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01
별을 쥔 순간 족쇄가 풀렸다. 광기가 해방된다. 분노가, 증오가, 광증이 자신을 집어삼키려 한다. 허나 켈르할름은 저항한다. 마지막까지 제정신을 놓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으므로.
「너는 나를 닮았단다, 아이야.」
떠올리는 것은 백 년 전 그날 배교자가 자신에게 속삭였던 저주의 언어다. 배교자는 켈르할름에게 말했다. 너 또한 나와 같은 광인이라고.
「너는 네 손으로 모든 것을 부수고 말 거야. 네 광기가 그리 만들겠지. 아아, 불쌍한 아이야. 너는 반드시 파멸하고 말 거란다.」
너는 파멸할 것이리라.
네 손으로 모든 것을 부수고 말 것이다. 배교자는 그리 예언했다. 그리고, 켈르할름은 그 예언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길고 긴 세월 동안 광기에 저항해왔다. 자신을 좀먹는 광증을 억눌러왔다.
광인(狂人)이라 멸시받아도 좋다.
아군에게 두려움을 사도 좋다.
모두에게 위험한 존재라 여겨져도 좋다.
누군가 나를 무어라 부르든, 그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
‘중요한 것은.’
저항했다는 것.
저항해 왔다는 것.
제 안에 타오르는 불길을 이해하고, 억눌러 왔다는 것. 스스로에게 족쇄를 걸고 감정을 죽이면서까지 백 년의 세월을 견뎌왔다는 것.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광인이 아닌, 인간으로 남고자 했다는 것.
“보아라, 배교자.”
인간, 켈르할름이 외쳤다.
그가 별을 움켜쥔 채 웃었다. 그날과 달리 지금의 켈르할름은 광기에 삼켜지지 않았다. 여전히 인간인 채로 백 년의 간극을 넘어 배교자의 앞에 섰다.
보아라, 배교자.
너는 내게 광기에 물들어 파멸하리라 예언했지만.
광증에 삼켜져 너와 같은 모습이 되리라 외쳤지만.
나는, 나 켈르할름 벨 아르티아는.
나의 의지로 이 땅을 두 발을 디디고 선 채.
광인이 아닌 인간으로서 네 앞에 섰다.
“이것이 내가 내놓은 답이다.”
밀려드는 파도의 앞에서.
켈르할름이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3.
켈르할름은 별에게 자신이 가진 영원과 함께, 자신의 마도를 바쳤다. 마도(魔道), 그것은 검사에게 있어 검로(劍路)와 같은 것이요, 마법사가 쌓아올린 탑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마법사의 삶 그 자체.
그리고 별은···.
【거래는 성립됐다.】
별은 켈르할름의 삶을 인정한다.
모든 것을 잃고, 광기에 휩싸인 채 파멸하리라 모두가 예상했지만··· 켈르할름은 그런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다. 저항하고 또 저항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백 년의 삶을 견뎌왔다. 그 길고 긴 삶이 가진 가치에 별은 정당한 대가를 매겼다. 켈르할름이 바친 영원에 마땅한 값을 매겼다. 그리하여 켈르할름에게 쥐어진 별빛은 그 무엇보다 찬란히 빛난다.
찬연한 빛이 범람한다.
하늘을 열던 배교자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라니엘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는 저주의 호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터져 나오는 빛을 보며 배교자는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 있는 광인··· 아니, 인간을 바라보며 배교자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최초의 성녀는 깨닫는다. 그날 자신이 한 예언이 틀렸음을.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곳까지 도달한 인간의 존재를.
“아하.”
배교자가 웃음을 흘렸다.
찬연한 빛.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새하얀 빛. 가장 순수한 그 빛은 무엇보다 아름답다.
그리고, 켈르할름은.
빛을 끌며 나아가는 인간은.
이 날을 위해 만들어낸, 오직 자신만의 주문을 펼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켈르할름을 중심으로 수백, 수천의 분열된 회로가 전개됐다. 전개된 회로가 일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별빛이 흐드러졌다. 흐드러진 별빛이 타올랐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하나의 점이 생겨났다. 점을 향해 불길이 빨려 들어간다. 백금색의 불길이, 켈르할름의 마나가 만들어낸 불길과 뒤섞였다. 그리하여 하나가 되어 타오르는 점은 그 무엇보다 밝게 빛났다.
이 주문에 붙은 이름은 일소(一消).
한 인간의 삶이 담긴 이 주문은, 인간이 재앙을 상대하기 위해 벼려낸 무기다. 거대한 영역을 ‘한순간’에 불태우는 데에 초점을 둔 주문.
켈르할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일소한다.
탁, 하고 켈르할름이 손가락을 튕긴 순간이다.
불길이 응축된 점이 한순간 크게 점멸했다. 점멸하는 극점이 만들어내는 것은 세찬 섬광. 섬광이 일대를 후려친 순간 대공동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번쩍.
레스티의 시야도, 저 멀리서 이곳을 바라보던 배교자의 시야도, 잊힌 신들과 분전하던 라니엘의 시야도, 그 모두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섬광은 소리마저 집어삼켜, 이윽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됐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정적 속에서.
해방된 열기가 모든 것을 일소(一消)했다.
일소(一消).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정적 속에서 열기가 범람했다. 한순간에 밀어닥치는 열기는 불의 형상을 띠지 않는다. 묘사하자면 차라리 빛의 파도에 가까우리라.
파도가 밀려온다. 빛이 범람한다.
범람하는 빛에 닿은 것마다 증발하고, 바스러지고, 검게 그을려서 기어코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아니, 재라도 남긴다면 그것은 운이 좋은 것이리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존재가 송두리째 지워진 것이 한가득 이다.
열의 파도가 밀려든다. 마치 재앙처럼.
저 높은 하늘에 떠올랐던 저주의 태양이 지닌 열기조차 이 빛의 격류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저주의 호수가 증발했다.
수증기로 변해 하늘로 솟구쳐, 다시 비로 내리려던 저주의 호수는 더는 그렇지 못하게 됐다. 먹구름이 머금은 수분마저 증발해버렸으므로. 빛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 남은 것이라곤 비쩍 마른 땅뿐이다.
고대의 재앙이 찰나의 순간 일소했다.
되살아났던 재앙이 증발해 사라지는 가운데, 빛의 파도는 멈추지 않고 뻗어 나간다. 1초를 한없이 잘게 쪼개 찰나라 불릴만한 시간 속에서 빛의 격류는 기어코 배교자가 서 있는 신전의 중심까지 뻗어 나갔다.
—————!
배교자를 감싸고 있던 잊힌 신들의 일부가 비명을 내질렀다. 거리가 멀어 열기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음에도, 신들의 살갗에 그을음이 번졌다.
그리고.
“···아아.”
배교자,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에게까지도.
“······.”
그녀는 말없이 제 한쪽 팔을 바라보았다. 살갗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불은 금세 꺼졌고 상처는 금세 아물었지만··· 그을음의 흔적만큼은 길게 남았다. 그 흔적을 바라보며 배교자는 웃었다.
···켈르할름의 삶은 기어코 재앙에게 닿았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초인의 삶은 재앙에게 흉터를 새겼다. 새김으로서 증명했다. 자신이 이곳에 서 있음을. 너의 예언이 틀렸음을. 자신의 삶이 무가치하지 않았음을.
허나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이 일격은 보잘것없을지도 모른다고.
금세 회복되고 말 상처. 흉터조차 아물고 말 흔적. 과연, 그 말대로다. 만약, 켈르할름이 제 마도를 바쳐 짜낸 최후의 일격의 목적이 배교자를 죽이는 것이었다면··· 이 일격이 지닌 가치는 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은 열었다.”
이 일격의 목적은 배교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켈르할름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르티아의 총학장 자리를 내려놓은 지 오래지만, 켈르할름은 여전히 교육자이자 앞서 걷는 선배다.
교육자이자, 선배의 역할은.
“가봐라.”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것.
아이들의 앞에 드리운 장애물을 치우고,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인도하는 것.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켈르할름이 팔을 들어 올렸다.
비쩍 마른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선 채, 켈르할름은 신전의 중심을 가리켰다. 중심을 가리키며 켈르할름은 어느 때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무대는 저곳이다.”
켈르할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볼 만큼의 힘이 남아있지 않았기에, 돌아볼 필요가 없었기에. 그리 앞을 가리키는 켈르할름의 옆을 누군가 스쳐 지나갔다.
탁, 하고 땅을 박차고.
레스티가 켈르할름의 옆을 지나쳐 앞으로 향했다.
그녀는 켈르할름이 멈춰선 곳의 다음으로 나아갔다. 켈르할름이 연 길을 따라 달렸다. 켈르할름의 일격이 지닌 가치는, 다름 아닌 그녀에 의해 결정 나리라.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켈르할름은 미소 지었다.
···제 수제자와 닮은 아이.
그녀의 뒷모습에서 셀레스티아를 떠올리며 켈르할름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몸에 남은 마나는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언제나 자신과 함께했던 힘의 근원이 사라진 가운데, 또 하나 무언가가 제 곁을 떠났다.
제게 주어졌던 영원.
영생의 삶이 켈르할름의 곁에서 떠나고 있었다. 마도(魔道), 마나, 마법사로서의 모든 것, 거기에 더불어 영원마저 벗겨진 지금··· 이곳에 남은 것은 마법사도 광인도 아닌 한낱 인간뿐이다.
한낱 인간, 켈르할름은 독백했다.
‘아아.’
그가 가벼이 웃었다.
“이걸로 된 거겠지, 셀레스티아.”
2.
검귀(劍鬼) 드라카.
한 평생 복수를 바라왔던 인간의 망집은 기어코 별의 족쇄를 풀어냈다. 족쇄에서 풀려난 드라카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의지로 제 앞에 펼쳐진 무대를 보았다.
심연의 끝, 신앙하지 않는 이를 위한 땅 알케이아.
눈앞에 있는 것은 배교자가 불러낸 걸작이요, 구정물의 파도와 함께 덮쳐드는 사역마의 무리다. 질척한 구정물을 바라보며 드라카는 과거를 떠올렸다. 제 영지가 모조리 녹아내렸던 그날의 기억.
···아아, 아르멜.
딸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모든 것을 빼앗겼던 그날을 드라카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 기억을 곱씹으며 드라카는 검을 쥔다. 검을 쥐고 앞을 향해 걷는다.
“당신···.”
그곳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이 하나 있다. 아니, 이제는 청년이라 불러야 하리라. 그 청년의 얼굴이 드라카는 낯이 익었다. 아마도, 그날 북부의 설산에서 마주했던 소년이리라.
시간이 흘러 소년은 청년이 됐다.
청년에게 느껴지는 것은 초인의 기세다.
고작 몇 년의 시간 만에 초인의 자리에 올라, 저만큼의 경지를 쌓아올린 청년을 바라보며 드라카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느끼는 것은 자신이 허비해온 시간이었으니.
···몇 년의 시간.
드라카가 인형으로 살아온 시간.
···몇십 년의 시간.
드라카가 복수에 미쳐 살아온 시간.
···한 평생.
누군가는 무언가를 이루고, 또는 납득하고, 또는 체념하며 제 삶에 만족하거나 아쉬워하며 죽어갈 시간. 그러나 드라카는 그 모든 시간을 허비해왔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소비해왔다. 낭비해왔다.
타오르는 하나의 불길. 그 불길에 드라카는 제 모든 시간을 장작 삼아 집어 던졌다. 불길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고, 여전히 드라카의 삶을 불태우고 있었다.
복수라는 이름의 불꽃.
그 불꽃에 휩싸이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삶도 눈앞의 저 청년처럼 반짝였다. 찬란히 빛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꿈꿀 수 없게 된 나날이다. 퇴색된 세월에 드라카는 더는 집착하지 않는다.
“아아···.”
드라카가 신음했다.
“정말이지, 최고의 무대로군.”
집착하는 것은 복수. 제 삶의 목적.
제게 남은 시간을 드라카는 망설임 없이 불길을 향해 집어 던졌다. 화륵, 하고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드라카는 검(劍)을 들어 올렸다.
그는 여전히 검사였고.
검사는 검으로 말하는 자였으므로.
3.
마수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드라카는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며, 드라카는 파도의 끝에 서 있는 마수의 왕을 보았다. 그를 향해 드라카는 걸었다.
스릉, 하고 드라카의 칼날이 길게 울렸다.
···드라카 반 하록트.
검귀, 드라카.
모든 것을 잃고 드라카란 이름만을 가지게 된 그는 언제부턴가 검귀(劍鬼)라는 이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지지 않는 그 모습이 꺼림칙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귀신이라 불렀다.
규탄하고, 지탄하고, 그를 손가락질 했다.
드라카의 삶은 그릇된 것이요, 결코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무엇으로도 포장될 수 없는 삶이다. 드라카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았다. 드라카는 알지 못했기에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알고도, 이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는 악(惡)을 행했다.
쓰레기 같이 살았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동료들을 손가락질 한 번으로 사지로 내몰았다. 오직 효율만을 추구하며 드라카는 타인의 삶을 짓밟았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복수만을 바라며 걸어왔다.
그런 삶 속에서 느꼈던 고통으로, 시련으로, 역경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미화할 필요를 드라카는 느끼지 못했다. 제 삶을 부정할 필요는 더더욱 느끼지 못했다. 어째서 그리해야 하는가?
키이이이이이잉!
드라카의 검이 길게 떨렸다.
솟구치는 검기와 함께 드라카의 눈앞에 검의 길이 보였다. 그 길은 조잡하다. 거칠다. 부드럽고 깔끔하기는커녕 난잡하기 짝이 없는 길이다.
그것이 드라카의 삶이다.
제 눈앞에 펼쳐진 검로(劍路)에서 드라카는 자신의 삶을 마주했다. 끔찍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길이지만, 그 길은 드라카 자신이 그려낸 길이다. 검사가 자신의 길을 믿지 않아서는 안 될 노릇이다.
드라카는 제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린 길을 따라 검을 휘두른다.
스겅.
드라카가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휘두른 검 끝에서 그물처럼 검기가 펼쳐졌다. 펼쳐진 그물이 밀려드는 마수들을 가두었다. 도륙 냈다. 사방으로 핏물이 튀어 오르는 가운데 드라카는 검을 휘두른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악!
피안개가 피어올랐다.
마수의 파도를 헤치며 드라카는 나아간다. 마수들이 피를 흘릴 때마다 드라카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드라카의 입꼬리가 쭉 찢어지며 그는 광소했다.
“와라.”
그가 웃었다.
“얼마든지 와라. 얼마든지 물어뜯어라.”
마수가 드라카를 물어뜯었다. 제 살점을 탐하려는 짐승을, 드라카는 손으로 움켜쥐어 터뜨렸다. 검을 휘둘러 조각냈다. 쏟아지는 핏물을 마시며 드라카는 검을 휘둘렀다.
짐승보다도 더 짐승 같은 모습이다.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마수들 사이를 헤집는 드라카의 모습은, 그야말로 검을 든 귀신과도 같다. 귀신이 마수들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
드라카가 괴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웃음소리 같기도, 비명 같기도 하다. 광소하는 드라카의 눈동자는 눈앞에 펼쳐진 검의 길을 보고 있다.
···드라카는 안다.
자신에게 남은 삶이 얼마 되지 않음을.
자신이 종막을 향해 걸어가고 있음을. 그것을 알기에 드라카는 기꺼이 선택했다. 제 남은 삶을 이 자리에서 모조리 불태우고자.
언제나 하던 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드라카는 복수를 갈망한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목숨이라 한들 마찬가지다. 드라카는 더는 효율을 계산하지 않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제 남은 삶을 모조리 불사 질렀다.
화륵.
삶을 장작 삼아 검로가 타올랐다.
눈앞에 펼쳐진 검로가, 서서히 뒤바뀌기 시작한다. 뒤흔들리고 불타기 시작하는 검로. 그 검로는 마치 드라카에게 질문하는 것과도 같다.
이 길이 맞는 것인가.
이렇게 뒤틀리고, 비틀린 길이 맞는 것인가?
그 의문에 드라카는 조금 전과 같은 답을 들려줄 뿐이다. 어째서 부정해야 하는가? 이것이 내가 걸어온 길이다. 그릇됐을지언정 이건 나의 길이다.
카가가가가가가각가각!
드라카의 검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검이 아니라 톱날로 긁어 헤집는 듯한 검기가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검기에 닿은 마수들은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죽어간다.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치면서.
쿠웅.
욕해라. 얼마든지.
비웃어라. 얼마든지.
손가락질하고, 규탄하고, 지탄하고, 얼마든지 나를 욕해라. 내 삶은 그래 마땅한 삶이다.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더.
‘그래도 상관없다.’
드라카가 검을 휘둘렀다.
‘나는 나의 길을 걷는다.’
조금전보다 빠르게, 더욱 난잡하게. 드라카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구정물이 휩쓸렸다. 피칠갑을 한 채 드라카는 앞으로 걷는다.
불타는 검로(劍路)는 어느덧 선명해졌다.
목숨을 버렸기에.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보고 걸어왔기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제 종막을 보고도 망설이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드라카의 검은 완성된다.
고집으로서 완성된 검이다.
그리 완성된 검로는 완벽하지 않다.
조잡하다. 부드럽지 않고 거칠다. 올곧지도 않으며 때로는 휘어지고, 구부러져서 난잡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 그의 검이 그리는 궤적을 보았을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그것이 드라카의 검이다.
그것이 바로 드라카의 삶이다.
비틀렸을지언정, 망가졌을지언정, 옳지 않을지언정, 드라카는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왔다. 스스로를 포장하려 들지 않았으며, 누군가에게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다.
검귀, 드라카는 그런 인간이다.
갈라할과 같이 찬란하고 숭고한 길을 걷는 인간이 있다면, 세상 어느 구석에는 비틀리고 뒤틀려선 악취로 진동하는 길을 걷는 인간도 있는 법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길을 고집해온 인간은 종막에 도달한다.
드라카가.
검귀(劍鬼)가.
귀신이,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는 귀신의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검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귀신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도륙내며 나아간다. 흐드러진 핏물과 함께 귀신은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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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라, 배교자.
나는 여전히 초라한 인간인가?
한 인간이 걸어온 생(生)이 불타올랐다.
검귀, 드라카의 삶이 타올랐다.
그가 걸어온 길이 타들어 가며 풍기는 향은 결코 고아하지 않다. 지독하고 매캐하며 독기가 가득하다. 독기를 품은 채 귀신은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악!
검이 한 뼘 움직일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토막 난 마수들의 살점이 후두둑, 떨어지고 치솟은 핏물은 피안개 되어 시야를 가렸다. 피와 살점이 가득한 초원에서 귀신은 날뛴다.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마수들을 모조리 도륙내며 귀신은 나아간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수들의 시체가 무더기처럼 쌓였다. 끝이 없을 것 같아 보이던 마수의 군세도 무한한 것은 아니라는 양, 서서히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움찔.
왕의 명령 아래 공포를 상실한 채 달려들던 마수들의 무리가, 어느 순간부턴가 드라카의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눈앞의 귀신에게서 짐승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저것은 과연 인간인가?
그리 짐승들이 멈춰선 사이에도 드라카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핏물을 뒤집어쓴 채 사지를 향해 제 몸을 몇 번이고 내던졌다. 아가리를 벌린 마수들의 사이로 뛰어들어, 그들을 모조리 찢어발기고 튀어나오기를 반복한다.
“와라.”
드라카가 광소했다.
“더 많이, 더, 더···.”
피칠갑을 한채, 만신창이인 몸으로도 웃음을 터뜨리며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귀신이란 단어를 가장 먼저 연상케 한다.
쿠웅.
그리고, 마수의 왕이 움직였다.
공포에 질린 마수들을 짓밟고, 쥐어 터뜨리며 마수의 왕은 귀신을 가리켰다. 어서 앞을 향해 달리라고. 앞에는 귀신, 뒤에는 두려운 왕. 이제 마수들은 어느 쪽을 골라도 죽음뿐이다.
————!
마수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드라카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모조리 갈려나가 육편이 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수의 왕은 검을 들어 올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물과 살점 사이.
귀신과 마수의 왕은 서로를 마주했다. 붉게 충혈된 드라카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 마수의 왕의 눈동자가 싯푸르게 번들거렸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앙!
전조없이 울려 퍼진 마찰음.
귀신과 짐승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울려 퍼진 소리가 채 가라앉기 전에 다시 카앙, 또 카앙··· 검과 검이 요란스레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2.
마수의 왕의 기억을 이어받은 이 짐승은, 마수의 왕 바르타와는 별개의 존재다. 기억을 이어받았다곤 하나 짐승에겐 바르타와 같은 긍지가 없다. 검사라는 인식이 희박했다.
짐승이 지닌 것은 왕의 권위, 그리고 모든 마수의 정점에 선 존재로서의 오만이다.
그것은 약자의 자만이 아니다. 강자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선 존재가 응당 지녀야 할 여유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마수의 왕에겐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
카아아아앙!
본래 조잡한 뼈대에 구정물로 채워져 조잡해야 할 짐승의 육체는, 지금 잊힌 신들의 권위로 하여금 완벽에 가까워졌다. 바르타의 육체와 견줄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다.
강인하기 짝이 없는 육체. 완벽한 육체.
그런 몸으로 짐승이 펼치는 것은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검술들이다. 그 검술의 묘리를 이해하지는 못하나, 그 검술을 흉내 낼 육체가 짐승에겐 있었다.
캉, 카앙. 카아아아앙!
그리하여 짐승이 검을 휘두르는 가운데, 짐승은 짙은 위화감을 느꼈다. 눈앞의 인간이 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건드리기만 해도 치워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인간이 쓰러지지를 않는다.
카아아아아앙!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얼핏 보면 짐승과 드라카는 호각을 이루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치 상황이 길게 이어지진 않으리라.
월등한 육체 능력과 무겁기 짝이 없는 검.
그 두 개가 맞물리며 만들어낸 짐승의 일격 일격이 드라카의 몸을 뒤흔들었다. 삶을 장작 삼아 피워낸 불길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우득.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검을 쥔 드라카의 손가락에서, 땅을 디디고 선 발목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수들이 할퀴고 물어뜯은 상처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피가 흐른다. 삶이 빠져나간다.
제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하염없이 흔들림을 드라카는 보았다.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꼈다.
‘아아.’
하지만.
‘보인다, 보인다, 보인다···.’
여전히, 드라카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한계까지 확장된 동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 눈동자는 눈앞의 짐승을 보지 않는다. 드라카가 보는 것은 자신이 그리는 검의 길이다.
검의 길, 자신의 삶, 검로(劍路).
드라카는 자신이 휘두르는 검에 몰입했다.
검이 휘둘러져야 할 길만을 보았다. 바라보는 것은 오직 자신의 길 뿐. 그외에 부차적인 것들은 드라카에게 있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아무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
독선적이고도 이기적인 인간.
자신의 길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경지에 도달한 그다. 귀신은 제 삶이 마지막으로 타오르며 만들어내는 불길을 보았다.
지독한 악취와 함께 타오르는 불의 길.
타오르다 못해 재가 되어버리는 검의 길이 드라카의 눈에는 보였다. 멋지군. 저것이 자신의 마지막 일격이리라. 드라카는 발을 내려찍었다.
쿠웅, 하고 울리는 땅.
드라카의 검이 움직였다.
어느 때보다 빠르게, 어느 때보다 거칠게, 어느 때보다 사납게. 마지막으로 치솟아오른 검기는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이 거세게 날뛰었다.
난검(亂劍).
귀신의 검이 움직였다.
기술에 붙은 이름은 없었다. 자신의 삶에 붙일 이름을 드라카는 찾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게 드라카가 제 삶의 마지막이 될 일격을 준비한 순간, 짐승은 무심코 뒤로 물러섰다.
기세에서 밀렸기에 뒤로 내디딘 한 걸음.
자신이 뒷걸음질쳤다는 사실에 짐승은 분노한다. 짐승 역시 검을 움켜쥔다. 그 어느 기억보다 강렬하게 남은 어느 검사의 검을 떠올렸다.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그 검사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일격을, 마수의 왕은 흉내 낸다. 그리하여 짐승이 걸어내는 검로는 그 무엇보다도 완벽하다. 아름답기 짝이 없는 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최강의 검사가, 가장 고고했던 최초의 용사가 걸어왔던 길을 흉내낸 검로(劍路)다.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길.
그 길에 맞부딪치는 것은 드라카가 걸어온 길이다. 귀신의 길은 그 검로에 비하면 보잘것없으리라. 허나, 길과 길이 맞부딪친 순간 밀려나는 것은 짐승이 휘두른 검이다.
···만약에, 지금의 상황을 짐승이 아닌 마수의 왕 바르타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필시 코웃음을 쳤으리라. 그리곤 경멸을 담아 짐승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검에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카, 가가가가가가각각!
이름조차 없는 난잡한 검은 짐승의 검을 압도했다. 짐승의 검을 밀어내며 드라카의 검이 한 뼘만큼 더 앞으로 나아갔다. 검이 낮은 궤도를 그리며 짐승의 다리를 할퀴었다.
스겅.
짐승의 오른 다리가 떨어졌다. 마치 잡아 뜯어낸 듯한 거친 절단면. 휘청, 하고 짐승은 균형을 잃으면서도 검을 다시 휘둘렀다. 그 검을 드라카는 피하지 않았다.
서걱, 드라카의 오른팔이 떨어졌다.
한 손으로 검을 쥔 채 드라카는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그렇게 검을 휘둘렀다. 검을 쥐고 있는 짐승의 오른팔을 찢어발겼다.
투확.
치솟는 핏물과 함께 짐승의 오른팔과 대검이 지면에 떨어졌다. 검을 놓친 순간 짐승의 왼팔이 움직였다.
콰득!
짐승의 손아귀가 드라카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길게 뻗은 손톱이 드라카의 눈구멍에 파고든 나머지, 드라카의 시야 절반이 붉게 물들었다.
촤악.
그대로 짐승이 힘을 주어 드라카의 머리를 터뜨리려는 순간, 드라카의 검이 짐승의 왼팔을 베어냈다. 두 팔을 잃은 짐승의 품을 향해 드라카는 가볍게 한 걸음 내디뎠다.
난검, 그리고 연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자신의 검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종점을 찍기 위해 드라카는 검을 휘둘렀다. 어쩌면 자신의 삶을.
카가가가가가각!
그 마지막조차 담백하지 않다.
요란스럽고, 난잡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 마지막까지 처음과 같은 검이다. 귀신의 검은 짐승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고도 더 나아가, 그 몸을 양분했다.
서걱.
인간의 검이 재앙을 베었다.
인간의 집념이 재앙을 갈랐다.
3.
쿠웅, 하고 마수의 왕이 무릎을 꿇었다. 마수의 왕은 고꾸라졌으나 드라카는 여전히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다. 그의 시선은 저 너머를 향했다.
마수의 왕이 쓰러지며 열린 길.
저 길의 너머에는 배교자가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원수가, 한평생 자신이 쫓아온 적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드라카는 깨달았다. 자신은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났다.
이리될 줄 알고 있음에도 검을 휘둘렀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가. 어째서, 저 앞에 놓인 원수에게 닿지 못할 것을 알고서도 이런 무대에서 목숨을 내던졌는가. 그 물음에 드라카가 들려줄 대답은 언제나와 같았다.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테니.
드라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재앙에게 닿을 칼날이 있다. 잿빛이 벼려낸 칼날이다. 드라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드라카는 판단한 것뿐이다.
저 칼날을 배교자에게 보내는 것이, 배교자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변수일 것이라고.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이루지 못한단 사실은 아쉬우나···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됨을 깨달은 인간은 결국 선택하는 법이다. 드라카는 선택했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
라크가 드라카를 보았다.
드라카가 라크를 보았다.
“당신, 왜···.”
“널 위해 연 길이 아니다.”
드라카가 라크의 말을 끊었다.
“잿빛이 나를 이용했듯이 나도 너를 이용할 뿐이다. 내가 저곳에 가는 것보다 온전한 상태의 너를 보내는 게 더 도움이 될 거 같으니.”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 중얼거리며 드라카가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검을 드라카는 라크에게 던졌다. 허공을 맴돌던 검이 콱, 하고 라크의 발치에 박혔다.
“가져가라.”
그것은 곧 드라카의 삶이자 반신.
검사에게 있어 검은 영혼의 일부이므로.
“어딘가엔 도움이 될 테지.”
그리 중얼거리며 드라카는 이제는 비어버린 손으로 길을 가리켰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 열어낸 길을.
“가봐라, 신성.”
라크는 말없이 제 발치에 박힌 검을 뽑아들었다. 피로 물든 검. 검을 허리춤에 찬 채 라크는 짧게 검례를 올렸다. 드라카란 인간이 아닌, 경지에 오른 검사에게 경의를 표하며.
검례를 마지막으로 라크가 드라카를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나티다는 드라카의 곁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
나티다는 말없이 드라카를 보았다.
제 삶을 바쳐 검을 휘두른 인간. 눈앞의 인간은 비어버린 껍질과도 같다. 죽음만을 앞둔 인간. 그 인간을 향해 나티다는 질문을 던졌다.
“남길 말씀은 있으세요?”
“반드시 죽여라.”
그 질문에 귀신은 답했다.
“그러기 위해 버린 목숨이다.”
마지막까지 인간은 귀신이길 선택했다.
영지를 잃고, 딸아이마저 잃어 마침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약한 인간이 아닌··· 복수만을 바라는 귀신이기를 갈망했다.
“반드시···.”
그리 중얼거리는 드라카의 곁을 나티다는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나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드라카는 천천히 팔을 떨어트렸다.
···그의 무대는 끝났다.
무대의 끝, 종막, 그토록 기다리던 파멸.
드라카의 내면에 타오르던 불길이 소리 없이 꺼졌다. 불이 꺼지고 남은 것은 어둠뿐이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드라카의 눈이 감겼다.
마지막의 순간 떠오른 것은 딸 아이의 얼굴.
그것이 귀신이길 갈망한 인간이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풍경이었다. 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인간은 눈을 감았다. 그 눈이 다시 떠질 일은 없으리라.
그것이.
스스로가 귀신이길 바란 인간의 최후였다.
저주를 비추는 해는 떨어졌다.
저주에 잠식된 호수는 증발했다.
마수의 왕은 도륙 났다.
자신이 되살려 낸 고대의 재앙들과의 연결이 하나둘 끊어지는 지금, 배교자가 느끼는 것은 놀라움이다. 순수한 감탄. 그 부활이 불완전했다고 한들··· 되살아난 재앙들이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님을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
고대의 재앙.
한때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거대한 벽.
카르디가, 가니칼트가, 벨리알이, 그리고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넘어왔던 벽들. 그 거대한 벽을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넘지 못하리라 배교자는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과거를 잃고, 진실을 잊은 거짓된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백 년에 백 년을 더하고 또 더해, 그리하여 수백 년의 시간이 흘러도 그들이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리라 배교자는 확신했다.
그렇기에 넘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닿지 못하리라.
다음으로, 다시 다음으로. 그리 외쳤던 성녀의 믿음이 깨지는 데 수백 년의 세월은 충분하고도 남았으니. 하지만···.
“······.”
배교자는 말없이 앞을 보았다.
말없이 바라본 그곳에는 계약의 후인(後人)이 있다. 모든 과거를 되찾고, 진실을 깨달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존재가 있다. 그녀의 예상을 깨부수고 이 자리에 도달한 존재.
라니엘 반 트리아스.
이 시대의 용사이자, 잿빛의 뜻을 이은 아이.
“그렇구나.”
배교자는 웃음을 흘렸다.
과연, 이제야 알겠다.
저 후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잿빛을 이은 저 아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배교자는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반드시.」
언젠가, 아직 저 아이가 모든 진실을 깨닫지 못했던 어느 날 저 아이는 말했더랬다.
「반드시, 나는 네 모든 것을 짓밟는다. 네 모든 것을 부정해서, 네가 틀렸음을 증명한다.」
네 모든 것을 짓밟아주겠노라고.
네가 말하는 구원이 틀렸음을, 그리하여 네가 걸어온 모든 길이 틀렸음을 증명해주겠노라고.
「반드시.」
오래전 저 아이는 그리 맹세했고, 그 맹세에 배교자는 비웃음으로 답했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과거를 알지도 못하는 네게, 거짓된 지금을 살아가는 네게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냐고 조롱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증명하러 왔다.」
「네가 틀렸음을.」
저 아이는 기어코 여기까지 왔다.
모든 진실을 깨닫고 계약의 후인이 되어서, 자신을 부정하고자 이 자리에 섰다. 모든 진실을 깨닫고서도 저 아이의 선택이 변하지 않았음을 배교자는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저 아이는 자신을 짓밟고자 한다.
배교자(背敎者) 글레투스가 걸어온 길을, 그녀가 살아온 모든 삶을 부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저 아이가 말하는 부정은 오직 한 명의 영웅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배교자에 의해 망가졌던 이들.
그녀가 걸어온 길에 의해 뭉개진 이들. 그들로 하여금 비로소 배교자의 삶은 부정될 수 있다.
그렇기에, 저 아이는 데려온 것이다.
이미 망가진 삶, 망가져 버린 길, 그럼에도 그 길을 계속해서 걷고 있는 이들을. 아직까지도 바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을··· 저 아이는 이곳까지 인도했다.
그리고, 인도된 이들은 답을 내놓는다.
배교자가 상상치 못한 답을.
「이것이 내가 내놓은 답이다, 배교자.」
배교자가 자신과 같은 광인이 되리라 비웃었던 어느 마법사는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았다. 인간인 채로 배교자의 예언을 부정했으며, 그녀가 세운 벽을 허물어트렸다.
「보아라, 배교자.」
「나는 여전히 초라한 인간이더냐?」
모든 것을 잃은 인간.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비루한 인간이라며 그녀가 비웃었던 어느 검사는, 귀신이 되어 배교자를 물어뜯었다. 그녀가 만든 무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던 이들.
···아무것도 아닌 채, 끝나리라 여긴 이들.
그저 그녀가 지나간 길에 깔려 뭉개져선, 작은 걸림돌조차 되지 못했던 이들. 그런 이들을 후인은 이 자리까지 인도해, 배교자의 예상을 벗어난 결과를 만들었다. 그녀가 만든 무대를 엉망으로 만듦으로써 증명했다.
네가 틀렸음을.
너의 예언이, 예상이, 확신이 틀렸음을.
그리하여 네 모든 것이 그릇됐음을.
“이게, 네가 말하는 부정이구나.”
배교자는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이것이야말로 배교자(背敎者)를 부정하는 방법이다. 확실하게, 치명적이게, 철저하게.
“하지만 말야.”
하지만, 하고 배교자는 묻는다.
“모든 게 그리될 것 같니?”
모든 게 네 뜻대로 될 것 같냐고.
글레리아는 알고 있다. 눈앞의 후인이 아르미엘, 그 사람과 놀라우리만치 닮았다는 사실을. 최선을 갈구한 나머지 스스로에게 족쇄를 거는 미련한 삶의 방식 또한 닮았음을.
그 미련함을 사랑한 글레리아이지만.
동시에, 그런 이를 어떻게 무너트리는지 글레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 내버려 둘 것 같니.”
배교자의 시선은 아직 남은 하나의 재앙을 향했다. 저주를 품은 토지의 주인, 아바돈. 그 재앙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물론 저 재앙마저 언젠가 쓰러지리라.
‘필시 그리되겠지.’
저곳에 있는 아이는 벨리알의 뜻을 이은 아이가 아니던가. 쓰러트릴 수 있고말고. 과거 벨리알이 그러했듯, 저 아이 또한 거센 폭풍을 일으켜 재앙을 토벌하고 마리라.
‘다름 아닌 카르디와, 벨리알이 선택한 아이야. 반드시 그리되겠지.’
배교자는 제 동료들의 안목을 신뢰한다. 그들의 뜻을 잇는 이들만큼은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말야?
배교자가 웃음을 흘리며 손짓했다.
그녀가 손짓하자 하늘로 솟구치던 구정물들이 일거에 걷혔다. 걷힌 구정물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바돈과 대치하고 있는 한 명의 소녀다. 배교자 자신과 닮은 소녀.
그 소녀를 바라보며 배교자는 웃었다.
···과거 만신(萬神)들은 인도자란 존재를 끔찍하게도 혐오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신들의 미움을 샀던 것은 단 한 명의 인간이다. 규율이란 이명을 가진 인간.
규율의 글레투스.
배교자가 지닌 영혼의 원본이 되는 존재.
하지만, 지금의 배교자는 그녀로부터 너무나도 멀어졌다. 망가지고 뒤틀린 배교자는 더는 그녀와 닮지 않게 됐다.
하지만, 저곳에 있는 소녀는 아니다.
아직 순수한 상태의 저 소녀의 영혼은 규율이라 불리던 존재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그 존재가 신들의 역린(逆鱗) 임을 배교자는 알고 있다.
‘신들이 두려워한 존재는, 고룡의 마법사. 인도자 요르문 반 드라고닉.’
하지만.
‘가장 혐오했던 존재는, 무슨 짓을 벌여서도 짓밟고자 했던 인간은··· 규율의 글레투스.’
자신이 손에 넣었던 진실.
그것을 곱씹으며 배교자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을 뻗었다. 뻗어서, 저 너머에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보아라.”
그녀가 입을 열어 속삭였다.
그녀의 속삭임에 잊힌 신들은 귀 기울였다. 그녀의 손짓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곳에 규율이 있다.”
규율(規律). 결코 잊을 수 없는 단어.
끽, 끼기기기긱.
그 이름에 잊힌 신들은 반응한다.
그들의 고개가 모조리 돌아갔다. 배교자의 곁을 지키던 신들의 시선은 저 너머에 있는 클로에를 향한다. 그 영혼을 바라본 순간 신들의 안광이 뒤흔들렸다.
“너희가 증오해 마지않는 규율이.”
툭, 하고.
“저곳에 있다.”
배교자는 자신이 쥐고 있던 잊힌 신들의 목줄을 놓았다.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는 양. 그렇게 잊힌 신들의 통제권을 배교자가 놓은 순간이다.
쿠웅.
땅이, 하늘이, 공기가, 그 모든 것이 뒤흔들렸다. 잊힌 신들이 포효한다. 그들은 포효하며 소녀가 있는 곳을 향해 질주했다.
카카카카카카가가강!
신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라니엘이 사방에 흩뿌려둔 사슬을, 역린을 자극당한 신들은 모조리 끊어내며 움직였다. 규율이란 단어를 들은 순간부터 그들의 움직임은 뒤바뀌었다.
쿵, 쿠웅.
그들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움푹 파이고, 땅이 뒤흔들리며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그 모습을 흘겨보며 배교자는 웃었다. 더없이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래도.”
배교자가 라니엘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신들의 핏물을 맞으며, 신들의 시체 위에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배교자가 미소 지었다.
“이래도, 내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니?”
너는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하지만.
나는 너의 작은 것 하나만을 부정해도 된단다.
“후배야.”
배교자가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너무 어려운 길을 고르지 마. 무너져. 망가진단다. 네가 바라는 최선을 타인에게 기대지 마. 네가 책임질 수 있는 건 오직 네 자신뿐이란다.”
글레리아는 보았다.
라니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그녀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소녀를 향해 질주하는 신들을 향하고 있음을.
“이것 보렴.”
흔들리는 라니엘의 눈동자를 가리키며.
배교자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기울였다.
“벌써 무너지려 하지 않니.”
라니엘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글레리아를 지나쳐, 클로에를 향하는 신들에게 손을 뻗고자 하나···.
콱.
라니엘의 팔을 글레리아가 움켜쥐었다.
“다시 말해줄까?”
글레리아가 라니엘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졌어, 아이야.”
하늘에서 거대한 주먹이, 발이, 철퇴가 떨어졌다. 글레리아가 붙잡은 라니엘을 향해 잊힌 신들이 달려들었다.
굉음과 함께.
처음으로 라니엘의 자세가 무너졌다.
2.
후두둑, 하고 핏물이 길게 튀었다.
결계의 정면이 아닌 땅 아래서 위로 치솟은 나무줄기. 클로에의 발치에서 튀어나온 줄기에 꿰뚫린 것은 그녀가 아니다.
“끄으윽···.”
줄기에 꿰뚫린 것은 찰나의 순간 클로에를 밀치며 자리를 바꾼 데스텔이다. 신음을 흘리면서도 데스텔은 대방패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구우우웅!
진동하며 대방패의 결계 범위가 확장됐다. 지면을 뒤덮은 결계가 나무줄기를 끊어낸 순간, 데스텔이 급히 제 팔과 종아리를 꿰뚫은 나무뿌리를 움켜쥐었다.
“크읍, 큭···.”
꿰뚫린 순간부터 곧장 체내에 뿌리를 내리고선, 양분을 빨아들이며 자라나는 나무뿌리다. 좀처럼 뽑히지 않는 뿌리를 데스텔은 온힘을 다해 뽑아냈다.
시야가 몇 차례고 번뜩이는 고통.
뿌리를 뽑아내는 과정에서 데스텔의 피부가 길게 벗겨졌다. 핏물이 후두둑, 하고 바닥에 쏟아졌다. 데스텔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뽑아낸 뿌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클로에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데스텔은 억지로나마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조차 허술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뭐해. 빨리 주문 안 외우고.”
데스텔이 다시 대방패를 움켜쥐었다.
캉, 카가강! 하고 뿌리가 대방패를 후려치는 굉음 속에서 클로에는 다시 마나를 끌어 올렸다.
‘···더럽게 아프군.’
데스텔은 후두둑, 떨어지는 핏물을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용사의 치유력으로도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다. 뻗어 나간 뿌리가 상처를 잔뜩 헤집어 놓은 탓일까? 그야 어쨌든.
“······.”
데스텔은 말없이 앞을 보았다.
솟구치는 뿌리들 사이를 내달리며, 거목을 향해 접근 중인 벨노아가 보였다.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선 수많은 회로를 전개하고 있는 클로에가 있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떨고 있지 않다.
저만한 적을 앞에 두고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둘은 겁에 질리기는커녕 승리로 향할 길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데스텔에게 있어선 마냥 신기하게 느껴질 뿐이다.
어떻게 저러냐, 도대체.
전장에 있다 보면 데스텔은 종종 이런 감상을 느끼곤 했다. 전장의 기사들에게서,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에게서, 혹은 제 동료에게서.
‘두렵지가 않나? 죽음이, 목숨을 건다는 것 자체가 두렵지가 않은 건가?’
자신의 손짓 한 번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기사들. 군말 없이 사지로 기어들어가는 병사들. 이룬 것이 많음에도, 그것이 아깝지 않다는 양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실력 있는 강자들.
···그 모든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야 자신은 두려웠으니까.
미친 듯이 두렵다. 지금도 심장이 쉴 새 없이 뛰고 있다. 조금 전 자신을 꿰뚫은 나무줄기가,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가 심장을 꿰뚫었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그 두려움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다. 데스텔은 보았다. 대방패를 쥔 자신의 손가락이 덜덜덜 떨리고 있음을.
‘···나는 이렇게 두려운데.’
물론 데스텔도 안다.
저들도 두렵지 않은 게 아니겠지. 두려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그 라니엘조차 말하지 않았나. 두렵지만, 후회하지 않기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라고.
‘도대체···.’
하지만 동시에 데스텔은 묻는다.
어떻게 하면 떨지 않고 저렇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냐고.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하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냐고.
‘모르겠다, 나는···.’
데스텔은 알 수 없었다. 죽음이 너무나도 두려웠으니까.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전장이 끔찍하게도 싫었으니까. 이 공포를 극복할 방법을 데스텔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저 데스텔은 이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이 모든 상황이 끔찍하게 싫지만, 모든 책임을 내던지고 이 자리에서 도망칠 용기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도, 그 어느 것도 데스텔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겁쟁이겠지.
그러니, 비굴이라 불리는 것이겠지.
“장전.”
그리 이도 저도 못한 채 방패를 붙잡고 있자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