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80
구하지 못한 은인이.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나는 계속해서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의 스승이자 은인, 그리고 선배. 그녀는 내게 가르침을 주었단 점에서 스승이었고, 내게 답을 알려주었기에 은인이었으며, 나보다 먼저 내가 걸어야 할 길을 걸었기에 선배였다.
라니엘 반 드라고닉.
미래에서 온 내게 나는 구원받았다.
그녀가 있었기에 나는 후회하지 않아도 됐다. 그녀가 답을 알려준 덕분에 나는 카일을 구할 수 있었다. 구할 수 있었기에, 망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타협하지 말고, 합리화하지 말고.」
「너처럼 살아, 라니엘 반 트리아스.」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웃음이 너무나도 낯설어서, 미래에서 온 그녀를 나는 ‘나 자신’ 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타인처럼 느껴졌다.
「나처럼 살지 말고 말야.」
나와는 다른 삶을 산 타인.
내가 살았어야 할 삶을, 내가 견뎌냈어야 할 비극을 대신해서 짊어진 타인. 비극의 끝에서 과거로 돌아와 미래를 바꾸고만 나의 은인.
···나는 그녀에게 빚을 졌다.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을.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나는 스승님을 통해 그녀의 최후를 알게 됐다. 모든 일을 마친 재의 여신은 소멸했다. 그녀에게 빚을 갚을 수 없게 됐으므로, 나는 하다못해 결코 그녀의 존재를 잊지 않고자 다짐했다.
그렇기에.
“지랄하네, 노망난 도마뱀 새끼가.”
나는 저 말을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넘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뚜둑, 하고 가볍게 턴 손가락에서 뼈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좀 많았는데.”
계약의 진실을 알게 됐을 때.
카르디에게 진실을 들었을 때. 그때부터 나는 언젠가 찾아올 고룡의 마법사를 기다렸다.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이참에 좀 물어나 보자.”
별, 방관자, 규칙, 그놈의 규율.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
이제는, 이해하기조차 싫어진 것들.
“이 빌어먹을 별자리 새끼들아.”
용사가 입에 담을만한 말이 아니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부터 입에 담을 말들은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가 아닌··· 잿빛 마법사, ‘라니엘 반 트리아스’로서의 말이다.
“니들은 하는 게 뭐냐, 대체?”
언제나 궁금했다.
“악의 세력을 쳐죽여라. 별을 섬기지 않는 그릇된 이들을 정화하라. 마(魔)와 관련된 것들을 모조리 불살라라. 만마의 주인인 마왕을 토벌하라.”
수백 년의 역사 동안 별이 강조했던 것.
때로는 신탁으로, 때로는 별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에게 전해왔던 것들. 그 말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내가 고룡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말은 번지르르하지. 그런데, 내가 지난 수년간 전장에서 싸우다 보니 의문이 들더라고.”
탁.
“그거 다 빈말이잖아. 그늘이 불완전한 존재로 추락한 이후부터, 별은 그늘을 끝장 낼 생각을 하지 않아. 내 말이 틀려?”
아마 맞을 걸.
내가 웃음을 흘렸다.
“별에게 위협이 되던 건 ‘완전한’ 그늘뿐. 가니칼트에 의해 그늘이 불완전한 신으로 추락한 시점에서 별은 그늘의 토벌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아.”
가니칼트의 별빛조차 거둬 가려 했던 별이다.
그 별을 이 땅에 고정한 것은 별의 의지가 아닌, 대현자의 의지였다. 대현자는 가니칼트가 지녔던 별빛을 이 땅에 붙잡아두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별은, 언제나 그랬다.
그것을 일종의 규칙이라 여겼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못하게 됐다. 별이 내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말았으므로. 별에게 의지가 있음을 확인하고 말았으므로.
“달리말하면.”
너희는.
“처음부터.”
언젠가 카일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왕 잡을 생각 없었잖아, 좆같은 새끼들아.”
너희들이 바라는 것은 현상유지일 뿐이다.
의심으로만 하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나는 카르디가 맺었던 계약의 진실을 모두 알게 됐을 때··· 의심은 확신으로 뒤바꼈다.
콱.
내가 고룡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별과 한통속인 별의 대리인을 노려보았다.
“누가 누구보고 죄인이래? 그딴 말을 할 자격은 있고?”
“규율을 어긴 이. 금기를 범한 이는 죄인이다. 그러니 죄인이라 불렀을 뿐이지. 실제로 그 죄인에 의해 규율이 흔들렸어. 끔찍한 일이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규율, 그래 그놈의 규율.”
고룡의 눈동자는 여전히 서늘할 뿐이었다.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 그 눈동자를 마주 바라본 채 내가 비웃음을 흘렸다.
“좆같은 규율에 묶여 살면 좋냐?”
움찔, 하고.
처음으로 고룡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 * *
라니엘에게 있어 ‘재의 여신’이 역린으로 작용하듯, 요르문에게도 역린 과도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규율의 글레투스.
그것이 수만 년을 살아온 고룡의 역린이다.
그렇기에 지금 라니엘이 언급한 ‘규율’에 고룡은 반응했다. 한순간 감정이 요동쳤으나 고룡은 이내 끌어 오르는 감정을 찍어 눌렀다.
“흥분했군, 라니엘 반 트리아스.”
서늘한 목소리.
“우선 진정해라. 너와 싸우자고 온 것이 아니니.”
고룡이 제 멱살을 움켜쥔 라니엘의 손목을 콱, 하고 움켜쥐었다. 그리곤 남은 한 손으로 쥔 지팡이의 끝으로 라니엘의 복부를 툭 건드렸다.
쿠웅!
충격파와 함께 라니엘이 뒤로 밀려났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방벽이 파삭, 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바스라지는 방벽을 바라보며 라니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마치 ‘쳤냐?’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단단히 꼭지가 돌았군.’
귀찮게 됐어.
그런 생각을 하며 고룡이 지팡이를 쿵 내려찍었다.
“머리 좀 식혀라.”
지팡이를 중심으로 파문이 인다.
직후 구웅, 하는 울림과 함께 거대한 압력이 일대를 찍어 눌렀다. 중력장과 유사한 주문. 하지만 고룡의 마나로 발현된 주문은 일반적인 주문과는 궤를 달리한다. 권능과 별빛이 실려있기에.
별빛과 권능이 실린 주문.
그것은 일종의 섭리와도 같다. 고룡이 발현한 주문이 곧 섭리이자 법칙이다. 초월의 영역에 닿지 않은 인간은 그에 저항하는 게 불가능하리라.
‘인도자라 한들 아직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저항할 방법은 없으리라.
삐걱이는 공간 속에서 고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인이라는 발언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으나, 저렇게 꼭지가 돌아서야 대화가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았으니.
“진정되면 말하게. 나도 이런 식의 감정소모는···.”
고룡이 입을 다물었다.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고룡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시선은 삐걱이는 공간 속에서도 무릎 꿇지 않은 라니엘을 향했다.
끽, 끼기기긱.
삐걱이고 흔들리는 공간.
그 공간 속에서도 라니엘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단순히 기합으로 버티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디디고 선 땅이 움푹 파이지조차 않았으니.
“······.”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 걸음걸이는 가볍다. 고룡이 장악한 공간 속에서도 그녀는 유유히 움직였다. 마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처럼.
“미래의 내가 어떻게 죽였나 했더니.”
라니엘이 툭 내뱉었다.
“죽일만했네.”
한순간 라니엘의 신형이 사라졌다.
직후 고룡은 제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손바닥을 보았다. 고룡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라니엘이 콱, 하고 고룡의 얼굴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쩍, 쩌적.
라니엘이 발을 디딘 땅이 갈라졌다. 막사의 천막이 요란스레 출렁인 직후, 섬광이 일대를 후려쳤다.
2.
『이게 전부였구나.』
『정말로.』
『이게 끝이었구나.』
들판을 걸으며 그림자 용의 군주는 뇌리를 맴도는 장면을 곱씹었다. 그것은 조금 전 엿보았던 미래다. 무너지는 하나의 세상과, 그 세상의 끝자락에서 탄생하고만 이질적인 신(神)의 존재.
‘어이가 없군.’
하늘을 열고 일만에 가까운 신을 찢어발겼던, 자신의 첫 번째 계약자 요르문 반 드라고닉. 그가 패배하는 모습을 여신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허나 그녀가 상상치 못한 일이 본래의 미래에선 벌어졌다.
『비켜.』
요르문이 지닌 단 한 마리의 용.
거신룡은 날개가 뽑혔고, 턱이 뽑혀나갔으며 온갖 장기를 내쏟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용의 핏물을 털어내며 요르문에게 다가가는 이가 있었다.
『비키라고 말했어.』
공허한 눈동자. 비어버린 인간.
잃을 게 없는 인간은 요르문의 너머에 있는 세상의 중심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요르문은 그녀를 막아 세웠지만, 저항은 결국 그녀의 두 눈을 앗아가는 데 그쳤다.
『돌아가야 해.』
『나는, 돌아가야만 해.』
뽑아버린 요르문의 머리.
그 곳에서 두 눈동자를 뽑아낸 여인은 용의 눈동자를 자신의 눈에 박아넣었다. 잃어버린 눈 대신 용안을 얻게 된 그녀는 권능을 얻었다.
그림자 용의 계약자가 된 것이다.
새로이 계약자가 된 그녀의 앞에 미래의 자신이 나타나는 모습을 그림자 용의 군주는 보았다. 미래의 자신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언가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까지 엿듣지는 못했지만···.
『그거면 됐다. 딱한 아이야.』
대화를 나눈 뒤 미래의 자신은 말없이 소멸했다. 무언가 계약이 이루어졌고, 그 계약에 만족했다는 것처럼. 그리고 공허한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그 계약을 곧장 이행했다.
『······.』
세상의 끝에서 여인이 뒤를 돌아봤다. 현재의 그림자 용의 군주와 눈을 마주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채 그녀는 어떠한 정보를 전했다.
그 정보를 곱씹으며.
“···나의 계약자야.”
그림자 용의 군주는 빙글, 몸을 돌렸다.
어느새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해가 뜨고 특별했던 시간은 끝나리라. 그 시간이 끝나기 전에 그림자 용의 군주는 벨노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십니까?”
“보면 모르나.”
그녀가 양팔을 벨노아를 향해 쭉 뻗었다.
마치 안아 달라는 것처럼.
“···뭐하십니까?”
“안아 달라는 뜻이다. 걷기 지쳤다.”
“언제는 걷는 게 즐겁다면서요.”
“질렸다.”
“변덕도 빠르시네.”
벨노아는 앞으로 안아 드는 대신, 그림자 용의 군주를 업어 들었다. 가벼웠다. 무척이나.
“그래서 뭡니까?”
“뭐긴.”
“할 말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눈치가 빠르군.”
피식, 여신이 웃음을 흘렸다.
벨노아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여신은 벨노아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것 아느냐? 나와 계약한 이들은 다들 썩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한다. 내 힘이 그런 것이니.”
“알고는 있습니다.”
“아니, 너는 모른다.”
여신이 쓰게 웃었다.
“첫 번째 계약자는 가장 소중했던 것을 잃었다. 그 거짓말쟁이가 지키자 했던 것은 하나뿐이나, 그 하나만을 지키지 못했지. 모든 것을 지켜냈음에도.”
“나의 두 번째 계약자 역시 마찬가지였지. 그 아이는 더 불행했어.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저 이성 잃은 짐승이 되어 날뛰게 됐지.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불태우면서.”
잠깐의 호흡.
길게 숨을 내뱉으며 여신이 말했다.
“그러니 나의 세 번째 계약자야.”
“예.”
“너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를 바라며 내게 하나만 더 조언하마.”
“오늘따라 말이 많으십니다.”
“나는 언제나 말이 많다.”
여신이 툭, 하고 내뱉었다.
“흐름은 제자리로 돌아오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네게도 위험이 닥치겠지. 본래대로라면 너는 곧 죽게 됐을 운명이니까.”
“운명이 참 가혹하네요.”
“그렇지? 그러니, 이 말을 꼭 명심하거라.”
무엇을, 하고 벨노아가 묻는 것보다.
여신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희생만을 위해 힘을 쓰지 말아라. 살아남기 위해 힘을 쓰거라. 진정으로 그 아이를 지키려면 네가 오랫동안 살아남아야 할 테니.”
이미 들려주었던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벨노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말은 참 잘하는구나.”
“말이라도 잘해야죠.”
“한 마디를 안 지는 아이로고. 건방지다.”
우물, 하고 그림자 용의 군주가 벨노아의 귀를 물었다. 이빨을 세워 물은 것은 아니었기에 간지러운 정도로 그치는 공격이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그만···.”
그리고, 그 순간이다.
“벨노아···?”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가 아닌 정면에서. 아주 익숙하고 또 반가운 목소리였지만, 지금만큼은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벨노아, 여기서 뭐 해?”
벨노아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밤의 끝자락, 이제 막 밝아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어둑어둑한 길. 그 길에서 유난히도 밝은 눈동자로 벨노아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클, 클로에?”
“응, 벨노아.”
싯푸른 녹빛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여기서, 뭐해?”
클로에가 미소 지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 평소와 같은 눈빛.
하지만 그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조금··· 아니, 많이 서늘했다. 등골이 쭈뼛 설정도로.
“그리고.”
클로에가 팔을 들어 올렸다.
쭉 뻗은 손가락으로 벨노아의 귀를 우물거리고 있는 그림자 용의 군주를 가리켰다.
“뒤에 그 여자분은 누구고?”
벨노아는 직감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오, 이런.”
벨노아의 귀를 우물거리던 여신이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위기가 다가왔구나, 계약자야.”
아니, 당신 때문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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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 제 1 군단 주둔지.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를 중심으로 편성된 제 1 군단은 소수로 이루어져 있다. 전선의 총 책임자 되는 라니아에게는 별다른 지원이 필요 없을 뿐 더러, 어중간한 지원은 오히려 발목을 붙잡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1 군단 소속원들의 실력이 형편 없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아니다. 개개인의 강함은 둘째치고 그들은 오랫동안 전장에서 활동한 기사들이다.
요컨대, 상황 파악이 빠르다는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주둔지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
하늘 위로 솟구치는 흙먼지와, 찢어진 채 허공에 나부끼는 막사를 본 순간 1군단에 소속된 기사들은 곧장 충격이 발생한 곳으로 집결했다.
몇차례의 섬광과 흔들리는 땅.
자욱하게 깔린 흙먼지가 시야를 가려 그 너머가 보이진 않지만,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솟구쳤던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먼지의 내부에서 연달아 충격이 울려 퍼졌다.
쿵, 쿠웅!
흔들리는 땅을 디디고 선 기사들은 창칼을 고쳐잡았다. 이곳은 본래 용사님의 막사가 있던 장소다. 그런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은, 저 흙먼지 속에 있을 존재를 쉬이 예상케 했다.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녀가 저곳에서 싸우고 있다. 무언가와. 연달아 울려 퍼지는 충격에 기사들은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흙먼지를 에워싼 채 그들은 먼지가 걷히기만을 기다렸다.
번쩍.
하늘의 위에서 땅을 향해 무언가 떨어졌다. 싯푸른 섬광에 시야가 새하얗게 물든 와중에, 시차를 두고 뒤따른 굉음이 기사들의 귀에 메아리쳤다.
콰릉!
푸른 번개가 흙먼지를 관통했다.
어찌나 굵은지 가느다란 번개 다발이라기보단 빛 기둥처럼 보이는 그것. 천둥이 내리꽂힌 직후 발생한 풍압과 함께 서서히 흙먼지가 걷혔다.
“···어?”
파직, 파지직 하고 땅을 기어 다니는 전류 사이로 드러난 광경은··· 전투가 끝났음에도 기사들을 안심시키긴커녕, 더욱 경악게 만들었다. 그들은 보았다. 용사께서 적대하고 있던 상대의 모습을.
고룡의 마법사, 요르문 반 드라고닉.
별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이 땅에선 아예 신(神)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마법사. 그 마법사의 목을 고룡의 마법사 만큼은 아니나, 그에 필적하는 명예를 지닌 용사가 움켜쥐고 있었다.
고룡의 목을 움켜쥔 용사.
용사의 가슴팍에 맞닿아있는 고룡의 지팡이.
어느 한 쪽이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한쪽은 머리가 날아갈 것이며, 다른 한쪽은 심장이 뚫릴 것이다. 기사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서로에게 주문을 겨누고 있는 둘의 입장에선 조금 달랐다.
“놓지.”
고룡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라니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부터 치우던가.”
“먼저 놓으시게.”
“치우라니까?”
고룡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지팡이를 치웠다. 진지하게 한대 더 후릴까 고민했던 라니엘이었으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기사들의 시선을 의식해 결국 고룡의 목을 놓아주었다.
“좀 분이 풀렸나?”
“풀렸겠냐?”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라니엘은 고룡을 노려봤다. 옷에 그을음만이 남았을 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아직 안되나.’
쯧, 하고 라니엘이 혀를 찼다.
피해를 입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꺼낸다면 정말 끝장을 봐야 했다.
‘아직은 아니야.’
손가락 위로 튀어 오르던 번개의 색이 변질하기 전에, 라니엘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마나를 털어냈다.
“시끄러웠냐. 미안하다.”
라니엘은 모여든 기사들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돌아가 봐. 별거 아니니까.”
몇몇이 무언갈 질문했지만 라니엘은 그 질문에 답해주진 않았다. 가벼운 말다툼이 있었다고 적당히 둘러대며 라니엘은 걸음을 옮겼다.
“······.”
“······.”
라니엘이 뒤를 돌아봤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고룡의 마법사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벌레를 보는듯한 눈으로 고룡을 바라보며, 라니엘이 툭 내뱉었다.
“뭐하십니까?”
“다시 존댓말로 돌아왔군. 반말인 쪽이 조금 더 취향인데, 이건 아쉬운 부분이야.”
“······.”
벌레보다 못한 것을 보는 눈동자로 라니엘이 고룡을 노려봤다. 그 경멸 어린 시선이 오히려 좋다는 듯 고룡은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할 말이 있다고 했지 않나.”
“서신을 보내든가 하십시오. 나눌 대화 없으니 좀 꺼져 주시면 좋겠는데.”
“서신으로 보내면 볼 건가?”
“찢어서 버릴 생각입니다.”
“역시 말로 해야겠군.”
“좆까십시오.”
하루종일 따라다니면서 칭얼거릴걸세.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도록 하지.
고룡의 마법사는 그리 중얼거리곤 라니엘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기지 말라며 코웃음을 친 라니엘이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고룡의 마법사는 정말로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러니까, 하루가 넘도록 라니엘을 따라다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