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77
“그럼···.”
“거의 다 막아냈어요. 지금은 전사분들께서 숨어든 마수를 처리하는 중이고··· 음, 부상자야 좀 있겠지만 아직까진 사망자는 없네요.”
나티다가 쓰게 웃었다.
“마수의 수가 많긴 했지만, 마수들을 통솔해야 할 존재가 없더군요.”
이만한 수의 마수가 움직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인위적인 현상이고, 이런 현상을 일으킨 지휘관쯤 되는 자가 필시 존재하리라.
하지만 지휘관은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 마수를 통솔할 존재를 전장에서 배제했다고 추측합니다. 그 덕에 이쪽은 비교적 쉽게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었구요.”
나티다가 라크를 바라봤다.
녹빛의 눈동자가 라크를 향했다.
라크와 마주한 순간 나티다는 직감했다. 마수를 통솔하는 존재와 싸운 게 바로 라크일 것임을. 그리고, 그 싸움이 꽤 힘겨웠으리란 것 또한.
그렇기에.
“덕분에, 말입니다.”
나티다는 라크를 똑바로 바라본 체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막아낼 수 있었다고.
그녀의 말에 라크의 동공이 흔들렸다.
숨을 헛삼킨 라크는 그제야 툭, 하고 검을 놓았다. 댕그랑 소리를 내며 검이 떨어졌다. 긴장이 풀린 라크는 길게, 아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감사하다. 은혜를 졌다.
수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그 어느것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긴장이 풀린 라크의 몸에서 힘이 탁, 하고 빠졌다. 진작에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다.
라크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꾸라지는 라크를 나티다가 받아냈다.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라크의 몸에 나티다가 천천히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는 라크에게 나티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좀 쉬십시오.
3.
보고를 받은 라니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마수의 왕이 북부에 출몰.
그에 따른 피해가 발생.
피해 범위와 사망자, 부상자를 확인한 라니아는 천천히 보고서를 내려뒀다. 제 미간을 짚은 채 라니아가 빠득, 하고 이를 갈았다.
···마경의 안으로 향했을 텐데.
분명 마경의 깊은 곳으로 향했던 마수의 왕이 어째서 북부에서 나타났는가? 그 어떤 전선에서도 징조는 보이지 않았는데?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잡아야 할 적이었다.
그러나, 라니아는 그곳에서 마수의 왕을 놓쳤다.
놓쳐버린 마수의 왕은 학습을 거듭하며 북부로 향했고 북부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 누구도 라니아를 비난하진 않지만, 그녀 스스로가 책임을 느꼈다.
“후우···.”
라니아가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떠오르는 것은 라크의 얼굴이다.
그렇다 할 상실을 경험하지 못한 라크다. 열세전사들이 라크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지 라니아는 잘 알고 있었다.
‘···가봐야겠네.’
전장에 있느라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라니아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움직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 라크를 직접 마주해야 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테프란.”
“예, 용사님.”
“서부 전선 잿빛 마탑 제 4지부에 통신 좀 넣어줘.”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탑주에게 직접.”
테프란이 곧장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프란이 통신망이 연결된 마도구를 라니아에게 건넸다. 라니아는 귓가에 마도구를 끼운 채 입을 열었다.
“레스티.”
「네, 선배님.」
“부탁이 하나 있어.”
잠깐의 침묵, 레스티가 무언갈 정리하는 소리가 마도구 너머로 들려왔다. 이윽고 끼익, 문을 열고 나온듯한 레스티가 말을 이었다.
「말씀하세요.」
“나 대신 서부전선을 맡아줄 수 있겠어?”
「얼마 정도요?」
“북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아마 길면 열흘 정도면 될 거야.”
「열흘, 열흘이라···.」
툭툭, 제 팔뚝을 두들기던 레스티가 말했다.
「전선에 각인된 회로는 구동률이 몇퍼센트인가요?」
“꽉 채워둔 지 얼마 안돼서 9할 정도 될 거야.”
「음, 마석이 대량으로 필요하긴 하겠지만···.」
레스티가 말했다.
「열흘 정도라면 될 것 같네요. 문제는 해골바가지가 나타나는 상황인데, 이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칼트가 보조로 붙을 거야. 그 정도면 괜찮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그래, 그럼 부탁할게.”
잠깐의 일정 조율 후 라니아가 연락을 끊었다. 당장 그녀를 대신해 잠깐이라도 전장을 맡아줄 수 있는 존재는 레스티가 유일했다. 그녀는 라니아가 남겨둔 회로를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해결됐고.’
라니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그녀가 손을 뻗어 로브를 어깨에 둘렀다. 별의 조각을 심은 그날 이후로 라니아는 라크에게 무언가 계기가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계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라크가 부디 잘못된 길을 고르지 않았기를 라니아는 간절히 바랐다. 잘못된 길을 걸은 이들이 도착하는 종착지를 라니아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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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박, 하고 눈이 밟히는 소리가 울렸다.
새하얀 눈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설원은 마냥 새하얗지만은 않다. 검붉은 피로 설원은 얼룩져 있었다. 피와 살점. 그리고 부러진 무기.
핏줄기를 따라 걸으면.
널브러진 형제들의 시체를 따라 나아가면.
걸음의 종착지에는 ‘그것’이 있다.
그것은 으적,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씹어 삼키고 있다. 쩌억 벌린 아가리에서 피와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끼긱.
인간을 씹어 삼키고 있던 그것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크를 마주 바라봤다. 라크 또한 그것을 바라봤다. 그것의 생김새를 두 눈에 아로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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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반신은 털가죽에 뒤덮여 있다.
우반신은 온갖 생명체가 뒤섞여 있다.
온전한 것은 반신뿐이나, 그렇기에 더욱 기괴하다. 짐승도 인간도 마수도 아닌 것이 그곳에 있었다. 그것이 아가리를 움직일 때마다 끈적한 핏물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검은 짐승.
마수의 왕, 바르타.
악몽과도 같은 그 존재를 눈에 아로새기며 라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았던 눈을 뜨면 그곳에는 설원도, 악몽도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매일같이 보는 천장.
그렇게 라크는 잠에서 깼다.
깜빡.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인 라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힘을 주려 하니 온몸이 비명을 질러댄 탓에 고개만 살짝 까딱이는 수준에서 그쳤다.
“그렇게 움직이면 상처만 덧나요?”
칼로 몸을 저미는듯한 통증에 라크가 신음을 흘리고 있자니,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라크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일어나셨습니까?”
성녀, 나티다.
그녀가 라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
잠에서 일어나고 라크는 한동안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몸에는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으며, 내용물이 빈 포션병이 선반 위에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다.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군.’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기야, 그만한 부상을 입고도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다. 라크가 몸을 일으키기를 포기한 채 고개만을 돌려 나티다를 흘겨봤다.
“···얼마 정도 잤습니까, 제가?”
“이틀 정도 된 것 같네요.”
나티다가 눈을 비비다가 길게 하품을 내뱉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동자가 제법 퀭했다. 마치 며칠간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움직이려 하지 마세요. 오늘 하루는 꼬박 누워계셔야 내일에라도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요.”
나티다가 쓰게 웃었다.
“시간이 좀 걸립니다. 제가 치유 쪽에는 좀 재능이 없어서 말이에요.”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우습죠? 명색이 성녀인데 가장 못 하는 게 치유의 기적이라니.”
딱히 우습진 않았다.
마법사면서 맨손으로 적의 두개골을 으스러트리는 괴팍한 교수 밑에서 배운 라크다. 회복이 특기가 아닌 성녀쯤이야 뭐···.
“······.”
라크는 말없이 제 손을 바라봤다.
나티다는 라크의 손을 맞잡은 채 신성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따스하다기보단 서늘한, 가을바람과 같은 신성력이 몸 안을 순회함을 라크는 느꼈다.
나티다는 치료 쪽에는 재능이 없다고 했지만.
망가진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하도 가열을 거듭한 결과 망가진 혈관이, 찢어진 근육이 온전하게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고맙습니다.”
“뭘요. 회복 정도는 해 드려야지.”
“이것도 이거지만···.”
라크가 잠깐 숨을 삼켰다.
이틀 내리 잠들었다 해서 그 전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짐승과의 조우. 죽음을 맞이한 형제들.
그리고, 북부로 향하던 수많은 마수들.
마수 무리가 성벽을 향하는 것을 보았던 그때, 라크는 속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 북부가 불바다가 되는 장면이 훤히 그려졌으니까.
‘···성벽으로 향하면서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 성벽으로 향하던 당시에도 라크는 속으로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라고. 그렇게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심정으로 성벽의 안으로 향한 라크는, 보았다.
기적이 일어났음을.
아무도 죽지 않았음을.
그리고 기적을 일으킨 성녀는 무덤덤히 말했다. 누군가 통솔자를 전장에서 배제한 덕분이라고. 그 말에 라크는 조금이지만 구원받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수 무리에서부터 북부를 지켜주신 점.”
그리고, 라고 중얼거리며 라크가 덧붙였다.
“···형제들의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게 해주신 점. 그 점에 감사드리고 싶었습니다.”
덕분에요, 라고 나티다는 말했다.
그것이 누구의 덕분인가. 그 짐승을 틀어막은 오야칼을 비롯한 전사들과 자신을 의미한 것이리라. 그 한마디의 말이 라크에게 있어선 그 무엇보다도 값졌다.
“감사할 것까지 있나요.”
나티다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어려운 싸움을 한 것도, 전투를 쉽게 만든 것도 전부 공자님이 한 일입니다. 제가 한 거라곤 차라리 뒤처리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나티다는 조금 거북했다. 자신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저 말고 칼트 경께서 파견 오셨다면, 혹은 다른 분께서 이곳에 오셨다면 상황이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라니아는 유능한 부하를 여럿 지니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나티다는 자신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라니아가 반쯤 동정심으로 자신을 거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분이 오셨더라면···.”
“저는 당신에게 감사해 하고 있는 겁니다.”
라크가 나티다의 말을 끊었다.
나티다는 눈을 깜빡이며 라크를 흘겨봤다.
“그 자리에 없었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가장 필요했던 순간, 가장 필요했던 장소에서 북부를 지켜준 당신께, 저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라크는 딱 잘라 말했다.
돌려 말하는 건 못하는 라크다. 라크는 느끼는 바를 그대로 입에 담아, 단정 짓듯이 말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이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질 않아 차마 숙일 수 없어 고개만을 까딱이는 라크를 보며 나티다가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제법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기 때문에.
“진지한 분위기에 죄송, 큽···.”
웃음을 터뜨린 그녀의 모습에 라크는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나티다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어깨를 얕게 떨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하아···.”
길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미소 지었다.
평소와는 달리 꾸밈없는 웃음을.
“그리 생각해주시다면야 뭐··· 그럼 저도 약간의 대가를 요구해도 될까요?”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전사들의 긍지를 지켜준 나티다다.
라크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리 답했고, 나티다는 정말로 별거 아니라며 손사래 치며 오른손을 쫙 펼쳤다.
“다섯 시간.”
“···예?”
“성검, 다섯 시간.”
요컨데 최초의 성검이 내뿜는 빛을 다섯 시간 동안 쐬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라크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나티다가 라크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슬며시 하나 접었다.
“그, 그럼 네 시간···.”
“후우···.”
“한, 한숨 쉬셔도 더는 안 돼요? 네 시간 정도는 요구해도 되잖아요, 네?”
갑자기 비굴해진 모습이다.
라크는 길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그냥 온종일 쬐게 해드리겠습니다. 원하실 때 말하십시오.”
“하, 하루 종일이요?”
나티다의 동공이 탁, 하고 풀렸다.
헤, 하고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2, 24시간···.”
상상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침이라도 흐를 기세였다. 미리부터 약에 절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를 흘겨보며, 라크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3.
다행이도 라크가 마지막까지 지켜낸 전사들의 시체는 무사히 확보됐다. 간신히 라크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을 때, 전사한 이들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대공에게 인정받은 전사 중에서도 전사.
긍지를 알고 명예를 아는 그들의 죽음과, 희생을 기리기 위한 장례. 한창 추모객이 모여들던 시기에 그녀 또한 도착했다.
우뚝.
그녀의 등장에 추모객들의 걸음이 모조리 멈췄다. 장례식에 등장한 그녀에게 온갖 이목이 쏠렸다.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녀는 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물며 용사의 상징과도 같은 정복을 차려입은 채 그녀는 장례식에 참가했다. 그것은 즉 라크의 지인이나, 라니아 개인이 아닌 ‘용사’로서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들렸다는 뜻이다.
“······.”
그녀는 말없이 꽃을 바치고 관 앞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도 매끄럽고, 또 자연스러워서 한 두 번 해본 이의 몸동작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익숙해진 것.
그러나 익숙함은 결코 가벼움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전사들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표했고, 그들의 죽음이 지닌 가치에 경의를 표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꽃을 바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그곳에는 라크가 서 있었다.
라니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눈짓했다.
장례가 끝나면 이야기를 나누자는 신호였다. 라크를 스쳐 지나가며 라니아는 툭툭, 가볍게 라크의 어깨를 두들겨 줬다. 스승으로서의 위로였다.
* * *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이야, 교수님이란 말도 오랜만에 들어보네.”
어느정도 장례식이 일단락됐을 때, 라크는 라니아가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에 도착했다. 라니아는 라크를 쓱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3년만인가? 키도 좀 큰 거 같고. 근육도 더 붙은 거 같고. 많이 컸네.”
“교수님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첨이 아니라 진짜였다.
3년 전과 비교해봐도 라니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라면 분위기 정도일까. 라니아가 쿡쿡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좀 동안이야.”
동안? 스무 살 초중반이 아니셨던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라크는 무심코 라니아가 아닌 ‘라니엘’의 나이가 은퇴 직전 스물여덟이었던 걸 기억해냈다. 그럼 지금은 못해도···.
“확실히, 30대의 외모는···.”
“아닌데?”
“예?”
“아니라고.”
라니아가 칼같이 라크의 말을 끊었다.
그 목소리가 서늘하기까지 했다.
마치,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나 30대 아니야.”
“예···?”
“라크, 세간에서 내가 뭐라고 불리지?”
“용사, 최강의 용사라고 불리십니다.”
“그거 말고, 내 이름.”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래.”
라니엘이 아니고 라니아.
“나는 이십 대 초반···은 아니고, 이십 대 중반이지. 결코 30대가 아니란 소리야.”
아니, 암만 그래도 그건 좀.
라크가 무언가 반박을 하려던 순간이다. 아주 오랜만에 라크의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초인의 경지에 오르며 강화된 직감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입 닥쳐라.
교수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반박하는 것은 곧 죽음임을 잊은 것인가?
3년동안 마주할 일이 없다 보니 잊어버렸던 철칙이다. 라크는 몸을 가볍게 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죠.”
교수님께선 20대 중반이시지요.
그제서야 라니아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가끔 도서관에서 라니엘 반 트리아스 문서를 열람하면 31세라고 나오는데, 그거 틀린 정보라니까? 나는 언제까지고 20대야.’ 라고 중얼거렸지만··· 그 중얼거림을 라크는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세상에는 듣지 않아야 이로운 이야기도 있는 법이었으니.
‘···그런데 자기 문서는 왜 열람해보시지?’
의문이 한둘이 아녔지만, 그 또한 조용히 묻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는 편이 좋다고 직감이 외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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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아는 한동안 라크와 잡다한 대화를 나눴다. 3년간 어찌 지냈느냐. 소식은 드문드문 들었다. 같은 썩 영양가 있지는 않는 대화.
“북부의 수호자라 불린다며? 가끔 신문 보면 네 이름이 보이더라.”
사실 ‘가끔’이라기 보단 ‘매일’에 가까웠지만,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제자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라니아는 세간에 관심이 없는 척 적당히 말을 둘러댔다.
그리고, 나이가 들고 눈치가 늘어 그 연기의 허점을 어느 정도나마 간파할 수 있게 된 라크는 쓰게 웃으며 ‘여전하십니다’ 하고 생각했다. 결코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고 속으로만.
“······.”
그렇게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라니아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짓고 있던 가벼운 웃음을 지우고, 숨을 가다듬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북부에서의 일은 들었다.”
마수의 왕의 출몰.
본론이었다. 라크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 일에 대해서 해야 할 말도 있고.”
이미 장례식에 참가해 조의를 표한 라니아다. 그녀는 전사들의 죽음에 대해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의 배려였다. 라크가 그들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기에.
“미안하다.”
라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라크를 향해, 그리고 북부를 향해.
“내 실책이었다.”
그 누구의 앞에서도, 설령 이 나라의 국왕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이가 바로 라니아 반 트리아스다. 그런 그녀가 라크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고 그녀는 말했다.
“마수의 왕을 놓친 것도, 추적에 실패한 것도, 경로를 잘못 읽은 것도 나야. 내 실수지. 내 실수로 하여금 마수의 왕은 북부에 도착했고···.”
북부에서 사고를 일으켰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냈다.
“···누군가가 희생돼야만 했지. 본래 그리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을 텐데.”
원망해도 좋다.
그리 말하는 듯한 라니아의 모습에 라크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교수님.”
라크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께서 사과하실만한 일도 아니고, 교수님의 책임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요.”
라니아가 고개를 들어 라크를 마주 봤다.
언제나와 같은 빛을 띠는 붉은 눈동자는,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분노에 물들지도 않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