짐승. 쩍 벌린 아가리에는 마수의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빙글, 몸을 돌린 병사가 등을 보인 순간이다.
“어···.”
병사는 보았다.
저 뒤에 서 있어야 할 짐승이, 자신의 앞에 서 있음을. 조금의 기척도 내지 않고 짐승은 한순간에 병사의 앞에 서 있었다. 싯푸른 안광을 마주한 순간 병사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헉, 허윽, 허억···.”
숨을 몰아쉬는 병사에게 짐승이 제 무릎을 굽혔다. 병사와 자신의 눈의 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곤, 짐승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륵, 그르륵.
피거품이 이는듯한 소음.
이대로 잡아먹히는구나, 하고 병사가 눈을 질끈 감았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죽음 대신 찾아온 것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인, 간.”
귀에 울리는 것은 목소리.
뜻을 가진 언어.
“인, 간. 묻는다.”
짐승이 말을 하고 있었다.
감았던 눈을 떤 병사의 시선이 세차게 흔들렸다. 눈앞의 짐승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새하얀, 곳. 눈, 이 쌓인 곳.”
그곳은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의도를 파악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마수가 인간의 언어를 흉내 냈단 사실에 놀란 채, 병사는 겁에 질려 북부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켰다.
“······.”
짐승은 말없이 병사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그리곤 서서히 굽혔던 무릎을 폈다. 짐승은 겁에 질린 인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감사를, 표하지.”
짐승이 걸음을 옮겼다.
짐승은 병사를 죽이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병사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짐승이 아예 멀어졌을 때 그제서야 병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사실을 어서 알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렇게 병사가 몸을 움직이려 한순간이다. 병사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륵, 그르륵.
수많은 마수가 그곳에 있었다.
이런 숲에 있을만한 마수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거리를 두고 자신의 왕을 쫓아왔고, 왕이 남기고 간 먹이를 보았다. 가장 좋은 먹이는 언제나 왕의 것이었고 왕이 남긴 찌꺼기가 바로 이들의 먹이였다.
마수들은 생각했다.
저것은 왕이 남긴 찌꺼기라고.
굶주린 마수들이 병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병사의 비명소리와 함께 으적, 하고 살점이 씹히는 소리가 한동안 숲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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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 한 번만 더 꺼내주시면 안 될까요?”
“싫습니다. 오늘만 해도 세 시간 동안 검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습니까.”
“딱 30분만 더.”
“그렇게 자주 보여줄 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10분.”
“싫습니다. 저도 일정이 있습니다.”
“그래, 3분! 3분은 되잖아요? 그쵸?”
3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30분이 됐으며, 30분이 다시 세 시간이 되는 과정을 목격한 라크다. 라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안 됩니다.”
“아 제발요···!”
등 뒤를 졸졸 따라오는 나티다를 못 본 척하며 라크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이탈했다. 지난번, 치료 목적으로 성검을 한 번 보여준 이후로 나티다는 툭하면 라크를 찾아오곤 했다.
‘처음 한 두 번이야 그렇다 치지만···.’
약에 절은 듯 헤, 입을 벌리고 있는 성녀의 모습은 썩 볼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종교에 뜻을 두지 않은 라크조차 ‘이런 식’으로 최초의 성검이 사용돼선 안된다고 무의식중에 느낄 정도로.
“쩝···.”
괜스레 입맛을 다시는 나티다를 뒤로하고, 라크는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았으므로.
2.
「이르긴 하지만 가르쳐줄게.」
「지금까지 내가 너희에게 가르쳤던 것들은, 너희가 쌓아왔던 건 모두 이걸 위함이야.」
쌓아온 것들이 맺은 결실.
「마나의 흐름이 흐트러지지 않게 붙잡고, 거래의 기초, 거래의 활용, 주문의 원리, 주문의 개찬, 그것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여기지.」
별과의 거래.
자신만을 위한 거래를 만들어내는 것.
「눈 똑바로 뜨고 잘 봐둬.」
「이게 너희가 배틀 메이지라 부르는, 전투 마학의 근간을 이루는 주문이니까.」
과거를 회상하던 라크가 짧게 숨을 뱉었다.
앞을 바라보면 설원의 한 자락이 통째로 도려내져 있었다. 육체에 남은 열기를 뱉어내며 라크가 몸에 걸린 주문을 해제했다.
“어우, 도련님 장난 아닌데요?”
마나의 잔재가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라크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오야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