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92
“그럼 왕도로 전이하는 건 부담이 적단 이야기지?”
“네, 왕도에 있는 잿빛마탑의 본탑과 전이문을 연결해놨어요. 여전히 선배님만큼의 특이체질이 아니라면 전이에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만···.”
레스티가 전이문을 흘겨보며 말했다.
“선배님의 경우, 두통과 마나 소모 정도로 견디실 수 있을 거예요. 왕도 쪽 좌표는 무척 안정적이니까요.”
“그래, 고맙다.”
“왕도로 다녀오실 생각이라 하셨죠?”
라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스케발 43호··· 아니 44호던가? 아무튼 스케발도 한 번 잡았고, 마경측 초인도 토벌됐으니 당분간 마왕군 기세가 확 꺾일 거거든.”
당분간은 라니엘이 담당하고 있는 전선에 마수들을 투입하기보단, 용잡이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급급할 것이리라. 거기에 유사시에 대응할 레스티라는 인재도 있으니 자리를 잠시 떠도 된다고 라니엘은 판단했다.
“오랜만에 생긴 여유니까, 왕도 좀 다녀와야지. 스승님도 만나뵙고··· 따로 만날 사람도 있어서.”
“그런가요?”
“응. 이번 기회를 놓치면 시간을 내기 힘들어질 것 같거든. 본격적으로 전선을 확장해야 하니까.”
레스티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교자 토벌전에 대한 작전서는 레스티 또한 받아봤으니까.
“확실히 그렇네요. 그럼 지금 열어 드릴까요?”
“응, 부탁할게.”
2.
푸르스름한 전이문이 열리고, 라니엘은 전이문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전이문은 잿빛 마탑의 최상층과 연결돼 있었고,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왕도의 정경을 흘겨보며 라니엘이 엷은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이다, 정말로.
그러고보면 거의 3년 만이던가?
출정 이후 왕도에 방문할 일이 거의 없던 라니엘이다. 지금의 방문도 비밀리에 이루어졌기에, 라니엘은 로브를 깊게 눌러 쓴 채 걸음을 옮겼다.
기척을 죽인 채 마탑 바깥으로 빠져나온 라니엘은 광장에서 길게 숨을 들이키며 기지개를 켰다.
“으그극.”
몸이 뿌득, 뿌드득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가운데 라니엘이 퍄 하고 숨을 뱉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막혔던 코가 뚫리는 기분이었다.
마기(魔氣)가 느껴지지 않는 청결한 땅.
이제는 이 청결함이 낯설게 느껴지는 마당이다. 라니엘은 쓰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스승님을 찾아뵐까 생각했지만, 할 일을 남겨두고 방문하면 왠지 찝찝하리라.
‘···일은 해치우고 가야지.’
라니엘은 로브에 담긴 편지지의 감촉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광장을 지나쳐 그림자가 드리운 골목길의 깊은 곳으로.
* * *
짤랑, 하고 문에 달린 종이 소리를 울렸다.
딱히 노크는 필요 없었다.
골목길에 들어선 순간부터 고대 엘프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라니엘이 손을 휙 들었다.
“오랜만이다, 카르디.”
낡은 가게의 내부.
잔을 닦고 있던 카르디는 찾아온 손님을 바라보며 보기 드물게 반색했다.
“뭐냐, 라니엘 너였나?”
“뭐야.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긴가민가했지. 너랑 클로에의 기척이 비슷해졌으니. 어느 쪽이든 반가운 인물이긴 하군.”
카르디가 앞에 놓인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정말 오랜만인데. 아마 3년 만인 것 같은데?”
“3년 만이긴 하지. 한동안 바빴으니까.”
의자를 끌어 털썩, 주저앉으며 라니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낡은 가구들의 냄새와 고서 특유의 향이 뒤섞인 골동품 가게. 묘하게 마음이 놓이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저 미묘한 냄새···.
라니엘이 눈을 부릅뜬 채 카르디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등을 돌린 채 카르디는 무언갈 찻잔에 따르고 있었다. 쪼르륵, 이라기보단 물컹거리는 소리가 나는 액체.
“녹차 끓여주지 마.”
“이미 끓였다.”
탁, 하고 카르디가 라니엘 앞에 찻잔을 내려두었다. 저 빌어먹을 꼰대 엘프는 건강음료이자 녹차라고 주장하지만, 라니엘이 보기에는 결코 아니었다.
으, 하고 라니엘이 녹차를 옆으로 쓱 밀어버리는 가운데 카르디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뭐··· 당분간 바빠질 것 같아서, 여유가 났을 때 얼굴 좀 보러 온 거지.”
“거짓말하긴.”
카르디가 쓰게 웃었다.
“곧 작전을 시작하려는 거 아니냐. 그래서 알려주러 온 걸 거고. 아니냐?”
“···눈치는 더럽게 좋아, 하여튼.”
“내 눈치 보면서 돌려 말할 필요 없다. 본론부터 꺼내도 되니 편히 말하도록.”
눈치를 어떻게 안 보냐, 이 꼰대야.
라니엘이 속으로 투덜거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장 입을 열지는 못한 채 라니엘은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녀로서도 제법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6개월 뒤야.”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라니엘이 서두를 던졌다.
“배교자 토벌전은 6개월 뒤에 시작될 거고, 그날 나는 배교자를 확실하게 끝낼 생각이야.”
카르디는 여전히 잔을 닦으며 라니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라니엘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경고, 그리고 자신이 하게 될 일.
그 일의 끝에 배교자가 맞이하게 될 최후까지도 라니엘은 확실하게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으니. 혹은, 마음 준비를 할 여유를 주고자.
“철저하게 짓밟게 되겠지. 어쩌면···.”
“라니엘.”
카르디가 라니엘의 말을 끊었다.
잔을 내려놓은 채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걱정해서, 내 눈치를 봐서 하는 말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괜찮으니까.”
쓰게 웃은 채 그가 말했다.
“애초에 이건 내가 해야 했던 일이다. 내 손으로 끝내야 했는데, 끝내지 못해 여기까지 온 일이지. 그러니 무슨 일을 벌여도 너를 원망하진 않는다.”
오히려 네게 고마워하겠지.
그리 중얼거리며 카르디가 숨을 뱉었다.
“그리고··· 알케이아로 진입한다는 것부터 너는 충분히 배려해준 셈이야. 더 쉬운 방법이 있었음에도 그걸 쓰지 않은 거니까.”
더 쉬운 방법.
그 방법을 카르디는 알케이아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당시, 라니엘에게 함께 들려줬었다.
“알케이아 내부에 있기 때문에 그녀의 강함은 성립되는 거지. 나를 미끼 삼아 그녀를 바깥으로 끌어낸다면, 토벌은 훨씬 쉬워질 거다. 분명 그렇겠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서도, 라니엘은 그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다. 그건 써서는 안 되는 방법이라고 단언하며 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너는 더 어려운 길을 골랐지. 그 선택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그 사실에 나는 네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어. 이 이상의 배려는···.”
“야, 카르디.”
라니엘이 카르디의 말을 잘랐다.
“그때도 말했지만, 그건 딱히 너에 대한 배려가 아니야. 그 방법으로는 계약을 완전히 끊어낼 수 없잖아. 그럼 의미가 없어.”
테이블을 툭툭 두들기며 라니엘이 미소 지었다.
“알케이아 내부에서, 배교자가 추구하는 구원(求援)을 정면에서 부정한다. 그게 계약을 온전히 끊어낼 방법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그럼 난 그렇게 해야 해. 그게 내가 추구하는 결말에 도달할 방법이니까.”
도달해야하는 결말.
“그리고, 그건 재의 여신이 했던 방식이잖아. 그녀가 내게 말했어.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지 말라고.”
재의 여신이 했던 방식으로는 완벽한 결말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야 그녀의 희생이 지닌 가치는 온전해지지 못한다. 라니엘은 재의 여신과는 전혀 다른 결말에 도달해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라니엘은 모든 계약을 온전히 끊어내고, 마왕의 앞에 도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카르디는 모를 테지만···.’
그래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최후의 무대에 서기 위해선, 과거부터 이어진 모든 사슬을 완전히 끊어내야만 했으니까.
“쉬운 길만을 걸어 도착한 결말에 만족할 생각은 없어.”
라니엘이 로브에 손을 넣었다.
“어려운 길, 최선의 선택, 타협하지 않아야만 원하던 결말에 닿을 수 있을 테니까.”
꺼내는 것은 종이봉투.
“카르디.”
두개의 봉투를 라니엘은 카르디 앞에 내밀었다.
“네게 부탁할 게 있어.”
어쩌면 가장 잔인한 부탁이 될 것.
하지만, 카르디가 바라고 있을 것. 그것을 라니엘은 수백 년을 기다려 온 대현자에게 건넸다. 그것이 라니엘이 대현자를 예우하는 방법이었으므로.
라니엘이 떠나고 홀로 남은 가게의 안, 카르디는 말없이 테이블을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는 라니엘이 두고 간 편지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낡은 편지지, 그리고 용사의 인장이 찍힌 봉투.
그 두 개의 서신을 바라보며 카르디는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귓가에 라니엘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네게 부탁할 게 있어.」
「길게 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확인해.」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그 목소리는 경고이자 배려였으므로, 카르디는 직감했다. 이 편지를 열어보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은 선택하게 될 것임을.
「며칠 뒤에 다시 찾아올 건데, 그때까지 고민해봐. 뭘 골라도 좋아. 선택하는 건 네 몫이니까.」
그녀는 어느 선택도 강요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남긴 편지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후우.”
카르디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용사의 인장이 찍힌 봉투는 라니엘이 건넨 것, 그리고 남은 하나의 편지는··· 라니엘이 아무런 설명을 들려주지 않았음에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카르디가 선반의 깊은 곳에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그녀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모아둔 상자가 있었다. 먼지가 쌓인 낡은 상자. 녹슨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상자를 열어보노라면, 그 안에는 수십 통의 편지지가 쌓여 있었다.
「다음 수업은 언제에요, 아르미엘?」
「저, 오늘 처음으로 사람을 제대로 치료했어요. 아르미엘 말대로 뼈부터 제대로 맞추고 하니, 과연. 이번에는 환자분이 지르는 비명이 절반으로 줄었지 뭐에요?」
그녀를 가르쳤던 시절의 편지부터 시작해.
「담배 좀 그만 태워요. 연구실에 쌓아둔 거 싹 다 버려버렸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왜 이걸 편지로 쓰냐구요? 그야, 눈앞에서 말하면 당신 화낼 거잖아요.」
「아르미엘.」
「요즘 바쁜가 봐요? 연구 중이라며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다니, 너무하지 않아요? 이래 봬도 교단의 대표인 제가 방문한 건데.」
교단의 상징이 된 그녀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보내왔던 편지들.
「내일은 얼굴 좀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펼치지 않더라도 그 안에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카르디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엘프라는 종족의 특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몇 번이고 다시 읽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으로나마 추억을 더듬어야 했으니까.
카르디는 상자에서 꺼내 든 편지를 라니엘이 놓고 간 편지의 옆에 내려놓았다. 역시나 똑같은 편지지였다.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럽다면서 온갖 술식을 걸어뒀단 점마저 같았다.
“···정말이지.”
카르디가 헛웃음을 흘렸다.
차마 편지에 손을 대진 못한 채, 카르디는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위치에 편지는 있다. 재앙이 되어버린 그녀가 남긴 편지가 있다.
그것을 열어보기가 두려웠다.
그녀가 무슨 말을 적어두었는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자신을 향한 저주의 말이 가득할까봐, 자신을 원망하는 글귀가 적혀있을까 두려워 카르디는 좀처럼 편지에 손을 뻗지 못했다.
두렵다, 정말이지 자신이 추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지경에 와서도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까.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못한 주제에, 감히 그러기를 바라는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따로 있으니까.
자신이 기억하는 글레리아와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그날 무너지던 아르카디아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한동안 카르디는 편지를 바라봤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카르디는 편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편지의 안에 무슨 문장이 적혀있든 간 자신에게는 그것을 똑바로 마주해야만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끼릭, 끼익···.
수백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방식으로 봉(封)해둔 편지지.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며 카르디는 편지지를 감싼 봉인 회로를 해체했다.
그리곤, 찰칵.
회로가 해제되며 편지가 펼쳐졌다.
카르디는 길게 숨을 내뱉고는 편지의 첫 줄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무엇이 적혀있던 받아들일 각오를···.
“···아.”
허나 편지의 첫 줄을 시야에 담은 순간, 카르디는 숨을 뱉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곳에 적힌 건 카르디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까.
『아르미엘, 사랑하는 당신에게.』
편지의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했다.
2.
라니엘은 익숙한 길을 걸어 저택에 도착했다.
언덕 위에 놓인 저택.
노을이 지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들판을 한동안 흘겨보다가, 라니엘이 저택의 문을 두들겼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열렸다.
“무어냐, 라니엘.”
로셀 반 트리아스.
라니엘이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늙어 보이는 그가 문고리를 잡은 채 피식 웃음을 흘려 보였다.
“연락 한 통 없이 찾아오는구나.”
“일단은 비밀리에 왔다 가는 거라서요.”
로셀은 별다른 말없이 손을 뻗어 라니엘의 머리를 툭, 두들겼다. 세간에선 인류 최강의 전력이니, 신위에 닿는 마법사와 같은 거창한 별명으로 불리는 제자 놈이지만···.
“들어와라.”
로셀의 앞에선 언제까지고 어린아이 일 뿐이다.
“날이 추우니.”
오랜만에 찾아온 자식의 앞에서마저 근엄한 표정을 지키기란 어려운 법이다. 풀어진 표정으로 로셀이 미소 지어 보였다. 로셀을 아는 인물이 곁에 있다면 제 두 눈을 의심할만한 표정이었다.
“곧 여름인데요, 스승님.”
“···꼭 그렇게 말꼬리를 잡아야겠느냐? 그리고 여름이더라도 저녁에는 춥다. 그냥 그러려니···.”
“전 용사라서 추위 안 타요.”
“······.”
꼭 초를 치는군.
쯧, 하고 로셀이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택의 안으로 들어서는 로셀을 따라 라니엘은 히죽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 *
“···저택이 좀 많이 휘황찬란해지지 않았나요?”
라니엘은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기억하던 것보다 저택은 더 넓어졌고, 적당한 규모로 저택의 한구석을 개조해 만들어 놨던 연구실이 지금은 어지간한 마탑의 연구실을 뺨칠 정도로 확장돼 있었으니까.
“아니, 이거 청색마탑제 마도구···.”
더럽게 비싼 마도구.
라니엘이 연구실에 놓인 시설들을 보며 제 눈을 의심하는 가운데, 로셀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산 건 하나도 없다. 마탑주이니, 궁중마법사이니 하는 놈들이 찾아와서 멋대로 증축하고 간 거니.”
“···예? 그 사람들이 왜요?”
“왜긴 왜겠느냐, 이 녀석아.”
로셀이 복도를 가리켰다.
아예 진열창으로 개조된 복도에는 온갖 상패와 훈장 따위가 걸려있었다. 전부 라니엘과 라니아 앞으로 온 것들이다.
“다들 네 눈치 보기 바쁘니까 그렇지.”
“제 눈치를요?”
“조금이라도 찔리는 구석이 있거나, 네게 무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한 놈들이 내게 ‘잘 좀 이야기해달라’는 부탁을 하며 저런 것들을 들고 찾아오더구나.”
청색 마탑주가 특히나 더 그랬다고 로셀은 덧붙였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마탑주의 위엄마저 내던진 채 고개를 조아렸다고.
“그 옆에서 선물을 들고 찾아온 백색 마탑주가 청색 마탑주를 어찌나 놀려대던지···.”
「그러니 줄 설 곳을 잘 골랐어야죠, 푸흡!」
「저는 이미 그분과 의자매나 마찬가지예요. 언니 동생 하는 사이라구요. 부럽죠? 진짜 부러워서 죽을 것 같죠? 우리 청마탑주님 배 아파서 어떡해!」
“썩 볼만한 꼴은 아니었다.”
“그럴 것 같네요.”
의자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라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구시설과 훈장들을 감상하는 가운데, 로셀은 흐뭇한 눈동자로 라니엘을 지켜봤다.
“넌 모를 거다, 네가 얼마나 칭송받는지.”
움찔, 하고 라니엘의 어깨가 떨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테프란이 올린 신문을 탐독하고 온 라니엘이다.
“아, 알고 있···.”
“그 먼 곳까지 소식이 제대로 갈 리가 있느냐? 이리 오거라. 네가 좋아할 것 같아 따로 모아뒀으니.”
식사하면서 찬찬히 읽어 보아라.
로셀은 그리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와, 와아···.”
라니엘은 식사를 하면서 한 번 읽었던 신문을 다시 읽어야 했는데, 결코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신문을 읽는 자신을 흘겨보며 반응을 기대하는 로셀에게 적절한 반응을 보여줘야만 했기에.
그리 오랜만에 스승과 식사를 마친 라니엘은, 억지웃음을 짓느라 경련하는 입꼬리를 한동안 문질러야만 했다.
“그래서, 삼일 정도만 있다가 돌아갈 거라고?”
“예, 전선을 오랫동안 비워두긴 힘들어서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쉽긴 하구나.”
“여유가 되면 종종 찾아뵐게요.”
여유가 날 리가 있겠느냐.
로셀은 쓰게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어찌 됐든, 푹 쉬고 가도록 하거라.”
“네, 그러려고요.”
소파에 늘어진 채 라니엘이 웃음을 흘렸다.
문득 쳐다본 창밖은 어두웠다. 늦은 밤. 별이 반짝이는 바깥을 바라보며 라니엘은 생각했다.
카르디 그 녀석, 아마도 지금쯤이라면 편지를 읽었을 거라고.
편지를 앞에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을 테지만, 라니엘이 알고 있는 그 꼰대 엘프는 결코 외면만큼은 할 수 없는 녀석이다. 두려워하면서도 편지를 열어봤겠지.
‘그 녀석, 분명 배교자가 자신을 원망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라니엘이 보기에 그럴 리는 없었다.
배교자는 언제나 카르디를 그리워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증오도, 애증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편지에 적혀있을 내용은 아마도···.
3.
『아마도, 더는 당신과 만날 수 없겠죠.
저도 알아요. 제게는 자격이 없다는 걸.
당신을 만나서도 안 되고, 만나 보아야 서로에게 해로울 뿐이란 것도 알아요. 저는 더는 성녀가 아니고, 당신도 더는 대현자가 아니니까요. 하물며 저는 당신이 그리워하는 글레리아도 아니에요.
저는, 글레투스에요.
배교자(背敎者)라 불리는 이단이에요.
당신이 지키고자 했던 성녀 글레리아가 아닌, 끔찍한 재앙 글레투스. 가끔 정신이 돌아오긴 하지만 그때마다 저는 깨닫고 말아요. 이미 돌아가기엔 늦었구나. 나는 절대 글레리아가 될 수 없구나.
사실 알아요.
당신이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저는 돌아가기엔 이미 멀리 왔다는 것을. 제게는 기적이 일어나도, 허락돼서도 안된다는 걸 알아요.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건 찬란했던 과거뿐인걸요.
아, 정말이지 즐거웠는데.
가니칼트와 함께했던 모험이, 벨리알과 함께 어린이들과 놀아주었던 시절이, 아르미엘 당신과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그리울 뿐이네요. 차라리 모두 잊어버렸다면 좋을 텐데.
당신도 그럴까요.
당신에게는 지독한 역할을 맡겼네요.
당신만큼은 온전히, 모든 걸 제정신으로 기억해야 할 테니까. 그런 당신에게 투덜거리는 건 아무래도 못된 일이겠죠? 미안해요, 아르미엘.
···조금씩 편지를 쓰려니 쉽지가 않네요.
그거 알아요? 이 편지, 벌써 몇 번째 다시 쓰는지 모르겠어요. 제정신이 들 때만 편지를 쓰는데··· 눈을 감았다 떠보면 편지는 엉망이 돼 있어요. 그래서 자꾸 고쳐 쓰다 보니 문장이 좀 난잡하네요.
그래도,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었어요.
어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제가 바라는 구원이 꺾이게 되더라도.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마지막까지,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흔들린 글씨체.
잉크가 긁히고 때로는 글자가 뭉개진 편지.
몇 번이고 고쳐 쓴 흔적이 가득한 문장.
“······.”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됐을 편지를, 카르디가 읽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마지막 문장을 읽어낸 카르디는 말 없이 편지를 내려두었다.
카르디가 제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마지막까지, 원망의 말은 없었다.
저주의 말도, 원망도, 책망도, 그 어느 것도 없었다. 편지에 남겨진 것은 그 반대였다. 마지막까지 원망하지 않겠다는 말.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거늘.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했거늘.
그럼에도 그녀는 말하고 있다. 자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글레리아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구해줄 필요도,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다고.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내린 카르디가 이를 까득 악물었다.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기적이 일어나기엔 너무 먼 길을 걸어왔으니까.
카일의 경우를 통해 재앙이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됐지만, 그 기적과도 같은 일은 그녀의 경우 불가능하며, 가능해서도 안 된다.
그녀는 너무 멀리 가버렸으니까.
그녀를 인간으로 되돌려, 다시 한 번 삶을 살게 하는 선택은 할 수 있어도 해서는 안 된다. 그녀 본인부터가 그것을 원치 않을 테니까.
『보고 싶네요, 아르미엘.』
편지의 가장 아래쪽.
작은 글씨로 쓰여진 한 줄의 문장. 카르디는 퀭한 눈동자로 한동안 그 문장을 보았다. 원망의 말이 없기에 오히려 고통스러움을 카르디는 깨닫는다.
···라니엘, 그 녀석은 무엇을 바란 것일까.
무엇을 바라길래 이 편지를 전해준 것인가.
그 이유는 아마 남은 한 통의 편지를 트면 알 수 있겠지. 카르디는 용사의 상징이 박힌 봉투를 텄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작전서이다. 다만, 일전에 자신의 도움을 받아 라니엘이 작성했던 작전서와는 조금 다른 형태를 띤 작전서.
마지막 한 페이지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페이지.
그 페이지에 적힌 것을 카르디는 보았다.
퀭한 눈동자로 문장을 읽어내리던 카르디의 눈동자에 어느 순간부터 빛이 돌아왔다. 빼곡히 채워진 문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카르디의 시선은 흔들렸으며, 종이를 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능성.
카르디에게 허락된 마지막 기회.
『이건 너와 나만이 공유하는, 작전의 마지막 단계야. 본래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 그녀에게서 모든 걸 빼앗고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는 걸 알아. 알고는 있지만 말야···.』
페이지의 마지막.
라니엘이 남긴 편지를 카르디는 보았다.
『이건, 배교자를 위한 게 아니야.』
『한때 세상을 지키려 했던 영웅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이자, 선배에게 보이는 예우이지.』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너희에겐 그럴 권리가 있어.』
배교자 글레투스의 모든 것을 짓밟겠다.
하지만, 성녀 글레리아에게서 모든 걸 앗아가진 않겠다. 그것이 과거의 영웅에게 바치는 칭송이다.
『잔인한 부탁이 되겠지.』
『선택은 네가 해, 카르디.』
선택해라. 선택은 네 몫이니까.
“···아, 하.”
카르디가 웃음을 흘렸다.
잔인한 부탁이라고, 이게?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카르디는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이 빌어먹을 후배 녀석이 뒤에서 이런 짓을 꾸몄다는 사실에, 이런 걸 준비해놨단 사실에 웃었다.
잔인한 부탁이 아니었다.
이건 카르디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그 기회를 붙잡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 번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고 또다시 수백 년을 후회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혹은, 후회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인가.
대답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휴가 2일 차.
“아, 찾았다.”
라니아는 어느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책자를 펼쳐, 가게의 간판과 비교를 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고.
가게의 이름은 베네팃.
라니아의 손에 쥐어진 책자의 이름은 [왕도에서 반드시 들려야 할 디저트 가게, Top 10!].
라니아는 흥얼거리며 가게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자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방문할 수 없는 가게라고 적혀있었지만, 그건 그녀에게 썩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아, 용사님. 혹시 왕도에 방문하셨을 때 유명 가게를 들르실 계획이시라면 이걸···.」
왕도로 이동하기 전, 라니아의 신문과 디저트 조달 담당인 기사 테프란이 건넨 훈장.
「이 훈장을 주인에게 보여주시면, 어느 가게든 간에 대기 없이 곧장 입장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것도 용사님의 신분을 숨기면서요.」
이 훈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테프란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렇겠지. 그런 가벼운 생각을 하며 라니아는 가게의 문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흐음.”
그렇게 가게의 문을 열기 직전, 그녀는 창가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창가에 비춘 머리칼은 짙은 검은색. 눈동자 색은 바뀌지 않았지만··· 머리 색을 바꾸기만 해도 알아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위장 주문도 제대로 걸려있다.
확인을 마친 라니아가 가게의 문을 열었다.
* * *
광장 인근에 위치한 디저트 가게, 베네팃.
베네팃은 근래 귀족가 영애들 사이에서 실시한 ‘반드시 들러봐야 하는 가게’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1위를 차지한 가게요, 베네팃의 팬케이크를 먹어보지 않은 이와는 디저트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존재하는 가게다.
이토록 명성이 자자한 만큼 베네팃의 한자리를 예약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요, 디저트를 맛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분명 그럴 텐데···.’
베네팃의 주인 되는 남자는 가늘게 뜬 눈으로 가게의 한구석을 흘겨봤다. 광장의 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 베네팃에서도 가장 인기 좋은 자리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기 팬케이크가 그렇게 유명하다던데.」
「남는 자리 있을까?」
「괜찮으면 포장도 좀 해가고 싶은데.」
예약하지 않은 손님은 받지 않는 것이 베네팃의 철칙이나, 그 철칙에도 예외가 있는 법이다. 가게를 방문한 여인이 슬쩍 내밀었던 훈장. 그 훈장을 마주한 순간 베네팃의 주인장은 즉시 창가의 자리로 여인을 안내했다. 그래야만 했으므로.
여인이 보인 훈장.
그 훈장을 그는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유명 디저트 가게나, 카페의 주인장들끼리 공유하는 정보를 통해서.
『이번에 베네팃도 책자에 실렸다면서.』
『그럼 곧 찾아오겠네?』
가게가 유명해지면 찾아오는 특별한 손님.
『딱 봐도 전장의 기사처럼 생긴 사람. 그 사람이 찾아와서 훈장 하나를 건네는데, 물자 조달이라는 서류도 함께 보여주거든?』
『듣기로는, 용사님께서 직접 시키신 거라더라고. 성류의 용사 클로에님, 혹은 그 위대하신···.』
설마 그분이?
『그래! 전설적인 바리스타 알렌 님께서도 말씀하셨잖아. 라니아 님, 아플리아 교수 시절 때부터 디저트를 엄청 좋아하셨다고.』
『아무튼, 그 훈장이 보이면 최대한 잘 대접해줘야 해. 나중에 기사단 쪽으로 연락 넣으면 웃돈도 엄청 얹어주는 데다가, 영광이기도 하니까···.』
떠도는 소문으로나마 듣던 훈장이다.
그 훈장을 본 순간 베네팃의 주인장은 뿌듯함을 느낌과 동시에, 최대한의 예의를 보이며 방문한 여인을 창가의 자리로 안내했다.
‘그러고 보니 기사분께서 방문하신다 하지 않았나?’
그는 창가에 앉은 여인을 흘겨봤다.
아무리 봐도 전장의 기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등허리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과, 햇살에 반짝이는 새하얀 피부. 무언가 신비스러운 느낌을 지닌 여인이었다.
‘게다가 물자조달보다는 본인이 가게를 즐기러 온 것 같은 모습인데···.’
···혹시 사전 답사인가?
확실히 그거라면 말이 됐다.
나중에 용사님께서 직접 방문하기에 앞서, 부하를 보내 테스트해보는 걸 수도···.
과연, 그럴싸한 추측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하리라. 훗날 용사님이 방문할 날을 대비해서라도. 그가 어깨에 힘을 팍 준 채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2.
햇살을 받아 디저트들이 반짝인다.
라니아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디저트를 즐기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테프란에게 부탁해 종종 달콤한 것들을 즐기긴 하나, 갓 만든 것들에게 비교할 바가 되지는 않는 법이다.
‘모처럼 들린 왕도인데 즐기다 가야지.’
위장 주문을 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수고를 들일만 한 보람이 있었다며 라니아는 흥얼거렸다. 그렇게 황금빛 팬케이크를 오물거리며 커피를 홀짝이던 라니아가 커피잔을 탁, 내려놓은 순간이다.
“더 필요하십니까?”
커피잔이 빔과 동시에 귀신같이 직원이 찾아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금세 커피잔을 새것으로 바꿔주는 모습을 보며 라니아는 짧게 감탄했다.
‘확실히 인기 있을 만하네.’
직원들의 움직임부터가 남다르지 않은가.
그리 라니아가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기는 가운데, 가게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본래 자신을 향해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문쪽으로 기울여짐을 라니아는 느꼈다. 라니아가 고개를 기울여 문쪽을 흘겨봤다.
···베네팃의 주 이용자는 귀족가 영애들이요, 소위 아가씨라 불리는 이들이다. 그들이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곳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백색의 머리칼, 금색의 눈동자.
시선을 끄는 수려한 외모.
마법사의 상징과도 같은 로브를 걸친 청년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라니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청년의 금빛 눈동자는 라니아의 위장 주문을 단숨에 간파했으며, 라니아 또한 청년의 위장주문을 간파했다.
카르디 반 아르미엘.
평소와 같이 육체를 변형한 것이 아닌, 엘프의 상징인 귀만을 감춘 카르디가 그곳에 있었다. 라니아와 눈을 마주한 카르디는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또각, 하고 단화 굽이 울리는 소리.
그가 한 걸음 옮길때마다 카르디를 향했던 시선도 조금씩 움직였다. 시선을 끌며 라니아의 맞은편 자리에 걸터앉은 카르디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볼 일이 있어 찾아왔다.”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기척을 좇아왔지.”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소름 돋는데. 스토커야?”
팬케이크를 먹기 좋게 자르며 라니아는 농담을 던졌고, 카르디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식탁에 놓인 여분용 포크를 하나 집어 들었다.
“뭐, 경우에 따라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틀린 표현은 아니···.”
찰싹.
라니아가 포크를 쥔 카르디의 손등을 후렸다.
“포크 내려놔라.”
“······.”
그 목소리가 어찌나 섬뜩한지, 카르디는 곱게 포크를 내려두었다. 손등이 좀 따가웠다. ‘거 더럽게 쩨쩨하게 구는군.’ 그리 중얼거리며 카르디가 팔짱을 꼈다.
“네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까 했는데, 한 번쯤은 내가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군.”
“그래?”
“그래. 그래서 답을 들려주러 왔다.”
그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하겠다. 네 계획대로.”
“···후회 안 하겠어?”
“안 하는 쪽이 더 후회할 것 같더군. 그리고, 이게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선택이 빠르네. 며칠 정도 더 기다려줄까 했는데.”
“글쎄, 빠른 것은 아니지.”
카르디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라니아에게만 들릴 크기로.
“수백 년 만에 선택할 수 있게 된 거니까.”
그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수백 년 만에 우연에 우연이 겹쳐 찾아온 기회야. 기적과도 같은 일이지. 이걸 놓치면 내게 다음은 없으리란 생각이 들더군.”
“그랬냐.”
“그런 거지.”
잠깐의 침묵.
이후 카르디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 기회를 줘서.”
이런 가게에서 할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카르디는 말을 계속해서이었다.
“네가 건넨 선택지에 대한 내 대답이 이거다.”
그가 자신이 차려입은 로브를 가리켰다.
로브에 새겨진 문양, 그 문양을 지금의 시대에 이르러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라니아만큼은 저 문양을 알고 있다.
초대 용사와, 그의 일행을 상징하는 문양.
동시에 잿빛의 초대 마탑주를 상징하기도 하는 것.
대현자 카르디 반 아르미엘의 로브.
한때 라니엘이 ‘빌려 입었던’ 로브이기도 했다. 그 로브를 걸친 채 본래의 외모로 돌아온 카르디는, 라니아가 북부의 탑에서 보았던 과거 대현자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다.
카르디가 늙지 않은 엘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평소의 카르디와 지금의 카르디는 두른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평소의 카르디가 전장에서 은퇴해, 일선에서 물러선 뒷방 늙은이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 반대지.’
다시금 전장에 서려 하는 이.
각오를 다진 이. 앞으로 나아가길 선택한 이 특유의 눈빛과 각오가 느껴졌다. 그런 카르디를 흘겨보며 라니아가 미소 지었다. 저 로브를 입었다는 건 각오를 다졌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다시 앞으로 향할 각오를.
“좋네.”
수백 년 동안 멈춰있던 어느 엘프의 시간이 흐르려 한다. 제 오랜 친구이자 까마득한 선배가 다시 일어섰다는 사실에 라니아는 웃었다.
“그럼 언제부터 합류할래? 레스티한테 언질을 두긴 했는데 네가 편한 대로···.”
“지금 당장.”
“···나 휴가 중인데?”
“그럼 네가 휴가 끝나는 대로 같이 올라가면 되겠군. 나 먼저 올라가 있어도 괜찮다.”
라니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냐, 카르디? 왜 이렇게 급해 보여?”
“북부의 탑에서 보지 않았나?”
카르디가 팔짱을 낀 채 툭 내뱉었다.
“난 원래 이런 성격이다.”
깐깐하고, 신경질적이며, 성격 급한 마법사.
그렇기에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대현자.
“마탑주란 본디 깐깐하고 급해야 하는 법이지. 일이 눈에 보이면 일단 해치워야 하지 않겠나?”
“그게 마법사의 덕목이긴 하지.”
“잘 기억하고 있군. 잿빛 마탑을 세우며 내가 했던 말이기도 하지.”
“어련하겠어.”
현자와 대현자.
초대 잿빛 마법사와 후세의 잿빛 마법사.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흘렸다.
2.
3일간의 휴가를 끝내고 복귀 당일.
“다녀 오거라.”
“예, 스승님.”
라니아는 로셀과 짧은 인사를 나눈 뒤 걸음을 옮겼다. 올 때는 전이문을 통해 왔지만, 갈 때는 전이문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전장에 도착하기 전 한번 들려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걸음을 옮겨 성벽 외곽으로 나가면 그곳엔 마차(魔車)가 기다리고 있다.
“왔나.”
마차의 문을 열면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카르디다. 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라니아가 마차에 털썩, 주저앉았다.
“먼저 들를 곳이 있어.”
“나와 함께 들러야 하는 곳이라 했던가.”
“그래야 편하니까.”
라니아가 마차를 조작해 목적지를 입력했다.
“한 번 얼굴은 보고 가야지. 아직도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긴 할 테지만··· 뭐.”
라니아가 입력한 목적지.
그곳을 확인한 카르디가 피식 미소 지었다.
“확실히, 나와 함께 가면 편하긴 하겠군.”
목적지로 입력된 곳은 수림(樹林).
세계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한 숲.
엘프들의 성지, 이그드라실.
“출발하지.”
그곳을 향해 마차가 움직였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대수림, 이그드라실.
엘프들에게 있어 고향이자 성지나 마찬가지인 그 신성한 땅을 향해 마차는 움직였다. 드륵, 하고 마차의 바퀴가 구르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라니엘은 눈을 감았다. 떠올리는 것은 과거의 일이다.
그러니까, 엘프에 환상을 가지고 있을 시절의 일.
으레 인간이 그렇듯, 라니엘 또한 엘프라는 종족에 묘한 동경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동화책에서 엘프는 미(美)의 상징이요, 신비로운 요정과도 같은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어디 그뿐인가?
영웅과 엘프의 비극적인 사랑.
장생종과 단명종의 수명 차이를 소재로 한 동화만 해도 수십 권이다. 그런 걸 읽고 자랐던 라니엘 또한 엘프에 대한 환상을 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거 다 사기 아니냐?”
애석하게도 그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라니엘이 한쪽 눈만을 뜬 채 카르디를 흘겨봤다. 라니엘이 처음으로 마주했던 엘프. 그리고, 라니엘이 가지고 있던 ‘엘프’의 인상에 금을 가게 한 인물.
“너만 해도 그렇고.”
“내가 어떻단 거지?”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라 해서, 모두가 기품 넘치고 지혜로운 어른이 아니란 점을 네가 알려줬지.”
오랜 세월을 살며 ‘어른’이 되기보단, 꼰대로 변하고 마는 엘프가 많다는 사실을 라니엘은 깨달아야만 했다. 눈앞에 앉아있는 엘프가 바로 그 꼰대였으니까.
“뒤이어 만난 레미아는 뭐···.”
“···그 아이에 대해선 할 말이 없군.”
라니엘이 질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3년 전 그날을 계기로 다소 발전한 레미아이지만, 그녀와의 끔찍한 첫 만남은 결코 잊히지 않는 법이다.
인간멸시. 종족차별주의. 엘프의 자존심.
그 빌어먹을 귀쟁이와의 여행이 얼마나 끔찍했던가? 물론 지금에 와서야 다 지난 일이니 추억으로 포장할 수는 있을···.
「동정 마법사.」
「성격이 그 모양 그 꼴이니 그 나이 처먹고 아직도 동정인 거 아니야?」
라니엘이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포장은 못 하겠다.”
아닌 건 아니었다.
추억으로 포장되기엔 다소 거지 같은 기억이다. 과거를 떠올린 라니엘이 표정을 구기며 ‘하여간 레미아 그 십년···.’ 하고 중얼거리는 가운데, 카르디는 무심코 소리 내 웃었다.
“···뭐야? 왜 웃어?”
“모르면 됐다.”
이제는 귀쟁이라고 안 부르지 않나.
그 말은 속으로 삼킨 채, 카르디는 창 밖을 흘겨봤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지금 이 마차가 향하고 있는 이그드라실은··· 엄밀히 따지면 엘프의 성지가 아니다. 카르디의 고향인 옛 성지는 이미 재가 됐으니까.
마수의 왕에 의해 한차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옛 성지는, 카르디의 여정이 끝났을 때 마왕에 의해 완전히 짓밟히고 말았다.
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땅.
그 땅을 버리고 카르디는 다른 곳으로 어린 엘프들을 인도한 뒤, 그곳에 세계수의 씨앗을 심었다.
“오랜만이군.”
그때 이후로 들른 적이 없으니.
카르디는 자신이 가르쳤던 오르벨을 떠올리며 피식 미소 지었다. 그 어렸던 놈이 얼마나 컸을지 한 편으로는 궁금해지기도 했으니.
“오르벨 그 애송이가 가장 오래된 엘프라···.”
세상 참, 하고 중얼거리는 카르디를 흘겨보던 라니엘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천 년을 살아온 엘프조차 애송이라···.
“야, 카르디.”
“뭐냐.”
“네 입장에서 애송이가 아니라면 도대체 나이가 몇은 먹어야 되는 거냐?”
질문에 대한 답은 곧장 돌아왔다.
“1,438살 이상.”
“···숫자가 어째 구체적이다?”
라니엘이 미심쩍은 눈길로 카르디를 흘겨봤다.
“야, 카르디 혹시 말야.”
“말해라.”
“너 나이가 1,438살이야?”
“아니.”
그래, 그럼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그만큼 양심이 없···.
“1,437 살이다.”
“에라이, 양심 없는 꼰대 새끼야.”
2.
이그드라실의 입구 앞에 마차는 멈춰 섰다.
녹음이 우거진 숲의 초입.
기지개를 켜며 라니엘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한 숲. 맑은 공기를 삼키며 라니엘이 팔을 빙글 돌렸다.
“언제봐도 복잡하게 생겼어.”
대수림은 엘프를 위한 땅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타 종족의 방문자를 위한 길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다는 뜻이다. 덩쿨이고 나무고 죄다 때려 부수며 나아가면 길이야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엘프와 전쟁을 하러 온 건 아니니···.
“곧 안내역이 올 텐데···.”
전보를 미리 날려놓은 참이다.
숲의 초입에서 잠깐 기다리자, 하늘을 향해 뻗어있던 나뭇가지가 조금씩 흔들렸다. 이윽고 엘프 하나가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 님 되십니까?”
그녀가 방긋 웃으며 라니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귀인(貴人)을 모시라고 오르벨 님께 명령받았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그렇게 안내를 하려다 말고, 그녀가 라니엘의 옆에 서 있는 카르디를 흘겨봤다. 카르디는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기에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옆에 분께선···?”
라니엘이 슬쩍 카르디를 흘겨봤다.
뭐하러 얼굴을 가리냐는 시선. 그 시선을 외면한 채 카르디는 안내역을 맡은 엘프에게 말했다.
“동행자다.”
“···네?”
“동행자 맞아요. 그냥 갑시다.”
엘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라니엘이 카르디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찍었다.
“···뭐냐.”
“얼굴은 왜 가려?”
“그 애송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내가 먼저 얼굴을 드러내고 가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려 할 것 아니냐.”
라니엘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 은근히 취미가 음습하다.”
“너만 하겠나.”
“내가 뭐.”
“벨노아에게 들었다.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정체를 숨기고 위대한···.”
콱, 하고 라니엘이 카르디의 발등을 짓밟았다.
카르디가 움찔, 하고 몸을 떠는 가운데 라니엘이 한걸음 앞장서 걸었다. 그녀의 귓볼이 붉어진 걸 보며 카르디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끄러운 줄은 아나 보군.
그렇게 안내를 받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울창했던 초목이 서서히 걷히고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땅. 트인 시야로 앞을 바라보면, 그곳엔 하늘에 닿을 듯한 거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