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82
라니엘이 툭툭, 테이블을 두들겼다.
프로젝트가 유출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고룡의 마법사가 자신에게 와서 경고를 날린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재의 여신’이 걸어온 길을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레스티, 내가 저번에 말한 이론 있잖아? 흐름의 뒤틀림과 자가 수복···.”
[시간 축에 관한 이론이요?]“응 그거.”
그거, 어떻게 생각해?
라니엘은 그렇게 물음을 던졌고 레스티는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가능성은 있다고 봐요. 어느 지점으로 향하는 흐름을 끊어낸 게 아니라 비틀어서 미래를 바꿨다면.]레스티가 덧붙였다.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형상··· 선배님이 말씀하신 가능성의 수복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제 눈으로는 아직 흐름을 읽을 수까진 없지만, 마나 또한 그런 형상을 띠니까요.]그녀의 말대로였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마나이며, 흐름 또한 마나와 같은 형상을 가진다. 그리고, 마나는 한번 향하려던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성질이 강하다.
꼬이고, 뒤틀리고, 뒤섞이더라도.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은 지속된다.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원래 벌어졌어야 할 미래로 수복되려 하지 않겠는가. 라니엘은 그런 의문을 품었고 레스티는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
대부분의 미래는 라니엘의 간섭으로 바뀌고 있으며, 계속해서 뒤틀리고 있다. 일어났어야 할 일을 라니엘은 모조리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은 지울 수 없다.
강하게 왜곡이 발생한 카일과 같은 경우의 흐름은 수복되지 않겠지만··· 아직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욱 많았으니까.
“레스티.”
라니엘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여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말했지?”
[네.]“북부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느낀 건데, 어떻게든 빨리 도입을 해야할 것 같다.”
[위험성이 너무 큰데요? 전장의 기사분들도 견디지 못할 거예요. 단련된 초인이라도 생사를 장담 못해요. 죽을 확률이 높은데···.]“쓰는 건 나뿐이야.”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줘. 당장은 크게 열 필요도 없어. 사람 하나 들어갈 크기면 되니까. 그 정도는 바로 할 수 있지?”
[가능은 하지만···.]“필요한 일이야. 부탁할게.”
레스티는 결국에 알았다는 답을 내놓았다. 빛이 꺼진 수정 구슬을 바라보다가, 라니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생각해야할 게 많았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나, 언제나처럼 앞만을 보고 나아갈 수는 없게 됐다. 보아야 할 것이 많아졌으니까. 놓치는 것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는 있으나···.
‘결국에 모든 걸 지키지는 못하지.’
누군가는 버려질 것이며.
누군가는 자신을 원망할 것이다.
그럼에도 라니엘은 이 길을 골랐다. 미래에서 왔던 그녀와는 다른 길을 고르기 위해서. 라니엘은 지끈거려오는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후우···.”
아무래도 환기가 필요했다.
라니엘이 테이블에 놓인 붉은색 마도구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기사 테프란이 라니엘의 막사로 찾아왔다.
“부르셨습니까, 용사님.”
막사에 찾아온 테프란은 한 손에는 신문을, 다른 한 손에는 커피와 디저트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테이블 위에 손에 든 것들을 늘어놓은 테프란이 고개를 숙이곤 자리를 떴다.
『위대한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
신문의 첫 줄을 장식한 문장.
그 문장을 곱씹으며 라니엘은 커피잔을 기울였다. 디저트를 오물거리던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오물거리던 디저트를 내려놓고, 포장지에 새겨진 로고를 확인한 라니엘이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테프란 이 자식···.”
일은 더럽게 잘해.
최근에 유심히 봐뒀던 디저트 가게. 그 가게에서 한정품으로 내놨다는 디저트를 도대체 어떻게 전장까지 조달시켰단 말인가.
홀짝.
유능한 부하 덕에 사치를 누리며 라니엘은 커피의 맛을 음미했다. 몇 안되는 그녀의 취미였다.
* * *
“마탑주님.”
“말해.”
“이거, 정말 가동이 가능한 겁니까? 한 번만 가동해도 박살 날 텐데. 애초에, 이걸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 의견은 타당했다.
레스티가 보기에도 그렇다. 이 아티펙트가 발동하는 순간 발생하는 부하를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뒤틀림에 휘말려 갈가리 찢어질 테니까.
“그렇겠지.”
레스티가 아티펙트를 조립했다.
한 손에 들어가는 크기, 큐브 형태로 조립된 아티펙트를 손바닥 위로 굴리며 레스티가 중얼거렸다.
“연산한 거 있잖아. 빠른 회복을 지닌 용사의 육체, 그리고 마탑주에 필적하는 연산능력을 지녔으면 부하를 약간이나마 통제하는 게 가능하단 결과.”
“그건··· 이론뿐이지 않습니까.”
“본인이 원하셔.”
레스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이 원하신다면, 그냥 그렇게 해드리는 게 나아. 말린다고 들으실 분도 아니니까.”
그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이곳의 모두가 안다. 결국 마법사들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주어진 명령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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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켈르할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초인은 생각했다.
과거를. 찬란했던 시절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기억은 퇴색된다고 누군가 말한다.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흐르면 다 털고 일어서게 되는 법이다. 많은 이들이 마치 겪어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그렇게 떠들곤 한다.
하지만,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이 마법사가 보기에 그것은 모조리 기만에 불과했다.
찬란했던 기억은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비극 또한 결코 잊히지 않는다. 정말로 거대한 비극이 덮쳤을 때 한 사람의 시간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리고 만다. 켈르할름의 시간 또한 그렇다.
자그마치 100년의 시간.
장수종에겐 짧다면 짧은 시간이나, 한 명의 인간에게는 너무나도 긴 시간. 그 시간 동안 켈르할름은 계속해서 과거를 곱씹어왔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
사박, 하고.
내디딘 발에 무언가 밟혀 바스러졌다.
켈르할름은 눈앞에 펼쳐진 폐허를 보았다. 불타 바스러진 건물의 잔해. 잿더미에 뒤덮인 도시의 풍경. 이제는 원형조차 알아볼 수 없는 도시이나···.
「이쪽 골목길로 가다 보면 가게가 하나 있어요, 스승님. 노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인데 스승님 입맛에도 맞으실걸요? 스승님, 의외로 입맛이 투박하잖아요.」
폐허에서 켈르할름은 과거를 보았다.
「스승님, 빨리 와요.」
「점심시간 짧단 말이에요. 스승님이야 느긋하게 여유 부려도 되지만, 저는 바로 수업 들어가야···」
잿더미에 뒤덮이고, 잔해가 널브러진 골목길에서 켈르할름은 잘 정리된 보도블록을 보았다. 손을 대면 바스러질 것 같은 건물의 잔해에선 오래전 노부부가 벽을 따라 늘어놓았던 작은 화분을 보았다.
「어때요, 괜찮죠?」
「거봐요. 맛있다니까.」
폐허가 된 현재의 도시에서, 켈르할름은 과거의 고향을 엿보았다. 켈르할름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학원 도시, 아르티아.
이곳에 돌아오기까지 자그마치 백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곳까지 전선을 밀어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사가 노력해 주었던가. 용사의 협조가 있었던가.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켈르할름은 걷는다.
걷고 또 걸으면.
「아, 스승님.」
어느새 폐허의 중심에 도달해있다.
백 년의 시간에도 지워지지 않는 파괴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폐허의 중심. 자신이 이성을 놓고 날뛰었던 그곳에 서서 켈르할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오랜만이다. 셀레스티아.”
폐허의 중심.
그곳에는 지팡이 하나가 꽂혀 있었다. 지팡이의 아래에는 그 누구도 묻혀있지 않음을 켈르할름은 안다. 셀레스티아의 시체는 이미 바스러져 가루가 됐으니까.
그저 그 아이가 썼던 지팡이를 바라보며 과거를 떠올릴 뿐이다. 지팡이의 옆에 켈르할름이 걸터앉았다.
이곳에 돌아와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정작 셀레스티아의 지팡이를 앞에 두자니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이번에는 구할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
좀처럼 입을 열지를 못한 채 켈르할름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감정의 태반을 잃어 반은 인간이 아니게 됐으나, 이곳에 온 순간만큼은 인간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한창 감상에 젖어있을 무렵이다.
움찔.
켈르할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주받은 땅이 되어 그 누구도 발길을 들이지 않게 된 아르티아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이 도시에서 켈르할름은 기척을 느꼈다.
무언가, 있다.
켈르할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2.
켈르할름이 담당하던 전선을 향해 벨노아와 클로에는 움직였다. 초인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함이었는데,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기에 둘의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본래 용사는 특수부대로 운용되기 마련이요, 이곳저곳 전장을 쏘다니는 것이 일상인 까닭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래? 휴가를 다 내시구.”
“고향에 방문하신대.”
“아···.”
광인에 얽힌 이야기야 클로에 또한 들어서 알고 있다. 학원도시 아르티아에 일어난 비극. 최근에 아르티아를 탈환했으니 그곳에 들르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그럼 그쪽 전선에 합류해서···.”
“켈르할름 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빈자리를 채우는 게 우리 임무야. 작전도 몇 개 수행할 수도 있고.”
앞으로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자니, 등 뒤에서 기사 한 명이 불쑥 사이에 껴들었다.
“제6부대 근처로 가는 건 두 분 모두 처음이지 않으십니까?”
특수부대 소속, 벨노아와 클로에를 보좌하는 중년의 기사 호론이었다. 전장에서 오랫동안 구른 기사답게 호론은 현재 향하고 있는 곳의 정보를 꿰고 있었다.
“4년쯤 전에 그곳에서 작전 하나를 수행한 적이 있었는데, 어우 장난 아닙니다. 지형도 지형인데 그곳에서 출몰하는 마수들의 수준이 좀···.”
“그래요, 호론?”
“예, 아무래도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할 겁니다.”
클로에가 마른침을 삼키는 가운데, 호론이 쓰게 웃었다.
“물론 용사님과··· 그림자 기사님이 붙어 계신다면 어중간한 마수들이야 갈려나갈 테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하실 겁니다. 그 부근은 간부가 나타나거든요.”
마왕군의 간부.
재앙만큼의 강함은 지니고 있지 않지만, 초인과 같은 강함을 지닌 이들이다. 거듭된 수련 끝에 벽을 허물고 앞으로 나아간 이들.
“용잡이, 아스테리오.”
호론이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혹시라도 조우하신다면 절대로 정면에선 붙지 마십시오. 고위 마법사의 지원까지 받은 기사들이 대방패를 겹겹이 세웠는데··· 일격에 모조리 뭉개졌습니다.”
그 장면을 직접 봤다는 듯 어깨를 떠는 호론을 바라보며 벨노아가 쓰게 웃엇다.
“참고할게, 호론. 전선에 관한 다른 정보는 없어?”
“왜 없겠습니까? 안 그래도 입이 근질근질하던 참입니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살아남은 호론이다.
일신의 강함이야 둘째치고, 각지의 정보에 대해 빠삭한 호론은 요 1년간 벨노아와 클로에에게 큰 도움을 주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
“지형의 특성상 이쪽에선 광역 주문보다는, 환경을 이용하는 주문이 더 쓸모 있을 겁니다. 그 왜, 격동의 록스 그 친구가 날뛰었다던 전장도 이곳입니다. ”
지형, 어울릴만한 주문 등등.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호론에게 문득 클로에가 질문을 던졌다.
“호론은 마법에 대해 잘 아네요?”
“들은 게 많을 뿐입니다.”
호론이 쓰게 웃었다.
“전장에선 지식이 곧 생존 아니겠습니까. 많이 아는 만큼 오래 삽니다. 제 옛날 부관께서 몇 번이고 강조하신 이야기입니다. 들리는 건 다 외워두라고.”
그래서 제가 아는 게 좀 많습니다.
그리 중얼거리며 호론은 설명을 이었다. 조언에 귀 기울이며 걸음을 걷던 벨노아가 자리에 멈춰 섰다. 덩달아 호론도, 뒤를 따르던 기사들도 멈춰섰다.
“아, 마중을 나온···.”
호론은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그 또한 위화감을 느낀 까닭이다.
“······.”
벨노아는 말없이 팔을 쫙 뻗었다. 벨노아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천천히 손을 허리춤에 얹었다.
직후, 맞은편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섬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벨노아의 팔이 휘둘러졌다. 맞은 편에서 쏘아진 은백색의 화살을 콱, 하고 벨노아는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끽, 끼긱.
화살이 붙잡히자 이제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기사들의 목이 기이한 각도로 돌아갔다. 그들의 뒤에 숨어있던 마왕군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꼭두각시.
죽은이의 시체를 조종해 적군을 교란시키는, 네크로맨서들의 전법이었다. 몇 번 당해본 적이 있기에 벨노아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외쳤다.
“전투 준비.”
쏟아지는 화살 비.
카카캉, 하고 칼을 뽑아내는 요란스러운 소음과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좁은 협곡에서 두 세력이 맞부딪쳤다.
3.
실질적인 지휘관 역할을 가진 벨노아가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기사들은 등뒤에 짊어지고 있던 대방패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쿠웅, 소리를 내며 땅이 울리며 방패에 각인된 주문이 발동했다.
수호결계.
기사들은 곧장 클로에를 에워싸고, 그녀를 지키는 벽이 된다. 클로에가 지팡이를 내리꽂고 영창 하는 가운데, 벨노아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가장 선두에 선 것은 벨노아.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벨노아를 보조하기 위한 세 명의 기사다. 벨노아의 등 뒤로 드리운 그림자가 세 명의 기사와 연결된 순간, 벨노아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콰악.
적을 향해 질주하며 벨노아가 검은 갑각에 뒤덮인 손가락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끽, 끼긱 소리를 내며 공기의 흐름이 비틀리기를 잠시.
카아아아아아아아악!
허공을 움켜쥔 손을 벨노아가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 같기도, 용의 울음 같기도 한 기이한 소음이 메아리친 직후 하늘을 가득 메운 채 쏟아지던 화살 비가 무언가에 휩쓸렸다.
몰아치는 것은 폭풍.
난데없이 뒤집힌 공기의 흐름에 화살은 물론이고, 마법사들이 쏘아낸 주문마저 뒤집힌다. 적을 노리고 쏜 공격이 아군에게 돌아오자 저들이 당황하는 사이, 벨노아는 빠른 속도로 마왕군에게 접근한다.
선두에 놓인 사령술사들이 부리는 시체.
그 시체를 찢어발기며 트롤들이 주먹을 내지른다. 내려찍는다.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주먹이 내려 찍히는 가운데, 벨노아는 짧게 숨을 뱉었다.
“후우···.”
한 번의 호흡.
한순간 그림자가 물결치며 벨노아의 몸을 뒤덮었다. 전신을 휘감은 것은 그림자 갑주. 태초의 신과 직접 계약을 치르며 벨노아는 더욱 빠르게, 더욱 적은 대가로 그림자를 부릴 수 있게 됐다.
한때는 이성을 갉아 먹힐 각오로 써야 했던 기술이나, 지금은 부담 없이 쓸 수 있게 된 기술.
그 덕에 숙련도가 는 기술이다. 그림자 갑주를 두름과 동시에 벨노아가 한순간 미끄러지듯 가속했다. 트롤들이 내려찍은 주먹이 땅을 움푹, 꺼트렸을 때 그곳에 벨노아는 없다.
그림자 말뚝.
땅을 밟고 도약한 벨노아가 트롤들의 머리 위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림자 갑주에서 터져 나온 그림자가 트롤 다섯 마리를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콰작, 소리와 함께 녹색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단숨에 전열을 무력화 한 채, 벨노아의 시선은 마왕군을 향한다. 그 수가 제법 많았다.
사령술사가 있는 것은 아주 깊숙한 곳이다. 하지만, 저곳까지 단숨에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벨노아를 향해 마왕군이 창칼을 내지르고 주문을 쏘아대나, 벨노아는 오히려 정면으로 내달렸다.
어느새 그 뒤를 셋의 기사가 따라붙어 있다.
그들은 좌우로 갈라져 벨노아의 측면에서 다가오는 공격을 쳐낸다. 그림자로 강화된 기사들의 움직임은 빠르며 절도 있다.
촤악, 서걱.
마왕군의 핏물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기사들의 보조를 받으며 벨노아는 정면만을 보고 질주한다. 두꺼운 가죽을 지닌 트롤도, 마석으로 이루어진 골렘도 벨노아를 막아서지 못한다.
트롤이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벨노아는 이미 트롤의 어깨에 올라타 있다. 콰직, 하고 맨손으로 트롤의 척추를 뽑아버린다. 사령술로 되살려도 척추가 없으면 제대로 서지조차 못할 테니.
탁.
쓰러지는 트롤의 어깨를 밟고 도약한 벨노아가 달려드는 골렘의 핵을 그림자 비수로 박살 낸다. 벨노아는 암살자인 동시에 주술사이며, 또한 마법사다. 핵의 위치쯤이야 마나로 유추할 수 있는 법이다.
무너지는 골렘을 지나친 벨노아의 시선이 휙, 하고 돌아갔다. 그 시선은 장치에 작살을 매기고 있던 마왕군에게 가 닿는다. 벨노아가 스톡(Stock)된 주문을 꺼냈다.
그림자 가시(Shadow-Thorn).
쐐엑, 소리를 내며 쏘아진 가시가 졸병의 목을 꿰뚫었다. 졸병의 뒤에 아티펙트에 마나를 주입하던 마도사의 방벽을 박살 내고, 그 두개골마저 꿰뚫는다.
“커흑···.”
피를 쏟으며 마왕군이 차례로 쓰러지는 가운데, 드디어 시야가 트였다. 그곳에는 사령술을 준비하고 있는 사령술사들이있다. 그들이 떨리는 눈동자로 벨노아를 바라봤다.
주술사, 마법사, 거기에 전사.
클래스의 약점을 다른 클래스를 빌려 메꿔놓은 벨노아다. 사령술사들의 눈에 벨노아는 또 다른 악몽으로 비춰 보일 뿐이다. 그들이 겹겹이 시체의 벽을 세웠다.
마치, 다가오지 말라는 것처럼.
그 바람을 들어줄 생각은 없지만 벨노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좌우가 아닌 벨노아의 뒤를 따라온 기사가 쿵, 하고 팔뚝에 달아둔 방패를 비스듬히 내려찍었다.
펼쳐지는 것은 작은 방벽.
벨노아가 방벽에 발을 디뎠다.
방벽에 새겨진 것은 반발 주문. 발을 깊게 파묻은 벨노아가 주문의 반발을 이용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하늘을 부유하는 벨노아를 마왕군이 올려다본다.
꿈틀.
허공에서 벨노아의 갑주가 물결쳤다.
수호자의 갑주를 연상케 하는, 고고한 형태를 띠던 갑주이나 그 손아귀만큼은 그렇지 않다. 마치 짐승의 손톱처럼 거칠게 둘린 그림자.
칵, 카가가각.
짐승의 손아귀가 공기를 찢기 시작한다.
용의 울음소리가 마왕군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저 울음. 용의 울음과도 같은 기이한 소리. 마왕군들에게 새로운 악몽이 된 벨노아를 상징하는 소음이다.
···온다. 대비하라.
사령술사들이 방벽을 둘러쳤다.
마왕군들이 방패를 겹겹이 세워 보호결계를 쳤다. 벨노아가 손을 휘두른 순간, 하늘에서 사선으로 폭풍이 내려꽂혔다. 용이 손톱으로 할퀸듯한 잔상을 새기며 풍압이 밀려든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폭풍에 결계가 찢어진다.
방패가 우그러지고, 방패를 쥔 병사들의 팔목이 비틀렸다. 거대한 풍압에 튀어오른 핏물과 살점마저 좌우로 밀려난다.
촤아아아악!
협곡의 양옆을 둘러싼 절벽이 붉게 물든 가운데, 기어코 버텨낸 사령술사들이 있다. 그들이 급히 시체를 일으키려는 가운데, 벨노아가 팔을 휘둘렀다. 그림자를 두르고 벨노아를 따라왔던 기사들이 그림자에 끌려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콱.
그들은 낙하하며 공격하긴커녕, 좌우로 갈라져 절벽에 검을 박은 채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 모습에 사령술사들이 당황하기도 잠시.
번쩍.
사령술사들의 시선이 위가 아닌 정면을 향했다.
그곳에서 백금색의 섬광이 번뜩이고 있다. 멀리서 대방패를 쥐고 있던 기사들이 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텄다. 그곳에는 지팡이를 앞으로 겨눈 소녀가 있다.
백금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지팡이
그 끄트머리에 응축된 마나가 너울 친다.
일직선으로 뻗은 지팡이가 향하는 곳은 사령술사들이 모인 곳. 사령술사들이 급히 시체로 만들어진 벽을 세우려 하나, 그보다 먼저 클로에가 주문을 읊었다.
섬멸(Exterminate).
상위주문이나, 그 위력만큼은 최상위에 필적하는 주문. 막대한 양의 마나를 잡아먹으며 보조를 받지 않으면 통제하기조차 어려운 주문.
그 주문을 클로에는 한순간에 완성시킨다.
사령술사들은 보았다.
지팡이의 끝에서 펼쳐진 회로가 한순간 협곡을 가득 메움을. 그 회로가 백금색으로 빛나며 하나의 점으로 모여드는 것을.
백금색으로 빛나는 점.
···상위 주문, 섬멸을 설명할 때 마법사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난이도에 비해 우스울 정도로 그 효과는 담백하다고.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초고열의 광선.
그런 단순한 주문에 ‘섬멸’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광선에 닿는 대상을 모조리 증발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번쩍.
이윽고 지팡이의 끝에서 섬광이 쏘아졌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일직선으로 쏘아진 광선에 협곡에 깔린 시체들이 타들어 간다. 바닥에 흐르는 핏물이 증발한다. 사령술사들이 반쯤 완성시킨 방벽도, 시체들의 벽도 광선은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사령술사들도.
그 뒤를 따라붙던 마왕군의 지원군도.
그 모두가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잔상을 남기며 얇아지던 광선은 사라졌지만, 광선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녹아내린 땅에는 열기가 남아있었다.
“컥, 커흑···.”
간신히 광선의 범위에서 빗겨난 사령술사가 있었으나, 이미 허리 아래가 사라진 뒤다. 땅에 잔류한 열기에 타들어 가며 사령술사는 흐릿한 시야로 앞을 보았다.
백색의 머리칼. 녹빛의 눈동자.
인류측에 새로이 나타난, 마법을 사용하는 용사. 그녀를 부르는 이름을 사령술사는 마지막을 떠올렸다.
격류(激流).
그 이름을 곱씹으며 사령술사는 웃음을 흘렸다. 죽음의 직전 사령술사는 눈동자를 굴려 하늘 위를 바라봤다. 주인께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으셨다.
치이익.
사령술사가 녹아내림과 동시에.
누군가 거대한 울림을 낳으며 협곡에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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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매달려있던 벨노아를 비롯한 세 명의 기사가 땅에 착지함으로써 상황은 종결 났다. 협곡에 몰려들었던 마왕군은 궤멸당했으며 아군의 피해는 전무하다.
완벽한 승리였다.
까다로운 사령술사들을 상대로 약간의 피해도 없이 대승을 거두었으니 기뻐해도 좋으리라. 몇몇 들뜬 기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벨노아에게 몰려들던 순간이다.
“대단했습니다! 역시···.”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노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벨노아가 제 옆에 서 있던 기사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땅을 박차고 뒤로 도약했다.
직후, 하늘 위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떨어지는 건 인간의 형상. 그것이 땅에 착지한 순간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흙먼지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먼지에 가려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적이 분명하다.
기사들의 판단은 빨랐으며, 옳았다.
모여있던 기사들이 동시에 흙먼지를 향해 창칼을 내질렀다. 빠르게 내지른 창칼이 흙먼지를 꿰뚫는 가운데, 벨노아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위화감, 불길함, 그리고 직감.
부릅뜬 벨노아의 눈동자에는 흙먼지에 가려진 움직임이 보였다. 흙먼지를 가르며 휘둘러지는 무언가를, 벨노아는 보았다. 그것을 본 순간 벨노아가 소리를 지르며 흙먼지를 향해 뛰어들었다.
“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