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81
“이제야 이야기를 들을 마음이 생긴 모양이로군.”
라니엘은 퀭한 눈동자로 눈앞의 마법사를 바라봤다.
“진짜 할 일이 없습니까?”
“내가 시간이 좀 많네.”
1분 1초를 쪼개어 써야 할 만큼 바쁜 삶을 사는 라니엘과 달리, 고룡의 마법사는 남는 게 시간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라니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빨리 이야기하고 꺼지세요, 그럼.”
결국 라니엘이 먼저 백기를 올렸다. 고룡은 만족스레 웃으며 그제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재의 여신, 미래에서 탄생한 신.”
고룡이 지팡이 끝을 툭툭 두들겼다.
“3년 전, 그녀가 이 시대에 개입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네.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그 시점에 개입하지는 않았지. 그 사실은 자네도 알고 있을 테지?”
섭리의 바깥에서 온 존재.
시간 축을 뒤틀며 찾아온 방문자를 고룡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눈치챘음에도 그가 개입하지 않았음은 라니엘 또한 알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문이 들 거고?”
“본론이나 말하세요. 별로 안 궁금하니까.”
까칠하기는. 고룡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때는 내 개입이 의미가 없었으니, 개입하지 않았지. 미래에서 과거로 넘어온 시점에서 내가 손대는 게 의미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하고 그가 덧붙였다.
“얼마 전에 나는 보았네.”
얼마 전 고룡은 흐름을 보았다.
그것은 앞으로 벌어질 미래가 아니었다. 3년 전 그날을 기점으로 고룡은 미래를 읽을 수 없게 됐으니까. 고룡이 본 것은 본래의 미래였다.
“재의 여신, 그 죄인이 걸어온 길을.”
일어났어야 할 미래를.
그녀의 개입으로 사라진 미래를.
그 미래를 보고 온 고룡은 입을 열어 말했다.
“금기란 금기는 모조리 범했더군.”
거래, 고대신의 계약, 힘의 강탈, 별빛의 억제, 육체의 변이, 배교, 이단숭배, 거기에 마지막으로는 섭리를 뒤틀어 시간마저 꼬았다.
“미래의 자네가 벌인 짓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
“지랄합니다, 진짜.”
라니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뭐 손 놓고 멸망하길 기다리는 게 옳다는 겁니까? 온 세상이 마경이 되고, 사람들이 죄다 변절자가 되고, 그 끝에 인간이 멸망하는 게 옳은 길이에요?”
“흐름이 멸망을 가리킨다면, 그게 옳은 거겠지.”
“뭐···라고요?”
라니엘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앞에 앉은 고룡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흐름이, 섭리가, 규율이 그것을 가리킨다면 그게 옳은 거라 답했네. 멸망하는 게 순리라면 그리 되는 것이 옳겠지.”
빈말이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룡을 보는 라니엘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었다.
“멸망을 막지도 말고, 그냥 멸망하게 두라고요?”
“그런 소리는 아니지. 나는 딱히 운명론자는 아니야. 막을 수 있다면 막는 게 좋겠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섭리를 거슬러선 안 된다는 뜻일세.”
“상대는 섭리고 진리고, 법칙이고 다 무시하는 와중에?”
“그래도 규율은 지켜져야만 하지. 규율이란 그런 것이니.”
“와.”
라니엘이 감탄했다.
“미친 새끼였네.”
“그런 소리 많이 들었지. 일만 년 전에는 말야.”
“그, 굉장히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라니엘이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지금 뭔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세요?”
말하면서도 라니엘은 확신했다.
눈앞의 이 노망난 도마뱀이 모를 리가 없다.
알고 있음에도 고룡에게 제 신념을 굽힐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수만 년에 걸쳐 굳어진 신념은 이미 견고한 벽과도 같았으니.
“말이 안 통하네, 진짜.”
“이해해달란 말은 아니네. 경고지.”
“당신의 정신 나간 신념에는 별 관심 없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뭐 책임이라도 물려고요?”
라니엘이 비웃음을 흘렸다.
“미래의 내가 벌인 일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말하러 왔습니까?”
고룡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야. 이미 다 끝난 일이니까.”
“그럼 뭐하러 찾아왔는데요?”
“지난번의 연장선일세.”
연장선.
“미래의 자네와 같은 방법을 고를 생각이라면, 미리 접어두라고 말하고자 왔지.”
선을 넘지 마라, 그렇게 고룡은 말하고 있었다.
“섭리에 도전하지 말라.”
고룡의 금빛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라니엘의 앞에 앉아있는 것은 땅 아래 묶인 존재가 아니다. 언제든지 초월의 영역에 닿을 수 있으나, 스스로를 제한하여 땅에 발을 디딘 채 살아가는 신이다.
“찢어지고 말테니.”
“할 수는 있고요?”
신의 경고 앞에 라니엘이 비웃었다.
“이미 한 번 당했잖아요, 미래의 나한테.”
그 비웃음 앞에 고룡이 입을 열었다.
“그래. 미래에서 온 그대의 삶을 통해 그대가 무언갈 깨우쳤듯이, 나 또한 깨달은 바가 있네.”
고룡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일대의 공간이 찢어지며, 찢어진 공간의 너머에서 수천에 가까운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모두가 고룡이 지닌 권능이자 신에게서 빼앗은 힘이다.
“미래의 나는 마지막까지 자네를 방치했지. 자네를 믿었을 거야. 개입하지 않는다는 규율을 지키고자 노력했을 테지. 그 덕에 권능의 대부분을 잃었을 테고.”
하지만, 하고 고룡이 단언했다.
“이번에는 그리하지 않기로 했어.”
공간이 더욱 크게 찢어졌다.
찢어진 공간에서 나타난 것은 거대한 용의 눈동자다. 얼마전 라니엘이 벽화에서 보았던 거신룡.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고룡의 눈동자가 라니엘을 응시했다.
“기미가 보이면 나는 즉시 개입할걸세.”
고룡의 눈동자에 백금색의 고리가 셋 합쳐졌다. 금빛이었던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태초의 신이 지녔던 용안(龍眼)에 별빛이 담겼다.
“무슨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죄인을.
규율을 어긴 죄인을 벌하리라.
“자네를 죽일걸세. 더는 자네를 믿지 않으니.”
무엇을 꾸미고 있는진 몰라도, 그것이 금기를 어기는 일이라면 접어라. 고룡은 그렇게 경고했다. 지난번보다 더욱 강력한 경고.
“하.”
일전에는 이 위압감 앞에 움츠러들었던 라니엘이다. 하지만, 지금의 라니엘은 위압감 앞에서 도리어 손가락을 튕겼다. 찢어졌던 공간의 위로 라니엘의 주문이 덧씌워졌다.
콰릉, 소리와 함께.
사방에 모습을 드러낸 눈동자에 수십 다발의 섬광이 벼락처럼 꽂혔다. 전조 없이 발현된 주문에 수십의 눈동자가 피 흘리며 철퍽, 흘러내렸다.
“할 말은 그게 끝입니까?”
라니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고룡의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라니엘은 툭 덧붙였다.
“말 다했으면 꺼져.”
그 말을 끝으로 라니엘은 자리를 떴다.
한동안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고룡은 지팡이로 허공을 두들겼다. 별이 존재하는 곳을 거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고룡이 걸음을 멈췄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소용없을 거라고.】
그녀가 고룡에게 말했다.
【막는다고 막아 지는 게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과거 당신을 그들이 막지 못했듯이, 이번에도 그리될 겁니다. 단지 역할이 반대가 됐을 뿐이지요. 이 또한 흐름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그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고룡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목소리의 주인에게 쏘아붙였다.
“가짜 주제에 조언하지 마라.”
【······.】
“그녀는 그렇게 말할 리 없어. 그건, 별과 하나 되며 더럽혀진 네 생각일 뿐이다. 그녀는···.”
고룡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내게 말했다.”
가짜를 바라보며 고룡이 웃었다.
“모든 게 끝나는 한이 있더라도, 규율을 지키라고. 그것이 자신을 기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것은 주박이다.
그녀가 죽으면서 고룡에게 새겨넣은 주박은, 수만 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고룡을 옭아매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나는 그 약속을 지킬 뿐이야.”
3.
“벨노아.”
클로에가 웃었다.
“그 여자 분은 누구야?”
“클, 클로에 잠깐···.”
“내가 묻잖아.”
강압적인 적이 없었던 클로에다.
언제나 미소 지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클로에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강압적인 말투로 묻고 있다.
“그 여자, 누구야?”
벨노아는 지금 자신이 위기에 처했음을.
크게 좆됐음을 강하게 인지했다.
여신께서 경고한 위기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음에 벨노아는 짧게 어깨를 떨었다.
“그, 클로에? 저번에 내가 신을 하나 모시게 됐다고 했잖아? 그림자 용의 군주님. 태초의 신.”
“응, 그런데 그게 지금 왜?”
벨노아가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을 자주 본 적이 있던 클로에다. 처음에는 벨노아가 미쳤나 싶었지만, 라니엘에게 물어본 결과 상상 속의 신이 아닌 실존한다는 답을 받고 안심한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일하고 무슨 상관인가?
클로에의 눈이 조금 더 시퍼렇게 번뜩이는 가운데, 벨노아가 황급히 등에 업고 있던 여신의 어깨 사이에 손을 끼워 넣어 클로에를 향해 내밀었다. 마치 인형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분이 바로 이분이셔. 태초의 여신.”
“뭔가 물건이 된 기분이로구나.”
여신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반갑다, 아이야. 내가 바로···.”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떠올랐다.
내리쬐는 햇살이 밤의 끝을 고했다. 그 순간 그림자 용의 군주는 눈 녹듯이 사라졌고,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
“······.”
실체화가 풀려 허접해진 모습으로 여신이 벨노아의 어깨에 걸터앉은 가운데, 클로에와 벨노아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끔찍하리만치 고요한 침묵이.
“벨노아.”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해.”
벨노아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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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입자로 변해 파사삭, 사라지는 그림자 용의 군주를 벨노아는 허망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물론 그 찬란한 효과와 달리 여신께선 딱히 멀리 떠나신 것은 아니며, 소멸하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 이런.]실체화가 풀렸을 뿐인 여신께선 벨노아의 어깨에 걸터앉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해가 떠버렸구나. 하늘도 참 야속하시지. 어찌도 이리 절묘한 순간에 실체화가 풀리다니.]그렇게 말하는 여신의 입가에는 웃음이 한가득 맺혀있었는데, 누가 봐도 노린 것이었다. 벨노아는 실체화가 풀리기 직전 그녀가 ‘최대한’ 느릿느릿하게 말하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으므로.
“그, 여신님, 진짜···.”
[나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닐 텐데?]여신의 말씀대로였다.
벨노아가 어깨에 걸터앉은 여신에게 신경을 기울인 순간, 떠오르는 햇살에 비친 클로에의 눈동자가 조금 더 시퍼렇게 번뜩였다.
“벨노아.”
뚜벅, 뚜벅.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클로에가 벨노아에게 다가왔다. 벨노아의 손목을 콱 움켜쥔 클로에가 벨노아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따라와.”
···어렸을 때부터 숱한 위기에 처해본 적이 있는 벨노아다. 그런 벨노아의 직감이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환장하겠네.’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벨노아는 간신히 참아냈다.
2.
“그 분이 그러니까, 네가 모시는 여신님이라구?”
“어, 그림자 용의 군주님.”
“저번에 말했던 그분이시구나.”
불행 중 다행으로 해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전부터 꾸준히 허공을 보고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병 취급을 받곤 했던 벨노아다. 라니엘이 허상이 아니라 실재 한다고 말해주었기에 그 의혹을 조금이나마 벗을 수 있었지만··· 아무튼간에.
“응, 그렇구나.”
별다른 의심 없이 클로에는 벨노아의 말을 신뢰해주었다. 그간 벨노아가 보여준 모습이 있기에 클로에는 벨노아의 해명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이제···.”
“그럼, 말야 벨노아.”
하지만, 당연하게도.
“365일, 24시간, 밤낮으로 그 여신님과 함께 생활하는 거야? 지금도?”
해명 하나로 상황이 종결되는 법은 없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클로에와 대치한 벨노아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오, 저 디저트가 맛있어 보이는구나.]그 와중에 어깨에 앉은 여신께선, 클로에의 막사 안에 놓여있는 디저트를 탐내고 있었는데··· 벨노아는 여신님의 목소리를 당장은 무시하기로 했다.
“매 순간 같이 있는 건 아니고, 불쑥 튀어나오시긴 하지. 하루에 한 절반 정도···.”
“응, 그렇구나.”
클로에는 여전히 웃고 있다.
웃고만 있다.
그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지는 벨노아였다.
“그··· 클로에?”
“응, 벨노아.”
“혹시 화났어?”
움찔, 하고 클로에의 어깨가 떨렸다.
“아···니? 화 안 났는데?”
화났구나.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을 못하는 클로에 답게 티가 팍팍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벨노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뭘 생각하는진 모르겠는데, 최소한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마라. 진짜로.”
“내, 내가 뭘 생각한 줄 알고···.”
“설마 내가 수만 년을 살아온 여신님한테 사적인 마음이라도 품었으려고. 그런 거 눈곱만큼도 없다.”
어깨에 앉아있던 여신이 짧게 혀를 찼다.
[내게 그렇게 매력이 없느냐? 슬픈일이로고.]좀 다물고 계십시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벨노아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걱정 마라. 모시는 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힘을 빌려주시는 고마운 분이기도 하시고.”
“그, 그래?”
클로에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렸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는지 클로에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빠르게 덧붙였다.
“물, 물론 벨노아 네가 여신님이랑 무슨 관계던 내가 상관할 건 아니긴···한데! 그냥 좀 신경 쓰여서. 그냥 신경 쓰여서 물어본 거야.”
“그래그래.”
벨노아는 쓰게 웃으며 클로에의 말을 흘려 들었다. 생각보다 위기는 가볍게 넘어갔으나, 클로에의 섬뜩한 눈동자가 아직도 뇌리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여신께선 말했다.
자신이 곁에 없으면, 클로에는 망가지고 말 거라고. 벨노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맞은편에 앉은 클로에를 흘겨봤다.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시선도 제대로 못 맞추고 있는 클로에.
조금 전 그녀의 시선에서 벨노아는 무언갈 느꼈다.
집착, 혹은 의존에 가까운 것.
그 질척한 감정에 기뻐해야 할 지 아니면 꺼려야 할 지 벨노아는 당장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여신의 경고를 곱씹을 뿐이었다.
‘내가 사라지면 망가진다, 라···.’
여신이 보고 온 미래.
「그 애, 갈라할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어.」
「위태로운 상태다.」
「그러니까 옆에 잘 붙어 있어라.」
그리고 얼마 전 용사, 데스텔이 벨노아에게 넌지시 말해주었던 것. 그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왜인지 목이 텁텁한 기분이 들어 벨노아는 물컵을 기울였다.
“클로에.”
“으응.”
“요즘은 좀 어때?”
“요즘 이라니··· 뭐가?”
“기사들이 죽는 거. 밤새워 뒤척이고 그랬잖아. 이젠 좀 괜찮냐고.”
“···응. 괜찮아.”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클로에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거짓말이란 것을 벨노아는 알고 있다. 여전히 클로에는 주변의 죽음에 깊이 몰입했으며, 그 희생에 답하고자 무리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라니아 교수님처럼.’
출정하기 직전, 3년 전의 그날 라니아는 벨노아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클로에는 자신과 닮은 것 같다고. 네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었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야. 계속해서 속으로 곪고 있겠지. 계속 물어보고, 계속 확인해. 나보다 클로에 그 애는 더 심할테니까.」
갈라할의 죽음.
그것이 여전히 클로에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렇게 벨노아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클로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있잖아, 벨노아.”
“어, 말해.”
“넌 나 두고 가지 마.”
멈칫.
잠깐의 침묵 후 벨노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그럴 거지?”
“안가. 가라고 해도 안가. 됐지?”
그제서야 미소 짓는 클로에를 보며 벨노아는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벨노아의 어깨에 앉은 그림자 용의 군주는 벨노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는 긴말은 하지 않았다. 벨노아 또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3.
급조해서 다시 세운 막사.
난장판이 된 막사 속에서 건져온 서류들을 넘기며 라니엘은 신경질적으로 툭툭,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씨발.”
기어코 입 밖으로 새어나온 욕설.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로서 남들의 앞에 서게 되며 욕설을 줄이고 줄였던 라니엘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저 욕설을 참을 수는 없었다.
‘도대체 뭐하는 새낀데?’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고룡의 마법사.
그가 늘어놓았던 으름장을, 제 권능을 모조리 선보이며 던졌던 협박을 라니엘은 곱씹었다. 선을 넘지 말라고 고룡의 마법사는 라니엘에게 경고했다.
···눈치챈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그걸 눈치챘다면 경고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을테니까. 라니엘은 테이블에 놓여있던 수정구를 두들겼다. 신호는 금세 연결됐고 얼마 안 가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세요, 선배님?]잿빛 마탑의 주인, 레스티 엘레노아.
그녀의 물음에 라니엘은 짧게 답했다.
“델로힘 교단하고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확인차 연락했어.”
[아주 작긴 하지만 ‘여는’ 단계까진 도달했어요. 이다음 부분은 결국 출력문제이고, 안정화의 문제라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외부로의 유출은?”
[극소수만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만큼, 보안에는 신경 쓰고 있어요. 말씀 주신대로 ‘별과의 거래’를 통한 발언금지 계약은 맺지 않은 채로요.]눈치가 빠른 레스티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의 개요를 받아봤을 때부터 라니엘이 무엇을 꾸미는지 이해했다. 이해했음에도 레스티는 선뜻 그녀의 계획에 동참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순조로워요.]“그건··· 다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