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03
갈라할이 빌려주는 것은 오직 성창뿐이다. 다른 용사들과 달리 갈라할은 자신이 가졌던 긍지도, 정신력도, 기술도, 그 어느 것도 빌려주지 않는다.
데스텔이 그렇게 바라고 있기에.
갈라할이 그것이 옳다고 믿기에.
갈라할은 자신이 마지막에 손에 넣은 답을, 마지막에 손에 쥐었던 광채를 데스텔에게 빌려주었을 뿐이다. 힘은 빌려줄 터이나, 그 답은 스스로 찾으라는 듯이.
“하여간.”
이런 면에서는 엄격한 갈라할다운 선택이다.
여전한 놈이야, 하고 중얼거리며 데스텔은 웃었다. 손에 쥐고 있는 성창의 무게를 오롯이 느낄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하고 데스텔은 생각했다.
————————!
제 속도를 찾은 시간 속.
거신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데스텔에게 달려들었다. 땅에서, 하늘에서, 거신들의 틈새로 뿌리가 뻗쳐왔다. 자신을 덮쳐오는 수많고 수많은 것들.
그것들에서 데스텔은 잠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의 망설임. 망설인 끝에 내뱉은 것은 언젠가 입에 담아보고 싶었던 대사다. 데스텔이 웃으며 말했다.
“먼저 간다.”
데스텔이 앞을 바라보며 한 걸음 내디뎠다.
“따라와라.”
탁, 하고 데스텔이 땅을 박찼다.
두려움을 짊어지고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 밀려드는 거신들을 향해 창날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3.
땅을 박차며 데스텔이 창대와 함께 몸을 빙글, 반 회전했다. 창끝이 땅을 스치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후웅, 하고 창대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쩌억!
창대로 지면을 후려치며 데스텔은 도약했다.
방금까지 자신이 서 있던 위치를 내려찍는 거신들의 발과 뿌리를 바라보며, 데스텔이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몸에 힘이 넘친다. 몸이 가볍다.
‘···카일, 그 자식이 평소에 이런 느낌이었구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한 명의 인간이 제 모든 삶을 바쳐 손에 넣은 힘이다. 그 힘을 잠시나마 빌려 온 데스텔은 공중에 뜬 채 길게 숨을 삼켰다.
그리곤, 콱.
두손으로 쥐고 있던 성창을 한 손으로.
앞을 향하고 있던 손을 등 뒤로. 데스텔이 삼켰던 숨을 내뱉었다. 내뱉으며 팔을 휘둘렀다.
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투창(投槍).
한줄기의 섬광이 선두에 선 거신의 심장을 관통한다. 거신의 뒤에서 다가오던 뿌리를, 거신보다 작은 신들을 단숨에 꿰뚫었다. 그렇게 콱, 하고 땅에 처박힌 창날을 바라보며 데스텔이 몸을 비틀었다.
후웅.
거신이 내지른 주먹을 회피하며 데스텔이 거신의 팔에 발을 내디뎠다. 신의 팔에 올라탄 채 데스텔이 달리기 시작한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치이익, 하고 거신의 팔에 발자국이 찍혔다.
별빛을 끌며 데스텔은 질주한다.
질주하는 데스텔은 거신들의 움직임보다, 뻗어오는 뿌리보다 빠르다. 데스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공격들이 허공을 꿰뚫는 가운데, 데스텔은 자신이 뚫어버린 거신의 몸통을 지나쳐 땅에 착지했다.
콱, 하고 땅에 박혀있던 창을 뽑아듦과 동시에 데스텔이 발을 내려찍었다.
···갈라할은 데스텔에게 어느 기술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데스텔은 창(槍)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다. 그가 여태껏 모방해온 용사 중에는 창을 다루는 이가 분명히 있었으며, 그들의 기술을 데스텔은 알고 있다.
떠올리는 용사는 가뉘르.
구원(求援)의 가뉘르.
그가 지녔던 무구와, 갈라할의 성창은 몹시도 닮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같은 기술을 펼치기에 적합하리라.
‘가뉘르, 가뉘르의 기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를 살리기 위해, 가뉘르는 수많은 적을 상대하는 창술을 구사했다. 넓은 범위를 휩쓰는 기술을 주로 사용했다. 그가 쌓아올린 창술을, 기억의 한구석에 남아있는 기술을 데스텔은 불러온다.
제 1 격, 선(旋).
성의의 도움 없이 데스텔은 기술을 모방한다. 오직 자신의 기억과 육체 능력에 의지해, 수백 년 전 어느 용사의 기술을 재현해낸다.
후웅!
큰 궤적을 그리며 수평으로 휘둘러진 창날이 별빛을 흩뿌렸다. 본래, 구원의 가뉘르가 펼쳤던 선(旋)은 마왕군의 잡졸을 쓸어버리는 데 그쳤으나··· 지금 데스텔이 재현해낸 기술은 거신들의 다리와 옛 재앙의 뿌리마저 휩쓸어버린다.
촤아아아아아악!
창날이 그린 것은 원의 궤적.
창날에, 창날에서 뻗어 나가는 별빛에 닿은 거신들의 다리가 찢어졌다. 부러졌다. 비명을 지르며 자세가 무너지는 거신들을 바라보며 데스텔은 휘두른 창대를 콱, 하고 움켜쥐었다.
제 2 격, 인(引).
휘둘렀던 창날을 당기며 비스듬히 쳐올린다.
제 1 격에서 뻗어 나갔던 풍압이, 창날을 따라 데스텔의 쪽으로 다시 밀려든다. 밀려드는 바람에 거신들이 끌려온다.
제 3 격, 참(斬).
끌려온 거신들을 향해 데스텔이 창대를 내려쳤다. 반월을 그리며 휘둘러진 창날. 밀려들던 바람이 다시 거신들을 향해 쇄도했다. 비스듬히 뻗어 나가는 참격이 거신을 집어삼킨다.
서걱.
가장 거대한 신이 양단되어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가운데, 데스텔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빙글, 창대를 한 바퀴 돌리며 핏물을 털어냈다.
쿠웅, 창대로 땅을 내려찍으며 데스텔은 웃었다.
이제는 데스텔이 거신을 향해 뛰어들었다. 데스텔은 더는 망설이지 않는다. 앞만을 보고 달려가게 된 지금, 데스텔은 어느 때보다 몸이 부드럽게 움직임을 느꼈다. 이것이 마냥 빌려 온 힘 때문만은 아니리라.
···짊어진 짐 때문에, 망설임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온몸에 힘을 주고 있던 데스텔이다. 그것을 떨쳐내고 나아가는 지금, 데스텔은 자신이 가진 것을 온전히 펼쳐낼 수 있었다.
‘떠올려라, 그 녀석의 움직임을.’
갈라할의 창을 쥔 채, 갈라할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데스텔은 창대로 땅을 내려찍으며 반동으로 도약했다. 녀석은 참 빨리도 달렸더랬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전장에 도착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렇게.
이제 데스텔의 눈에 비추는 거신들은 더는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다. 박차고 달릴 수 있는 발판이요, 데스텔이 나아갈 길이다.
콱, 촤아아아아아아아악!
자세가 무너진 거신의 몸에 올라탄 데스텔이, 창을 거신의 몸에 박아넣은 채 질주했다. 거신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나, 데스텔은 멈추지 않는다. 데스텔이 나아간 길을 따라 핏물이 길게 튀었다.
탁.
거신의 피로 피칠갑을 한 데스텔이 땅에 발을 내디뎠다. 데스텔이 창날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며, 천천히 창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창날이 자신들을 향함을 보고 거신들이 주춤, 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제, 잊힌 신들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여겼던 인간이, 지금은 자신들의 목덜미를 물어 뜯고 있다. 그리 거신들은 물러서나··· 그들의 너머에 있던 거목(巨木)은 아니다.
【■■, ■■■■■■, ■■■■■■!】
아바돈의 뿌리가 거신들을 꿰뚫었다.
꿰뚫린 거신들이 바싹 말라 허물어지는 가운데, 신들의 피를 삼킨 아바돈이 서서히 형태를 바꾸기 시작한다. 눈앞의 인간을 집어삼키기 위한 형태로.
거목의 뿌리가 거목에 휘감겼다.
소용돌이치듯 휘감긴 거목은, 마치 갑각룡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이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땅을 헤집으며 데스텔을 향해 질주했다.
카가가가가가각!
갑각룡보다 몇 배는 거대한 체구.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재앙을 바라보며 데스텔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이 낯설지가 않다. 정말이지. 데스텔이 길게 숨을 뱉으며 자세를 잡았다.
···그때는, 라테나일 수호전에선 도망쳤지만.
지금은 도망치지 않으리라.
더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다가오는 거대한 재앙을 바라보며 데스텔은 창대를 움켜쥐었다. 쿠웅, 하고 발을 내려찍고 창대를 등뒤로 당겼다.
“와라.”
이번에는, 굴하지 않으리라.
밀려드는 것은 고대의 재앙.
땅을, 거신의 시체를, 제 앞에 놓인 모든 것을 갈아 마시며 질주해오는 수해(樹海)는 갑각룡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데스텔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웃지 못할 농담이었으므로.
쿵.
땅을 내려찍고 창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과거 자신이 도망쳤던 전장이다. 총지휘자였음에도 명령을 내리지도, 선택을 내리지도 못했던 비굴한 겁쟁이였던 자신이다.
‘하지만.’
데스텔이 눈을 부릅떴다.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바라보는 것은 정면. 자신이 마주해야 할 것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데스텔은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언제까지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성창(星槍).
가장 용사다운 용사가 쥐었던 무기.
“그럴 수는 없지.”
빌려온 것은 갈라할이 최후의 순간 품었던 광휘.
고뇌하며 살아온 끝에 답을 손에 넣은 인간의 삶.
‘이만한 것을 빌려 오고도···.’
과연, 그때처럼 꼴사납게 도망칠 수는 없는 법이다. 두려움을 짊어진 채 인간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손에 움켜쥔 성창은 더욱 찬란히 빛난다. 마치, 새로운 주인의 의지에 반응하듯이.
탁.
데스텔이 땅을 박찼다.
찰박, 하고 바닥에 고인 신들의 핏물이 튀어 올랐다. 튀어 오른 핏물이 땅에 추락할 적, 신들의 핏물은 들끓고 있다. 별빛의 열기 아래 부정한 것들이 타들어 간다.
빙글, 그리고 콱.
한 바퀴 돌린 창대를 강하게 움켜쥔 데스텔은 다가오는 거목의 아가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제 내부로 별빛이 들어옴을 깨달은 거목은 곧장 입을 다문다. 찬란히 빛나는 광채가 재앙에 삼켜지기를 잠시···.
번쩍.
섬광과 함께 얽히고설킨 뿌리의 틈새 사이로 빛이 새어나왔다.
2.
거목이 벌린 아가리 속으로 뛰어든 순간, 데스텔이 마주한 것은 수백, 수천 갈래로 뻗어오는 뿌리다. 거목의 내부에는 갑각룡의 내부처럼 약점이라 할 것도, 장기와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알고 있었다.
거목 아바돈은 갑각룡의 형태를 빌렸을 뿐, 딱히 갑각룡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을 테니까. 데스텔은 밀려드는 뿌리를 향해 창을 휘두르고, 출렁이는 땅을 박차며 거목의 내부를 질주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구태여 내부로 들어온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데스텔은 밀려드는 수천 갈래의 뿌리의 너머를 보았다. 그곳에는 거목의 핵이 있다. 마치 심장처럼 두근거리고 있는 저것이야말로 이 거대한 재앙의 본질이다. 저것을 꿰뚫으면 중심을 잃은 거목은 무너지리라.
끽, 끼기기기기기긱.
그런 데스텔의 목적을 거목도 읽었다는 듯,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데스텔이 내디디고 있는 땅이 출렁였다. 이곳은 거목의 내부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거묵의 줄기이자 뿌리다.
땅에서, 옆에서, 하늘에서, 그리하여 사방에서 날카로운 뿌리들이 뻗쳐왔다. 발을 내디딜 틈조차 없이 뻗어오는 수천 갈래의 뿌리.
쐐에에에에엑!
시야의 사각에서 뻗어나온 뿌리에, 창을 휘둘러 모두 쳐내지 못한 뿌리에 꿰뚫린 데스텔은 피를 흘렸다. 그러나 데스텔의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눈을 부릅뜬 채 데스텔은 질주했다.
···버텨라. 견뎌내라.
이를 악물고 내달리는 데스텔이 보고 있는 것은 거목의 중심이나, 동시에 누군가의 삶이기도 하다. 성의로 보았던 갈라할의 삶을 데스텔은 떠올린다.
요약되고, 간추려지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된 삶.
성의가 보여주는 타인의 삶이 으레 그렇듯, 갈라할의 삶 또한 그렇게 떠오를 뿐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선명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갈라할이 마지막으로 섰던 전장의 모습이다.
밀려드는 배교자의 군세.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재앙의 파도.
그 파도 앞에 갈라할은 몇 번이고 피를 토했다. 몇 번이고 꿰뚫렸으며, 몇 번이고 내던져졌다. 갑각룡에게 물어뜯기면서도 녀석은 나아갔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데스텔은 이를 악물고 성창을 휘둘렀다.
···녀석처럼. 가장 용사다웠던 녀석처럼.
머릿속으로 갈라할의 움직임을 그리며, 언젠가 보았던 녀석의 싸움을 떠올리며 데스텔은 나아간다. 창을 휘두르고 찌르고 쳐올린다. 자신이 모방해왔던 용사들의 기술과, 멀리서 봐왔던 갈라할의 기술을 재현한다.
그 재현의 모두가 완벽하진 않다.
성의의 힘을 빌릴 수 없는 지금, 데스텔의 기술은 반푼이짜리 모방에 불과하다. 육체 능력과 별빛에 의존했을 뿐인 기술. 조잡하고, 어설프지만 그럼에도 데스텔은 앞으로 나아간다.
푸욱.
뿌리가 연신 몸을 꿰뚫고, 핏물이 솟구쳤다.
신음을 흘리며 한순간 주춤이지만 데스텔은 다시 앞으로 걷는다. 결코 굴하지는 않는다. 밀려드는 뿌리를 후려치고, 때로는 발로 내려찍어 짓밟으며 앞을 향해 달리고 달린다.
촤아아아아아아악!
···타인의 기술을 모방하고, 타인을 흉내 내며 쌓아온 경험. 그 경험을 더듬으며 데스텔은 창을 휘둘렀다. 갈라할처럼 창을 휘두르고, 갈라할처럼 피를 토하며 앞으로 향한다.
점차 중심이 가까워진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그곳에 핵이 있다. 그 사실에 조급해진 것일까. 아니면 거목의 저항이 더욱 거세진 것일까.
쐐에에에엑!
뻗어온 뿌리가 데스텔의 손목을 관통했다.
팔을 휘둘러 뿌리를 끊어내지만, 손에 힘이 빠진 나머지 성창을 놓쳐버리고 만다. 밀려드는 뿌리에 후려쳐져 하늘로 치솟은 성창을 데스텔은 바라본다.
놓아버린 창.
허공에 맴도는 창.
데스텔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놓아버렸던 창을 다시 움켜쥔 채 낙하한다. 뿌리들에 꿰뚫리면서도 데스텔은 기어코 거목의 중심에 도달한다.
푸욱.
기어코, 핵의 중심에 성창을 꽂아넣었다.
짧게 점멸하는 성창과 함께 별빛이 세차게 터져 나왔다. 터져 나오는 별빛이 거목의 핵을 불태운다. 밀려들던 뿌리가 모조리 타들어 갔다.
번쩍, 하고 별빛이 범람했다.
핵을 잃은 거목이 바스러진다. 얽히고설켜 있던 뿌리들이 잿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흩날리는 잿가루 사이로 데스텔이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커흑, 허억···.”
숨을 토해낸 순간 상처에서 피가 미친 듯이 흘러나왔다. 꿰뚫리고, 찢어지고, 벌어진 상처. 시야에 튀어 오르는 불똥 사이로 데스텔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목, 아바돈은 쓰러졌다.
바스라지는 잿가루 사이로 시야가 탁 트였다.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신전의 중심으로 향하는 통로일 것이라고, 이제 자신의 역할은 끝났으리라 생각한 데스텔이나··· 그것은 데스텔의 희망에 불과하다.
“···하.”
데스텔이 쓰게 웃었다.
여전히, 길은 가로막혀있다. 수많고 수많은 거신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길을 열어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질린다, 질려.”
당장에라도 쓰러질 거 같은 몸을 성창에 기댄 채 데스텔은 길게 숨을 뱉었다. 여기서 주저앉아 버리고 싶지만, 데스텔은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끝나지 않았음을 짐작한다.
“······.”
데스텔이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자신을 뒤따라오는 클로에와 벨노아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저 아이들을 신전의 중심까지 보내는 것이다. 멋들어지게 ‘따라와라’ 라고 말해놓고선 뒤처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 쪽팔려서 어떻게 살아.’
아니, 이제 팔릴 쪽도 없겠지만.
그야 어찌 됐든 간에.
“후우···.”
길게 숨을 뱉으며, 떨리는 손으로 데스텔이 창을 움켜쥐었다. 땅에 꽂아넣은 성창을 뽑아들고 되는 데까지 해보겠단 생각으로 그가 움직이려던 순간이다.
쿠구구구궁.
땅이 뒤흔들렸다.
설마 또 새로운 적이 나타나는 건가, 지치지도 않고?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든 데스텔이지만··· 이 울림을 수상하게 여기는 것은 데스텔뿐만이 아니었다.
거신들 또한 뒤를 돌아보고 있다.
이 땅을 뒤흔드는 울림은 신전의 중심과, 거신들의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 울림이 잠시 잦아든 순간이다. 전장의 전체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나가 실린 목소리.
전이문(Gate).
땅과 하늘 사이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문에 새겨진 문양을 본 순간 데스텔은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역할은 끝난 것 같았으므로. 데스텔이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말야.”
클로에를 바라보며 데스텔이 피식 웃었다.
“친구 참 잘 뒀네.”
문에 새겨진 것은 잿빛 마탑의 문양.
과거의 잿빛 마법사가 그러했듯, 저 문양은 이젠 잿빛 마탑을 상징하지 않는다. 잿빛 마탑을 휘어잡은 어느 여인을 가리키는 문양이 된 지 오래다.
···전장에서, 저 문양을 본 마왕군들은 이렇게 외치곤 했다. 경의를 담아서, 공포에 떨면서.
“잿빛 마녀.”
잿빛 마녀, 레스티 엘레노아.
전장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방(Open).
주인의 부름에 문이 열린다.
극의에 도달한 소환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둔 보물고이자··· 병기고의 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의 너머에 보이는 것은 끝없는 어둠.
또각.
어둠의 아래 선 잿빛 마녀가 거신들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또각, 하는 걸음 소리. 마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연보랏빛의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나부끼는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것은, 거신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가 지녔던 눈동자.
와쳐(Watcher)가 거신들을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거신들을 가리키며 그녀가 외쳤다. 대상 지정, 이라고. 그 순간 하늘 위에 열린 문에서 어둠이 크게 출렁였다.
“전량 소환(Summon-All).”
어둠이 찢어진다.
찢어지는 어둠 사이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갑각룡의 모습이다. 아니, 갑각룡이 아니다. 저것이 표피에 두른 것은 갑각이 아닌··· 마탑을 짓는 데 사용되는 것과 같은 재질의 광석이다.
수많고 수많은 회로가 새겨진 광석을 두른 지룡(地龍)이 열린 문의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미 사역마가 아니다. 차라리, 한 채의 마탑과도 같다.
잿빛 마녀가 만들어낸 걸작, 마골룡(魔骨龍).
마탑을 두른 용이 포효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걸작의 뒤를 잇듯, 게이트의 틈새에서 그녀의 군세가 쏟아져 나왔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군세, 출렁이며 거신들을 물어뜯고 꿰뚫는 마골룡의 앞에 거신들은 더는 데스텔을 노리지 못한다.
서서히,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것에 쐐기를 꽂아 넣은 것은 하늘 위로 치솟은 세찬 검기다. 터져 나온 검기가 길을 가로막은 거신을 양단했다. 쏟아지는 핏물 사이로 날뛰는 것은, 격멸(擊滅)이란 칭호를 가진 초인이다.
“···하여간.”
격멸, 라크 반 그레이스.
성녀, 나티다.
잿빛 마녀, 레스티 엘레노아.
지원군의 등장 아래 데스텔은 웃음을 흘렸다.
이걸로 자신의 역할은 끝이다. 하지만, 아직 자신에겐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데스텔은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성창을 바라봤다.
···별빛이 세차게 점멸하고 있는 성창.
얼마 안 가 이 성창은 자신의 손을 떠나겠지만, 아직 일격을 먹일 만큼의 시간은 남아있다. 성창에서 새어나오는 별빛을 보며 데스텔은 짧게 숨을 뱉었다.
갈라할이 지녔던 별빛은 집속(集束).
성창을 휘두를 때마다 별빛을 축적하고, 축적된 별빛을 한 번에 터뜨릴 수 있는 별의 특성. 이것을 가리켜, 녀석은 자신보다 강한 적에게 일격을 먹일 수 있는··· 그야말로 영웅의 일격을 가능케 하는 별빛이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영웅, 영웅의 일격···.’
피식 웃은 데스텔이 빙글, 하고 성창을 한 바퀴 돌렸다. 한 바퀴 돌린 성창에서 별무리가 흐드러졌다. 흐드러진 별무리를 끌며 데스텔이 쿠웅, 하고 오른발을 내려찍었다. 왼발을 뒤로 쭉 빼 단단히 고정했다.
길게 숨을 삼키며 팔을 뒤로 젖힌다.
성창을 쥔 손가락이 뿌득, 뿌드득 소리를 냈다. 피부 위로 핏줄이 돋아난다. 힘을 준 나머지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쏫아지는 가운데, 데스텔은 서서히 열리는 길의 너머를 보았다.
그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배교자를 보았다.
「네가 가진 그 힘은 저주란다.」
재앙과 시선을 마주한다.
「겁쟁이에게, 영웅이 되지 못하는 아이에게, 빛나지 못하는 아이에겐 아주 끔찍한 저주이지.」
마주한 순간 떠오르는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속삭였던 예언이다. 그녀의 예언을 곱씹으며 데스텔은 입가를 틀어 올렸다.
「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망칠 거란다.」
「그리고, 증오하겠지.」
「너희가 축복이라고 부르는 이 저주를.」
그래, 증오했었다.
도망치고, 또 도망쳤었다.
비굴해지고, 숨고, 선택을 회피하고, 외면하며 살아남는 일만을 생각했다. 그렇게 겁쟁이로 살았다.
“하지만.”
데스텔이 웃었다.
“지금은 네 앞에 서 있군.”
도망치지 않고 말야.
그녀의 예언을 정면에서 부정하기 위해서, 데스텔은 이 자리에서 영웅이 되고자 한다.
···카일 토벤이 말하는 영웅이란 반드시 승리하는 완벽한 존재이다. 갈라할이 말하는 영웅은 모두를 구해내며 희망의 상징이 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데스텔은.
가장 현실적인 용사가 말하는 영웅은 무엇인가?
“쐐기.”
뒤흔들리는 전장에서 쐐기가 되는 존재.
승리로 이어질 쐐기를 꽂아넣는 존재.
그러니까, 누구도 상상치 못한 변수를 만들어내는 이를 데스텔은 영웅이라고 생각해 왔다. 자신이 그런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지금이다.
지금이, 그런 존재가 될 시간이었다.
데스텔이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팔을 휘둘렀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며.
투창(投槍).
가장 현실적인 용사가, 가장 이상적인 용사의 힘을 빌려 영웅의 일격을 자아낸다. 빛의 쐐기가 배교자를 향해 쏘아졌다.
백금색의 별무리를 끌며 성창이 쏘아졌다.
전장을 가로지르는 성창이 끄는 빛 무리는 마치 사람이 달려가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창을 쥐고 언제나 앞으로 달려갔던··· 모두의 앞에 섰던 어느 용사를 닮은 별빛이 전장을 질주한다.
‘아, 젠장···.’
투창을 마친 데스텔은 제 시야가 흐릿해짐을 느꼈다. 몸이 차갑게 식음을 느꼈다. 과다출혈. 꿰뚫리고 헤집어진 상처에서 피가 미친 듯이 새어나왔다. 투창을 마지막으로 갈라할의 별빛은 데스텔의 몸을 떠났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자신이 쏘아낸 창이 만들어낼 결과는 지켜보고자, 데스텔은 눈을 깜빡였다.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바라봤다. 그렇게 눈을 연신 깜빡이던 데스텔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느리다. 너무나도.
세상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느리게 흘러가다 못해 아예 멈춰 섰다. 정지한 시간 속에서 데스텔은 눈앞에 무언가 흩날림을 보았다.
···잿가루?
눈앞에 흩날리는 것은 잿가루다.
잿빛 마법사, 라니엘의 상징과도 같은 것. 하지만 녀석이 흩뿌리는 잿가루와는 무언가 달랐다. 라니엘의 잿가루가 불씨를 기다리는 장작과 같은 느낌이라면···.
이건, 더는 타오르지 못할 잿가루다.
가진 것을 모두 소진해버린 나머지, 더는 미련을 갖지 않는···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는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하는 잿가루.
사락.
정지한 시간 속에서 오직 잿가루만이 움직였다.
눈처럼 흩날리는 잿가루가 데스텔의 몸에 닿은 순간이다. 분명 앞을 바라보고 있을 데스텔의 눈동자는, 이제 아주 먼 곳을 비추고 있었다.
사방에 가득하던 거신들도.
점점 기울기 시작하던 전장도.
저 너머에서 싸우고 있을 라니엘도.
그 모두가 다른 풍경에 덧씌워졌다.
데스텔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검게 물든 땅이다. 더는 생명이 살지 못하게 된 황폐해진 땅. 그 땅은 지평선의 너머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마치 멸망한 세계의 풍경 같다고, 데스텔은 문득 생각했다.
깜빡.
데스텔은 이젠 선명해진 시야로 앞을 보았다.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우연하게도 그는 백금색의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이 눈에 익었다. 피로 물들고 더럽혀져 형태를 알아보긴 힘들었으나, 아마도 저건······.
찰박.
들려온 소리에 데스텔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 아래로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핏물은 저 너머에 서 있는 남자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어진 핏물을 따라 데스텔은 시선을 옮겼다.
「어째서.」
「어째서, 도와주지 않았어요?」
「왜 도망쳤어요? 왜?」
「용사라면서요. 당신도, 가장 강한 용사라는 그 사람도, 전부, 전부······.」
핏물에서 들려오는 것은 목소리.
울부짖는듯한 목소리와 함께, 황폐해진 땅 위로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벨노아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울부짖는 소녀가 있었다. 제 살갗을 손톱으로 긁으며 비명을 지르는 클로에가, 그곳에 있었다.
「왜. 왜, 왜······.」
핏물은 계속해서 흐른다.
흘러나간 핏물에서 들려오는 것은 비난, 원망, 조롱, 이어지고 이어지던 핏물에선 어느샌가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됐다.
“······.”
핏물의 끝에 서 있는 남자.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서, 데스텔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얼굴이 자신과는 다르지만··· 짓고 있는 표정도 너무나 다르지만, 데스텔은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미래의 자신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가 데스텔을 바라보았다. 피에 젖은 옷을 입은 채, 핏물의 위에 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아.」
신음하며 그가 미소 지었다.
엷은 웃음.
그 웃음이 사라지기 직전, 그가 질문했다.
「이번엔 후회 안 하냐?」
데스텔이 무언가 답하려는 순간, 먼 곳에 서 있는 그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다행이네.」
마치 대답을 들었다는 것처럼.
그 순간 파챵, 하고 풍경이 무너졌다. 풍경을 무너트린 것은 데스텔이 던졌던 백금색의 성창이다. 멈춰 섰던 시곗바늘이 움직이듯, 멸망한 세상의 풍경을 박살 내며 성창은 앞으로 나아갔다.
검을 휘두르는 라크를 지나쳐서.
소환수들을 지휘하는 레스티를 지나쳐서, 앞으로, 다시 앞으로. 머나먼 미래의 누군가 닿지 못했던 풍경을 향해 성창은 나아간다.
쐐에에에에에에엑!
거신들을 꿰뚫고, 전장을 가로질러 나아간 빛의 창은 기어코 배교자에게 도달했다. 창을 향해 그녀가 손을 뻗었지만, 창은 그녀가 뻗은 손을 관통해 심장에 가 닿았다. 일찍이, 어느 용사가 창을 찔러넣은 그곳에.
창날의 끝이 재앙의 심장에 틀어박힌 순간이다.
번쩍, 하고 창에 축적됐던 별빛이 모조리 해방됐다. 범람하는 별빛이 배교자를 집어삼킨다. 한순간이지만 세상이 별빛으로 물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울려 퍼지는 굉음.
하늘로 치솟았던 검은 십자가가 흔들리고, 점차 거대해지던 하늘에 뚫린 구멍이 확장을 멈췄다. 배교자의 명령을 따르던 거신들도 일제히 멈춰 섰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틈.
그리하여 열린 길.
자신이 던진 창이 만들어낸 길을 바라보며, 조금 전 자신이 보았던 알 수 없는 풍경을 떠올리며··· 데스텔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피를 흘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후배들.
그 두 사람을 바라보며 데스텔이 웃었다.
“가봐라.”
손을 뻗어 배교자를 가리키며 데스텔이 말했다.
“너희의 무대로.”
고개를 끄덕인 클로에와 벨노아가 신전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는 가운데, 데스텔이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자리에 주저앉은 채 곱씹는 건··· 미래의 자신이 제게 던진 의문이다.
후회하지 않냐, 라고 그는 질문했다.
그 질문에 답하듯 데스텔은 중얼거렸다.
“안 해. 후회.”
자신이 열어낸 길을 따라 달리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데스텔은 웃었다. 어느 때보다 만족스레 웃었다.
2.
배교자,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는 자신에게 쏘아진 창을 바라보았다. 일직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성창(星槍). 그 창은 이미 주인의 손을 떠나 투창된 무기이나······.
배교자의 눈에는,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
밀려드는 별빛에서 배교자는 보았다.
성창을 쥔 채, 피를 흘리며 자신에게 돌진해 오는 용사의 모습을 보았다. 그가 피워낸 광채를 보았다. 다시는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한 그 광채에 홀린 지금 이 순간, 배교자의 대처는 늦어지고 만다.
뒤늦게 손을 뻗어보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쐐에에에에에에엑!
밀려든 성창이 배교자의 손을 관통했다.
손등을 꿰뚫고 더 나아가, 배교자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제 심장을 꿰뚫은 채 세차게 점멸하는 성창을 바라보며 그녀는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번쩍, 하는 섬광.
뒤이어 울려 퍼지는 것은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
집속된 별빛이 모조리 해방되며 배교자의 몸을 뒤흔들었다. 심장에 꽂힌 채 터져 나오는 별빛이 배교자의 망막을 불태웠다. 그녀의 피부를, 육신을 찢어발겼다.
끽, 끼기기기긱.
하늘을 향해 치솟았던 십자가가 뒤흔렸다.
흔들린 나머지 열리던 하늘이 일순 정지했다. 사역마들과의 연결조차 흔들려 거신들이 멈춰 섰다. 빛의 폭발이 잦아든 후 남은 것은 만신창이가 된 배교자다.
후두둑.
그녀의 입에서, 눈에서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비틀거리며 바로 선 그녀는 제 몸을 바라보았다. 별빛에 타들어 가 너덜너덜해진 팔. 그을은 피부. 가슴에 뚫린 구멍. 그것들을 바라보며 배교자는 웃었다.
빛의 폭발과 함께 성창은 사라졌으나, 성창이 새긴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갈라할이 새겼던 상처 위에 데스텔은 새로운 상처를 새겼다.
“아아, 정말이지···.”
그 상처를 더듬으며 배교자는 웃음을 흘렸다.
피를 흘리며 그녀는 신음했다.
변수다. 상상치 못한 변수였다. 지금 이 순간 어느 것 하나 배교자의 예상대로 되는 일이 없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인간이, 광기에 삼켜져 파멸하리라 예상한 인간이, 언제까지고 도망치리라 여겼던 겁쟁이가···.’
광채를 잃었다 생각한 이들이.
다시는 빛나지 못하리라 여겼던 이들이, 기어코 다시 빛을 손에 넣었다. 그 빛을 자신에게 보이고 있다.
‘마치, 내 모든 것이 틀렸다는 것처럼.’
모든 예상은 빗나갔다.
그녀가 입에 담았던 예언은 모두 부정당했다.
그녀가 배교자(背敎者)로서 걸어온 길을, 그녀의 신념을, 가치관을 모조리 부정하고 있다.
“과연.”
배교자가 피를 흘리며 앞을 보았다.
그곳에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오는 계약의 후인이 있다. 저 사랑스러운 후인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무대에, 배교자는 웃었다. 더없이 즐겁다는 듯이.
···모든 계획이 틀어졌거늘.
···자신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거늘.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는 오히려 이 상황이 즐겁다. 자신이 부정당하는 이 순간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 찬란히 빛나는 이들을 마주하는 이 순간이,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쩌억.
파고든 라니엘이 주먹을 휘둘렀다.
몇 겹으로 중첩된 주문을 두른 주먹이 배교자의 얼굴에 꽂혔다. 뇌리를 뒤흔드는 충격과 함께, 배교자가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아, 아아···.”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워보면.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가 보인다. 이름 잃은 신들을 찢어발기며, 자신이 준비한 모든 무대를 엉망으로 만들며 이곳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
가니칼트의 검을 든 이가.
자신과 같이 별에게 선택받은 이가.
벨리알의 뜻을 이은 이가.
자신을 닮은 아이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 극한에 도달한 이가.
“가진 패 있으면 다 까라.”
그리고.
“더 없으면 넌 여기서 끝이야.”
그들을 이 자리까지 데려온, 계약의 후인까지.
탁, 하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라니엘을 바라보며 배교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진 게 있다면 다 보여라. 그 말에서 이제서야 그녀의 의도를 알 것 같았으니.
“상상도 못했는걸.”
배교자가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까지 해서 네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뭔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나를 부정하려 하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네.”
배교자가 웃음을 흘렸다.
“너는 그 사람과 닮았으니까.”
철저하게 짓밟는다.
그 목적 하나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니까.
“너 말야.”
배교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게서 배교(背敎)를 벗겨 내려는 거구나, 그렇지?”
움찔, 하고 라니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배교자, 글레투스와··· 성녀,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를 분리할 생각이구나. 내게서 배교를 벗겨 내서, 나를 성녀로서 죽게 할 생각이구나. 그렇지?”
그것이 저 아이가 생각한 구원이구나.
어쩌면, 그 사람이 바란 구원이겠구나.
“고맙지만.”
얼굴을 쓸어내린 손.
그 손이 턱밑으로 내려간 순간, 그녀의 손바닥에서 백색의 빛이 피어올랐다. 틱, 티딕 하고 피어오르는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신성이다.
“사양할게.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니까.”
틱, 티디디디딕 하고.
피어올랐던 빛이 검게 물든다. 검게 물든 빛을 끌며 배교자는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온전히 열리진 않았지만, 저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역천(逆天)까진 아직 시간이 필요하지만.
개천(開天)은 이미 이루었다.
그렇게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는 배교자를 바라보며, 라니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내뱉으며 그녀가 제 귓가를 툭툭 건드렸다.
“야, 카르디.”
움찔, 하고 배교자가 들어 올리던 손가락을 멈춰 섰다. 들려온 그리운 이름에 배교자가 라니엘을 돌아봤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가 놓아버리지 못한 것.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미련.
“그렇다는데?”
“너···.”
배교자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라니엘을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랑 이야기하고 있는듯한 모습이다. 그녀의 귓가와 어딘가에 길게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너, 누구랑 말하고 있는 거야?”
라니엘은 배교자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기울일 뿐이다. 마치 배교자에게 들으라는 것처럼 라니엘은 말을 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을수록 배교자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실은 멀지 않은 곳에 이어져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건가?
여기까지 온 건가? 개입하지 않겠다는 규율을 깨면서 여기까지···? 아니, 설마. 그럴 리는 없다. 그런 형편 좋은 이야기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쩌면···.’
속으로 부정하면서도 배교자의 시선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그녀가 라니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흔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어 말했다.
“너.”
“쉽지는 않을 거 같은데?”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어.”
“뭐, 하는 데까진 해볼게.”
“내가 묻···.”
라니엘이 귓가를 두들기던 손을 늘어트렸다.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구긴 누구야.”
라니엘이 쿵, 하고 땅을 내려찍었다.
한순간에 배교자와 거리를 좁히며 그녀가 말했다.
“너 하나 구해보겠다고 천 년 동안 구르고 있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지.”
콱, 하고.
라니엘이 배교자가 뻗었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배교자의 오른 손가락을 움켜쥔 채 라니엘이 팔을 뻗었다. 뻗어서, 배교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성창에 꿰뚫려 너덜너덜해진 배교자의 팔을 움켜쥔 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말했지.”
콰직.
“가진 거 다 까라고.”
움켜쥔 손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중첩된 주문.
배교자의 손가락이 꺾이고 뒤틀린다. 붙잡힌 팔에 수십 발의 강타가 꽂혔다. 싯푸른 가시와 같은 수십 발의 섬선에 관통당한 배교자의 오른팔에서 길게 피가 튀었다.
“안 그러면, 여기서 끝이야.”
뇌리를 뒤흔드는 고통에 배교자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이다. 배교자의 팔을 붙잡은 채, 라니엘이 허리를 비틀었다. 오른발을 지면에 고정한 채 왼발을 들어 올린다. 무릎을 굽히며 배교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키이이잉.
팔을 붙잡힌 채 끌려오는 배교자는 본다.
라니엘이 들어 올린 왼발, 군화의 밑창이 새하얗게 점멸하는 것을. 군화에 새겨진 주문이 새하얗게 타들어 갔다. 직후, 타들어 가는 섬광이 짓쳐 들었다.
쿠웅.
라니엘이 굽힌 무릎을 뻗었다.
쭉 뻗은 다리가 후려치는 것은 배교자의 심장. 데스텔의 투창이 꿰뚫은 부분을 라니엘은 집요하게 노렸다.
“···커흡.”
배교자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한 움큼 토해져 나왔다. 물리적 충격에 그녀의 눈동자가 뒤흔들리기를 잠시.
분쇄(Smash).
터져나온 충격파에 배교자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그 찰나의 순간 배교자는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몇 차례고 바닥을 구른 뒤 배교자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일으켜 세우려 했다.
“······.”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려 했거늘, 오른팔이 없다. 배교자는 엎드린 채 앞을 보았다. 그곳에는 어깨째 뜯어낸 자신의 오른팔을 위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는 후인이 있다.
“네 모든 걸 부정하겠다고, 네 모든 걸 짓밟겠다고 난 맹세했다. 그렇게 카르디와 약속했고.”
카르디. 카르디 반 아르미엘.
“그래야만 의미가 있을 테니까.”
탁, 하고 라니엘이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엎어진 채 배교자는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배교자가 왼팔로 땅을 짚은 채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녀가 제 어깨를 움켜쥐었다. 팔이 뜯어져 나간 곳. 피가 질척하게 떨어지는 어깨를 움켜쥔 채 그녀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상냥하구나. 너나, 그 사람이나.”
여기까지 와서 나의 구원을 바라는 걸까.
내게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그런 꿈을 꾸게 해주려는 걸까. 그 꿈은 자신이 언제까지고 바랐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배교자 ‘글레투스’는 여전히 끝을 바란다.
그녀가 배교자로서 살아온 시간이, 그녀의 뒤틀린 신념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여기서 끝낼 것이냐고. 여기까지 달려온 주제에 아직도 흔들리는 것이냐고.
배교자의 시선은 땅 아래를 향했다.
땅을 타고 흐르는 것은 핏물. 고이고 고인 구정물. 신들의 핏물과, 자신의 손으로 짓뭉갠 인간들이 부르짖는 비명이 담긴 핏물이다. 악취가 진동하는 풍경.
“···아하.”
배교자가 길게 웃음을 흘렸다.
웃음을 흘리며,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후인을 똑바로 마주했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거니?”
“말했잖아. 다 꺼내라고.”
라니엘이 손을 콱, 하고 움켜쥐었다.
그녀가 뜯어낸 배교자의 오른팔이 타들어가 잿가루로 화(化)했다. 흩날리는 잿가루 속에서 그녀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들어올린 손가락의 끝이 향하는 것은 배교자의 심장이다.
“네가 가진 그거.”
심장에 고인 구정물.
창에 두 번이나 뚫려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구정물. 저 구정물이 무엇인지 라니엘은 알고 있다.
“너희가 그날 삼킨 저주.”
세상의 절반을 삼키려던 그늘을, 그날 그곳에서 세 명의 영웅은 제 몸에 받아들였다. 저것을 몸에 담아둔 이상, 저들은 진정한 의미로 해방되지 못한다. 자유로워지지 못함을 라니엘은 알고 있다.
···계약을 알지 못했을 때, 라니엘이 토벌했던 흑룡은 마지막까지 재앙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계약을 알게 된 이상 그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계약의 진실을 깨닫고도 모두를 재앙인 채로 짓밟았던 재의 여신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 했으므로. 완벽한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만 했으므로.
그러니까, 하고 라니엘이 말했다.
“여기서 다 털어내.”
라니엘이 과거의 영웅을 바라봤다.
“모조리 쏟아내라고.”
그녀의 말에 배교자는 웃음을 흘릴 뿐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끝을 바라는 그녀이지만, 그녀라 한들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 제 동료들과 함께 짊어졌던 짐이자 족쇄이다.
“감당 못 해, 후배야. 내 배려를 부디 짓밟지 말렴. 이건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거야.”
“누가 카르디 여친 아니랄까 봐.”
라니엘이 코웃음 쳤다.
“너나 그 엘프나 꼰대스러움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배교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라니엘은 배교자에게 턱짓했다. 주변을 둘러보라는 것처럼. 그제야 배교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쿵, 쿠웅.
무너지는 거신들.
거신들의 시체를 밟으며 이곳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 배교자가 무시했던, 거짓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을 가리키며 라니엘이 말했다.
“배려할 상황은 되고?”
“···건방지구나, 너.”
“새삼스레.”
라니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
“너, 그거 안 꺼내고 감당 되겠어?”
···하여간, 하고 배교자는 숨을 토했다.
눈앞의 후인의 말 대로다.
족쇄를 풀지 않고선 저들을 모두 상대할 수 없으리라. 완전히 하늘을 열 수 있었다면, 심장에 성창이 꽂히지만 않았다면, 하물며 재앙들이 이렇게 빨리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이걸 쓰지 않아도 됐다.
단 한 가지만이라도 계획대로 됐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아도 됐으리라. 하지만 모든 계획은 어긋났다. 예상치 못한 변수와 변수가 모여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글레리아는 드디어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대로 끝을 맞이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모든 것을 꺼내고, 마지막까지 발버둥칠 것인가.’
이 세상에 대고 그녀는 외쳐야 할 말이 있었다. 거짓된 세상에 보여야만 할 구원이 있었다. 그것을 바라왔기에 배교자(背敎者)는 이곳까지 걸어온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구원보다 중요한 것이다.
설령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꿈에 그리던 재회를 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이루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 네 말대로구나.”
배교자가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을 내렸다.
틱, 티딕하고 변질하는 신성력.
본래대로라면 여기서 그쳤을 테지만··· 배교자는 변질하는 신성력을 담은 손을 서서히 제 심장이 위치한 곳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콱, 하고 심장을 움켜쥐었다.
끽, 끼긱. 끼기기기기긱.
새어나오던 구정물에서 검은 번개가 튀어 올랐다. 번개가 튀며 들려오는 것은 인간의 비명이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된 이들의 저주다.
“어쩌면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
배교자가 미소 지었다.
후인의 말대로다.
더는 봐줄 필요도, 저 아이들을 가여이 여기지 않아도 된다. 저들은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과 같은 무대에 서게 된 아이들이 아닌가. 일찍이 자신들이 향했던 곳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아닌가.
“이게, 나을지도 몰라.”
그렇기에 배교자는 알고 있다.
저 아이들이 향할 곳에, 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결말을. 별이 존재하는 이상 반복될 참상을. 그 참상 속에서 저들이 마주하고 말 진실을.
“너희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야 해.”
그 곳에.
시련 끝에 도달한 결말에, 구원(求援)따위 없다는 것을 최초의 성녀는 알고 있다.
“이런 결말은 우리 하나로 충분하잖니.”
성녀가 쓰게 웃었다.
웃으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곳에 보이는 것은 반쯤 열린 구멍이다. 하늘로 치솟고 있는 검은 빗방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