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72
바위가 깨지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긴 동굴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동굴의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나티다가 코를 틀어막으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녀가 한 걸음 옮긴 순간이다.
어둠 속에서 푸른 불길이 번뜩였다.
그것이 짐승의 눈동자가 내뿜는 빛이라는 걸 이해하기까지 잠깐의 시간을 필요로 했고, 그 시간은 짐승에게 있어 충분한 시간이었다.
쐐엑.
짐승의 손톱이 나티다의 눈을 노리고 뻗어왔다.
* * *
콱.
날카로운 손톱이 나티다의 눈을 찌르는 것보다 먼저, 나티다의 뒤에서 뻗어나온 라크의 팔이 짐승의 손목을 낚아챘다. 직후 은백색의 섬광이 거친 궤적을 그리며 짐승의 팔을 내려찍었다.
투확! 그리고 후두둑.
검은 구정물이 솟구쳤다가 땅 아래로 떨어졌다. 짐승이 기이한 비명을 내며 뒷걸음질쳤고, 라크는 나티다를 제 뒤로 물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뒤에 서 계십시오.”
라크가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
어느새 꺼내 든 도끼에는 질척한 구정물이 묻어 있었다. 라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살아있는 것을 베는 감촉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것을 베는 감촉.
번쩍.
나티다가 불러낸 광구가 동굴의 안쪽을 밝혔다. 팔을 잃은 짐승의 모습을 라크는 확인했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선 마수의 모습은 기이했다. 흘러내리는 구정물, 붕괴하는 육체. 살아있다기보단 차라리 시체에 가까운 형상이다.
“······.”
낮게 신음을 흘리는 마수의 손톱을 라크는 보았다. 날카롭게 갈린 손톱은 마치 칼날과도 같다. 땅에 파였던 흔적과 저 손톱을 대조해보면 얼추 맞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라크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비명을 지르며 마수가 하나 남은 손을 휘둘렀다.
쩍 벌린 마수의 아가리에는 육편이 끼어있었으며, 하나 남은 손은 구정물로만 이루어져 있진 않았다. 짐승과 마왕군의 시체를 엮어 만든듯한 손아귀.
카앙!
라크가 손톱을 쳐내며 마수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곤 쩌억, 자세를 낮춘채 마수의 무릎을 도끼로 찍었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마수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마수의 몸이 기울었다.
빙글.
한바퀴 돌리며 살점을 털어낸 도끼로 라크는 마수의 하나 남은 팔을, 목덜미를, 어깨를 차례로 내려찍었다. 도끼가 그리는 은백색의 궤적은 날카로웠으며 또한 사나웠다.
“————!”
순식간에 사지를 잃었으나, 마수는 마지막까지 저항이라도 하려는 듯 아가리를 쩍 벌리곤 라크의 팔을 물어 뜯으려 했다. 그러나 라크는 두 손으로 마수의 위턱과 아래턱을 붙잡은 채 찢어버렸다.
쿠웅.
바닥에 쓰러진 마수의 척추에 도끼를 꽂아넣은 채 라크가 짧게 숨을 뱉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라크를 지켜보던 나티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일부러 살려 두셨군요?”
라크의 곁에 다가온 나티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마수를 가리켰다. 찢어진 아가리로 줄줄 검은 구정물을 흘리면서도 그것은 움찔거렸다.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지만, 그리 오래 살아있을 것 같진 않았다.
마주했을 때부터 붕괴되고 있던 육체.
저 육체가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정보를 뽑아내는 것이 나티다의 임무였다.
나티다가 장갑을 벗었다. 드러난 흰 손바닥을 마수의 머리에 가져다 댄채, 그녀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콱. 마수의 정수리와 자신의 손바닥을 단검으로 함께 꿰뚫었다.
신성술, 기적의 일종.
나티다의 핏물과 짐승의 구정물이 한데 뒤섞였다.
2.
델로힘 교단이 발전해온 기적, 신성술.
신에게 축복받은 성녀는 대부분의 신성술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중 일부의 영역에선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강한 신성술을 사용하곤 했다. 최초의 성녀 같은 경우는 ‘생명 창조’의 영역이었고···.
바로 이전 대의 성녀인 사라의 경우 타인의 육체와 치유력을 비롯한 마나의 강도를 함께 강화하는 ‘축복’이 특기 영역이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신성술에 특기를 지녔던 사라는 최초의 성녀를 제한다면 교단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녀였다.
그녀만큼이나 다양한 분야에 특기를 지녔으며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타고난 성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사라의 은퇴 이후 다음 성녀가 나티다로 정해졌을 때 교단의 늙은이들은 한숨을 토했다. 나티다가 재능을 보이는 신성술의 종류가 교단이 그녀를 활용하는 방향과는 썩 맞지 않았으므로.
그렇기에 교단은 시도했다.
그녀에게서 재능을 지우고 성유물을 통해 인위적으로 새로운 재능을 점지하는 실험을.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는 절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실패했다. 실험의 부작용만큼은 지울 수 없었으므로.
“어윽, 어으.”
나티다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얼핏 봐도 위험해 보이는 상태였기에 라크가 나티다의 어깨에 손을 댔지만···.
“놓으십시오. 두 번 하긴 싫습니다.”
나티다의 싸늘한 목소리에 라크는 도로 손을 뗐다. 그렇게 한동안 피를 토하던 나티다가, 손등을 찍은 단검을 뽑아냈다. 찐득한 피가 늘어지는 가운데 나티다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머리야.”
등지고 앉은 동굴의 벽에 제 뒷머리를 가볍게 툭툭 부딪치며 나티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연초를 꺼내 들었다. 점화석으로 연초에 불을 붙이려 했지만, 자꾸만 손이 떨려 연초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
“후우···.”
나티다는 한숨을 쉬며 라크를 슬쩍 돌아봤다.
“그, 공자님?”
나티다가 쓰게 웃으며 점화석을 라크에게 건넸다.
“불 좀 붙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라크는 말없이 연초에 불을 붙여줬다.
연초를 입에 문 채 감사함미다, 하고 중얼거린 나티다가 길게 연기를 빨았다. 그제야 덜덜 떨리던 손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조사는 마쳤습니다. 시체야 뭐 여기에 둬도 되고, 나중에 사람들을 불러서 치워도 되겠군요. 이제 돌아가서 보고서만 작성하면 될 것 같습니다.”
“···조사가 끝났다니?”
“제가 이쪽으론 재능이 좀 있습니다.”
나티다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들겼다. 붉게 충혈된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보다 못한 라크가 질문을 던졌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원래 좀 쓰고 나면 피곤하긴 한데··· 오늘은 더하네요.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읽히는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나티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힘이 풀려버린 제 다리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고개를 들어 라크를 보았다. 그리곤 제 다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정말 죄송한데요.”
머쓱하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저 좀 업어주시면 안 될까요? 아까처럼 어깨에 둘러메지 말고, 제대로. 어깨에 매달리니까 속이 뒤집히더라고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라크는 나티다를 등에 업은 채 동굴을 빠져나갔다. 이동하는 중에도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던 나티다는, 백야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3.
나티다에게서 보고서가 도착했다.
라니아는 찬찬히 보고서를 살폈다.
보고서엔 북부에 기이한 흔적을 새긴 존재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 마수의 사체를 확보했다는 이야기 또한 함께 적혀 있었다.
『신성술을 활용한 탐지결과, 배교자의 개입이 확인됐습니다. 배교자 글레투스에 의해 ‘창조’된 마수라고 확정.』
『직후 ‘간섭’을 시도, 최초의 순간 배교자는 마수를 가리켜 ‘마수의 왕’이라고 명명. 북부에서 확인된 것은 실패작이며 ‘성공작’ 또한 이미 완성되었을 거라 추정합니다.』
확실히 나티다는 유능한 보좌관이었으며, 그녀가 새롭게 발견한 정보를 토대로 라니아는 퍼즐을 짜맞췄다. 놀라운 점은 최전선에서 발견된 마수가 북부까지 흘러들어 갔다는 점이었다.
“북부에서 발견된 흔적은 실패작이 남긴거였나.”
마수의 왕을 조우하고 짐작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확실한 것 같았다. 새로 지원을 보내야 하리라. 라니아는 보고서의 다음 장을 넘겼다.
『공방으로 보이는 곳의 실험관에서 탈출.』
『대상의 불안정한 상태 탓에 중간중간 기억이 날아가 버린 부분이 존재하나, 모종의 수단으로 북부에 도착한 이후 포식을 통해 육체의 붕괴를 해결한 것으로 추정됨.』
검은 구정물을 공급하는 호스가 떨어지자마자 붕괴해 죽어야 할 실패작이다. 허나 실패작은 포식과 사냥한 마수들의 시체로 무너지는 육체를 재구성하며 버티고 있었다고 나티다는 보고했다.
『생존의지가 무척이나 강렬합니다.』
『간섭을 시도했을 때 읽히는 사고라곤 오롯이 생존에 대한 집착뿐입니다.』
생존에 대한 집착.
“흐음···.”
그 단어에 라니아가 제 턱을 매만졌다.
실패작이라고 한들 베이스로 삼은 개체가 바로 마수의 왕이다. 학습하며 성장하고 생존하기 위해 진화하는 기이한 마수. 그 의지마저 이어받았단 것인가.
호스에서 떨어지면 3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실패작이, 수십 일이 넘는 기간 동안 생존했다.
그 사실에 라니아는 질리다는 듯 치를 떨었다. 실패작만 해도 이 정도인데 공방에서 마주쳤던 완성작은 어떠할 것인가. 감히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귀찮게 됐네.”
마수의 왕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칼트를 통해 추적한 결과 마경의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는 결과만이 나왔을 뿐이다. 그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했기에 라니아는 제 미간을 꾸욱 눌렀다.
새로운 재앙의 탄생.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재앙과, 그 재앙이 성장을 마쳤을 때 도달할 영역. 그 모든 것을 계산에 넣어봤을 때 이것은 분명한 변수였다. 그녀가 쌓아올린 계획을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변수.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라니아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보고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남은 내용을 라니아는 빠르게 훑어봤다.
『무리한 신성술의 사용으로 몸이 족창났어요, 용사님. 저 북부에서 요양 좀 하다 와도 될까요?』
『아니 요양까지는 아니고.』
『북부에서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요컨대 휴가 좀 달라는 이야기였다.
라니아는 머릿속으로 나티다의 신성술을 떠올려봤다. 확실히, 마구잡이로 신성력을 펑펑 소비해도 문제가 없던 사라와 달리 나티다는 부작용이 존재했다.
‘몸의 흐름이 꼬이던가?’
오염되지 않은 기(氣), 맑은 물과 같은 신성력을 지닌 역대 성녀들과 달리 나티다의 기는 탁하다. 온갖 약물에 노출되고 인위적인 시술을 받은 결과였다. 신성력의 출력 자체는 매우 뛰어나나···.
‘자체적인 회복이 더디지.’
그 탁한 흐름이 종종 몸을 망가트리곤 했다.
꼬인 흐름을 정화하는 데 다른 성녀들과 달리 나티다는 제법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고,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침대 신세를 지곤 했다.
회복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자연적인 치유를 기다리거나, 둘은 라니아와 같은 별빛을 정밀히 다룰 수 있는 인물이 흐름을 풀어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오염되지 않은 신성한 성유물.
순백의 기운을 지닌 성유물에 장시간 노출되는 것이었다. 현시대에 그만한 성유물은 남아있지 않기에 세 번째 선택지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교단이 타락하기 전, 수백 년 전의 성유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어디 남아있겠냐고.’
그리 생각하던 라니아가 문득 눈을 깜빡였다.
“어?”
성유물이 무엇인가?
신성함을 꽉꽉 눌러담은 기적의 물건이다.
요컨대 신(神), 별과 관련된 힘이 담겼으며 성인(聖人)의 손때를 탄 물건은 모두 성유물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도 성유물이 아닌가?
“남아··· 있네?”
그것도 나티다의 가까이에.
생각해보면 그것만 한 성유물이 없었다.
역사상 가장 신성하다고 불릴만한 존재가, 가장 오랫동안 썼던 성유물이니까. 라니아는 곧장 편지지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내가 부탁했다고 하고 라크에게 이렇게 전해.』
『가지고 있는 대검, 한 번 보여 달라고.』
최초의 용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성인이라 불리던 그가 사용했던 최초의 성검(星劍). 라니아가 생각하기에 그것 이상의 성유물은 찾기 힘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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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휴양, 휴식.
이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 단어란 말인가.
다리를 쭉 뻗고 침대에 누워선 이불의 포근함을 느끼며 나티다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최전선에 있을 때 이렇게 쉬고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라니아가 찾아와 새로운 일을 던져주고 가곤 했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인가.
라니아의 입김이 닿지 않는 북부다.
마음 놓고 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티다가 보기에 휴가를 낼 명분도 충분했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흥, 흐응.”
그렇게 콧노래마저 부르고 있자니, 침대의 머리맡에 올려둔 편지지가 번쩍였다. 답장이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나티다가 슬쩍 손을 뻗어 편지지를 확인했다.
“···응?”
나티다가 눈을 깜빡였다.
편지에 적힌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본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을 보여달라 하라고?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애초에··· 그 사람 도끼 쓰지 않나?’
북부의 수호자, 라크 반 그레이스.
그가 대검을 쓴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럼 무슨 장식용 대검이라도 가지고 있단 뜻일까? 의문을 느끼면서도 나티다는 사용인을 불러 라크를 불러와 줄 것을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크가 도착했다.
나티다가 건넨 편지지, 라니아에게서 도착한 편지를 쓱 읽어본 라크가 눈을 깜빡였다. 편지에서 언급된 대검이라 할만한 것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최초의 성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자 역사적인 성유물이기도 하기에 외부인에게 쉬이 노출할만한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라니아의 부탁이라면 말이 좀 달랐다.
“예, 알겠습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라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지를 내려둔 직후 라크가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그리곤 허공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공간이 출렁이며 라크의 손목을 집어삼켰다.
“어?”
나티다의 눈동자가 크게 뜨이기를 잠시.
허공에서 라크의 손이 서서히 빠져나왔다. 그 손에는 무언가 쥐여져 있었으며, 그것이 공간의 바깥으로 빠져나오며 찬란한 빛을 내 뿜었다.
번쩍!
직후 찬란한 별빛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 * *
머나먼 과거, 지금은 잊힌 시대.
찬란했던 시대를 이끌었던 용사가 있다.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그 누구보다 앞에 서서, 그 누구보다 먼저 재앙을 마주했던 그는 영웅이었으며 용사였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백금색으로 빛나는 성검이 쥐여져 있었으며, 세간은 그를 가리켜 델로힘의 화신이라 불렀다.
영웅, 용사, 성인, 그리고 신의 사도.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파도처럼 물결치는 빛 앞에선 그 누구라 한들 신앙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교단을 견제하던 귀족도, 신을 믿지 않던 척박한 땅의 인민들도, 그 모두가 가니칼트에게서 신성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는 성인(聖人)이었다.
그로부터 수백 년의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 누구도 그 시대를 기억하지 못하게 됐음에도, 최초의 성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수백 년 전과 같은 감상을 품게 만들었다. 지금의 나티다가 그랬다.
“어, 어어···?”
나티다는 눈을 깜빡이며 앞을 보았다.
그곳에 빛이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그냥 빛이었다. 너무나 찬란한 나머지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빛. 빛을 바라볼수록 나티다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느끼는 것은 신비함, 그리고 경악.
뭐지 저게.
교단에 머무를 적 수많고 수많은 성유물을 보았던 나티다다. 하지만, 그것들 중 그 어느 것도 눈앞의 저 빛을 이기지는 못했다. 나티다가 보아온 성유물이 물건에 신성함을 한 방울 떨어트린 것이라면···.
눈앞에 저것은 신성함으로만 이루어진 무언가였다.
성유물이란 자고로 그것을 지닌 자가 행했던 선행, 위업, 신앙 따위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라크가 꺼내 든 ‘최초의 성검’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성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교단이 몰락하기 전.
가장 신성했던 시절.
악을 정화하고 만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워졌던 델로힘 교단의 전성기. 그 전성기를 이끌었던 물건의 앞에선 아무리 교단을 혐오하고 신을 증오하는 나티다라 한들 신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나티다의 눈동자가 탁, 하고 풀렸다.
몸의 내부에서 꼬일 대로 꼬였던 흐름이 순식간에 풀리기 시작했다. 불편했던 호흡이 한순간에 편해지고 줄곧 지끈거렸던 편두통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남은거라곤 기분 좋은 고양감.
“헤에···.”
흡사 침이라도 흘릴 기세로 나티다가 성검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움찔, 하는 라크를 뒤로 하고 나티다가 성검의 검면에 제 볼을 비볐다.
마치 약에 취한 기분이었다.
성유물이 내뿜는 신성력에 취할 대로 취한 나티다가 한참 동안 성검에 제 얼굴을 비비다가 문득 라크와 눈을 마주쳤다. 라크는 몹시 유감스러운 눈동자로 나티다를 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과 마주친 순간 나티다가 급히 정신을 차렸다.
“어흠, 흠.”
이런 추태를.
그리 중얼거리며 급히 성검에서 얼굴을 땐 나티다가 부스스해진 제 머리칼을 정리했다. 입가에서 흐르는 침을 쓱 닦아내곤 나티다가 라크를 돌아봤다.
“저기, 공자님.”
“···예.”
어째 대답이 조금 늦었지만,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티다는 신성함이 남긴 기분 좋은 고양감을 곱씹으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며 라크는 속으로 ‘밤새 술을 마신 전사들이 아침에 짓는 표정이군’ 하고 생각했다.
“혹시, 혹시 말이십니다.”
동공이 탁 풀린 눈동자.
신성력에 취한 나티다가 라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종족이 천사이십니까?”
밤새 술을 마신 전사들이 취기에 쩔어 내뱉는 헛소리와 비슷하군. 그런 생각을 하며 라크는 적당히 대답했다.
“전사입니다. 같은 ‘사’ 자를 쓰기는 하는군요.”
굳이 따지자면 다른 ‘사’ 자를 쓸테지만, 발음하는 데 있어선 같으니까 그게 그것 아닌가. 라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라크 답다면 라크 다운 대답이었다.
2.
지금으로부터 1년 전, 델로힘 교단의 교황 자리에 갑작스레 앉게 된 젊은 남성 지타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한숨이 자꾸만 늘었다.
덜컹.
교황이 타고 다니는 마차라기엔 지극히 투박하고, 속도를 중시한 나머지 주기적으로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는 마차의 안에서 지타판은 창밖을 보았다.
빠른 속도로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마차가 향하는 곳은 인류가 최전선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이유야 간단했다. 대가리를 박고 용서해달라고 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큰 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태도의 문제였다.
물론 왕족조차 반역죄 수준이 아니고서야 교단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교황을 무릎 꿇릴 수 없다곤 하나, 세상에는 ‘사소한’ 이유로도 교황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1년 전, 단신으로 교단을 엎어버린 인물.
교단의 윗선을 싸그리 싹싹 치워버리고, 한참 아래에 있던 지타판을 교황의 자리에 앉힌 인물. 그 인물에게 ‘잘 보여야 함’을 지타판은 이해하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았다간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덜컹, 덜커덩.
점점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타판은 속으로 자신의 잘못을 곱씹어봤다. 굳이 따지자면 지타판이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고, 델로힘 교단의 사제 중 하나가 일을 그르친 것이었다.
「나티다, 그 아이의 곁에 접근하지 마.」
「접촉도, 접근도, 서신도, 그 어떠한 시도도 하지마. 걸리는 순간 죄다 엎어버릴 테니까.」
그분께서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사제 중 하나가 북부로 향하는 성녀 나티다에게 접촉하고 말았으므로. 지타판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제발 쉽게 넘어가 주심 좋을 텐데···.”
1년 전 목격했던 그분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타판이 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 * *
최전선의 인근 점령지역.
그곳에 준비된 접견실에서 지타판은 초조한 마음으로 준비된 차를 홀짝였다. 최전선에는 당연하게도 신을 믿거나, 교단 소속의 성기사들도 존재했기에 지타판은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으나 지타판 스스로가 그것을 거부했다.
교황의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된 지타판이다.
저들과 비슷한 위치에 있던 시절이 떠올라 대접을 받는 것이 썩 익숙하지가 않았다. 게다가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저들에게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았으므로.
끼이익.
그렇게 접견실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굳게 닫혀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지타판이 어깨를 파르르 떨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숨을 삼키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또각, 또각.
침묵 속에서 울리는 걸음 소리.
제 앞에 멈춰선 인기척에 지타판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 그분이 계셨다.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 님을 뵙습니다.”
“어. 오랜만이다, 지타판.”
교황을 존칭 없이 이름으로 부르며 라니아가 지타판의 맞은 편 소파에 걸터앉았다. 지타판은 마른침을 삼키며 눈앞의 인물을 흘겨봤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1년 전, 성녀 나티다에게 교단이 행한 만행을 목격하곤 교단을 통째로 엎어버린 인물. 그날 교단이 자랑하던 성기사들과, 방호 술식이 몇 겹으로 쳐져 있던 기도실이 ‘어떤 꼴’이 됐는지 지타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방문 이유는?”
라니아가 질문을 던졌다.
서늘한 목소리에 지타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사죄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지타판이 싸게싸게 고개를 박았다.
망설일 것은 없었다.
지타판은 잊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존재가 얼마나 거대한 존재인지. 제 앞에 앉아 있는 저 여인은 인류의 정점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단신으로 전선을 책임지는···.’
수백년의 역사를 뒤져봐도 일개 개인이 이만한 힘을 지녔던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저 부드러워 보이는 외모에 속아 넘어가선 안됨을 지타판은 되새겼다.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존재는···.
‘마음만 먹는다면, 하룻밤 만에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존재다.’
인류의 적을 향해 겨누어진 칼날.
그 칼날이 한 바퀴 돌아 라니아의 적의가 인류를 향했을 때, 그녀를 막아낼 수 있는 존재가 인류에겐 없었다. 그 사실을 지타판은 직접 경험해야만 했다.
「죄, 죄를 사하시옵소서.」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라 불리는 초월적인 존재가 꼭 하늘 위에 있으란 법은 없었다. 1년 전 그날 지타판은 보았다. 땅 아래에 발을 디디고 선 신과 같은 존재를.
-콰직, 콰즈즈즈즉.
눈앞의 저분께서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박살 나고 바스러지던 교단의 결계를, 이를 맞부딪치며 바닥을 기던 성기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타판은 제 한 마디 한 마디에 심혈을 기울여 사죄의 말을 올렸다.
“문제를 일으킨 사제는 즉시 처벌했으며, 교단에서 영구적인 제명을···.”
필요하다면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고개를 조아리는 것으로 해결된다면 몇 번이고 조아릴 수 있다. 지타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타판은 현실을 볼 줄 아는 인물이다.
교단에 속해 있음에도 신을 과신하지 않는 그는 어찌보면 성직자로서의 자격이 부족할지는 모르나, 현실을 볼 줄 안다는 점에서 교단을 이끄는 자리에 지타판은 적합했다. 그것이 라니아가 지타판을 교황의 자리에 앉혀둔 이유기도 했다.
“···이상입니다.”
이야기를 다 마친 지타판이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 라니아의 눈치를 살폈다. 저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덜덜 떨던 지타판은 문득 눈을 깜빡였다.
“으응···?”
라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뒤늦게 말했다.
“아니, 그것 때문에 온 거였어?”
“예···? 그렇습니다만···.”
“난 또 뭐라고···.”
에휴, 하고 라니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