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94
3.
며칠 뒤, 크렘펠리아에는 손님이 찾아왔다.
미리 연락을 받았기에 크렘펠리아의 총지휘관인 라크와 나티다는 찾아온 손님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손님이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접견실을 향해 그 문을 열어젖힌 라크는···.
“······.”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는 남자를 마주했다.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다.
한때 라크에게 체술을 알려주었던 인물이기도 하며, 용사의 보좌관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
“칼트 님?”
검의 초인이자 가더(Guarder).
추적자, 칼트가 눈을 개슴츠래 떴다.
핏발선 눈동자가 천천히 라크를 향했고, 이어서 라크의 옆에 착 붙어있는 나티다를 향했다. 나티다는 라크와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순간 칼트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어린놈의 새끼들이···.’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칼트는 간신히 씹어 삼켰다. 이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제 ‘위대하신’ 선배님과 같은 꼰대가 되고 말 테니까.
“오랜··· 만이다. 라크.”
간신히 인사를 건낸 칼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후우···.”
어째 요즘들어 한숨만 느는 기분이다.
길게 한숨을 내쉰 칼트가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갈 꺼내 들었다. 담뱃갑이었는데, 거꾸로 잡고 탁탁 털어도 나오는 거라곤 먼지뿐이었다.
“이런 십···.”
칼트가 비어버린 담뱃갑을 허망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자니, 라크의 옆에 붙어있던 나티다가 문득 탄식을 내뱉었다.
“그거 타아리200 아닙니까?”
라크의 곁에서 떨어진 나티다가 총총걸음으로 칼트에게 다가왔다. 빈 담뱃갑을 가리키며 나티다가 오, 하고 짧게 감탄했다.
“타아리200 좋죠. 독한데, 독한만큼 잠이 확 깬다고 할까. 뒷맛도 깔끔한 게 저도 좋아합니다. 취향이 좋으시네.”
“···타아리200을 알아?”
독하기로 유명한 담배다.
그 독한 맛으로 잠을 깨우기 위해 칼트가 줄로 피워대는 담배인 만큼, 평범한 사람은커녕 애연가들조차 고개를 가로젓는 담배.
“예, 알죠. 저도 그거 자주 태웁니다.”
그런 담배를 눈앞의 소녀는 자신도 피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런 애가 타아리 200을? 칼트가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나티다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들었다. 꺼내든것은 목함. 확장마법이 걸린 목함의 뚜껑을 연 나티다가 목함을 거꾸로 들고 흔들었다.
곧이어 테이블에 우수수 담뱃갑들이 쏟아졌다.
신경안정제, 타아리200, 그 외에도 독하기로 유명한 온갖 연초들이 테이블에 쌓여 산더미를 이루기 시작했다.
“······.”
칼트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티다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저 소녀에 대해 알 것 같다. 라크의 곁에 붙어있으며 연초와 마약에 환장하는 소녀.
“···이름이 혹시.”
“나티다입니다. 반갑습니다, 칼트 경.”
나티다가 칼트에게 타아리200을 건넸다.
“용사님껜 이야기 자주 들었습니다.”
퀭한 칼트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나티다가 쓰게 웃었다. 그 쓴웃음에는 동정과 공감이 반반 섞여 있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정말로.”
용사님은 여전하시나 보군요.
혹시 다른 연초도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가져가서 태우셔도 됩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나티다를 바라보다가, 칼트가 눈이 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칼트는 담뱃갑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가 맞네.”
성녀가 내려준 기적인 담배를 칼트는 입에 꼬나물었다.
가장 간절한 순간 필요로 하는 기적을 내려주는 이에게 사람들은 신성함을 느끼는 법이다. 한평생을 무교로 살아온 칼트이나, 지금 이순간 칼트는 델로힘 교단에 귀의할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었다.
“자, 마음껏 피십시오.”
타아리200.
칼트에게 있어선 기적과도 같은 연초다.
신께서는 칼트의 피로함을 해소해주지 않으시지만, 이 기적의 막대 과자는 피곤을 싹 날려주었으니.
“후우···.”
“아, 이것도 제법 향이 좋습니다. 그 왜, 타아리200이 맛이 좀 진하지 않습니까? 그 잔향을 이걸로 씻어내는 느낌인데,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과연··· 담배의 뒷맛을 담배로 씻는다니, 생각지도 못한 방법인데.”
타아리200에 이어 연초를 하나 더입에 문 칼트의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소파에 축 늘어진 채 연기를 뻑뻑 내뿜어대는 칼트를 라크는 동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옛날에는 안 저러셨는데.’
눈이 초롱초롱하던 분이셨는데.
총명함은 어디에 가고 피곤에 찌든 직장인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퀭한 눈동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는데.
‘북부에 처음 왔을 때, 나티다가 분명···.’
북부에 처음 왔을 때 당시, 나티다 또한 저런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피로에 찌든 퀭한 눈동자. 처음에는 그것이 약기운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눈앞의 상황을 보아하니 단순 과로 때문인 듯싶었다.
“용사님은 여전하신가 봅니다.”
“아니, 더 심해졌어.”
“거기서 더요? 끔찍하군요···.”
“서신은 받았을 거 아냐? 선배님이 토벌전 준비로 바쁘시다 보니, 주변도 다 갈려나간다. 쉴 틈이 없어. 쉴 틈이···.”
칼트는 퀭한 눈동자로 중얼거리고, 나티다는 다 이해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하군요.”
“끔찍하지. 그런데, 더 끔찍한 건···.”
“용사님 본인이 몇 배는 더 일한다는 점 아니겠습니까? 상관이 내 곱절은 되는 임무를 수행 중인데··· 쉬고 있자니 굉장히 눈치 보이는.”
“그래. 그거지.”
칼트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선배님은 안 지치나? 그 사람, 철야는 기본이야. 열흘 밤샘에, 무휴, 무식으로 전장을 쓸고 돌아다니는데··· 거기에 대고 내가 사흘 동안 철야했다고 징징댈 수나 있겠어?”
“이해합니다. 정말로.”
말뿐인 공감이 아니었다.
나티다 또한 라크의 보좌관으로 직책을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라니아의 보좌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초인조차도 혀를 내두를 업무량을 몸소 경험해 본 적이 있단 소리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정말로.”
둘 사이에 묘한 공감대가 형성된 가운데, 칼트가 마지막으로 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연초를 끄고 방을 적당히 환기한 뒤, 칼트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인사가 늦었지만···.”
칼트가 멋쩍게 웃었다.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 님의 보좌관 역할을 맡고있는 칼트다. 라크와는 구면이고. 거기 성녀 분과는 초면이지.”
칼트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내가 크렘펠리아로 파견 나온 이유는 이 서신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서신에 쓰인 임무를 돕기 위해서지.”
“임무··· 말씀이십니까?”
“그래. 라크.”
쿤텔이 쓰던 검(劍)이자, 이제는 칼트가 물려받게 된 한 자루의 검. 검의 칼자루에는 특정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을 가리키며 칼트가 입을 열었다.
“검의 성지, 갈라트릭에 대해서 알고 있어?”
크렘펠리아의 총지휘관에게 주어진 임무.
그것은 검의 성지 갈라트릭의 조사였다.
2.
검의 성지 갈라트릭.
크렘펠리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곳은, 한때는 성지라 불렸으나 지금은 검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다. 수많은 검의 초인을 길러 냈으나, 동시에 그들의 무덤이 되어버린 곳.
“그곳에 성배가 있어. 갈라트릭에서 수많은 초인이 배출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지. 물론, 지금은 그 성배는 파손돼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겠지만···.”
칼트가 테이블을 툭툭 건드렸다.
“성배에 담긴 신성력. 그것이 배교자 토벌전에 앞서 ‘필요하다’ 라고 선배님은 판단하셨지.”
배교자 토벌전.
참가인원에겐 모두 서류가 전달됐기에, 라크와 나티다 또한 토벌전에 관한 정보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라크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트는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그 성배의 회수다. 그 회수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게 라크 너와···.”
칼트가 눈짓했다.
“당대의 성녀, 나티다. 너인 거지.”
“저도 말씀이십니까?”
“파손된 성배를 ‘온전히’ 회수할 수 있는 건 성녀 뿐일 테니까. 라크의 경우는 나도 잘은 모르지만···.”
칼트가 짧게 숨을 뱉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왠지 모르게 빛나는 검 있잖아? 죽음의 칼이 가진 것과 비슷한 검. 그 검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이유는 알 것 같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겠지만 말야.”
칼트가 쓰게 웃었다.
무언가 조건에 충족돼야만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있다는 걸 칼트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긴 했다. 그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더라도 재앙과 관련된 거겠지.
“본래 검의 성지는 죽음의 칼이 머무르는 곳이자, 가니칼트의 영역으로 여겨져 출입하는 것 자체에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게 됐다.”
칼트가 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죽음의 칼은 ‘게헤테’라는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고 선배님은 단언하셨어. 현재 갈라트릭에는 가니칼트가 존재하지 않아. 물론, 죽음이 남긴 흔적이 남아있긴 할 테지 만··· 재앙과 마주칠 일은 없다는 거지.”
그러니, 하고 칼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우리는 돌입 후 성배만을 탈환하고 도주한다.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으니 말야.”
“예, 알겠습니다.”
임무의 수행은 그럼 언제, 하고 라크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칼트는 짧게 답했다.
“내일 새벽.”
총지휘관이 자리를 오래 비워서 좋을 건 없다. 마왕군의 움직임이 위축된 지금, 빠르게 회수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칼트는 강조했다.
“그럼 전할 건 다 전한 것 같고···.”
내일 새벽까지 나는 눈 좀 붙이고 싶은데, 막사 좀 빌려줄 수 있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칼트가 무심코 입을 다물었다. 나티다의 얼굴을 본 탓이다.
“···걸리는 게 있나?”
새하얗게 질린 안색.
창백해 보이는 나티다의 낯빛에 칼트가 질문을 던졌고, 나티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 * *
“나는 실패자입니다.”
광전사, 라크 반 그레이스가 말했다.
그레이스 가(家)는 물론이고 모든 게 잿더미가 됐지만,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를 ‘라크 반 그레이스’라고 불렀다. 자신만큼은 그레이스여야 한다는 것처럼.
“그분께선 저를 도와주셨지만, 몇 번이고 저를 구해주셨지만··· 나는 그분의 곁에 서지 못했습니다.”
타닥, 하고 타오르는 모닥불.
모닥불에 잔가지를 집어넣으며 라크가 말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 저는 그분께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발목을 붙잡았죠. 그분께 선택을 강요해야만 했습니다.”
타오르는 나뭇가지.
잿더미가 된 땔감들.
“결국 그분께선 다른 쪽을 선택했고, 그것으로 내 고향은 불타 사라졌습니다. 단 한 명에 의해. 단 한 명의 검사에 의해··· 모든게 사라졌습니다.”
라크가 쓰게 웃었다.
“고향도, 전사도, 형제와 같던 이들도, 부모도, 제가 지켜야 할 것도. 나는 모두 잃었습니다.”
잃어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 중얼거린 광전사는 짧게 답했다.
“약했으니까.”
약해서 잃었다. 모든 것을.
“그렇게 모든 걸 잃은 지금, 내게는 지켜야 할 게 없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광전사로 불렸던 거고, 검귀(劍鬼)의 이름을 이어받은 겁니다.”
광전사, 라크 반 그레이스.
또 다른 이름은 복수에 미친 검귀(劍鬼).
“그런데 말입니다, 웃기는 일이지요.”
타오르는 모닥불.
제 맞은편에 앉은 여인을 라크는 바라봤다.
“당신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당신이 가진 특성을 이용해서, 당신을 상처입혀서 내 목적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분명 처음에는 그랬을 텐데···.”
성녀, 나티다.
교단에 의해 삶이 망가진 여인.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을 증오하고 있는 여인. 성유물에 의지하지 않고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중독자.
“어째서인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라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키고 싶어졌습니다, 오히려.”
“저를?”
“예. 우습게도.”
“미친 모양이네요. 저를 지켜서 뭘 얻는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얻을게 없을 텐데.
목적을 이루는 데 방해만 될 텐데.
그리 중얼거리던 라크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아무래도 당신이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나티다는 웃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다. 약에 절여진 중독자이며, 교단의 개처럼 부려지는 자신이다. 교단에서 주는 치료제 없이는 연명조차 할 수 없는 비루한 몸뚱어리.
이런 자신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단 걸까.
“저조차 제 가치를 모르겠는데요. 제게서 도대체 무슨 가치를 보셨길래···.”
“그런 게 꼭 필요합니까. 어차피 가치가 한없이 희박해진 세상인데. 그냥 당신한테 끌리는 겁니다.”
“참 대충인 고백이네요.”
“싫습니까?”
“싫을 리가. 얼굴만 뜯어먹고 살아도 십 년은 즐거울 것 같은데요.”
나티다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옮겼다. 라크의 맞은편이 아닌 라크의 곁에. 라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나티다가 말했다.
“내일이군요.”
“예.”
“꼭 해야 하는 걸까요?”
“당신이 상처 입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 말고, 당신 말이에요.”
“···괜찮을 겁니다.”
“안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도, 약속 하나 하지요.”
라크가 말했다.
“어떤 상황이 오던, 당신만큼은 지키겠습니다.”
그 말이 귓가에 메아리친 순간, 나티다는 눈을 떴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모닥불이 아니다. 익숙한 천장이다. 꿈에서 깨어난 나티다는 천천히 제 몸을 일으켰다.
“···후우.”
옷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나티다는 손을 뻗어 선반에 올려둔 연초를 집어들곤 불을 붙였다. 치익, 탁. 연초를 태우며 나티다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또 그 꿈이었다.
예지인지, 망상일지 모를 꿈.
끊어진 꿈의 다음을 나티다는 알고 있다.
꿈속의 라크는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돌아오지는 못했다. 투입된 작전에서 라크는 시간을 끌기 위한 버림 패로 소모됐고,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꿈속에서 나티다는 검의 협곡에 있었다.
검의 협곡에서 모닥불을 태우며, 라크와 함께 무언갈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검의 협곡을 지나가려는 어느 존재를 막아서는 것이었으니까.
꿈속에서 보았던 풍경과.
지금, 현실에서 맡은 임무인 ‘성배의 회수’가 나티다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뒤섞였다.
“···도대체가.”
나티다가 제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꿈속에서 본 것은 대체 무엇인가.
예지라기엔 현재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애초에 자신은 라크가 아닌 라니아에게 구해졌다. 꿈속처럼 망가지지도 않았으며, 라크의 가문 역시 멀쩡하다.
그렇다면 이건 망상인가?
하지만, 망상이라기엔 지나치리만치 선명한···.
“윽.”
나티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꿈의 마지막에서 보았던 것. 검의 협곡에 나타났던 알 수 없는 존재가 떠오른 까닭이다.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티다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형체는 떠올릴 수 없다.
떠올릴 수 있는 거라곤, 그 이름뿐이다.
꿈속에서 라크가 이를 갈며 불렀던 존재의 이름을 나티다는 입 밖으로 내뱉어 봤다.
“···역천.”
역천(逆天)의 검(劍).
존재를 라크는 그렇게 불렀다.
3.
“역천의 검··· 이라고?”
『예, 선배님.』
긴급 통신 회로를 경유해 도착한 칼트의 연락.
칼트는 말했다. 성녀, 나티다가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본 미래는 ‘역천의 검’에 의해 라크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었다고.
『그 자리에서는 모른 척했지만, 그 역천의 검이라면···.』
칼트는 알고 있다.
역천의 검을 마주했던 적이 있으니까.
『카일 토벤 님··· 아닙니까?』
라니엘은 침묵했다.
그것은 사라진 미래다. 카일은 역천의 검이 아닌 ‘용사’로서 기록됐으니까. 지금의 세상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미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아이가 미래를 봤다는 거지.”
나티다 본인은 그것이 예지인지, 망상인지 헷갈려 하는 것 같으나··· 라니엘은 알고 있다. 나티다가 본 것은 미래가 맞다.
‘그것이 설령 일어나질 않을 미래라 한들.’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티다가 예지를 했다는 것.
그리고, 꿈의 형태로 예지가 내려오는 건 지난 수백 년 동안 하나의 경우밖에 없었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
예지는 언제나 죽음을 가리켜왔으니.
“······.”
라니엘이 말없이 지도를 펼쳤다.
지도에 표기된 점에는 미동도 없다. 죽음의 칼은 여전히 게헤테에 머물러 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끝을 기다리고 있을 뿐, 움직일 리가 없다.
그 또한 계약의 일종이므로.
라니엘이 미간을 짚었다.
잠깐의 고민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늦은 밤, 라니엘 반 트리아스는 눈을 감았다.
떠올리는 것은 변곡점. 자신의 삶이, 가치관이 송두리째 뒤바꼈던 그날의 기억이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라니엘은 과거를 곱씹었다.
「안녕, 라니엘 반 트리아스.」
「난 미래에서 온 너야.」
3년 전 마주했던 미래의 자신.
그녀는 라니엘이 본래대로라면 맞이해야 할 미래를 경험한 인물이요, 당시의 라니엘과는 너무나도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라니엘 반 트리아스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국면에서 라니엘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버림 패에 넣었다.
수명을 걸었고, 몸을 혹사시켰으며, 무언갈 버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자기 자신의 삶을 버렸다.
그건 타인의 희생에 극도의 거부감을 느끼는 강박의 발현이요, 라니엘 반 트리아스의 고집일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서 왔던 자신은 어떻던가.
라니엘 반 드라고닉.
신이 되어버린 인간은 달랐다.
그녀는 모든 것을 버렸다.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다. 버림 패를 쓰는데 주저가 없었으며, 버려야 할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쥐고 있던 것을 놓아버렸다. 그녀는 오롯이 효율만을 추구했다.
「최선은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악만을 면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난 그렇게 살았어. 빈말로도 잘 살았다고는 말 못 해. 너무 많은 걸 버렸으니까.」
제자를, 동료를, 후배를, 그 모두를 버렸다.
「정말로, 다 버렸으니까.」
버리고 버린 끝에 도달한 결말. 그 결말이 무슨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버렸던 거였나.”
라니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칼트가 전해준 정보. 나티다는 꿈에서 라크가 죽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검의 협곡을 넘어가려는 역천의 검을 막아 세우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그것은 나티다의 망상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미래였을 테니까.
라니엘은 ‘재의 여신’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돌아보았다. 역천의 검, 카일 토벤. 그건 라니엘이 3년 전 상대했던 카일과는 다른 존재일 것이다. 그늘의 그릇으로서 완전히 각성한 마왕(魔王)과 같은 존재였을 테니.
그런 재앙이 다가오는 것을 단 1초라도 늦추기 위해, 더 많은 수를 준비하기 위해 미래의 자신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렸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이 아끼는 제자라 한들.
“······.”
라니엘이 말없이 눈가를 쓸어내렸다.
왜 이제 와서 나티다가 그런 미래를 보았는가. 성녀가 미래를 보았다는 것은,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죽음의 칼의 등장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단순히 우연 같지는 않았다.
검의 협곡이란 같은 무대.
나티다와 라크라는 같은 등장인물.
하지만, 그곳에 ‘역천의 검’이라는 인물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역천의 검을 대신한다는 뜻일까? 라니엘이 보기엔 그 또한 불가능했다.
‘가니칼트가 카일의 역할을 대신해?’
불가능하다. 결코.
죽음의 칼, 가니칼트는 ‘게헤테’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의 끝, 그늘의 신전으로 향하는 길목을 가로막은 채 자신을 찾아올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누구인가.
“마수의 왕, 바르타.”
라니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되살아난 고대의 재앙, 마수의 왕 바르타의 경우 계약에 직접적으로 묶여있지는 않으나··· 배교자와의 연결점 탓에 지도에 그 위치가 대략적으로나마 표기되곤 했다. 라니엘은 지도를 쫙 펼쳤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바르타를 가리키는 점.
그러나, 그 점은 여전히 마경의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검의 협곡 갈라트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검의 협곡에 바르타가 나타날 일은 없을 테지만···.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라니엘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아티팩트를 바라봤다. 레스티는 다음에 어떤 영구적인 부작용이 몸에 남을지 알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2.
「마수의 왕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알아둬. 솔직히 말해서 가능성이 낮긴 한데,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거니까.」
검의 협곡, 갈라트릭으로 향하는 길.
칼트는 외투의 주머니에 손을 푹 꽂아 넣은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정육면체의 형태를 띤 아티팩트다.
「가능성은 낮지만.」
「만약에 나타난다면, 알고 있지?」
게이트(Gate)라 이름 붙여진 아티팩트.
아티팩트를 손바닥 위에서 굴리던 칼트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 아티팩트의 부작용에 대해선 칼트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난번에는 반신 마비.’
이번에는 또 어떤 부작용을 견디시려고.
용사의 육체가 아무리 강인하고, 회복이 빠르다고 한들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칼트가 보기에 라니엘은 제 삶을 계속해서 가불하고 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잿빛 마법사 시절부터 줄곧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희생하느니 제 삶을 갈아버리는 인간.
되도록이면 이 아티팩트를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칼트는 걸음을 옮겼다. 라니엘이 이렇게까지 이 임무를 빠르게 처리하려는 이유까진 알 수 없었으나, 성배라는 걸 하루빨리 회수해야 할 이유가 있단 거겠지.
“라크, 경고는 들었지?”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더 굳은 표정.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라크를 보며 칼트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마수의 왕이 북부에서 수많은 전사를 죽였다고 하던가.
‘···원수로 여길 만도 하지.’
칼트가 짧게 숨을 내뱉으며, 라크의 목에 제 팔을 걸었다.
“미리 말하지만 나타날 확률은 드물다. 정말로 만에 하나, 아주 만약의 상황이니까. 그리고 그 상황이 오더라도 말이다, 라크.”
칼트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우리의 임무는 성배의 회수다. 마수의 왕의 토벌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 둘··· 아니.”
뒤따라 걷고 있는 나티다. 잠을 설쳤는지 눈동자가 퀭한 그녀를 흘겨보며 칼트가 덧붙였다.
“우리 셋으로는 불가능할 테니까. 선배님을 바로 불러서 이 자리를 이탈하는 게 고작일 거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판단은 언제나 냉철해야 하지.”
칼트가 툭툭 라크의 어깨를 두들기곤 앞장서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씩 서늘해지는 공기와 함께, 검의 협곡의 초입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의 협곡, 갈라트릭.
그러나 이젠 수많은 검사의 무덤이 되어버린, 검의 무덤 갈라트릭. 양옆으로 갈라지고 무너진 협곡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용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같이 보이기까지 하다.
“아, 그거 아냐? 라크.”
분위기 환기 겸, 긴장이나 풀어줄 생각으로 칼트가 협곡의 초입을 가리키며 말했다.
“검의 협곡, 저 거대한 협곡 말이다. 인위적으로 생긴 지형이란 이야기가 있더라? 검사들의 대 스승이자 검의 협곡에 처음 발을 디딘 시조께서 검을 한번 휘둘러 협곡을 갈라버렸다더라고.”
그리 말하면서도 칼트가 큭큭 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이만한 협곡을 칼 한번 휘둘러서 어떻게 가르냐? 불가능하지, 절대.”
“···그렇습니까?”
“그렇지. 말이 안되잖냐.”
칼트가 양팔을 쫙 벌려 협곡의 좌우 폭을 가늠하며 말을 이었다.
“저만한 크기를 칼질 한 번에? 불가능해. 그런 게 가능한 게 있다면 죽음의 칼, 가니칼트 정도나 되겠지.”
그렇지 않냐? 하고, 칼트가 라크를 돌아봤다.
칼트로서는 농담으로 던진 말이나, 라크는 굉장히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3.
검의 협곡에 들어온 이후, 나티다의 안색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날씨가 그리 춥지 않음에도 나티다는 계속해서 제 팔뚝을 문질렀다.
“···괜찮습니까?”
“네? 아, 네. 괜찮아요.”
곁에서 걷고 있던 라크가 걱정스러운 눈치로 나티다를 흘겨봤다. 그러나, 나티다는 라크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의 무덤, 갈라트릭.
부러진 수십, 수백 자루의 검이 이곳저곳에 어지러이 꽂혀 있었다. 저 검의 주인들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지 오래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그들이나, 그들은 죽음으로서 제 검(劍)을 남겼다.
검사에게 있어 반신과도 같은 것.
주인 잃은 칼들이 어지러이 꽂힌 이곳은 과연 검의 무덤이라 불릴만한 모습이었다.
“쿤텔 님이 생각나네. 쿤텔 님이 이곳의 마지막 생존자였으니까 말이야. 이야기로만 들었던 곳을 이렇게 와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검의 무덤을 둘러보며 칼트는 쓰게 웃었다.
쿤텔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제 고향에 대해, 스승에 대해, 동문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검의 무덤에 도착한 지금, 칼트는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고.
‘···시련에서 본 곳이다.’
라크는 성배의 시련 속에서 본 풍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티다는···.
「도망치십시오.」
「이곳은 나의 무대입니다.」
「말했지 않습니까, 당신만큼은 지키겠다고.」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었다.
나티다는 현실에서 걷고, 눈을 뜬 채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나 그 눈에 비추는 것은 꿈속의 풍경이다. 꿈속에서 라크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 이곳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검격에 휩쓸려 죽어나가는 기사들을, 나티다는 신성술을 이용해 현세에 붙들어 뒀다. 그들은 죽지 못하는 인형이 되어 역천의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 몸이 모조리 갈려 더는 일어설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리고, 라크 반 그레이스는.
기사들의 시쳇더미를 밟으며 역천의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라크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으나, 그건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시간은 끌었지만.’
라크가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제 몸을 잃어가며 역천의 검을 붙들어 두어도. 이곳에는 그 어떠한 지원도 오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버림 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무의미했다.
버티고 버텨냈으나, 결국 라크는 죽었다.
툭, 하고 떨어진 머리가 비탈길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그래, 지금 눈에 보이는 저 비탈길···.
“우욱!”
꿈에서 보았던 라크의 최후가 떠오른 순간 나티다는 무심코 제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짧은 헛구역질, 그리고 휘청거림.
꿈이라기엔, 환상이라기엔 지나치리만치 생생한 풍경이다. 비틀거리던 나티다의 어깨를 라크가 붙잡았다.
“···진짜 괜찮은 거 맞습니까?”
“아···.”
제 옆에 서 있는 라크를 바라보며 나티다가 쓰게 웃었다. 꿈에서 보았던 라크처럼 흉터가 많지도 않고, 사나워 보이지도 않는··· 오히려 조금 얼빵해 보이는 모습의 라크다.
“이젠 괜찮아요.”
나티다가 쓰게 웃으며 몸을 추슬렀다.
“후우.”
길게 심호흡 한 다음, 나티다가 라크에게 제 손바닥을 내밀었다. 라크가 눈을 깜빡이다가 ‘성검이라면 못 줍니다. 여기선 들고 있어야 해서’ 라고 답하는 순간 나티다가 인상을 팍 구겼다.
“성검 말고 손 달라고요. 손.”
“···제 손 말입니까?”
“예. 축복이라도 걸려고요.”
“아직 적은 안 보이는데.”
“잔말 말고 내놔요.”
라크가 떨떠름한 눈치로 손바닥을 얹었다.
나티다는 두 손으로 라크의 손을 붙잡은 채 신성술을 발했다. 빛이 번쩍이길 잠시, 라크의 몸에 축복이 스며들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이.
주륵.
나티다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이윽고 라크의 손을 놓은 다음, 나티다는 제 콧잔등을 옷깃으로 문질렀다.
“이제 가봐요. 저 비탈길 오를 때 조심하시구.”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크는 비탈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탈길의 중턱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칼트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떫어 보였지만, 라크는 거기까지 신경 쓰지는 않기로 했다.
무너진 협곡의 잔해가 쌓여 만들어진 비탈길.
이 비탈길을 넘으면 보이는 것은, 과거 갈라트릭의 중심이라 불렸던 곳이다. 검사들이 시련을 치르는 사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
탁.
비탈길의 정상에 오른 라크와 칼트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탁 트인 시야. 무너진 사원과 할퀴듯이 사방에 가득한 검흔(劍痕). 그리고···.
“잠깐.”
칼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을 쭉 뻗은 칼트가 검흔들이 모여드는 곳을 가리켰다. 폭풍처럼 사방을 할퀸 검흔이 시작된 곳. 그곳에 한 자루의 검(劍)이 꽂혀 있었다.
거대한 대검.
부러진 검만이 가득한 검의 무덤에서, 유일하게 부러지지 않은 한 자루의 검. 그 대검의 형상을 바라보던 칼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도신에 구멍이 뚫린, 기괴한 형태의 검.
그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이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의 검이 협곡의 중심에 꽂혀 있었다.
검의 협곡, 갈라트릭.
이제는 검의 성지라는 이름보다 ‘검의 무덤’이라는 멸칭으로 더 자주 불리는 장소. 이곳은 지난 수십 년 간 그 어떤 인간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인류는 감히 갈라트릭에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갈라트릭의 탈환은커녕, 갈라트릭의 방향으로 전선을 확장하는 것조차 미친 짓으로 여겨졌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검의 무덤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가장 두려운 재앙이, 실체를 가진 죽음이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죽음의 칼, 가니칼트.
검의 협곡이 무너지고 인류가 크게 후퇴한 그날 이후, 갈라트릭에는 언제나 그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장 두려운 재앙이 자리 잡은 갈라트릭에 다가서는 건 자살 행위로 여겨졌다. 거부할 수 없는 재앙인 죽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인류는 검의 무덤 일대를 ‘금역’으로 지정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다.’
칼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더는 이곳에 죽음의 칼은 없다. 그 두려운 재앙은 이곳이 아닌 마경의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선배님께선 단언하셨다.
「가니칼트는 그곳에 없어.」
「죽음의 칼은, 마경의 최극단에서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언가를 쉽사리 확신하는 법이 없는 선배님이 그렇게까지 단언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이곳에 가니칼트가 나타날 리는 없었다.
없어야 하는데.
“저거.”
그렇다면,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게 왜···.”
잔해들이 쌓여 만들어진 비탈길.
그 비탈길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칼트가 협곡의 중심을 가리켰다. 쿤텔이 들려주었던, 검 수행자들의 시련장소인 사원. 지금은 무너진 사원의 중심에 칼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거대한 대검.
구멍이 뚫린 도신.
저것은 재앙의 상징이다. 가니칼트의 상징인 죽음의 칼이 그곳에 꽂혀 있었다. 저 검을 잊어버릴 리가 없다. 칼트가 몸서리치는 가운데, 라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검에서 구정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뭐?”
“저 대검 말입니다.”
라크가 사원의 중심에 꽂힌 대검을 가리켰다.
“본래 뚫린 구멍에서 구정물이 흘러내리지 않습니까. 제가 가진 검에서 별빛이 흘러내리듯이···.”
라크가 허공을 움켜쥐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원의 중심에 꽂힌 대검과 정확하게 같은 형태를 가진 대검이다. 대검에 뚫린 구멍에선 백금색의 별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확실히···.”
칼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에 놓여있는 건 한 자루의 검뿐. 그 어디에서도 죽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잠깐의 시선 교환 후, 칼트와 라크는 비탈길을 타고 내려갔다.
촤아악.
미끄러지듯 비탈길을 내려간 둘은 자세를 다 잡은 채 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충분히 좁혔음에도 꽂혀있는 검에선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그러나 라크도, 칼트도 검을 향해 손을 뻗지는 않았다. 직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으니까. 저 검을 향해 손을 뻗으면 안 됨을 둘은 무의식중에 느꼈다.
휙.
칼트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자갈을 주워다 검을 향해 던졌다. 자갈이 꽂혀있는 대검에 닿은 순간···.
파삭.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노라면 대검에는 서늘한 검기가 서려 있었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갈아버리는 예리한 검기가.
“환장하겠군.”
칼트가 혀를 내둘렀다.
손에 쥐지도 않은 칼에 검기를 감아둔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한 존재가 둘씩이나 있을 리가 없었다.
“구정물이 흐르지 않다뿐이지 죽음의 칼이 맞는 것 같은데? 이게 왜 여기 있는진 모르겠지만···.”
“···손을 댈 수는 없어 보입니다.”
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의 말대로였다. 칼트가 가벼이 검을 휘둘러 보았으나 카아아아앙!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올 뿐이었다. 각을 잡고 두들긴다면 가능할지는 몰라도···.
‘···자극해서 좋을 것 없겠지.’
건드려선 안 된다고 칼트는 직감했다.
지면에 꽂힌 검을 경계하며 칼트가 라크에게 눈짓했다. 그 시선이 가리키는 곳은 사원의 잔해가 있는 곳.
“최대한 빠르게 성배 수색을 마친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성배를 회수하고 이곳에서 이탈한다.
주어진 임무를 칼트는 착각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라크가 나티다에게 손짓했다. 비탈길을 내려온 나티다와 함께 라크가 잔해더미를 뒤지는 가운데, 칼트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숨을 가다듬으며.
칼트가 들어 올린 칼날을 낮게 끌었다.
스릉, 하고 낮게 검명이 울렸다.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세운 감각.
재앙이 휘두르던 대검을 앞에 둔 채, 칼트는 왜인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불길함을 느낄만한 흔적이 있는 건 아니다. 초감각을 통해 엿보는 미래 역시 잠잠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칼트는 불길함을 느낀다.
이는 초인으로서의 감각이 아니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 살아온 병사로서의 직감. 그 직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무언가 일어나려 한다고.
칼트는 자신의 직감을 과신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여 가벼이 여기지도 않는다.
낮게 끌은 칼날에 검기가 피어올랐다.
예리하기 짝이 없는 검기. 틱, 티딕 하고 칼끝에 닿은 돌무더기들이 갈라지는 가운데 칼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세운 감각은 모든 정보를 받아들인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 공기의 떨림. 불어오는 바람의 결. 느낄 수 있는 모든 것.
그렇기에.
칼트는 반응할 수 있었다.
끼이이이이익, 하고 하늘 위에서 울부짖는 독수리를 닮은 마수의 울음을. 조금 전부터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검의 무덤의 하늘을 배회하던 그것의 움직임이 달라졌음을.
휙, 하고 칼트의 고개가 하늘을 향했다.
시선이 향하는 것은 높은 하늘을 비행하고 있는 마수다. 그 마수의 몸이 부글거리는 것이 시야에 잡힌 순간 칼트의 초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미래를 예측하기에 필요한 정보가 제공됐다. 정보를 바탕으로 한순간에 눈앞에 그려지는 몇 초 뒤의 미래를 칼트는 보았다.
망설임은 없다.
칼트가 곧장 검을 휘둘렀다.
완벽한 자세, 완벽한 호흡, 완벽한 일격.
쏘아진 검기가 하늘로 치솟는 가운데 하늘을 날던 마수의 아가리가 찢어지듯이 벌어졌다. 벌어진 아가리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마수의 덩치보다 거대한 팔.
끽, 끼기긱.
마수의 목구멍에서 뻗어나온 거대한 팔이 구부려졌다. 구부려진 팔은 자신이 튀어나온 마수의 아래턱을 붙잡았다. 마수의 몸이 더 부푼 가운데, 마수의 목구멍에서 다른 팔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한 손으론 아래턱을.
다른 한 손으론 위턱을.
이윽고 구부렸던 두 팔이 촥 펼쳐짐과 동시에 마수의 아가리가 찢어졌다. 투두둑, 소리를 내며 근육과 살이 찢어지며 마수의 몸이 갈라진다. 사방으로 핏물과 살점이 비산했다.
마수의 아가리를 찢어발기고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체구를 지닌 짐승. 어쩌면 인간.
콱.
땅 아래로 추락하며 짐승은 등 뒤에 짊어지고 있던 거대한 대검을 움켜쥔다. 검을 쥔 순간 그것은 더는 짐승이 아니다. 싯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것은 마수의 정점에 선 존재.
마수의 왕, 바르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마수의 왕이 검(劍)을 쥐었다.
지성 없는 존재로 태어나 초월의 영역에 오른 검사가 검(劍)을 움켜쥐었다. 검을 쥔 순간 바르타는 한낱 짐승이 아니다. 한 자루의 검으로 초월의 길에 오른 초인이자, 고고한 검사다.
땅아래로 추락하는 불안정한 자세라 한들, 코앞까지 검기가 밀려드는 상황이라 한들.
바르타의 자세에는 흔들림이 없다.
검의 초인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든 완벽한 검격을 자아내야 하는 법으로. 바르타의 안광이 시퍼렇게 일렁였다. 검을 쥔 여섯 개의 손가락이 삐걱거린다.
후웅!
등 뒤에 매어둔 검집이 콰작, 소리를 내며 박살 난다. 검집을 깨부수며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대검. 대검의 도신은 좀먹은 도포와도 같이 구멍이 뚫려있다.
스겅.
움켜쥔 대검을 바르타가 휘둘렀다.
공기의 흐름을 끌며 완전한 일선을 그리는 검격. 칼트가 쏘아낸 검기를 집어삼킨 검격은 지면에 맞닿으며 거대한 울림을 낳는다.
쿠우우우우웅!
피어오르는 흙먼지.
검격에 휘말린 돌무더기가 하늘로 튀어 올랐다. 튀어 오른 돌무더기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다시 추락할 무렵 쿠웅! 하는 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무언가 땅에 착지 울림.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수의 왕이다. 싯푸른 눈동자. 인간의 두세 배에 이르는 거대한 체구. 쥐고 있는 것은 거대한 대검.
“······.”
마수의 왕, 바르타가 인간을 응시한다.
이윽고 바르타의 아가리가 쩌억 벌어지며, 길게 숨을 토했다. 증기를 내뿜는듯한 소음이 한차례 지나간 후 들려오는 것은 인간의 언어다.
“인간.”
마수가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묻는다.”
다리를 구부리고 허리를 숙여, 칼트와 눈을 마주한 바르타가 제 손을 쭈욱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의 끝이 가리키는 것은 협곡의 중심에 박혀있는 한 자루의 검(劍)이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의 검.
“너는 그 검을 뽑을 수 있나?”
2.
“너는 그 검을 뽑을 수 있나?”
마수의 왕의 질문.
그 질문 앞에 칼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전에 배교자의 공방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다르다. 두른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차갑게 가라앉은 싯푸른 눈동자에서 칼트는 섬뜩함을 느꼈다.
칼트는 검을 고쳐 쥐며 입을 열었다.
당장은 시간을 끌어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건 왜 묻지?”
“나는 기다린다. 저 검의 주인을.”
바르타가 다시 말했다.
“그날의 재결전을, 나는 바라고 있다.”
재결전.
“그러므로 찾는다. 저 검을 뽑아 검의 주인을 이 자리에 불러낼 수 있는 존재를.”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칼트는 마수의 왕의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숨을 죽이고 있는 나티다와 라크가 있다. 나티다의 손에 쥐어진 아티팩트를 칼트는 흘겨 보았다.
흙먼지가 피어올랐을 때부터 나티다가 시동을 걸기 시작한 아티팩트. 그것은 충분한 준비가 됐다는 듯 엷게 떨리고 있었다.
전이문 발생장치, 게이트(Gate).
나티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티팩트를 바닥에 던졌다. 키이이잉! 하는, 공간이 열리는 소음에 마수의 왕의 고개가 돌아간 순간 칼트가 땅을 박차고 마수의 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달려든 것은 칼트뿐만이 아니다.
나티다의 곁에 서 있던 라크도 성검을 끌며 마수의 왕을 향해 질주했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서.
그 순간이다.
바람이 불어왔다. 썩은 내를 간직한 바람이, 죽음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칼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지독한 바람을 칼트는 알고 있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가 끌고 오는 바람.
그러나 이 자리에 죽음의 칼은 없다.
그 바람을 일으킨 것은, 죽음이 아닌 마수의 왕이다. 마수의 왕을 향해 달려들던 칼트는 보았다. 마수의 왕의 안광이 시퍼렇게 점멸하는 것을.
한순간이지만, 칼트는 바르타의 움직임을 놓쳤다.
스겅.
이윽고 울려 퍼진 것은 고요한 절삭음.
한줄기의 검격이 할퀸 것은 라크도, 칼트도 아니다. 그들의 너머에 있는 존재. 칼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표정을 바라본 라크가 뒤를 돌아봤다.
“아.”
게이트와 함께 나티다의 몸에 비스듬히 일선이 그어졌다. 직후, 검붉은 핏물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