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02
클로에의 주문이 완성됐다는 신호.
데스텔은 방패를 놓았다. 백금색의 별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대방패와 함께, 수십 줄기의 가지가 데스텔을 덮쳤다.
펄럭.
대방패가 해제되며 데스텔의 성의가 크게 펄럭였다. 펄럭이는 성의가 빛나며 만들어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별의 무구, 성검(星劍)이다.
절단(絶斷)의 베르제르.
데스텔이 모방할 수 있는 용사 중, 가장 강한 용사. 카일 토벤의 등장 이전까지는 최강이라 불렸던 용사다. 그가 다루던 성검이 손에 쥐어진 순간 데스텔의 안광이 착 가라앉았다.
···자신은 겁쟁이에 비굴한 인간이다.
하지만, 자신이 불러올 수 있는 이들은 찬란히 빛나는 용사들이다. 그들을 연기할 때만큼은 데스텔은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었다. 용사로서 있을 수 있었다.
서걱.
데스텔의 팔이 움직였다.
모방하는 것은 베르제르가 지닌 쾌속의 검격. 성의가 펄럭이며 데스텔의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성검이 다가오는 나무줄기를 모조리 절단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길.
“발현.”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데스텔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며 옆으로 도약했다.
번쩍.
섬광과 함께 클로에의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집속된 마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하나의 점으로 모여든 회로가 빛을 뿜었다.
주문 다발(Spell-bunch).
주문 가속(Spell-boost).
섬멸(Exterminate).
뻗어나가는 것은 빛의 광선.
하나의 섬광에서 갈라진 수십 줄기의 광선이 밀려들던 뿌리를 불태우며 나아갔다. 질주하는 벨노아의 앞을 가로막은 뿌리가 섬멸에 격추당한 순간이다.
탁, 하고 벨노아가 뿌리의 잔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클로에는 빙글, 하고 지팡이를 한 바퀴 돌렸다.
돌린 지팡이의 끝으로 툭, 하고 그녀가 땅을 두들겼다. 땅으로 퍼져 나가는 회로. 거대한 회로의 중심에 선 클로에가 외쳤다.
“대격변(Cataclysm).”
땅이 뒤흔들렸다.
쿠구구궁, 하고 솟아오른 지면이 요동치는 거목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감옥처럼 거목을 에워싼 땅을 밟고 벨노아는 가속한다.
폭풍을 끌며 나아가는 벨노아.
끊이지 않고 주문을 난사하는 클로에.
그 모습을 바라보며, 데스텔은 한 걸음 물러선 곳에서 검을 휘둘렀다. 클로에를 노리는 뿌리들을 모조리 쳐냈다. 성의를 펄럭이며 데스텔은 생각했다.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겁쟁이인 자신이라도 이런 일은 할 수 있다. 최소한 후배의 핏물을 마시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이 전장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것이 데스텔의 마지막 보루였다.
후배를 대신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최소한 후배와 함께 싸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끔찍이 여기지 않게 하는 마지막 보루.
그 보루에 선 채 데스텔은 앞을 보았다.
클로에의 지원을 받으며, 폭풍을 끌며 나아가는 벨노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역전의 영웅이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다. 그런 벨노아를 바라보며 데스텔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래, 한 방 먹여줘라.”
스스로가 영웅이 되지 못함을 아는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 데스텔 또한 영웅에게 몰입한다. 저 빛나는 영웅이 자신을 대신해 기어코 위업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렇게 벨노아가 폭풍을 끌며 팔을 휘두르려는 순간이다.
【■■, ■■. ■■■■■■■■■■■■!】
하늘을 뒤흔드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데스텔도, 클로에도, 벨노아조차도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넓게 펼쳐져 있던 밤하늘은 그곳에 없었다. 눈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거구뿐이다.
【■■■■■■■■■■】
【■■】
【■■■■■■■■■■】
【■■■■■■■■■■■■■■■■■■■■■■!
하늘을 가리며 뛰어오른 거신(巨神)이 전장에 개입했다. 거신의 뒤를 이어 이름 잊힌 신들이 차례로 전장에 개입한다.
콰직!
거신의 발길질에 얻어맞은 벨노아가 피를 토하며 공중을 날았다. 목숨을 걸고 거목에게 뛰어들었던 방금 전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벨노아는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쿠웅.
굉음을 내며 벨노아가 땅에 처박혔다.
데스텔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움푹 파인 땅이 있다. 피를 토하고 있는 영웅이 있다.
“벨, 벨노아!”
클로에의 비명.
벨노아가 쿨럭, 하고 피를 토하는 소리.
“···아.”
데스텔이 탄식했다.
데스텔이 어느샌가 놓아버린 성검은 별가루가 되어 돌아갔다. 펄럭이던 성의가 착 가라앉았다. 데스텔은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보았다.
출렁이는 거목, 아바돈.
전장에 개입한 이름 잃은 거신들.
그들이 이곳을 짓밟기 위해 달려드는 상황을 바라보며, 데스텔은 허망이 중얼거렸다.
“···농담이지?”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수호전도 끝날 것 같군요. 훌륭한 지휘였습니다, 용사님.”
제 1 기사단의 단장, 요르네.
그녀는 짧게 숨을 뱉으며 이번 작전의 총지휘관을 향해 미소 지었다. 좀처럼 타인을 인정하는 법이 없는 그녀이지만, 지금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인류의 최중요 전력인 ‘카일 토벤’과 ‘라니엘 반 트리아스’를 동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대규모 작전.
『라테나일 수호전』
모두가 실패하리라 여긴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것이 바로 총지휘관 자리에 앉은 저 남자였다. 평소에는 카일 토벤과, 가장 용사다운 용사인 갈라할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가장 현실적인 용사라 불리는 인물.’
저 남자 역시 인류를 대표하는 용사의 자리에 앉기에 손색이 없다고, 그리 생각하며 요르네는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데스텔 님.”
가장 현실적인 용사, 데스텔.
요르네의 미소에 그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제 1 기사단이 잘 버텨준 덕분이지. 무모한 작전이었을 텐데 따라와 줘서 고맙다.”
“다름 아닌 용사님의 부탁이지 않습니까. 기사로서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기사란 인류의 검이자 방패요, 용사는 인류를 대표하는 영웅이다. 그러니 용사의 명령에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지만···.
“용사고, 기사이기 이전에 사람 대 사람으로서 고맙다는 거다. 직함이 다 무슨 소용이야? 사지에 뛰어드는 작전을 군말 없이 수행한 너희에게 고맙다는 거지.”
데스텔은 구태여 그리 말했다.
그는 용사의 정복의 옷깃을 자꾸만 매만지며 쓰게 웃었는데, 마치 이 옷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제야 한숨 좀 돌리겠군.”
데스텔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제 눈가를 쓸어내렸다. 긴장이 풀린 그는 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름을 느꼈다.
···자신의 실수 한 번에 수십, 수백의 죽음이 피어나는 전장. 그 전장의 총책임자란 역할은 작은 마을의 극단에서 일하며 배우를 꿈꾸던 청년에겐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었으므로.
‘그래도, 어떻게든 해냈나···.’
데스텔은 성벽의 위에 선 채 기사들을 내려 보았다. 자신의 지휘를 믿고 따라와 준 이들. 그들이 흘리는 피와 땀방울을 보며, 그것이 마냥 헛되지 않았음에 데스텔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하여간, 부담스러운 자리야.”
“···그렇습니까?”
“아무리 봐도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데스텔의 중얼거림에 요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질문했다.
“그럼, 누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입니까?”
“누구긴 누구야. 너 같이 고결한 사람들이지.”
데스텔이 성벽에 기댄 채 요르네를 가리켰다.
“오직 인류를 위한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이 자리에 선 너 같은 사람. 어렸을 때부터 전장에 서기 위해 검을 들고 자신을 갈고닦은··· 그런 고결한 사람이 앉아야 할 자리지, 여기는.”
데스텔이 쓰게 웃었다.
“나 같이 어쩌다 힘을 얻게 된 촌구석 애송이가 아니라 말야.”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 뭐라고?”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르네가 딱 잘라 말했다.
“스스로를 그리 깎아내리실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 당신은 그 자리에 충분히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내가?”
“굳이 제 입으로 말씀 드려야 합니까?”
그녀가 쓰게 웃었다.
“저는 당신과 같이 저들을 지휘하지 못합니다. 이번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지도 못했겠지요. 당신의 덕분입니다. 인류의 주요 거점인 이곳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말입니다, 하고 그녀가 말했다.
“기사로서 교육을 받지 않은···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작은 마을의 평범한 인간이었던 당신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더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
“고결하지 않은, 나약한 인간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제 책임을 다한다. 멋진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 미소 짓는 요르네를 데스텔은 똑바로 바라보질 못했다. 낯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린 데스텔은 괜스레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영광이네. 제 1 기사단의 단장님께 이런 말도 다 들어보고.”
“예, 저도···.”
그리 요르네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이다.
요르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변을 눈치챈 데스텔의 고개 또한 휙, 하고 돌아갔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것은 성벽의 너머.
···지평선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검게 물든 지평선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이. 평야에 가득하던 마수들의 시체를 집어삼키며 밀려드는 검은 지평선의 정체를 두 사람은 깨달았다.
“검은···안, 개”
요르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스로 말하고도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뒤늦게 두 사람의 귓가에 전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검은 안개가 밀려옵니다.」
「안개 속에선, 셀 수 없을 만큼의 마수가 들어차 있습니다.」
마수. 검은 안개.
배교자(背敎者)의 상징과도 같은 것.
데스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검은 안개? 배교자가 왜 이곳에? 데스텔이 황급히 지령을 내리려는 순간이다. 무언가를 판단해보려 한 찰나다.
「확인···한 결과, 갑각룡이 다섯입니다.」
데스텔의 사고가 정지했다.
“뭐···라고?”
갑각룡이 다섯 마리.
그 검성 쿤텔조차 한두 마리를 상대하는 게 고작이었던 갑각룡이, 다섯. 그것을 지금 이 성에 모인 인원만으로 상대하라고?
쿠구구궁.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데스텔이 입을 열지 못한 것은 고작 해봐야 몇 초에 불과한 시간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있어 그 몇 초는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은 시간이다.
콱, 하고 요르네가 데스텔의 손목을 붙잡았다.
“도망치십시오, 데스텔 님.”
그녀는 선택을 내렸다.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모실 수 있어 저 또한 영광이었습니다. 데스텔 님.”
성벽의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데스텔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직후, 거센 흔들림과 함께 성벽이 무너졌다. 무너지는 성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갑각룡.
————————!
갑각룡의 포효와 함께 안개가 성의 내부로 밀려들었다. 밀려드는 안개. 카가가각, 하고 땅으로 파고드는 갑각룡. 울리는 땅.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기사들. 기사들을 삼키는 검은 안개. 땅을 파헤치며 튀어 오르는 거대한 갑각룡.
피가.
비명이.
살점이.
죽음이 흐드러졌다.
* * *
라테나일 수호전은 실패했다.
그곳에 있던 인원의 태반을 희생시켜 데스텔은 살아남았다. 라테나일에 주둔 중이던 병력의 대부분은 전사했다. 그 중 극히 소수만이 살아 거점으로 복귀했다.
그들이 복귀했을 때, 데스텔은 막사를 빠져나와 복귀한 이들을 향해 정처 없이 걸었다.
“······.”
피, 비명, 신음, 부상병.
죽어가는 이들의 사이를 데스텔은 걸었다. 그들을 버리고 도망친 지휘관인 자신이, 이곳에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걸까.
데스텔은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혐오감에 무색하게도 그 누구도 데스텔을 비난하진 않았다. 그들은 데스텔과 눈을 마주친 순간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살아남아서 다행입니다, 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원망 어린 시선 한 줌조차 던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데스텔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데스텔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부상병들이 누운 막사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 중 익숙한 갑옷의 양식이 보였다. 제 1 기사단의 갑옷이었다.
“하나.”
팔을 잃은 기사에게.
더는 검을 쥘 수 없어서, 더는 전장에 설 수 없게 되어서, 더는 기사가 아니게 될 기사를 붙잡고 데스텔은 말을 이었다.
“하나만, 하나만 묻지.”
“···말씀 하십시요, 데스텔 님.”
“제 1기사단의 단장, 요르네는···.”
“전사하셨습니다.”
입안이, 타들어 갔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기사를 놓아주고선 데스텔은 막사 사이를 빠져나왔다. 기사들 사이를 걸으며 데스텔은 정보를 수집했다. 그들은 말했다.
제 1 기사단의 단장, 요르네는 데스텔을 대신해 지휘관을 잡았다. 성창, 갈라할의 동료와 협력하여 갑각룡에 저항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라테나일 고성에 남았다고 기사들은 입 모아 말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데스텔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뜯어내야 합니다. 상처가 오염돼서···.
-진통, 진통 주문을···.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틀렸습니다.
-너무 오염이 진행돼서···.
-대처가 늦어서···.
죽음, 들려오지 않는 숨소리.
죽음 앞에 소리 죽여 슬픔을 토하는 기사들. 애도하는 성직자와, 기어코 참지 못해 토해져 나오는 울음소리.
어딜 보아도,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그곳에는 핏물뿐이었다.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린 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한평생을 갈고 닦았을 고결한 이들이, 자신보다 훌륭한 이들이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들이 흘린 핏물이 데스텔의 발목을 붙잡았다.
“······.”
데스텔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부상병들의 한가운데서 그는 제 발밑을 보았다. 자신이 어깨에 두른 성의(星衣)를 보았다. 용사의 상징과도 같은 것들. 저들이 기꺼이 피를 흘리게 하는 것들.
···성의에 무게는 없을 텐데.
지금은 이 성의가 너무나도 무겁게만 느껴졌다. 데스텔은 말없이 성의를 벗었다. 허망한 눈초리로 걸음을 옮긴 데스텔의 앞에는 기사들이 있다. 갈라할이 있었다.
갈라할은 기사들을 다독이고 있었다.
제 동료를 잃었음에도, 그는 기사들을 응원하며 다음에는 더 힘내보겠다며 그들에게 애써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 곁에는 기사단장 하인켈이 있다.
하인켈 역시 다음을 외치며, 너희들의 희생은 더 없이 고결했다고, 그 희생에 반드시 답하겠노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아, 아···.”
그들을 바라보며.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데스텔의 입가에는 헛웃음이 맺혔다. 데스텔은 그들에게서 끔찍하리만치 이질감을 느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지?
다 성공한 작전이었다.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쓸 수 있는 모든 수를 써서 희생을 줄인··· 그야말로 완벽한 작전이었다. 이보다 더한 작전을 세우라 한들 세울 수 없을 만큼의.
작전은 성공했다. 성공을 목전에 뒀다.
그 모든 것을 엎어버린 게 무엇인가?
재앙이었다. 배교자(背敎者)의 군세였다. 재앙 앞에 인간은 무력했다. 인간이 한없이 정밀하게 쌓아올린 계획도, 들인 노력도, 희생도, 재앙의 앞에선 일말의 가치도 가지지 못했다.
···언제나 느끼고 있던 위화감이.
···그러나 언제까지고 외면해왔던 의문이.
지금 이 순간 데스텔의 머리에 가득 찼다. 지울 수 없을 만큼. 이래서 안 됨을 알지만, 입 바깥으로 목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변덕이잖아.”
데스텔이 중얼거렸다. 힘없이.
“고작, 변덕이잖아.”
한 번 열린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은 데스텔이 품어온 독이다. 참아왔던 설움이다. 응어리진 언어들이 쏟아져나왔다.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 작전도, 전법도, 그냥 다 필요가 없어. 밀고 들어오면 끝인 거야.”
제 1 기사단의 단장, 요르네.
그녀는 데스텔이 보기에도 유능한 인물이었다. 데스텔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결한 인물이었다. 한 없이 빛나는 인간이었다. 그런 빛나는 인간조차, 용사인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린다. 목숨을 바친다.
그렇다면 그들이 흘린 피에, 목숨에 가치는 있는가?
나를 살리면.
저들을 대신해 내가 살아남으면.
내가 무언갈 이룰 수 있는 건가?
“변덕. 고작 재앙의 변덕에 의해 유지될 뿐인 전장에···.”
데스텔이 신음했다.
아니었다. 이룰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런 전장에, 대체 무슨 의미가···.”
데스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엔 자신을 바라보는 갈라할이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단장이 있다. 수많고 수많은 기사가 있다. 그들의 서늘한 시선을 받으며 데스텔은 헛웃음을 흘렸다.
해서는 안 됨을 알고 있지만.
데스텔의 입 밖으로 목소리는 새어나왔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모두가 미쳐있다.
그날 데스텔은 그렇게 생각했다.
1.
잊혀진 옛 신들이 몰려온다. 저주를 품은 토지의 주인, 아바돈이 꿈틀거린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밀려오는 압도적인 적의 군세는··· 데스텔로 하여금 그날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였다.
“······.”
데스텔의 시선이 흔들렸다.
데스텔이 무심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물러선 것은 고작해야 한 걸음이다. 더는 물러서지 못한 채, 그렇다고 나아가지도 못한 채 데스텔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벨, 벨노아···!”
“크읍, 큭···.”
그곳엔 피를 게워내며 일어서는 벨노아가 있다. 그러나 벨노아는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한다. 데스텔보다 앞선 곳에서 달려나가던 저 청년은, 이젠 데스텔의 뒤에 서 있다.
···데스텔은 다시 앞을 보았다.
제 뒤에는 후배들이 있다.
제 앞에는 거대한 적들이 한가득 이다. 저들의 진격을 잠깐이나마 자신이 막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정말로.
“모···.”
데스텔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방. 불멸의···.”
겁쟁이인 그는 또다시 타인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을 숨기려 든다. 그러나 펄럭이던 성의는 어느샌가 착 가라앉았다. 성의는 데스텔의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
확신이 없기에. 불멸의 트리탄을 데스텔이 연기하지 못하기에. 지금 이 순간, 데스텔 본인조차 자신으로선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기에.
그렇기에, 성의는 주인의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 데스텔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의 힘을 모방하지 않으면··· 이곳에 있는 거라곤 초라한 한 명의 겁쟁이뿐이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쟁이. 도망칠 용기도, 나아갈 용기도 없는 비굴한 겁쟁이.
“아, 제발, 왜···.”
데스텔이 제 성의를 콱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가운데, 데스텔은 제 윗니와 아랫니를 딱딱 맞부딪쳤다.
내가 나설 차례이지 않나.
후배들을 위해 멋지게 나서야 하지 않나.
너는 용사이니, 그리 해야 하지 않나.
자신 또한 동화 속 영웅들처럼 두려움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데스텔은 바란다. 허나 한평생을 겁쟁이로 살아온 인간은 좀처럼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다.
두렵다, 죽음이.
두렵다, 저 거대한 적들이.
두려운 나머지 견딜 수가 없다.
···동화나 이야기, 영웅담 속의 등장인물들은 너무나도 쉽게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 그들의 두려움을 묘사하는 문장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묘사한다 한들 고작 한두 줄에 불과하다.
그러나 데스텔의 경우는 아니다.
‘제발···!’
이곳에 있는 한 명의 인간의 내면을 묘사해보자면, 두려움만으로 수십 페이지를 채우고도 남으리라.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 나머지 숨이 가빠질 지경이다.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란다.」
귓가에 맴도는 것은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
「딱한 아이야.」
어느날 마주쳤던 배교자.
겁에 질린 데스텔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데스텔의 귀에 속삭였었다.
「네가 가진 그 힘은 저주란다.」
「겁쟁이에게, 영웅이 되지 못하는 아이에게, 빛나지 못하는 아이에겐 아주 끔찍한 저주이지.」
그 자리에서 배교자는 예언했다.
「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망칠 거란다.」
「그리고, 증오하겠지.」
「너희가 축복이라고 부르는 이 저주를.」
데스텔은 떨리는 눈동자로 앞을 보았다.
그곳에는 발을 들어 올린 거신이 있었다.
“···아.”
거신이 발을 내려찍었다.
쿠웅, 하는 굉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거신의 발구름에 땅이 뒤흔들렸다.
데스텔이 그 일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요행에 가까웠다.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며 일어선 데스텔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숨을 급하게 토해냈다.
“헉, 허억···.”
움푹파인 지면. 거대한 발.
시선을 올려보면, 그곳에는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거대한 신이 서 있다. 거신은 데스텔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는 아무런 열기가 담겨있지 않았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시선.
벌레만도 못한 존재를 바라보는 눈동자.
허나, 그 시선이 데스텔의 뒤에 선 클로에를 향한 순간 거신의 눈동자에는 거센 불길이 일렁였다. 거신이 괴성을 내지르며 다시 한 번 발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데스텔이 아닌 클로에를 노리고선 발을 굴렀다.
쿠우우우우우웅!
땅이 뒤흔들렸다.
거센 울림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진 데스텔과 달리, 벨노아는 피를 게워내면서도 클로에를 등에 업은 채 도약했다. 거신의 발구름에서 벗어났다.
“······.”
바닥에 주저앉은 채 데스텔은 그 모습을 보았다.
핏발이 선 눈동자로 도약에 도약을 거듭하는 벨노아를, 벨노아에게 안긴 채 주문을 외우는 클로에를. 그리고··· 그런 그들을 노리는 수많은 신과 거목을.
신의 발길질이, 주먹이, 철퇴가.
땅에서 솟구친 뿌리가, 후려치는 줄기가.
쉴새 없이 두 사람을 노렸다. 오직 두 사람만을 노렸다. 마치 그 자리에 데스텔이 없다는 것처럼.
‘···아아.’
한순간이지만.
한순간에 불과하지만, 데스텔은 그 사실에 안도하고 말았다. 자신이 노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저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데스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밀려드는 것은 혐오감.
끔찍한 자기혐오 속에서 데스텔이 이를 악물었다.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선 데스텔은 제 성의를 콱 움켜쥐었다. 제발 뭐가 됐든 간에 힘을 빌려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여전히 성의는 용사가 아닌 겁쟁이 데스텔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왜, 왜, 왜···!”
타인의 힘을, 타인의 휘광을 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쟁이. 데스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어서지 못한 채 데스텔은 고개를 들었다.
“······.”
그곳에는 도약에 도약을 거듭하며, 거신의 팔을 타고 달리는 벨노아가 있다. 간신히 공격을 회피하는 벨노아와, 그런 벨노아의 등에 매달린 클로에가 있었다. 찰나의 순간 클로에와 데스텔은 시선을 마주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1초, 2초에 불과한 순간.
데스텔은 2초의 시간을 공포에 질린 채 낭비했다.
클로에는 2초의 시간을 판단하는 데 소모했다.
겁쟁이에게 있어서 2초는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나, 용사에게 있어서 2초는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음을 증명하듯··· 클로에의 입이 열렸다.
『저희가 시간을 끌게요.』
『데스텔 님은 지원을 불러주세요.』
데스텔의 귓가에 전음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데스텔의 시야에서 벨노아와 클로에는 사라졌다. 쿵, 쿠웅 하는 굉음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세찬 소음 속에서 데스텔은 자신의 귀에 울린 전음을 곱씹었다.
···지원을 불러 달라고?
데스텔의 시선이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자신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여전히 거신과 거목은 데스텔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저곳으로 우회한다면.’
지원군을 불러올 수 있을까?
대공동을 한 바퀴 돌아, 저 너머에 있을 라니엘이나, 다른 방향에서 진입 중인 초인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
···뭐가 됐던 이렇게 떨고 있는 것보단 나으리라.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스스로도 확신을 하지 못한 채 데스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나아갈 때는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던 몸이 뒷걸음질을 칠 때는 너무나도 잘 움직인다.
탁.
전장에서 등을 돌리고 데스텔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뒤를 돌아본 채 전장을 이탈해,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탁, 하고 두 번째, 탁, 하고 다시 세 번째 걸음을 옮긴 순간이다.
“······.”
데스텔이 멈춰 섰다.
멈춰선 데스텔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슬아슬하게 거신과 거목의 공격을 회피하는 벨노아가 있다. 허공을 수놓는 클로에의 주문이 보였다.
‘···시간을 끌겠다고.’
···벨노아의 회피는 어설프다.
부상을 회복하고,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조차 주지 않고 적들은 벨노아를 몰아붙인다. 벨노아의 몸에는 생채기가 늘어나고, 때로는 피를 토했다.
‘시간을, 끌겠, 다고···.’
클로에의 공격 또한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준비 시간 없이 난사하는 주문은 신들에게 작은 생채기를 입히는 게 고작이다. 뻗어오는 뿌리의 궤적을 조금 비트는 게 고작이다.
···시간을 끌 테니, 지원군을 불러주십시오.
조금 전 클로에가 했던 말의 진의를 데스텔은 모르지 않는다. 전장에서 수도 없이 많이 들어온 말이었으니까. 데스텔의 귀에 수많고 수많은 목소리가 맴돌았다.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뒤로 물러서서 다음을···.」
「가십시오, 데스텔 님. 지원병력과 함께 돌아오시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무얼, 저희들은 명예로운···.」
「후퇴하셔서···.」
「시간을 끌고 있을 테니···.」
그렇게 말한 이들은 모두 죽었다.
그런 말을 남겼던 이들 또한, 그 말을 내뱉을 당시에 죽음을 각오했으리라. 스스로가 살아남지 못함을 확신해, 체념한 듯한, 혹은 각오를 다진듯한 눈동자였으니.
···언제나 외면해왔지만.
···외면한 채 도망쳐왔지만.
시간을 끌겠다는 저 말의 뜻이 무엇인지 데스텔도 딱히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겁쟁이이지 멍청이가 아니었으니.
‘이곳에서 우리가 희생할 테니, 너는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우리의 핏물을 마시고 다음으로 나아가라.’
수많고 수많은 이들이 데스텔에 그렇게 말했다.
그리 말하며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눈앞의 후배들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데스텔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다. 후배의 핏물만은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이, 신념이 바스러진다.
무너진 곳에 남은 것은 초라한 인간이다.
도망치고 도망쳐온 한 명의 겁쟁이다.
겁쟁이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겁쟁이는 스스로를 조소한다. 찬란히 빛나는 이들의 피를 마시고, 그들의 죽음으로 살아남은 겁쟁이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이런 자신이 끔찍하게도 싫다.
그날도 그랬다.
자신이 비굴이 됐던 그날도 그랬다.
자신이 선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어진 몇 초의 시간 동안 고민만을 하고 있을 때,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는 선택을 내렸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망치십시오, 데스텔 님.」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제 1 기사단장 요르네.
빛나는 인간이었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더랬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도, 마치 자신을 안심시키듯 그곳에서 그녀는 웃고 있었다.
「저희가 시간을 끌게요.」
「데스텔 님은 지원을 불러와 주세요.」
지금 또한 그렇다.
자신의 후배가, 자신보다 어린아이가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다. 쓰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마치 정말로 그리해도 괜찮다는 것처럼.
‘그들은 언제나 선택을 내렸고.’
자신은 언제나 선택을 내리지 못한 채 도망쳤다.
‘이번에도, 도망쳐야 하는가.’
겁쟁이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도 그리할 것이냐고.
선택을 떠넘기고 살아남을 것이냐고. 이렇게 또다시 살아남아서, 비굴하게 살아남아서 손가락질받을 것이냐고. 정녕 그렇게라도 살고 싶은 거냐고.
“···하.”
데스텔이 헛웃음을 토했다.
빙글.
그래, 좆같은 새끼들아. 그러고 싶다.
그렇게라도 살고 싶다. 나는 살고 싶다. 조롱 당하고, 손가락질 받으면서라도 살고 싶다. 죽는 게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죽으면 그걸로 끝이니까. 나는, 나는, 애초부터 나는···.
탁.
나는, 용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탁.
내 꿈은 배우였다. 무대 위에 올라 많은 사람 앞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 때로는 광대가 되어서, 때로는 왕자가, 때로는 장사치가, 때로는, 때로는, 때로는······.
“씨, 발. 아··· 진짜. 진짜···!”
그냥, 그렇게 연기를 하면서 살고 싶었을 뿐이다.
용사가 뭐냐? 목숨을 거는 게 그리 쉬운 일이냐고. 도대체, 도대체가 저들은 왜 나 때문에 죽는 거냐. 왜, 나를 살리겠다고 피를 흘리는 거냐. 왜 나한테 이런 무거운 짐을 남기는 거냐.
탁, 탁, 탁, 탁, 탁.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어떻게라도 살아남아서, 그냥 살아남아서, 언젠가 꿈을 이루고 싶었는데···.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왜 달리고 있는 건가.
“으하, 으하하하학!”
데스텔은 웃었다. 미친놈처럼 웃었다. 웃으면서 뒤가 아닌 앞을 향해 달렸다. 그 모습은 꼭 겁에 질린 나머지 실성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거신들을 향해 달리며 데스텔은 제 어깨에 있는 성의를 콱 움켜쥐었다.
“모방, 절단의 베르제르.”
성검이 손에 나타났다.
겁쟁이는 성검을 쥔 채 신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거신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길게 핏물이 튄 순간, 신들이 데스텔을 보았다.
날 봐라, 그래. 날 봐라.
데스텔은 웃었다. 웃으면서 성검을 놓았다.
신들의 눈동자에서 열기는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거추장스러운 벌레를 치우듯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모방, 불멸의 트리탄.”
데스텔이 대방패를 내려찍었다.
그러나 신의 주먹과 맞닿은 순간 데스텔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데스텔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토해져 나왔다. 데스텔은 바닥을 구르며 꼴사납게 흙투성이가 됐다.
“하, 하아, 하하···.”
웃음을 흘리며, 피 섞인 침을 늘어트리며.
데스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떨리는 무릎을 한 손으로 콱 움켜쥔 채 겁쟁이는 독백한다.
후배의 핏물을 마시며.
또다시 비굴이 되어 도망치고 도망치며.
그렇게 또다시 살아남는 건.
과연, 추해도 너무 추하지 않겠나.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린 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죽고 싶어지지 않겠나. 도대체, 어디까지 추락할 생각이냐.
“하아···.”
데스텔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일어서지도, 주저앉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 그런 자세로 데스텔은 제 손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숙이고 제 손을 이마 앞으로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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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올린 손을 콱, 하고 움켜쥐었다.
여전히 데스텔은 겁쟁이다. 하지만, 겁에 질린 채로 데스텔은 나아가기를 선택했다.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데스텔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도, 긍지도, 각오도 아니다.
‘그건 빌려 올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니까.’
지금 자신이 빌려 올 것은, 기적을 이루어낼 힘.
“모방··· 아니, 부탁한다.”
지금 이 순간 데스텔은 연기하지 않는다.
“한 번만 빌리마.”
그 무엇도 연기하지 않기에.
겁쟁이인 채로,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했기에. 스스로가 영웅이 되기를 바라기에. 여태까지 길을 걸어온 겁쟁이인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비로소.
“갈라할.”
성의(星衣)에 새겨진,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반응한 적이 없는 누군가의 별자리가 반짝였다. 그것은 언젠가 저물었던 별자리. 하지만 그 무엇보다 찬란히 빛났던 별자리. 그 별자리가 데스텔의 부름에 답한다.
“가장 용사다운 용사, 갈라할.”
데스텔의 성의가 펄럭였다.
움켜쥔 손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새어나오는 빛의 격류와 함께 데스텔이 어느샌가 감고 있었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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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들린 것은 그 녀석이 쥐었던 무기.
마지막까지, 그 녀석이 놓지 않았던 상징.
성창(星槍)을 움켜쥔 채 데스텔이 일어섰다. 스스로의 의지로. 공포를 짊어진 채 데스텔은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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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이 범람했다.
2.
별빛이 범람한다.
세찬 별빛의 격류에 잊힌 신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들은 빛을 내는 인간을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마저, 저 인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신들의 직감이 경종을 울린다.
안광을 번뜩이며 잊힌 신은 빛나는 인간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발을 내려찍었다. 제 몸을 던져 인간을 깔아뭉개고자 한다. 그 빛을 막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가려질 리가 없다.
쐐에에에에에에엑!
한 줄기의 빛이 신들의 팔을, 몸통을, 발을 관통한 채 어딘가에 꽂혔다. 빛이 꽂힌 것은 궁지에 몰려있던 벨노아의 곁이다. 클로에의 눈앞이다.
“···아?”
클로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의 눈앞에 박혀있는 것은 찬란히 빛나는 창. 별빛으로 빛나는 성창(星槍)이다.
번쩍.
섬광과 함께 누군가 성창의 곁에 바로 섰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이윽고 걷힌 흙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한 명의 용사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지원군.”
데스텔이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불러왔다. 어떻게든.”
그가 성창을 움켜쥔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둘러싼 것은 수많은 신들. 저 앞에서 길을 가로막고 꿈틀거리는 것은 고대의 재앙이다. 여전히 두렵지만, 데스텔은 성창을 뽑아들었다.
「고결하지 않은, 나약한 인간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제 책임을 다한다.」
언젠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면서.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흘렸던 핏물을 떠올리면서. 자신을 대신해 내렸던 선택을 떠올리면서.
「멋진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데스텔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했다.
“가자.”
데스텔이 성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 너머로.”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으리라.
이번만큼은, 그들이 바라는 영웅이 되리라.
‘한 번쯤은.’
비굴한 겁쟁이가 아닌 용사가 되어보리라.
자신에게 주어진 이 힘을 저주가 아닌 축복이라 생각할 수 있게끔 위업을 세워보리라. 그리 독백하며 데스텔은 앞을 가로막은 것들의 너머를 보았다.
그곳에 배교자가 서 있었다.
별빛이 범람했다.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백금색의 별빛은, 저 하늘 위의 별이 인간에게 내려주는 별빛과는 본질이 다르다. 상위의 존재가 아래의 존재에게 하사(下賜)하는 것이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의 대가로 지불한 것.
그렇기에, 범람하는 것은 별빛이되 별빛이 아니다.
이는 한 명의 인간이 지닌 삶의 가치.
마지막까지 용사로서 있고자 한 어느 인간의 생애 그 자체다. 그러니, 찬란히 빛나는 백금색의 섬광은 오직 그만을 상징하는 빛이리라.
“···어떻게?”
터져 나오는 빛에 배교자가 눈을 크게 떴다.
저 찬란한 빛을 그녀가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배교자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것은 언젠가 어느 용사와 나누었던 문답이다.
「단 한 번도.」
「저는 단 한 번도 별이 제게 준 이 힘을 저주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말을 정면에서 부정한 인간.
「별의 축복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예상치 못한 답을 들려주며, 그녀가 틀렸음을 증명해내고만 용사.
「이게 축복이 아니라면 뭐겠습니까?」
“갈라, 할···.”
배교자가 무심코 그리 중얼거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용사의 이름. 모든 것이 거짓된 시대에서도 광채를 잃지 않았던 인간의 이름. 무심코 그 이름을 중얼거린 배교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리고, 이는 라니엘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거신의 발에 짓밟힌 채, 라니엘 역시 배교자와 같은 곳을 보았다. 그녀와 같은 풍경을 시야에 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범람하는 별빛이다. 그 별빛을 바라본 순간 그녀의 시선 역시 크게 흔들렸지만···.
“···하.”
이내 라니엘은 헛웃음과 함께 흔들림을 털어냈다.
까득.
라니엘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득, 우드드득 하고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라니엘이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일어섰다. 거신들은 더는 라니엘을 그 자리에 묶어두지 못한다.
콰직!
거신의 발을 으스러트리며 라니엘은 바로 섰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녀가 길게 숨을 뱉었다.
“너도.”
배교자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나도 사과해야겠다.”
라니엘은 웃었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변수에, 라니엘은 그만 쓰게 웃고 말았다. 사람을 잘 본다고 생각해왔는데, 사람을 보는 안목만큼은 탁월하다고 여겨왔는데···.
“너나 나나 사람 잘못 봤어.”
적어도, 데스텔에 관해서는 자신이 전부 틀렸음을 라니엘은 인정해야만 했다. 본래 자신의 과오를,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괴로운 법이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라니엘은 더없이 기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비굴(卑屈)이 아니다.
“용사, 데스텔.”
결코 굽히지 않음을 의미하는 비굴(非屈)이리라.
“네가 깔본 용사의 이름이다.”
그리고, 내가 잘못 판단한 용사의 이름이고.
찬란히 빛나는 광채.
누군가 피워올린 봉화에 이끌리듯, 라니엘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배교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2.
지금 이 순간, 거신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작은 인간을 경계하고 있다. 인간이 피워올린 광채에,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섬광에 거신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더는, 그들은 데스텔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온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지금, 데스텔은 자신이 쥔 성창을 바라보았다. 가장 용사다운 용사, 갈라할이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았던 무구.
“······.”
느려진 시간 속에서 데스텔은 성의(星衣)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성의는 불러온 용사를 데스텔이 ‘이해’하고 ‘모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과, 그들이 관철해온 신념을 데스텔의 머리에 새겨넣곤 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 데스텔이 마주한 것은 갈라할이 살아온 삶. 그가 관철했던 신념이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갈라할은 데스텔이 알고 있던 ‘용사’ 갈라할과는 거리가 멀다. 마주하게 된 것은 ‘인간’ 갈라할이다.
갈라할은 고뇌해왔다.
한평생을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져왔다.
자기 자신이 어째서 용사가 됐는가. 왜 찬란히 빛나는 이들이 아닌 자신에게 이 별빛이 내려졌는가.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별빛이 쥐어졌더라면, 그들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의문이 데스텔에겐 썩 낯설지 않다.
이는 데스텔 또한 가지고 있던 의문이니.
그렇게 흔들림 속에서 갈라할은 걸었다.
데스텔은 흔들림 속에서 멈춰 섰으나, 갈라할은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었다. 흔들리고, 망설이고, 때로는 잠시 멈춰 섰지만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 끝에 갈라할은 답을 손에 넣었다.
답을 손에 넣은 인간이 뒤를 돌아본다.
데스텔은 자신보다 앞선 곳에 선 갈라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데스텔의 귀에 맴도는 것은 갈라할이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던 문장이다.
「어느 길이던, 그건 틀리지 않습니다.」
「빛을 향해 나아가길 선택한다면 모두 옳습니다.」
「당신도, 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데스텔은 쓰게 웃었다.
“···하여간.”
데스텔은 어느샌가 감고 있었던 눈을 떴다.
느릿하게 흐르던 시간이 제 속도를 찾는다. 서서히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데스텔은 제 손에 쥐어진 성창을 바라봤다. 성창은 찬란히 빛나고 있다.
“정말 고맙게도, 닮았다고 말해주는 거냐.”
갈라할이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갈라할의 일부와 같은 성창(星槍)은 데스텔을 긍정한다. 나아가길 선택한 데스텔에게 기꺼이 힘을 빌려준다. 자신의 주인이 그러했듯이.
“후우···.”
데스텔이 길게 숨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