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93
세계수, 이그드라실.
거대한 세계수의 뿌리와 줄기를 중심으로 조성된 도시, 엘프들의 고향이었다. 언제 보아도 압도되는 풍경 앞에 라니엘이 짧게 감탄하고 있을 무렵이다.
“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곳까지 안내해 준 엘프가 고개를 숙이곤, 옆으로 물러섰다. 이윽고 요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프들의 행렬.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몰려든 엘프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그 안에서 누군가 걸음을 옮겼다. 또각, 하고 울리는 발걸음 소리.
“귀하신 손님이 오셨군.”
울려퍼지는 목소리는 청아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하지도 않은 의복을 끌며 엘프들의 왕, 오르벨이 라니엘을 향해 다가왔다.
“수호자이자 현자, 동시에 인도자인 세간의 영웅을 뵙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엘프의 은사인 카르디 님의 친우라는 점이지.”
엘프라는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
라니엘이 유일하게 환상을 깨지 않아도 됐던, 가장 엘프다운 엘프. 오르벨이 엷은 미소를 지은 채 라니엘에게 눈짓했다.
“서신은 보았네. 세계수에 머무르는 동안은 여기, 이 아이가 도울 것이고···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도 좋네.”
“배려에 감사합니다.”
“무슨, 은사의 친우분께는 당연한 처사지.”
그리 이야기하다가 문득.
오르벨이 라니엘의 옆에 서 있는 카르디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확하겐 카르디가 입고 있는 로브. 그 로브에서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낀 오르벨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옆에 있는 마법사는 누구···.”
“반갑다, 오르벨.”
오르벨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카르디가 입을 열었다. 감히 왕의 이름을 존칭 없이 입에 담았다는 사실에, 오르벨 옆에 서 있던 엘프들이 눈을 부릅떴다.
“은사분과 관계가 있다곤 하나, 무례가 지나치지 않습니까. 왕의 존함을···.”
엘프 여럿이 언성을 높이는 가운데, 정작 그 중심에 서 있던 오르벨의 시선은 파르르 떨렸다. 저 목소리. 저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정정 하··· 왕이시여?”
제 옆에 서 있던 엘프의 앞을 팔로 가로막으며 오르벨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엘프가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오르벨을 바라보는 가운데, 오르벨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로브를 쓴 마법사 앞에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스승을 뵙습니다.”
존귀한 왕께서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에 엘프들이 경악하기를 잠시, 곧이어 카르디가 로브를 벗음에 따라 엘프들은 또다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락.
로브를 벗음과 동시에 드러난 것은 은색의 머리칼과 금빛의 눈동자.
「그분께선 밤하늘의 달과 같은 은빛의 머리칼과, 하늘을 나는 용과 같은 금빛의 눈동자를 가지고 계신다.」
일찍이 왕의 입을 통해 들었던, 위대하신 엘프의 선조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습. 그리고 왕께서 보이는 행동을 통해 엘프들은 눈앞 인물의 정체를 눈치챘다.
소문으로만 듣던 엘프의 은사(恩師).
카르디 반 아르미엘이 이 자리에 있다. 엘프들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리는 와중, 카르디는 손을 뻗어 오르벨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들겼다.
“그래, 오랜만이다. 오르벨.”
직후 이곳저곳에서 ‘미천한 말예가 위대한 선조를 뵙습니다!’ 따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흡사 거품을 물 기세로 엘프들이 하나둘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며, 라니엘은 질린 기색으로 카르디를 흘겨봤다.
“···이게 다 뭐냐?”
“말했지 않나.”
카르디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아이들 사이에선 유명인이라고.”
3.
라니엘이 기억하는 엘프들의 왕, 오르벨은 그야말로 왕이라는 단어에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 외모야 엘프들이 으레 그렇듯 20대의 모습이긴 했으나··· 두른 분위기나 기품부터가 다른 엘프들과는 달랐으니까.
고고하고, 고결하며, 무엇보다도 엘프다운 인물.
그런 인물이 지금 카르디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눈물 흘리며 어째서 이제 오셨습니까··· 하는 말들을 중얼거리는 모습은 빈말로도 썩 볼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야, 카르디.”
라니엘이 질린 기색으로 세계수를 가리켰다.
“난 카일하고 사라 보고 올 테니까, 넌 여기서 이야기 좀 나눠라. 보니까 놓아줄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러도록 하지.”
카르디를 데려오면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착각인 모양이었다. 라니엘이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본래 세계수의 뿌리가 위치한 성지는 왕 이외의 존재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으나···.
“위대한 선조의 친우분을 뵙습니다···!”
라니엘이 걸음을 옮기는 족족 엘프들이 고개를 숙이며 좌우로 갈라졌다. 카르디를 대동한 시점부터 귀빈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어버린 라니엘이다. 라니엘은 심히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이 점은 편하긴 하네.
혼자 왔다면 온갖 엘프들을 대동한 채 보러 가야 했을 테니까. 이윽고 세계수의 뿌리, 가장 깊은 곳에 도착한 라니엘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굳게 닫힌 문.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그곳에는 빛의 샘이 있다. 크고 작은 빛 무리가 반짝이는 곳. 대수림에 만연한 생명력이 모여드는 곳. 이 공간에 존재하는 마나는 그 무엇보다 정순했으며, 공기는 더없이 맑았다.
조르륵.
위를 바라보면 천장에 얽힌 세계수의 뿌리에서 흘러내리는 푸른 물이 있었다. 뿌리를 타고 흘러내려, 수로를 타고 이 방안을 순회하는 푸른 물. 그야말로 생명의 정수와 같은 물줄기다.
‘한 방울 한 방울이 공방주(主)급 연금술사가 만든 최고급 포션이라던가···?’
과연, 치료를 위해 최적화된 환경이다.
라니엘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옮겼다. 방의 중심. 그곳에는 두 사람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
라니엘이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생명의 정수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있는 두 사람. 카일 토벤과 사라의 모습. 그 둘을 바로 앞에 멈춰선 라니엘은 무심코 혀를 찼다.
“염장 지르네. 이런 씨···.”
손을 깍지 끼고 있는 두 사람.
세계수의 뿌리가 두 사람의 손을 휘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용사와 성녀의 모습 같아, 라니엘은 굉장히 떫은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르게 소외된 기분.
오랜 세월 독신으로 살아온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 라니엘은 누가 봐도 연인 사이인 두 사람을 보며 왠지 모를 꼬움을 느꼈다. 하여간 염장질은.
그러나, 그도 잠시.
“에휴.”
편해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라니엘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둘 사이에 털썩 주저앉은 라니엘이 길게, 아주 길게 숨을 내뱉었다.
“오랜만이다, 카일. 사라.”
늬들은 여전하구나.
엘프의 구원자, 카르디.
고대, 그러니까 황금기라 불리던 시절을 기억하는 유일한 엘프요, 지금을 살아가는 엘프들에게 있어선 구원자이자 은사쯤 되는 존재. 이 은발의 엘프를 모르는 이는 이그드라실에 존재치 않는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동화책으로, 연극으로, 역사서로 접해온 위대한 구원자. 현왕 오르벨께서 입이 닳도록 칭송하는 엘프들의 은인.
그 위대한 구원자께서 세계수에 돌아오셨다.
“미천한 말예가, 위대하신 선조를 뵙습니다!”
수많은 엘프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가운데, 카르디는 쓰게 웃었다. 불타는 세계수에서 어린 엘프들을 데리고 이주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있는 거라곤 풀밖에 없던 들판에서 이만큼의 번창을 이루어낸 것이다. 카르디가 제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르벨의 어깨를 두들기며 작게 말했다.
“왕이란 녀석이 그렇게 오래 고개를 숙여서 어쩌자는 거냐? 위엄은 챙겨야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위대한 구원자 앞에 제 위엄 따위가 뭐 대수냐고 중얼거리는 오르벨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서 일어서라는 재촉에 못 이겨 오르벨이 결국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은 구원자의 모습.
천 년 전, 어렸을 적에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야 겨우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난 천 년간 오르벨 또한 성장했으니.
“잘 자랐군.”
카르디가 툭 내뱉었다.
청년의 외모에서 성장이 멈추는 엘프답게, 오르벨과 카르디의 키 차이는 크지 않았다.
“잘 키워냈고.”
카르디는 오르벨의 뒤에 우뚝 선 세계수를, 이어서 오르벨을 따르는 수많은 엘프들을 흘겨봤다. 일전에 글러 먹은 신궁을 보고 왕이자 교육자로서의 오르벨의 자질을 심히 의심했던 카르디지만··· 이 광경을 보고 있자면 의심도 사그라드는 법이다.
“수고가 많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흡사 눈물이라도 흘릴 듯한, 감격 받은 표정의 오르벨을 보며 카르디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애송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1,000살 먹은 놈이 눈물 콧물 흘리며 울부짖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
“어디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보는 눈이 많다. 여기 계속 있다간 더 소란스러워질 것 같고.”
엘프들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는 와중이다.
카르디의 말에 오르벨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카르디를 세계수의 중심에 있는 왕의 거처로 안내했다.
* * *
카르디를 독대하게 된 오르벨은 정말이지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난 천 년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당신께서 남긴 가르침을 지키고자 노력했다느니와 같은 이야기들.
“쉽지 않더군요. 정말이지···.”
말뿐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성장한 세계수와 번창한 엘프의 도시. 그것은 곧 오르벨이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음을 의미했으니.
“다들 저를 보고 고고하다느니, 고결하다느니, 가장 엘프답다느니, 다양하게도 부르지만··· 저는 알지 않습니까.”
오르벨이 쓰게 웃었다.
본래 남들 앞에서 이토록 편한 말투와, 웃음을 보이는 오르벨이 아니지만··· 카르디의 앞에서만큼은 예외였으므로.
“스승님,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엘프라는 걸. 이 모두가 당신께서 가르쳐 주시란 것을 말입니다.”
남들 앞에서야 한 종족을 책임지는 왕이자, 권력자이나 카르디의 앞에서 오르벨은 그저 제자일 뿐이다. 오르벨은 기억한다. 어렸을 시절 카르디가 자신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을. 엘프의 긍지를.
“저는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오르벨이 쓰게 웃으며 질문했다.
그 질문에 카르디는 짧게 답했다.
“잘 안 하고 있었으면 내가 진작 찾아왔겠지.”
“아하, 확실히 그렇겠군요.”
칭찬은 아니나, 칭찬보다 더한 답이었다.
오르벨이 만족스레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투명한 녹빛의 물이었는데, 엘프들이 녹차(綠茶)라 부르는 건강 음료였다.
「야, 카르디.」
「너한테 가르침을 받았다는 엘프들은 녹차를 그렇게 잘 타던데, 너는 왜 이런 유사 고문 음료만 만드는 거냐? 너 솔직히 말해. 니가 못 타는 거지 그냥?」
귓가에 울리는 것은 라니엘의 목소리다.
카르디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한 모금. 녹차를 마신 순간 카르디의 눈썹이 움찔, 하고 움직였다.
“···오르벨. 이거 말이다.”
“아, 녹차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거 내가 가르쳐줬던 방식으로 탄 거냐?”
오르벨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녹차는 엘프들의 전통음료 아니겠습니까. 옛 문화를 보존하는 것 또한 후대의 역할이지요.”
···같은 방식으로 탔는데, 이건 왜 맛있지?
“···잘 보존하고 있군. 내가 타는 거랑 맛이 ‘거의’ 비슷해.”
“그것참 다행입니다.”
양심에 찔려 차마 ‘완전히’ 같다고는 말하지 못한 채, 카르디는 찻잔을 비웠다.
“아,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그리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오르벨이 짝하고 박수를 쳤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지금 세계수의 뿌리에서 치유 중인 두 분 있잖습니까? 스승님과 지인분의 동료라는.”
“그래. 그 녀석들이 왜?”
“그 두 분 분명 이전 세대의 용사와 성녀였지요? 지금은 신성력과 별빛을 다 잃은···.”
카르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와 성녀로서의 힘은 다 잃었지. 다음 세대로 이어졌으니까. 왜, 뭔가 문제가 있나?”
“예, 그것이···.”
오르벨이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어디선가 나타난 엘프 하나가 테이블에 보고서를 올려놓곤 다시 사라졌다.
“주기적으로 성지를 관리하고 있는데, 이상한 현상이 관측되지 뭡니까? 물론 성지에 악영향을 미치진 않는 현상이긴 하나···.”
오르벨이 말했다.
“이게 무엇인지를 알 수 없어서 말입니다.”
툭, 하고 그가 건드린 보고서.
그 보고서에는 벽에 걸려있는 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검 위로 피어오르는 기이한 기운.
“별빛이 아닙니다? 신성력도 아니고요. 그런데 또 신성력에 반응하는 마도구들과 공명하질 않나··· 큰 문제는 아니지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보고서를 흘겨보던 카르디가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그 기운 말이다. 혹시 잿빛이었나?”
“오.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하고 중얼거린 오르벨이 말을 덧붙였다.
“당시 성지를 관리했던 아이의 이야기에 따르면 잿가루가 날리는 것 같았다더군요. 방안에 재가 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고. 혹시 아시는 게 있습니까?”
재, 잿가루라···.
카르디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글쎄. 설명하긴 어렵다만··· 최소한 해가 될 일은 없을 거다. 신경 쓸 것 없어.”
“스승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오르벨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카르디는 빈 찻잔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비어버린 잔. 그 잔의 아래에 녹차를 우리고 남은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비어버린 잔에 남은 찌꺼기.
한동안 카르디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2.
카일이 누워있는 석관.
그 석관에 등을 기댄 채 라니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날로부터 벌써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선을 슬쩍 옆으로 끌어보면··· 방의 벽에 걸려있는 카일의 검(劍)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는 성검이 아니게 된 것.
그렇다 한들 오랜 세월 별빛을 머금었던 검이다. 어지간한 레어메탈제 검을 씹어먹을 수준의 명검.
‘···머금었던 게 별뿐만은 아니지만.’
별과 그늘을 동시에 머금었던 검이다.
저 칼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옛일이 떠올라 라니엘이 제 가슴팍을 문질렀다. 저 칼에 심장이 꿰뚫렸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 까닭이다.
“후우···.”
한숨을 쉬며 라니엘이 고개를 돌려 석관에 누워있는 카일을 바라봤다. 세상 편한 표정으로 잠들어있는 녀석이다. 그 몸에는 여전히 균열이 가득했지만···.
“처음보단 많이 좋아졌네.”
막 쓰러트렸을 때는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았던 카일이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며 발로 카일의 옆구리를 찔러 댔을 때 ‘꾸욱’이 아니라 ‘퍼석’ 소리가 났던 걸 라니엘은 아직 기억했다.
팔자 좋게 퍼질러 자는 카일을 흘겨보다가, 라니엘은 이내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창녀스러운··· 아니, 벚꽃잎을 닮은 머리칼을 지닌 여인이 눈을 감고 있었다. 성녀, 사라. 역천의 검이 됐던 카일을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
반쯤 물에 잠긴 채, 눈을 감고선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사라는 그야말로 교회의 벽화에나 나올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애는 뭐 성녀가 아니게 되고 나서야···.”
성녀같은 느낌이 드네.
물속에서 찰랑이는 연분홍색의 머리칼, 세상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라. 왜인지 모르게 신성하게 느껴지는 그 모습에 라니엘은 쯧, 하고 혀를 찼다.
“······.”
둘 사이에 거리가 제법 됨에도 기어코 손을 쭉 뻗어 깍지를 끼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뭔가 꼬왔다. 더러운 커플 놈들. 누군 전장에서 구르고 있는데.
연애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곤 하나, 30년의 세월··· 아니 ‘26년’의 세월 동안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라니아’다. 염장을 질러대는 커플 놈들을 보며 꼬움을 느끼기엔 충분한 세월이었다.
“야, 늬들 그러고 있음 불편하지 않냐?”
라니엘이 그리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불편할 거야. 불편하지? 그렇지?”
잠자고 있는 이들이 질문에 답할 리가 없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라니엘이 손을 뻗었다. 깍지끼고 있는 저 손을 내 풀어버리겠노라 다짐한 라니엘이 깍지낀 사라의 손가락을 움켜쥔 순간이다.
찰싹!
깍지 낀 두 사람의 손을 얽매고 있던 세계수의 뿌리가 돌연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그 힘이 강하지 않으나, 찰싹하고 소리가 날 만큼의 위력은 됐다.
“······.”
라니엘이 제 손등을 문질렀다.
아프진 않지만 뭔가 기분이 나빴다.
손등을 문지르며 꿈틀 거리는 세계수의 뿌리를 노려보았는데, 세계수의 뿌리가 다시 한 번 출렁였다. 마치 허튼짓 하지 말고 저리 꺼지라는 것처럼. 혹은 뭘 꼬라보냐는 것처럼.
“씹···.”
라니엘이 울상을 지은 채 중얼거렸다.
“더러운 커플 놈들···.”
처음부터 풀 생각 없었어.
그냥 건드려나 볼 생각이었거든?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왠지 뻘쭘해진 라니엘은 등을 돌린 채 석관에 걸터앉았다.
“나, 곧 배교자를 토벌하러 갈 생각이다.”
중얼거리는 것은 혼잣말.
“6개월 뒤 알케이아 토벌전을 할 거야. 이제야 첫단추를 꿰는 거지.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과장없이 정말 절반일지도 모르지.”
배교자를 쓰러트리는 순간.
그 순간 변곡점은 찾아오리라.
“당분간 바빠질 것 같다.”
그리고, 하고 라니엘이 중얼거렸다.
“너하고 한 약속은 잘 지키고 있고. 가장 강한 용사라는 이명도 물려받았고, 이상적인 용사라는 것도, 완벽한 용사라는 것도 다 물려받았다.”
정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네가 맡긴 것들을 잘 수행 하고 있다는 뜻이지.”
인사는 마쳤다.
라니엘이 읏챠, 하고 일어섰다.
“뭐··· 잘 먹고 잘살고 있어라, 하고 말하면 딱 좋을 시점이긴 한데.”
세상 편한 얼굴로 요양 중인 두 사람을 보며 라니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미 너무 잘살고 있는 것 같아서, 말 해봐야 나만 배 아플 것 같네.”
반쯤 농담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다. 라니엘의 감각이 무언갈 포착했다. 라니엘의 고개가 휙 돌아가고,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카일의 검이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카일의 검.
그 검에서 라니엘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별빛은 사라졌을 텐데?’
별빛과 함께 특성이 모조리 사라진 검이다.
이제는 그저 명검에 불과한 검에선 아무것도 느껴질 리가 없어야 하는데, 조금 전 라니엘은 무언갈 느꼈다.
“······.”
한동안 검을 노려봤지만, 그 이상으로 무언가 느껴지진 않았다. 단순한 착각이었나? 라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세계수의 뿌리, 생명의 성지.
그 방에서 나오기 전 라니엘은 포션병을 꺼내 수로를 타고 흐르는 물을 가득 채웠다. 이곳에 온 이유 중에는 생명의 정수를 얻어가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니까.
꿈틀.
세계수의 뿌리가 굉장히 떫은 눈치로 출렁였지만, 라니엘은 뿌리의 움직임에 개의치 않고 포션병 하나를 더 꺼내 가득 채웠다.
“세상 구하겠다는데 협조 좀 해라. 쓴다고 닳아지는 것도 아니고 뭐···.”
다 쓸 데가 있어.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은 기어코 포션병 세 개를 가득 채웠다. 이는 오르벨과 약속이 된 부분이었기에, 세계수의 뿌리 또한 떫은 눈치로 라니엘의 주변을 출렁일 뿐이었다.
세계수의 뿌리에 깃든 건 숲을 사랑하는 요정과 정령이요, 그들은 눈앞의 여인에게서 ‘불순한 의도’를 감지하지는 못했기에 잠자코 그 모습을 쳐다봤다.
“읏챠.’
꽉 채운 포션병을 허리춤에 묶은 채 라니엘이 성지의 문을 열어젖혔다. 성지의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 라니엘은 마지막으로 카일과 사라를 돌아봤다.
“하여간.”
가벼운, 그리고 털털한 웃음.
그 웃음을 마지막으로 라니엘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에 돌아봐야 할 것들은 다 돌아봤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무대로.
그러니까, 전장으로.
* * *
“이야기는 잘 나눴냐?”
“그래. 떼어내느라 고생했지. 조금만 더 머물다 가라고 어찌나 발목을 붙잡아대던지.”
조금 지친 기색으로 카르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는 라니엘 너는 어떻냐?”
“뭐가?”
카르디가 라니엘의 얼굴을 가리켰다.
평소보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
고민거리를 해결한 듯한 이의 얼굴이었다.
“얼굴이 좀 밝아졌는데.”
“지난 3년간 시간 나면 해야지, 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걸 다 해치웠으니까.”
스승님도 뵈고 왔고,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는 연놈들의 상태도 확인했다. 왜인지 걸음걸이마저 조금 가벼워진 가운데 라니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야지.”
이그드라실을 빠져나가는 길.
“그건 그렇고.”
앞장 서 걷던 라니엘이 빙글, 몸을 돌려 카르디를 바라봤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소감은 어때? 전장으로 복귀하게 됐는데.”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전장으로.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곱씹으며 카르디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세월이 무심하군. 이제는 대마법사도, 대현자도 아니게 됐으니까.”
“그래도 지식은 남아있잖아?”
라니엘이 미소 지었다.
“레스티에겐 이미 말해놨어. 까마득한 선배가 마탑으로 복귀할 거라고.”
잿빛의 초대 마탑주, 아르미엘.
잿빛 마탑에 그 이름을 모르는 마법사는 없다. 전설적인 마법사이자 작금의 마탑을 이루는 기반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니.
“시설은 충분할 테니, 그곳에서···.”
“그래, 그곳에서.”
카르디가 뒷말을 이어받았다.
“그날을 준비하면 된다는 소리군.”
지금으로부터 6개월 뒤.
쌓아온 것들이 결실을 맺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카르디는 다시금 연구에 매진하게 될 것이다. 과거 이루지 못했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마무리 짓지 못했던 연구에 종점을 찍기 위해서.
“당분간 바빠지겠어.”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기뻐 보이는데?”
라니엘은 카르디의 얼굴을 가리켰다.
풀어진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카르디의 금빛 눈동자. 그 눈동자에 언제나 깃들어있던 체념한 듯한 이 특유의 무기력함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뻐해야지.”
카르디가 웃었다.
“내게는 이 모두가 기적 같은 일이니.”
비웃음이 아닌 가벼운 웃음.
카르디는 걸음을 옮기며 과거를 떠올렸다. 자신이 걸어왔던 수많은 길을 회고했다. 수백 년 전 북부의 탑에서 계약을 맺었던 당시의 자신은 이런 미래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아니, 떠올리지 못했겠지.’
농담하지 말라며 일축했을 것이다.
턱없는 이야기라고.
허망한 이야기라고 조소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지금은 현실성을 띠고 있다.
우연이 아닌, 자신의 노력에 의해 결정 나는 필연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그 사실에 카르디 반 아르미엘은 만족스레 웃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허황된 것만을 쫓아왔던 마법사는, 자신이 바라보던 것이 마냥 허황된 것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 닿을 수 있는 결말. 그러니······.
“노력해야지.”
“그래, 열심히 해봐.”
라니엘이 빙글, 다시 몸을 돌렸다.
잿빛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리는 가운데 카르디의 시선은 문득 라니엘의 허리춤에 향했다. 찰랑거리는 포션병. 세계수의 기운이 느껴지는 포션병을 가리키며 카르디가 질문했다.
“그런데, 그건 왜 들고 온 거냐?”
“쓸 데가 있어서.”
라니엘이 허리춤에 달아둔 포션병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칼트 그 녀석한테 쓸 거야.”
“그 사냥개를 말하는 건가?”
“어. 그 녀석이 몸을 굴릴 일이 더 많아질 거 같거든. 그런데, 걘 특별한 뭔가가 없잖아?”
용사의 치유력을 가진 것도, 그림자 용의 군주의 축복을 받은 것도, 하물며 최초의 성검을 지니지도 않았다. 요컨데 부상을 빠르게 치료할 수단이 모자라 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만간 쓰러질지도 모르는데, 몸에 좋은 거나 챙겨줘야지. 내가 이런 거 잘 안 챙겨주는데··· 걔는 챙겨줘야겠더라고. 눈가가 퀭하더라니까?”
살아있는 좀비를 보는 느낌이야.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지 걱정되더라니까.
“그, 라니엘.”
그리 중얼거리는 라니엘을 흘겨보다가, 카르디는 무심코 한마디 내뱉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일을 줄여주면 되는 것 아니냐?”
무척이나 당연한 질문.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라니엘은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제 허리춤에 걸어둔 포션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듣기로는 이거, 피로 회복 효과도 있다던데.
2.
“어우.”
“갑자기 몸은 왜 떨어, 형씨?”
“글쎄요. 갑자기 오한이 듭니다. 날이 추운 것도 아닌데 거참.”
“누가 흉이라도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에이, 제 흉을 누가 봅니까?”
칼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마왕군의 시쳇더미 위.
시체를 깔고 앉은 칼트가 칼집으로 시쳇더미를 툭툭 두들겼다. 은백색의 칼날은 피와 살점으로 뒤덮여 검붉게 변해있었다.
“그쪽도 얼추 정리됐습니까, 카리옷?”
“어떻게든 된 것 같지?”
불사(不死), 카리옷.
초인의 자리에 오른 성기사는 제 등 뒤에 쌓인 마왕군의 시체를 가리키며 쓰게 웃었다.
“형씨보다는 한참 느리지만 말야.”
비슷한 시기에 초인에 오른 둘이다.
하지만 칼트와 같은 작전에 몇 번이고 투입되며 카리옷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칼트라는 검사에 대한 위화감이자, 이질감이다.
꼭 검의 실력이란 게 세월에 의해 결정 나는 건 아니지만, 카리옷은 오랜 세월 검을 휘둘러 왔다. 검(劍)이란 무구에 대해선 제법 자신이 있단 뜻이다. 하물며 초인의 자리에 오른 지금은 더욱.
하지만···.
시쳇더미 위에서 연초를 태우고 있는 저 검사(劍士)는 무언가 달랐다. 사냥개, 칼트. 젊은 나이에 초인이 됐으며 몇 번이고 재앙과 마주치고 살아남은 인간.
저 젊은 검객은 무언가 다르다.
그 이질감을 처음으로 느꼈던 게 언제던가?
아마도 칼트와 두 번째 모의전을 치르던 날이었으리라. 합을 주고받으며 초인의 감각을 단련하는 모의전. 첫 번째 모의전에서 카리옷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칼트와 검을 맞부딪쳤다.
그 끝에 패배하긴 했으나, 처참한 패배는 아니었다.
실수 혹은 아슬아슬한 한 합의 차이.
다음에 싸우면 승리를 점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카리옷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채 며칠 뒤 두 번째 모의전을 치른 날···.
카앙!
카리옷은 단 세 합 만에 패배했다.
불사(不死)를 바탕으로 펼치는 카리옷이 자신 있는 전술을 쓰지 않았다곤 하나,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패배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카리옷이다.
그때 카리옷은 위화감을 느꼈다.
칼트의 움직임이 빨라진 건 아니다. 고작 며칠 만에 검술의 완성도가 올라간 것도 아니다. 승패를 결정지은 건 그보다 더 단순한···.
“형씨 보면 참 독특해.”
“예? 뭐가 말입니까?”
카리옷이 십자가 검으로 칼트를 가리켰다.
“깔고 앉은 그 마수 말야. 샌드웜.”
“아, 이거 말입니까?”
칼트가 검으로 샌드웜의 시체를 푹 찔렀다.
녹빛의 피가 푸슉, 튀어나오는 가운데 카리옷이 말을 이었다.
“저번 전투에서만 해도 저놈들 귀찮다고 하지 않았나? 자꾸 땅 아래로 파고들어서 잡기 귀찮다고. 그래서 오래 걸린다고.”
“그랬었죠.”
“그런데 오늘은 마주치자마자 갈아버리던데?”
모래 안으로 파고든 샌드웜을 무슨 조화를 부린지는 몰라도 한 번의 휘두름으로 토막 내는 모습을 카리옷은 똑똑히 보았다. 보고도 기이하다고 느껴지는 광경.
“어떻게 한 거야 도대체?”
“샌드웜도 버릇이 있지 않습니까.”
칼트가 길게 연기를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사막으로 파고드는 시점, 튀어나오는 시점, 땅 울림이 겹쳐지는 시점. 그걸 저번 전투에서 관찰을 좀 해봤습니다. 잘 보니 반복되는 부분이 있더군요. 그걸 바탕으로 이번에는 예측을 좀 해봤습니다.”
“···그래? 난 안 보이던데.”
“일단은 제 클래스가 트래커(Tracker)지 않습니까. 뒷조사하던 버릇이 어디 안 간 거겠지요.”
그냥 보다 보면 읽히는 게 있습니다.
그리 답하는 칼트를 보며 카리옷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수의 습관을 전투 한 번으로 파악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샌드웜의 악명이 높아질 일도 없을 테지.
“하여간 여러 번 싸우긴 싫은 상대야.”
카리옷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이질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검의 초인이자 추적자인 저 검사는, 한 번이라도 싸워본 적이 있는 대상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률을 자랑한다. 오랜 세월 간 굳혀진 전투의 습관을 꿰뚫어 보곤, 그 틈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까닭이다.
일격에 검의 궤도를 틀고.
이격에 빈틈을 만들어내며.
삼격에 목덜미에 칼을 겨누던 칼트의 모습을 카리옷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소름 돋는 눈동자 또한.
그 섬뜩한 모습을 떠올리고 있자니, 줄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칼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칼트는 퀭한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세상만사에 허탈함을 느끼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 죽상이야 형씨?”
“카리옷, 제가 말입니다.”
그 목소리에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제들이 힐을 넣으면 오히려 데미지를 받을 것 같은 몰골. 퀭한 눈가를 비비며 칼트가 말했다.
“제가, 제가 정말 존경하는 선배님이 하나 계십니다. 진짜 존경하는 분인데···.”
···그게 누군지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분이 제가 은퇴하는 날에 왕도에 건물을 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제 명의로요. 그것도 진짜 큰 건물을요. 아, 대대손손 물려줄 건물을 말입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칼트가 웃음을 흘렸다. 헛웃음에 가까운 웃음.
“요즘 그 건물을 상상하며 힘을 내곤 합니다. 건물을 떠올리면 의욕이 납니다. 아, 금칠이 된 건물. 마탑만큼 거대한 건물. 그 정도는 지어주시겠지요···.”
“그, 그런가?”
“예, 도대체 얼마나 멋진 건물을 지어주실 생각이시기에···.”
칼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많은 일을 시키시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칼트의 손에는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제 4 전선, 크렘펠리아에 합류할 것.』
다음으로 향해야 할 전장이 적힌 편지.
“먼저 가보겠습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칼트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카리옷은 혀를 찼다. 젊은 친구가 고생이 많구만.
3.
제 4 전선, 크렘펠리아.
“있잖아요, 라크.”
성녀 나티다.
“우리 알고 지낸 지 좀 됐잖아요? 동료라고 부를만하잖아요? 이쯤 되면 영혼의 동반자잖아요? 그렇잖아요?”
달밤 아래.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우리 사귈까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집무실.
스며든 달빛에 반짝이는 연갈색 머리칼과 반개(半開)한 녹빛 눈동자. 번들거리는 녹빛의 눈동자는 요사스럽기 짝이 없으며, 속삭이는듯한 목소리는 달콤하기까지 하다.
성녀, 나티다.
평소에는 퀭한 눈동자로 연초를 물고, 허리를 잔뜩 굽힌 채 다녀 부각되진 않지만··· 그녀 또한 상당한 미색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엘프를 옆에 세워놓아도 뒤처지지 않을 인물.
“우리, 사귈까요?”
그런 여인이 속삭이듯이 고백을 전했다.
늦은 밤과 달빛이라는 환경적 요소까지 더해지니 그 속삭임이 가진 위력은 곱절이 되는 법이다.
“연애해요, 우리.”
평소에 그녀에게 관심이 없던 인물도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볼 것이요, 그녀에게 호감이 없던 인물조차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만큼 달콤한 고백이나···.
“······.”
정작 고백을 받은 당사자인 라크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다. 집무실의 테이블 위에 다리를 꼰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티다. 그녀를 올려다보던 라크는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성검 필요합니까?”
라크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성검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말 하십쇼. 그런 식으로 장난치지 말고.”
이런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라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성검을 뽑아들었다. 백금색으로 빛나는 성검이 방안에 스며든 달빛과 어둠을 몰아냈다.
“아으으···.”
성검이 눈부시다는 듯 나티다는 제 눈가를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궁시렁댔다.
“아니, 반응이 이게 뭐예요? 고백이잖아요? 이렇게까지 분위기 잡고 고백했는데 대답이 성검 필요하냐니··· 좀 너무하지 않아요?”
길게 내뱉는 한숨. 실망한듯한 나티다의 모습에 라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검 달라는 말 아니었습니까?”
“아니에요. 진짜 눈치 없긴.”
“그럼···.”
“아니, 그렇다고 집어넣지는 말구요.”
나티다가 콱, 하고 라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결국 라크가 꺼내 든 성검을 품에 안은 채 그녀는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성검이 합법적인 마약이긴 하지만, 제가 꼭 이것 때문에 당신한테 고백했겠습니까? 너무하네 정말.”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라크가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이걸로 벌써 다섯 번 째 고백입니다.”
“···설렌다거나 그런 건 없어요?”
“전혀. 설레기보단 당황스럽습니다.”
“와. 진짜 너무하네.”
“애초에 사귀는 게 뭡니까. 저는 그런 거 모릅니다.”
비꼬는 말투가 아니다.
정말로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듯한 말투로 라크는 말을 이었다. 애초에 여성과의 접점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이쪽으로는 제 스승을 닮아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라크다.
“연애가··· 뭡니까?”
연(戀)은 또 뭐고 애(愛)는 또 뭐란 말인가?
손잡고 거리를 거닐어? 밥을 같이 먹어? 그럴 시간에 라크는 도끼를 한 번 더 휘두른다. 이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진 전사의 머리에 든 거라곤 강함과 단련 훈련과 성장뿐이었으니.
“그럴 시간에 도끼나 한번 더 휘두르지.”
남들이 연애할 때 라크는 도끼로 마왕군 대가리 하나를 더 깬다. 잡념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는 뜻이다.
“와···.”
그 단호한 대답에 나티다가 질린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티다는 애써 묶어놨던 머리칼을 풀어헤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람이 꿈에서는 어쩜 그렇게···.”
“꿈?”
“예, 꿈이요 꿈.”
나티다가 투덜거리며 테이블에서 내려왔다.
“꿈에서 봤어요.”
“뭘 말입니까.”
“당신이랑 연애하는 장면을 봤다구요. 꿈에선 그렇게 낭만적이었는데···.”
치익, 탁.
성검을 품에 안은 채 입에 연초를 꼬나문 나티다가 재주도 좋게 한 손으로 불을 붙였다. 이윽고 회색 안개를 길게 토해낸 나티다가 말을 이었다.
“요즘 자꾸 꿈을 꾸는데, 당신이 나와요?”
“제가 말입니까.”
“네. 꿈이라기엔 좀 많이 선명한.”
연초를 태우며 나티다가 피식 웃었다.
“라크, 우리가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죠?”
“석 달이 조금 넘었으니 100일은 넘었을 겁니다.”
“100일이라···.”
후우, 하고 길게 내뱉은 연기.
“그럼 앞으로 630일만 더 기다리면 되겠네요.”
“···630일?”
“꿈에서 봤던 라크랑은 알고지낸 지 2년이 넘었거든요.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는건가···.”
저게 무슨 뜬구름잡는 소린가.
사실 매일같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나티다였기에, 라크는 별생각 없이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요, 라크?”
“정찰 나갑니다.”
외투를 걸친 채 밖으로 나서려던 라크가 문득 나티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티다가 눈을 깜빡이다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턱, 하고 라크의 손 위에 얹었다.
“뭐하십니까.”
“손 내밀길래.”
“아니, 검 달란 소립니다.”
“······.”
성검을 돌려받은 라크가 문 앞에 멈춰선 채, 잠깐 뒤를 돌아봤다. 툴툴거리며 제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는 나티다를 흘겨보다가, 라크는 툭 내뱉었다.
“2년 뒤에 제가 뭘 했길래 그럽니까?”
꿈 내용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나티다는 짧게 답했다.
“저한테 고백하던데요?”
“개꿈인가 봅니다.”
“아니, 진짠데.”
2.
깊은 밤, 라크가 없는 집무실의 안.
나티다는 라크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은 꿈에서 보았던 풍경이다.
···라크는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성녀에게 있어 꿈이란 결코 가벼운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 법이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성녀의 꿈은 예지(豫知)와 맞닿아 있으니.
벌어질 미래, 벌어졌어야 할 미래,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가능성. 성녀는 꿈을 꿈으로서 미래를 엿본다. 하지만 나티다는 자신이 본 것이 미래인지, 아니면 자신의 망상에서 비롯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꿈이라기엔 구체적이었고.
예언이라기에는 터무니없는 일이었으니.
‘···애초에, 전제조건 자체가 틀리기도 했고.’
꿈에서 보았던 풍경.
그건 예언이라기보단 차라리···.
‘전혀 다른 미래.’
그 미래에서 나티다는 여전히 교단에 붙잡혀 있었다. 교단의 성녀로서 움직이고 있었으며, 약에 절은 채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골방. 약에 절은 채 반쯤 꿈을 꾸며 살아가던 삶.
「당신이 성녀인가.」
그런 자신을 찾아온 인물이 있었다.
「나는 라크 반 그레이스.」
그가 나티다에게 손을 뻗었다. 손을 뻗어 나티다를 골방에서 끌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당신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분의 곁에 설 수 있을 테니까.」
그 뒤에 보았던 수많은 미래.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
「당신은 도망치십시오.」
그리고···.
「여긴 내 무대니까.」
그 미래에서 맞닥뜨린 가장 끔찍한 재앙. 그 흐릿한 기억들을 더듬으며 나티다는 제 어깨를 짧게 떨었다.
“···개꿈인가 봅니다, 라.”
조금 전 라크가 중얼거렸던 말.
그 말을 곱씹으며 나티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디 개꿈이면 좋겠네요.”
그 꿈에서 라크는 죽었으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사에게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희생했으니까. 꿈에서 들었던 라크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나티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고백했다니까 그러네.”
* * *
“그러고 보니 말야, 카르디.”
“뭐냐. 라니엘.”
“내가 벨노아한테서 이상한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 정확하겐 벨노아가 모시는 신한테 들은 말인데.”
“벨노아가 모시는 신? 아, 그림자 용의 군주를 말하는 거냐?”
“어. 그분. 그분이 나한테 말했거든.”
“뭐를.”
“미래를 보았다고. 정확하겐 본래라면 일어났어야 할 미래를 보았다는데, 그거 아무리 봐도···.”
라니엘이 쓰게 웃었다.
“재의 여신의 이야기더라.”
“···그 미래는 사라지지 않았나?”
“사라졌지. 없던 일이 됐을 텐데, 재의 여신이 과거에 개입하면서 그 흐름 때문에 설령 별이라 해도 미래를 볼 수 없게 됐다고 하던데.”
그림자 용의 군주는 말했다.
더는 어떤 예언자도 미래를 볼 수 없게 됐다고. 미래시와 예언과 같은 기적을 지닌 이들이 엿볼 수 있는 거라곤, 재의 여신이 걸었던 미래뿐이라고.
“설령, 노망난 도마뱀이라도 말야.”
뭐, 하고 라니엘이 뒷짐을 진 채 말했다.
“그래 봐야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도 더 없긴 하니까, 상관은 없으려나. 예언의 기적이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말야.”
그말대로다. 신성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가 아닌 평범한 인간에게 예언이란 쉬이 허락되는 기적이 아니다. 예언의 기적을 손에 넣은 사제는 수백 년의 역사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라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예언, 예지와 같은 기적이 내려지는 건 ‘그 경우’ 뿐이잖아. 여태까지 쭉 그래 왔고.”
“그렇긴 하지. 애초에 예언은 별이 극도의 위기를 느꼈을 때만 신도들에게 내려주는 기적이니.”
수백 년의 역사에서 별이 예언의 기적을 허락할 때는 언제나 그가 나타났다. 가장 두려운 재앙. 형상화된 죽음.
죽음의 칼, 가니칼트.
“가니칼트, 그 녀석이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예언의 기적이 내리질리는 없을 거다. 그리고 녀석은 찾아올 그날까지 더는 움직이지 않을 테고.”
카르디의 말에 라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