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26
“어떻게 생각해?””
툭, 하고 던져진 질문.”
목적어도 주어도 없는 질문이지만 그녀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라크는 알고 있었다. 라크가 말없이 도낏자루를 매만졌다.”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뭐를?””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말입니다.””
라크가 말했다.”
“제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저희 가문··· 그레이스 가(家)에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건 외면해선 안 되는 의무입니다.””
그 의무가 무엇인지는 라니엘도 안다.”
“시조, 그레이스의 스승인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을 해방하는 것. 그를 토벌하는 것. 그것이 저희 그레이스 가의 의무입니다.””
시조가 맺었던 약속이자 맹세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저희 가문은 성검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성검을 쥘 수 있는 ‘권한’을 핏줄에 새겨 이어받고 있었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라크가 신음했다.”
“그것이 외면해선 안 될 의무임을 알고 있음에도, 저는 바르타의 존재 또한 외면할 수 없습니다.””
마수의 왕, 바르타.”
“마수의 왕 앞에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형제들의 모습을, 저는 아직 잊지 못했습니다. 마수의 왕이 불러들인 들짐승에게 시체마저 파먹힌 그들을··· 모욕당한 형제들의 긍지를 저는 결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외면해선 안 됩니다.””
꾸욱, 하고 라크가 도낏자루를 움켜쥐었다.”
결코 잊지 못할 풍경이다. 무력함. 상실. 분노. 형제들에게 남은 조금의 긍지마저 지키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 그것은 라크가 벽을 넘게 만든 원동력이자, 라크가 강함을 갈망하게 된 원인이었다.”
“두 전장 모두 외면할 수 없는 겁니다, 저는.””
죽음의 칼, 가니칼트를 토벌해야 할 사명.”
마수의 왕, 바르타에게 복수를 해야할 의무.”
“선택하기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그 어느 것에서도 라크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두 개의 전장에 동시에 설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하나의 전장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라크는 헤매고 있었다.”
“···한심한 일입니다. 스스로 선택조차 내리지 못하다니.””
라크가 손을 허공에 뻗었다.”
뻗은 손아귀에 붙잡힌 것은 성검이다. 최초의 용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이 쥐었던 최초의 성검. 그 성검을 바라보며 라크가 말을 이었다.”
“종종 제게 이 검이 과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저는 애당초 검사도 아니었을뿐더러, 이 검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았으니까요.””
라니엘은 말없이 라크의 말을 들었다.”
라크가 성검의 칼자루를 매만졌다.”
“저보다 이 검의 주인으로 어울리는 분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라크가 떠올리는 것은 수년 전의 일이다.”
이 검을 처음으로 손에 쥐었던 그날.”
가니칼트와 충돌한 순간 라크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라크가 놓친 검을 쥐고 앞으로 달려나가던 검사가 있었다.”
카일 토벤.”
설원에 꽂힌 검(劍)을 뽑아든 채 가니칼트에게 달려들던 검사. 그는 기어코 죽음의 칼에게 일격을 먹였으며, 가니칼트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 순간 카일이 선보였던 일격의 궤적을 라크는 잊지 못한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일격이었으니.”
“저는···.””
“네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진 알겠는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그 검을 던져준다 해도 쓰지 않을걸?””
“···예?””
“카일, 그 녀석 말하는 거잖아. 물론 그때 가니칼트의 앞에서 그 대검을 기깔나게 쓰긴 했는데··· 지금의 녀석에겐 그런 게 필요 없을 거 같거든.””
“그게 무슨···.””
“너는 모르겠지만.””
라니엘이 쓰게 웃었다.”
“걘 자기가 가진 검 한 자루로 하늘을 갈랐어. 성검도 아니게 된, 평범한 검 한 자루로 말야. 아마 가니칼트도 똑같았겠지.””
그 손에 무엇이 들려있든 상관없었을 거다.”
그들은 검에 휘둘리는 반푼이가 아닌, 검을 쥐고 휘두르는 검사였으니. 그러니 그 검의 무게를 그리 무겁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라니엘은 이야기했다.”
“애초에 말야, 라크.””
라니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역할에 어울리는 사람이 따로 있을 리가. 그 검에 어울리는 사람 같은 게 따로 있을 리가. 그런 게 어딨냐? 필요한 자리에 서 있고, 필요한 역할을 하면 그게 주인공인 거지.””
그녀가 턱을 괸 채 말했다.”
“뭘 선택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니?””
“···예.””
“그럼 동전이라도 던져볼까?””
“예?””
“어느 쪽을 선택할지 모르겠다며.””
앞, 그리고 뒤.”
고르라는 라니엘의 말에 라크는 당황했다. 고민 중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고르는 건 뭔가 이상했으니까.”
“아니, 그건 조금···.””
“조금 그렇지?””
라니엘이 손가락 사이에서 동전을 튕겼다. 피식 웃음을 흘린 그녀가 동전을 공중에서 휙, 낚아챘다.”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답해.””
후회하지 말고.”
“네가 가고 싶은 방향을 골라. 이번만큼은 내가 선택해주지 않을 거니까.””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답을 내려라.”
그것만이 후회하지 않을 길일 테니.”
“···알겠습니다.””
끼이익, 쿵.”
라니엘은 문을 열고 회의실 바깥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회의실 안에서 라크는 고뇌했고, 저울질했으며, 답을 내놓았다. ”
“저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휴식시간. ”
휴식이 끝나고 회의실로 돌아온 이들의 앞에서 라크는 말했다. 자신이 선택한 답을.”
“대륙의 북서쪽, 포투나 신전으로 가겠습니다.””
마수의 왕, 바르타 토벌전.”
참가자.”
라크 반 그레이스 일인(一人).”
또다시 꿈을 꾸었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데스텔은 꿈의 저편을 향해 걷는다. 시체가 가득한 황야. 바닥에 고인 핏물에 얼굴을 비추어보면, 그곳에는 추레한 남자의 얼굴이 있다.”
퀭한 눈동자. 부스스한 머리칼.”
피로 얼룩진 옷과 흉터가 가득한 얼굴.”
빈말로도 용사답지 않은 모습이다. 염세적인 눈동자에는 이상이니, 희망이니, 최선이니 같은 동화적인 단어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퀭한 눈동자로 데스텔은 누군가의 등을 바라봤다.”
“······.””
그곳에는 말없이 앞으로 향하는 이가 있다.”
비틀거리면서, 규탄받고 지탄받으면서 멈추지 않고 걷고 있는 용사가 있다. 더는 그 누구도 그녀를 용사라 부르지 않는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승리의 상징이었던 어느 용사와 달리, 그녀는 죽음과 재앙의 상징과도 같았으니.”
그녀가 걷는 길마다 죽음이 가득했다.”
그녀는 가장 위험한 전장에 나타나, 가장 많은 죽음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녀가 전장에 도착한 순간 기사들은 희망을 품기보단 죽음을 직감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기에 그녀는 죽음의 상징이었다.”
···저곳이구나, 하고 데스텔은 생각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자신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이다. 그렇기에 데스텔은 죽고 싶어했다. 하지만 자결만큼은 선택하지 못했다. 그건 자신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던 이들의 삶을 모독하는 행위일 테니.”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무언가 도움이 되다가 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의미가 있으면.”
그런 생각으로 데스텔은 라니엘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데스텔은 번번이 살아남았다. 죽지 못한 채 라니엘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어느새, 자신은 라니엘의 뒤가 아닌 곁에서 걷고 있었다.”
“끔찍하지 않나?””
그 무렵이었다.”
목소리가 들린 것은. 데스텔이 깜빡, 하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눈에 들어온 풍경은 잿가루가 쌓인 폐허의 풍경이었다.”
“끔찍할 테지. 분명.””
잿가루가 가득 쌓인 신전.”
그 신전의 부러진 기둥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었다.”
“반갑다, 얼간아.””
미래의 데스텔이, 현재의 데스텔을 향해 미소 지었다.”
고개를 내려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희뿌연 잿가루가 가득 쌓여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잿가루가 눈처럼 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신전은 잿가루에 뒤덮였다.”
반쯤 무너진 신전.”
절반만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신전은, 신전이라기보단 차라리 폐허라 부르는 것이 더 옳을 듯싶었다. 신(神)을 모시기 위한 장소가 아닌, 어느 과거에 이런 신이 있었단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장소.”
“반갑다, 얼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