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75
아가리로 허공을 물어뜯고.
손톱을 휘둘러 주변을 마구잡이로 할퀴어댄다.
고고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짐승의 싸움이다.
야수성을 그대로 드러낸 짐승의 앞에, 라크는 눈을 부릅뜬 채 도끼를 고쳐 쥐었다. 라크의 몸에서 피어나던 눈보라가 이윽고 도끼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마치, 라니아가 재(Ash)를 모을 때처럼.
몰아치는 눈보라를 도끼에 휘감은 채, 라크는 달려드는 짐승을 향해 질주했다.
가속에 가속을 거듭한 도끼로 라크는 차례로 기술을 펼쳤다. 지난 몇 년간 단련해온 기술. 시조께 직접 전수받은 기술을 라크는 짐승을 죽이기 위해 꺼내 들었다. 첫 일격은, 초견살이다.
그레이스류, 제 1식 초견살.
눈으로 좇는 것 조차 힘든 쾌속의 일격이 달려들던 짐승의 아가리를 후려쳤다. 짐승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고, 뒤늦게 터져나가는 공간이 짐승의 몸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빈틈.
그레이스류, 제 2식 파열.
고개가 젖혀지면서도 짐승이 오른팔을 휘둘렀다. 휘두르는 오른팔을 라크가 도끼로 내려찍었다. 짐승의 오른팔에 박힌 도끼가 키이잉, 소리를 내며 진동하고 직후 짐승의 오른팔을 터뜨렸다.
후두둑, 하고 떨어지는 살점.
오른팔을 잃은 짐승을 향해 라크는 약진했다. 연속해서 기술을 펼쳤다. 그레이스류 3식, 4식, 5식을 이을 때마다 라크의 도끼가 휘감은 눈보라는 거세졌다. 그것이 충분히 커졌을 때.
라크는 제 도끼를 짐승을 향해 던졌다.
콰직, 소리를 내며 짐승의 가슴팍에 박힌 도끼에서 눈보라가 터져 나왔다. 미친듯이 몰아치는 눈보라가 짐승의 몸을 할퀴고, 찢어발기며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라크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륵, 그르르륵!”
짐승이 웃음을 흘리며 눈보라를 지우며 빠져나온 순간이다. 짐승의 동공이 크게 뜨였다. 크게 뜬 눈동자는 라크가 쥔 검에 고정되어있다.
구웅.
라크가 대검을 쥐고 있었다.
직전, 허공에서 뽑아든 것은 라크가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 초대 용사의 성검이다. 성검의 앞에서 짐승은 몸을 크게 떨었다. 라크는 그것을 공포라고 추측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짐승은 환희했다.
환희하며, 짐승은 왼팔을 들어 올렸다.
전투 직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왼팔을.
그 순간 짐승이 두른 분위기가 격변했다.
3.
짐승은 자신을 향하는 살기를 느꼈다.
노골적이게 드러나는 집념을 느꼈다.
‘무언가, 잃어버렸던 것.’
제 앞에 바로 선 인간에게서 짐승은 언젠가 자신이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을 떠올렸다. 맞부딪치면 맞부딪칠수록 기억은 더욱 강하게 자극됐다. 그렇기에 짐승은 이 싸움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왼팔을 쓰지 않았다.
야수처럼 싸우고, 짐승처럼 뒤쫓으며 짐승은 자신이 새롭게 가진 것들만을 사용했다. 자신이 본래부터 지녔던 왼팔을 쓰지 않은 채 짐승은 인간과의 접전을 계속했다.
맞부딪칠수록, 무언가 떠올랐다.
인간이 펼치는 기술에서 짐승은 무언갈 느꼈다. 자신도 알고 있었던 기술이다. 언젠가 체득했던 기술이었으나, 지금은 잃어버렸던 기술이다. 짐승은 부디 인간이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인간을 몰아붙였다.
몰아붙일수록 인간은 더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한계에 몰아넣으니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짐승은 그럴수록 버거워졌으나, 인간이 마지막으로 가진 것을 꺼내길 바랐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니까.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둔 수가 있을 테니까.
이윽고 인간이 그 수를 꺼내 들었다.
꺼내 든 수 앞에 짐승은 조금 전과 같은 반응을 하진 못했다. 크게 뜬 눈으로 짐승은 보았다. 인간이 쥐고 있는 검을. 인간이 취한 자세를.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이 지녔던 검(劍).
자신의 목을 떨궜던 검.
최후의 순간 보았던 찬란한 빛이 눈앞에 있었다. 빛을 쥔 인간은, 가니칼트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짐승은 환희했다. 열망했다. 바라던 것이 저 앞에 있었다. 저것마저 짐승은 왼팔을 쓰지 않고 막아낼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찬란한 광채.
그때, 그날과 같은 광채.
광채를 마주한 순간 짐승은 떠올렸다.
파편화 된 기억이 짐승의 몸을 지배한다. 온전치 않은 기억이 짐승의 몸을 움직였다. 부풀었던 짐승의 몸이 수축했다. 꾸득, 꾸드득 소리를 내며 줄어든 몸. 짐승이 제 왼팔을 쭉 뻗었다. 일자로 뻗은 그것은 한 자루의 검(劍)과도 같다.
일류의 경지에 오른 검사에게 있어, 제 육체 또한 검과 마찬가지다.
검을 쥔 채 검사는 자세를 잡았다.
···그것은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다.
일초도 채 안 되는 시간. 일 초를 수백, 수천 쪼개고 바스러트려 그 중 하나의 파편을 집어든 것과 같은 찰나의 시간.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한들.
그 순간 짐승은 왕이 됐다.
긍지를 지닌 마수의 왕이.
직후 검(劍)과 검(劍)이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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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류, 극의. 무형검(無形劍).
라크는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패를 꺼내 들었다. 최초의 성검을 쥐고 펼치는 극의. 아직 무형검을 완전히 펼쳐내진 못했기에 휘두르는 순간 몸에 막대한 부하가 걸릴 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앞의 적을 벤다.
저 짐승을 이 자리에서 죽인다.
그 일념으로 라크는 최초의 성검을 쥐었다.
완성된 자세, 성검의 도신에서 터져 나오는 백금색의 별빛. 검을 휘두를 준비를 마친 라크가 제 발을 눈밭 위에 단단히 고정했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라크의 시야가 흔들렸다.
흔들린 것은 현재의 시야가 아니다. 라크가 초감각을 통해 내다보고 있던 몇 초 뒤의 미래였다. 본래 라크의 눈에 보인 몇 초 뒤의 미래는 ‘무형검’에 의해 양단 당하는 짐승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창, 소리를 내며 라크가 내다보던 미래가 박살 났다. 라크가 지닌 초감각이 그보다 더 정밀한 무언가에 의해 덧씌워졌다. 그렇게 펼쳐진 것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미래다.
미래는 곧 현실이 된다.
라크는 보았다, 눈앞의 짐승이 두른 분위기가 뒤바뀜을. 찰나의 순간이지만 시퍼렇게 일렁이던 짐승의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직후 짐승은 제 왼팔을 쭉 뻗은 채 특정한 자세를 취했다.
기이한 자세, 기이한 움직임.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검의 묘리가 담겨있다. 그다음에 펼쳐질 동작을 라크는 예측하지 못했다. 더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선 존재가 무엇인지 라크는 이해하지 못했기에,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의 직감을 믿을 뿐.
라크는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제대로 된 검로가 보이지 않았기에, 라크가 휘두르는 검은 난잡하다. 허나 난잡하다 한들 이것은 최강의 검사가 만들어낸 검술의 일부다.
부족한 기술을 육체 능력으로.
부족한 묘리를 성검이 지닌 별빛으로 보완했다.
거대한 칼날이 휘둘러지며 바람이 휘몰아쳤다. 땅에 쌓인 눈이 모조리 뒤집히며 눈사락이 흩날렸다. 휘몰아치고 흩날리는 것들을 모조리 끊어내며, 무형의 충격파가 짐승을 향해 쏘아졌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각!
닿는 모든 것을 모조리 갈아버리며 다가오는 검격의 앞에서, 짐승은 땅을 내려찍었다. 땅과 수평을 이루던 팔을 휘둘렀다. 허나 라크의 눈에 짐승이 팔을 휘두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왼쪽을 가리키던 짐승의 손톱은, 어느새 완전한 선을 그려내며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두 장면 사이에 놓인 과정을 라크는 보지 못했다. 눈으로 좇는 것조차 불가능한 쾌속의 검격.
‘초견살(初見殺)···?’
완벽한 자세.
완벽함에서부터 만들어진 흔들림 없는 검격.
이윽고.
“···아.”
서걱, 하는 고요한 절삭음이 울려 퍼졌다.
라크의 검 끝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절삭음과 함께 찢겨나갔다. 뒤늦게 밀려드는 검풍과 함께 라크가 만들어냈던 인위적인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짐승에게로 향하던 눈보라가.
무언가에 휩쓸려 도로 라크에게로 돌아온다.
바람을 휩쓸고 오는 것은 한줄기의 검격이다. 라크가 삐걱이는 몸을 움직여 급히 대검을 들어 올렸다. 대검에 한줄기의 검격이 맞부딪치는 순간, 카아아아아앙! 하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커,흑!”
막대한 충격 또한.
검을 쥔 라크의 손가락이 우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팔이, 어깨가,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라크의 몸이 공중에 붕 뜬채 밀려드는 바람에 난도질당했다.
투확.
검격의 여파가 라크의 몸을 할퀸다.
밀려드는 검격을 막아내며, 미처 흘리지 못한 충격파가 라크의 몸을 헤집었다. 라크의 입에서 쿨럭, 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가 토해져 나왔다.
라크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2.
라크가 설원 위를 나뒹굴었다.
바닥을 한참 구르고 나서야 라크는 멈춰 섰다.
“컥, 커흑!”
철퍽, 하고 입에서 검붉은 핏덩어리가 쏟아졌다. 설원이 붉게 물들었다. 라크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설원에 짚고 일어서고자 했다. 그러나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 주질 않는다.
‘일어서라.’
일어서아먄 하는데.
저 짐승을 쳐죽여야만 하는데. 한계에 도달한 라크의 몸은 라크의 집념에 답해주지 않았다.
뿌득, 하고 라크가 이를 갈았다.
피가 들끓었다. 호흡이 가팔랐다. 차가운 눈보라에도 가열된 육체의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거센 불길이 라크를 집어삼켰다. 지금 라크는 오직 한가지만을 강렬히 바랐다.
‘죽인다.’
라크의 눈동자가 하나의 점으로 수축했다.
뿌득, 하고 어금니가 갈렸다.
‘죽인다, 죽여서 원수를 갚는다.’
무언가에 이토록 강렬한 증오를 느껴본 적이 달리 있었던가. 상실을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라크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던 소년은, 일생 처음으로 강렬한 분노를 느꼈다.
가족과도 같았던 전사가 죽었다.
오야칼이 죽었다. 긍지를 짓밟혔다.
그들의 죽음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짐승은 그들의 죽음을 모욕했으며, 그들의 삶조차 짓밟았다. 그 사실을 라크는 견딜 수 없었다. 짐승을 처죽여 복수를 이루어야만 했다.
쿵, 쿠웅.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분노가 라크의 머리를 뜨겁게 달궜다. 사그라들지 않는 거센 불길이 라크의 이성을 뿌리째 불태우기 시작했다.
강렬한 동기, 열망, 집념.
라크에게 결여돼 있던 것들이 지금 이 순간 충족됐다. 라크의 심장에 자리 잡았던 씨앗이 발아(發芽)했다. 씨앗을 싹 틔우는 것은 살의다. 가장 단순하고도 강렬한 감정을 양분 삼아 씨앗은 자라난다.
내면에 세워져 있던 벽은 이미 허물어진 지 오래다.
성배에 의해 무너진 벽의 앞에서, 라크는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고뇌하였기에 라크는 초인이 되지 못했다. 모든 조건을 충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지금 라크의 앞에 길이 펼쳐졌다.
발아한 씨앗은 뿌리처럼 벽의 너머로 퍼져 나갔고, 수십,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진 뿌리는 길이 되었다. 방향은 다를지언정 그 하나하나가 모두 초인의 삶이다. 라크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섰다.
수천개의 길 중 가장 빛나는 길이 있다.
그것은 최강의 검사가 걸었던 길이다.
명예로우며 긍지롭고, 긍지롭기에 고고하다. 그렇기에 가장 어려운 길이다. 저 길을 고르더라도 당장 짐승을 쳐죽일 힘을 얻기 어려움을 라크는 알았다. 지금의 저 길은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
여유가 없다.
짐승을 쳐죽일 힘을 가져야 한다.
복수를 위한 힘을.
이성이 끊어진 라크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고, 어느 길 앞에 라크의 눈동자가 멈췄다. 라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핏빛으로 물든 길이다.
쉽고, 간단한 길.
당장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길.
복수에 미쳐 증오를 원동력 삼아 걷는 길이다. 가장 쉬우나, 쉽기에 파멸로 향하는 길. 그 길에 긍지와 명예 따윈 없다. 이 길을 걸은 인물을 라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검귀, 드라카.
알고 있었음에도.
라크는 그 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라크의 손이 핏빛으로 물든 길에 닿으려는 순간이다. 그보다 먼저 무언가 라크의 손에 닿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것은 서늘한 감각이다. 금속의 감각.
“······.”
라크가 눈을 떴다.
검격에 휩쓸려 솟구쳤던 눈발이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보라에 시야가 가려졌지만, 자신의 손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보였다.
부러진 검.
오야칼의 무구였다. 그 무구에 닿은 순간 라크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언제나 냉정하십시오, 도련님.」
「일류의 전사는 그 어느것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제 멋대로 휘두를 줄 알아야 진정한 전사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들었던 조언.
그 조언을 떠올리며 라크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죽어서도 가르침을 주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라크가 천천히 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분노하는 것은 옳다.
화를 삭이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그저 휘둘려선 안 된다는 뜻이다. 이성을 뿌리째 불사 지르던 불길을 라크는 찍어눌렀다. 불길은 사그라들었지만 언제라도 거세게 타오를 수 있다는 듯 세차게 일렁였다.
불길을 품은 채.
라크는 바닥에 꽂힌 대검을 움켜쥐었다. 그 어떠한 길도 선택하지 않은 채 라크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 라크가 쥔 성검은 찬란히 빛났다.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마치, 그것이 정답이라는 듯이.
* * *
온전치 않은 기억은 한 번의 휘두름과 함께 사라졌다. 다시 짐승이 된 왕은 일렁이는 눈동자로 제 팔을 보았다. 조금 전 자신이 선보였던 움직임을 떠올렸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잡힐 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빛이 코앞에 있었다.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그 빛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자신이 펼친 기술의 여파를 보며 짐승은 직감했다.
빛이 될 불길을.
거세게 타오르던 불길을, 자신이 꺼트렸음을.
깨닫지 못한 채로 싸움은 끝이 났다. 짐승이 뿌득 하고 이를 갈며 걸음을 내디뎠다. 답에 근접했다. 열망했던 것이 코앞에 있었다. 조금 더 가면,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알 수 있을까?
그렇게 짐승이 북부의 안으로 향하려는 순간이다.
서걱, 하는 절삭음.
직후 몰아치던 눈보라가 갈라졌다. 눈보라를 가르고 걸어나오는 것은 한 명의 인간이다.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지만, 기어코 쓰러지지 않는 인간. 그 인간이 두른 분위기는 조금 전과 달랐다.
짐승의 눈에 인간은 환히 빛나 보였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인간.
살의에 삼켜지지 않은 채, 제 집념을 드러내는 인간. 인간에게 남아있던 불순물은 완전히 제거됐다. 지금 짐승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짐승이 그토록 바라던 찬란한 빛이었다.
그날, 그때와 같은 순수한 빛.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빛 앞에 짐승이 환희했다.
3.
검을 든 라크의 움직임이 뒤바뀐다.
라크의 눈에 비춰 보이는 세상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이 보다 선명했다. 감각이 더 날카로워졌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마저 모조리 읽혔다.
완성된 초감각.
한 수 앞의 미래를 내다보며 라크는 움직였다. 망가진 몸으로 라크는 짐승과 같은 속도를 내진 못했지만, 짐승보다 한발 먼저 움직임으로서 그 차이를 메꿨다.
카앙!
짐승의 손톱을 쳐내며 라크가 대검을 손에서 놓았다. 허공에서 빙글, 대검이 도는 와중 라크는 짐승의 가슴팍에 쳐박힌 제 도끼를 뽑아냈다. 양손에 든 도끼로 짐승의 공격을 빗겨내고 쳐내며 파고들었다.
그리곤 쩌억.
짐승의 양 어깻죽지에 라크의 도끼날이 파고들었다. 깊게 파고든 도끼날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짐승의 근육이 찢어졌고, 팔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직후 도끼를 놓으며 라크가 손을 뻗었다.
콱.
공중에서 원을 그리던 대검이 라크가 손을 뻗은 위치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떨어졌다. 대검이 라크의 손에 붙잡혔을 때, 라크는 이미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촤아아악!
처음으로 짐승의 몸이 길게 베였다.
질긴 가죽을 뚫고 대검은 짐승의 가슴팍에 사선의 흉터를 새겼다. 터져 나오는 검붉은 핏줄기. 짐승이 웃음을 터뜨리며 왼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캉, 카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크의 움직임은 계속해서 빨라졌다. 정교해졌다. 부릅뜬 라크의 눈동자는 더이상 미래만을 보지 않았다.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극한에 도달한 미래 예지는, 라크가 지닌 감각에 의존해 최선의 수를 예측한다. 그 수는 수십 갈래의 길이 되어 라크의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이 쥔 무기가 지나가야 할 길. 그 길을 가리켜 검의 초인들은 이렇게 부른다.
검로(劍路).
아직은 흐릿한 길을 향해 라크가 대검을 휘둘렀다. 느린 대검으로 생겨난 빈틈은, 검을 놓아버리고 도끼를 휘둘러 채워넣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경지를 라크는 주변의 수를 활용해 메꿨다.
때로는 주문을 터뜨렸으며.
때로는 성검이 지닌 빛을 활용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라크는 짐승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성장하는 것은 라크 뿐만이 아니다. 짐승의 움직임 또한 서서히 정교해진다. 한순간이나마 기억을 찾았던 짐승은, 그 한 번의 휘두름을 떠올리며 제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어느 순간부터.
라크가 그리던 미래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조금씩이지만 미래가 틀어졌다. 예측한 미래에서 벗어난 움직임을 짐승이 보인다. 짐승 또한 라크의 움직임을 미약하게나마 예측했다. 그렇게 짐승과 라크는 완전한 호각을 이룬다.
어느 한 쪽도 밀리지 않는다.
드넓게 펼쳐진 설원 위에서, 두 명의 검사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선보였다. 그리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결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그것, 방치해 둬도 되는 것인가?』
피비린내가 가득한 공방.
고대 리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 아니었나. 그런 작품을 그렇게 방치해두는 건 비효율적이라 생각한다. 낭비지.』
“낭비?”
『그래. 사역마는 통제해야 하지 않겠나? 네가 만들어낸 그건 강력한 전력이다. 그것만 있다면 전선에 변수를 만들어낼 수도···.』
“···통제를 해?”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그녀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녀는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내며 스케발을 돌아봤다.
“애초에 그건 통제되는 존재가 아니야.”
『···기껏 해보아야 짐승일 뿐이다.』
“그 기껏 해보아야 짐승인 존재가 가니칼트와 호각을 이루었어. 수백 년 전 마왕을 제외하면,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가장 강력한 존재였고.”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
최초의 성녀가 비웃음을 흘리며 스케발을 가리켰다.
“넌 상대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그건 그만큼 까다로운 존재였어. 예측할 수 없고 통제되지 않는 기이한 존재.”
『그래도 지금은 짐승에 불과하지 않나. 그것은 아직 개화하지 못했어. 그러니 통제하려면 지금뿐이라고 말하는 거다. 수백 년 전처럼,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건 낭비이니.』
“그게 말처럼 쉬우면?”
배교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스케발.”
그녀는 알고 있다.
인간을 잡아먹으며 검은 짐승이라 불리던 존재가, 마수의 왕이라 불리기까지의 일련의 역사를.
한낱 짐승에서 시작한 존재.
미물에서 시작한 그것은 최후의 순간 또 다른 왕으로서 길을 가로막았다. 인간을 향한 동경, 열망, 집착, 질투, 수많은 감정들로 하여금 짐승은 완성됐다.
“내버려둬, 그냥.”
배교자가 웃었다.
“그건 혼자서 완성돼야만 해. 남의 손에 의해 완성되고 길러지는 존재가 아니야. 홀로서 완벽한 완성된 존재이지.”
시련, 고난, 역경.
숱한 위기 속에서 완성된 존재.
때로는 도망치고, 때로는 패배하고, 때로는 분노하면서도 짐승은 살아남았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고 채우며 짐승은 완성됐다.
“어이없는 이야기지.”
배교자는 웃음을 흘렸다.
웃으며, 그녀는 과거를 떠올렸다. 인간을 혐오했으나 또한 사랑했던 마수의 왕은 어느 인간에 의해 이름 지어졌다. 그 어느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름이나, 배교자는 그 이름을 기억했다.
마수의 왕.
마수의 왕, 바르타.
* * *
터져 나오는 피.
선혈과 고통.
다가오는 죽음의 앞에서 짐승은 떠올렸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을 정의할 단어를.
짐승이 눈을 감았다.
눈을 뜰 적 짐승은 왕이었다.
마수의 왕, 바르타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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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어 오르는 핏방울과 다가오는 죽음.
빛 무리를 끄는 검사와 결투.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찬란한 빛과 마주함.
빛이 제 몸을 두들길 때마다,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짐승은 과거를 떠올렸다. 잃어버렸던 과거를. 기억이 돌아옴에 따라 짐승의 근육은 수축했다. 거대했던 체구가 꾸득, 소리를 내며 줄어들었다.
인간의 서너 배에 달하던 체구는 어느새 그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줄어든 만큼 압축된 근육과 가죽은 더욱 질겨졌다. 짐승은 더는 팔을 늘어트리고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서서히, 짐승의 허리가 올곧게 펴졌다.
짐승의 안광이 가라앉았다.
「내게 이름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없게 돼버렸지.」
짐승의 귀에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것은 짐승이 처음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인간의 목소리이며, 끝내 이해하지 못한 인간의 절규였다.
「내게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된 이름이지. 내 이름을 아는 이들도, 내 이름을 불러줄 이들도, 그 모두를 네가 죽여버렸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하고 인간은 말했다.
「네가 가져.」
「나는 네게 그 무엇도 줄 수 없지만, 이름만큼은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네가 가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여인은 자신을 사랑했던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바르타.」
「그게 내 이름이야.」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
짐승은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떠올렸다. 수많은 기억이 파도치듯 짐승을 집어삼키고, 짐승의 이성을 일깨웠다.
그렇게 짐승은 왕이 된다.
고고한 마수의 왕이.
마수의 왕, 바르타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