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28
라니엘이 말없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손가락 위로 피어오르는 것은 별빛. 별빛이 천칭의 형상을 이루다 말고 흩어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라니엘이 남겨둔 단 한 번의 기회. 어쩌면, 그것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라니엘은 생각했다.”
“하여간.””
라니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숨을 내뱉으며 머플러를 다시 단단히 묶고, 장갑을 끼었다. 그리곤 힘을 주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내디뎠을까.”
탁, 하고.”
말없이 라니엘의 한 걸음 뒤에 칼트가 따라붙었다. 무장을 마친 칼트를 흘겨본 라니엘이 말했다.”
“미안하게 됐다.””
“뭐가 말입니까.””
“가니칼트 토벌전에 끼게 만든 거 말야.””
라니엘의 말에 칼트는 잠시 침묵했다.”
침묵하다가, 그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글쎄요.””
칼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딱히 미안해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뭔 소리냐? 그게.””
“사실, 그때 광인 토벌전에 참가할 인원을 호명했을 때··· 제 이름이 껴있으면 오히려 제가 따져 물었을 겁니다. 가니칼트 토벌전에 끼게 해달라고.””
“왜?””
“왜겠습니까.””
절그럭, 하고 칼트가 허리춤에 매둔 검을 두들겼다.”
“제 스승께선 삶의 마지막에 죽음의 칼에게 일격을 먹였습니다. 그럼 저도 죽음의 칼을 흘려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뼈 한두대 정도는 끊어놔야 검성(劍聖)으로서 이름이 좀 살지 않겠습니까?””
“그게 뭔······.””
“무엇보다 말입니다.””
칼트가 쓰게 웃었다.”
“검의 협곡의 시조, 제 검(劍)의 본류가 그곳에 있지 않습니까. 그분께도 보여 드려야지요.””
무엇을, 하고 묻는 질문에 칼트가 짧게 답했다.”
“갈라트릭 류(流).””
칼자루를 매만지며 그가 말했다.”
“그분의 검에서 시작되었지만, 흐르고 흘러 이제는 저마다의 꽃을 피워낸 후세의 검을 그분께도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분의 삶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칼트가 웃었다.”
“그게, 한때는 영웅이셨던 분께 바치는 최대한의 경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냐?””
“멋지지 않습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낭만 있긴 하네.””
“제가 또 낭만에 살고 낭만에 죽는 검객 아닙니까.””
둘은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마차에 오른 그들이 향하는 곳은 최전선, 그 너머에 있다. 지난 수백 년간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곳. 만마의 주인을 마주하기 위해 인류가 마지막으로 거쳐야 할 시련이 자리 잡은 곳.”
죽음이 침묵하는 곳, 게헤테.”
찢어진 하늘의 아래 자리 잡은 그곳을 향해 두 사람은 나아간다. 그곳에 자신들의 무대가 있기에.”
체스판 위에서 말들이 움직인다.”
대륙의 양 끝단을 향해 움직이는 백(白)과 대륙의 끝에서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흑(黑)이 뒤섞인다. 마지막 결판을 내기 위해서. 기나긴 투쟁에 종점을 찍기 위해서.”
백(白)의 기물을 이끄는 용사와.”
흑(黑)의 기물을 이끄는 광인이 서로를 바라본다.”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꺼내 보인다. 흑은 백이 시선에 두지 않고 있던 기물들을 끌어와 판에 올렸고, 백은 흑이 얕잡아보는 말들을 통해 기물을 막아 세운다.”
그러나, 흑도 백도 염두에 두지 않은 기물이 하나 있음을··· 용사도 광인도 알지 못한다.”
“먼저 가 있어라.””
빠르게 움직이던 마차가 왕도에 도착했을 무렵, 데스텔이 마차에서 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토벌대원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데스텔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들려야 할 곳이 있다. 늦지 않게 도착 할 테니 먼저 가 있어.””
데스텔이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는 데스텔을 바라보던 레스티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잿가루?””
걸음을 옮기는 데스텔의 몸에서 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와쳐(Watcher)인 레스티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극소량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한 잿가루였다.”
왕도, 카르테디아의 중심.”
토벌대원을 태운 마차는 왕도에 잠시 멈춰 섰고, 왕도에 대기 중이던 로얄 가드와 정비사들이 곧장 멈춰선 마차에 따라붙었다. 그들이 마차(魔車)에 새로운 목적지를 입력하고 정비하는 가운데, 마차에서 내린 이들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들려야 할 곳이 있다. 늦지 않게 도착할 테니 먼저 가 있어.””
그 말을 남기고 데스텔은 어딘가로 떠났다.”
남은 이들은 마차의 정비가 끝나길 기다리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
“······.””
라크와 나티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마주 바라보고 있을 뿐, 그 눈높이와 시선에 담긴 온도가 아주 같지는 않았다. 라크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나티다는 눈을 부릅뜬 채 라크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마수의 왕, 바르타를 상대하러 가겠다고 하셨습니까. 그것도 혼자서?””
“그럴만한 이유가 있···.””
“이유를 묻는 게 아닙니다. 변명을 듣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구요.””
나티다가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잘 들으세요, 라크.””
“······.””
라크가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격멸(擊滅)이라 불리며 마왕군에게 있어 공포의 상징이자, 광전사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라크이지만··· 그런 라크도 제 연인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뿐이었다.”
“무모하다고, 미쳤냐고, 나도 따라갈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되는걸 알아요. 당신 혼자만이 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거겠죠. 맞나요?””
“···맞다.””
“역시, 그럼 어쩔 수 없는 일이네요.””
나티다가 쓰게 웃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라크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삐뚤어진 목깃을 세워주던 나티다가 콱, 하고 라크의 옷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긴말 안 해요.””
목깃을 붙잡고, 라크를 올려다본 나티다가 제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렸다. 콧잔등이 맞닿을 듯한 높이에서, 나티다가 라크와 시선을 마주했다.”
“살아 돌아와요. 반드시.””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나티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선 나티다가 제 입가를 소매로 감추며 웃어 보였다.”
“죽기라도 하면, 전 성녀가 아니라 사령술사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약속해요. 살아 돌아온다고.””
피식, 하고 라크가 웃음을 흘렸다.”
라크가 손을 뻗어 나티다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확실히, 살아서 돌아와야겠군.””
내가 아닌 너를 위해서라도.”
마지막으로 툭, 하고 가벼이 나티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건드린 라크가 뒤를 돌았다. 어느덧 마차의 정비가 끝났다. 왕도까진 함께 왔지만, 이제는 각자의 무대를 향해 갈라져야 할 시간이었다.”
“다녀오세요, 라크.””
라크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보였다.”
등을 돌린 채 라크는 북서쪽 끝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그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던 레스티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전혀 기분 나쁠 이유가 없는데, 왜인지 모를 떫음에 입안이 바싹 메마르는 기분이었다.”
“후우···.””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려보니, 이번에는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클로에와 벨노아가 레스티의 시야에 들어왔다. 레스티의 표정이 조금 더 구겨졌다.”
“마탑주 님, 정비가 끝났습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레스티가 시선을 돌렸다. 구겨진 레스티의 표정에 흠칫, 하고 마차를 정비하던 마탑의 마법사들이 어깨를 떨었다.”
“호, 혹여 불편하신 부분이라도···?””
“아니야. 수고했어.””
레스티가 얼굴 근육을 풀며 마법사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겼다. 그래, 연인이 뭐 대수인가. 자신에겐 마탑이 있고 마법이 있다. 그거면 충분···.”
‘···마법은 쟤들도 잘 다루는데.’”
···자신에겐 소환수와 마탑이 있다.”
결코 배신하지 않고, 결코 무너지지 않을 공든 탑이다. 요컨대, 인생의 동반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다. ”
‘그래, 그거면 된 거야.’”
레스티가 괜스레 뿌듯한 눈동자로 제 휘하의 마법사들을 흘겨봤다. 평소에는 차갑기 그지없는 마탑주께서 자신들을 향해 미소 지으시니, 마법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입력 완료, 정비도 마쳤습니다.””
정비는 끝났다.”
“향하는 길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경례를 올리는 그들을 뒤로하고, 영웅들을 태운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릇된 신이 움직이기 시작한 아래, 각지에서는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마수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최전선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마수들이 들끓는 곳.”
마수들이 모여드는 곳.”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