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27
그 장소를 한 명의 인간이 지키고 있었다.”
무너진 돌기둥에 걸터앉은 사내가 연초를 꼬나물었다. 불을 붙인 필요는 없었다. 하늘에서 내리고 있는 잿가루가 연초의 끝에 맞닿은 순간 치이익, 하고 불길이 타올랐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은 남자가 턱을 괸 채 데스텔을 바라봤다.”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래, 일단 상투적인 표현으로 시작해볼까.””
남자가 피식 웃었다.”
“나는 너다.””
데스텔이 데스텔을 가리켰다.”
“실패한 미래에서 온 너.””
* * *”
실패한 미래에서 온 자신.”
그 사실은 이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해가 되진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그런 데스텔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탁한 연기가 데스텔의 시야를 가렸다.”
“그래서, 어땠지?””
연기 사이로 목소리가 울렸다.”
“본래대로라면 네가 겪었어야 할 미래는.””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데스텔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악몽이었다. 끔찍했어. 나한테 뭘 바라길래 같은 꿈을 계속 꾸게 하는 거냐? 뭐, 보고 배우라고?””
배교자 토벌전이 끝난 그날부터 줄곧.”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데스텔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악몽과 마주해야만 했다. 데스텔이 제 눈가를 꾸욱 누르며 한숨을 토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건데?””
“그걸 보고도 깨달은 게 없냐?””
“뭐?””
“하긴, 없으니까 내가 여기까지 온 거겠지.””
치이익. 연초를 손등에 비벼끈 미래의 데스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뚝, 뚜둑 하고 가볍게 몸을 푼 뒤 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그가 두른 용사의 정복이 크게 펄럭였다. 핏물로 얼룩져 검붉어진 정복. 넝마가 되어버린 성의(星衣)가 펄럭인 순간 풍경이 일변했다.”
“네가 본 건 미래이지만, 과거이기도 하다.””
신을 잃은 신전.”
수북이 쌓여있던 잿더미가 돌연히 불어온 바람에 흩날렸다. 흩날리는 잿더미 사이로 신전의 바닥이 드러났다. 바닥에는, 수많은 무구가 꽂혀 있었다.”
부러진 창날. 부러진 검. 박살 난 방패.”
수많은 무기들이 꽂혀있는 무덤. ”
무덤에 꽂힌 무기들이 데스텔의 눈에는 낯이 익었다. 저건, 하고 데스텔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저 모두가 용사들의 무구였으니. 자신이 모방했던 무구였으니까.”
콱, 하고.”
그 중 하나를 미래의 데스텔이 움켜쥐었다. 부러진 창날. 갈라할의 성창(星槍)이었다. 그러나 데스텔이 알고 있던 빛나는 성창과는 달리··· 저것은 피가 눌어붙어 검붉게 변해 있었다.”
“내가 보았던 미래. 내가 보았던 악몽. 그 모든 건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다. 회귀하면 그 모든 게 없던 일이 될 거라고,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녀석은 굳게 믿었지만···.””
그가 피식 웃었다.”
“그건 아니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런게 용납될 리가 있나.”
그리 중얼거리며 그가 부러진 성창을 고쳐 쥐었다.”
“모든 건 일어났던 일이다. 내 실수. 그 녀석의 실수. 크고 작은 실수가 모이고 모여서 벌어진 재앙. 죽어야만 했던 사람. 잃어야만 했던 이들. 희생돼야만 했던 수많고 수많은 기사와 영웅들.””
내가 마셔야 했던 핏물.”
지금 이곳에 흐르고 있는 피. ”
피를 머금은 무구.”
“그 모든 건 지워지지 않아. 그들이 흘린 핏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네가 밟고 있는 땅을 다질 거름이 되었을 뿐이지, 그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쿵, 하고 그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때 나는 네게 물었다.””
잿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후회하지 않냐고, 나와 다르게 살고 있냐고, 나와 다른 결말에 도착할 수 있냐고, 그때의 나는 네게 물었다.””
배교자 토벌전에서 보았던 풍경.”
핏물의 끝에 서 있는 미래의 자신이 던진 질문.”
“그 질문에 너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했지.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 답했다.””
그 질문에 데스텔은 그렇게 답했다.”
그 대답을 미래의 데스텔은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비로소.””
『계약 전에 한 가지 조건을 추가해라.』”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네가 과거로 돌아가 바꿔낸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다 한들··· 그곳의 나는 여전히 겁쟁이일 거다. 비굴(卑屈)에 불과하겠지.』”
그는 언젠가 신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니 내가 내게 묻겠다.』”
『자격이 있는지. 계약의 이행은 그다음이야.』”
“계약은 성립됐다.””
비굴(卑屈). 낮게 굽힌 채 한평생을 후회하며 살아왔던 어느 용사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이, 비굴(非屈).””
“······.””
비굴(非屈). 더는 굽히지 않기로 결심한 어느 용사는 말없이 미래의 자신을 바라봤다. 미래의 자신이 겨눈 피로 물든 창을 바라봤다.”
“나는 그 녀석과 계약했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그 녀석의 첫 번째 사도이지. 비록 이 시간대의 내게 기생하여 존재하는 게 고작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 존재한다.””
녀석의 대리인으로서.”
그리고, 분명히 존재했던 과거의 증거로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대표하여 나는 네 앞에 서서, 네게 묻겠다.””
무엇을, 하고 비굴(非屈)은 질문했다.”
자격을, 하고 비굴(卑屈)은 답했다.”
“배교자에게 한 방 먹였다고 자만했나?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고 우쭐해졌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영웅이라도 된 것 같았나?””
미래의 데스텔이 비웃음을 흘렸다.”
“집어치워라. 내게 증명해라. 네가 내가 도달하지 못한 곳에 도달할 수 있음을. 지금 네게 닥쳐올 시련을 능히 뛰어넘을 힘이 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자격이 없음이 드러난다면.”
그리되고 만다면.”
“그 몸을 가지는 건 내가 될 거다.””
“출발하겠습니다.””
이른 아침, 모두가 각자의 무대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라크 반 그레이스는 북서쪽의 끝, 버려진 신전으로. 그를 제외한 남은 인원들은 전부 북쪽의 끝, 얼어붙은 탑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니엘은 마차에 오르는 이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가벼운 인사말을 건넸다. 그렇게 하나둘 배웅하던 라니엘은 마지막으로 데스텔의 앞에 섰다.”
“광인 토벌전을 지휘할 건 네가 되겠지. 이번에도 무거운 역할을 맡기게 됐어.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 데스텔.””
라니엘이 피식 웃었다.”
“살아서 보자고.””
그렇게 어깨를 두들기다 말고, 라니엘은 문득 눈을 깜박였다. 무심코 마주친 데스텔의 눈동자가 평소와는 다른 까닭이었다. 퀭한 눈동자.”
“데스텔?””
“······.””
데스텔은 말없이 마차에 올랐다. ”
라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떠나는 마차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모든 인원이 주둔지를 떠난 가운데, 라니엘은 홀로 주둔지를 걸었다. 이젠 자신의 무대로 떠날 차례였으므로.”
“···후우.””
모두가 떠나고 나서야 라니엘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단단히 묶어둔 머플러를 조금 느슨하게 풀고,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로브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최종장.”
아무리 빨라도 두세 달은 뒤에 맞이하리라 생각했던 최종 국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니칼트와 광인, 마수의 왕, 거기에 이어 그늘까지. 그 모두를 동시에 토벌해야 하는 상황에 라니엘은 제 미간을 꾸욱 눌렀다.”
···부족했다.”
대비가 부족했다. 방심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갈 줄 알았으나, 광인은 판을 뒤엎었다. 모든 예상을 뒤집고 예상 바깥의 수로 판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끝 차이다.’”
서로가 서로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광인은 자신이 감추고 있던 모든 수를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가진 전부를 꺼내 들어야 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