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29
그 모든 곳은 최전선이 아닌 저 후방에 있었으니까. 그것은 마치 마수들이 본능적으로 최전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게 맞겠지.””
고요한 전장을 걸으며 라니엘이 중얼거렸다.”
“마수들에게 지성이 없다곤 하나, 짐승으로서의 본능마저 결여된 건 아니니까. 본능적으로 느낀 거겠지.””
그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최전선, 저 바로 앞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최전선의 경계선에 라니엘이 바로 섰다.”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협곡. 깎아지른듯한 협곡의 너머에 그 장소가 있었다. 인류가 마지막으로 뛰어넘어야 할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곳.”
“죽음이 침묵하는 곳, 게헤테.””
라니엘이 걸음을 옮겼다.”
경계선을 넘어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녀가 곧 마경과 인간의 땅을 나누는 경계선이요, 그녀가 내디디는 발자국이 곧 인류의 발자취였다.”
퍼석.”
메마른 땅에 발자국을 새기며 라니엘은 걸었다. 그 뒤를 따라 칼트가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협곡의 가운데에는 길이 뚫려있었고, 두 사람은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말을 잘 하진 않지만 말입니다.””
칼트가 고개를 들어 올린 채 말했다.”
“절경이군요.””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은 쪼개지고, 갈라져 뻗어 나가···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는 협곡의 풍경이다. 아니, 협곡이라 부르는 것도 어려울지 모른다. 차라리 거목(巨木)에 가까운 풍경이었으니.”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풍경이라는 점에서 더.””
칼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칼트에겐 보인다. 이 협곡의 내부서부터 휘둘러졌을 수많은 검이. 협곡에 길을 만들고, 검을 휘두르며 나아갔을 누군가의 모습이.”
탁.”
그 흔적을 쫓아 두 사람은 걸었다.”
길고 긴 길을 따라 걷다가, 두 사람은 문득 발아래를 바라봤다. 바닥에는 길게 검흔(劍痕)이 새겨져 있었다. 검흔을 따라 시선을 올려보면, 그곳엔···.”
죽음이 침묵하는 곳, 게헤테가 있다.”
거대한 협곡을 가로질러 도달한 곳.”
그곳의 땅에는 온갖 검흔들이 가득했다. 땅에 새겨진 모든 흉터가 곧 검의 흔적이었다. 하루, 이틀, 수십, 수백일, 수년, 수백 년의 시간에 걸쳐 쌓였을 흔적.”
그 흔적은 땅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칼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들어서 하늘을 보았다. 마경의 최심부, 그 끝자락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하늘은 새까맣지 않았다. 검게 물든 하늘의 한가운데에 새파란 하늘이 존재했다.”
그것은 흉터였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지워지지 않은 흉터. 그것은 과거, 누군가 이 자리에서 이루어냈을 위업을 증거하기도 했다. ”
“칼트.””
“예.””
하늘에 새겨진 검흔은 말한다.”
흑(黑)으로 물든 하늘을 거슬러, 검은 하늘의 한가운데에 청(靑)을 새긴 검사가 있다고. 그것이 최초의 용사가 받아들인 하늘이요, 그가 행한 역천(逆天)이었노라고.”
“준비해라.””
그리고, 하늘에 새겨진 흉터는 묻는다.”
그것은 질문이자 경고이기도 하다.”
“온다.””
“과거 하늘을 거스른, 역천의 검과 마주할 각오는 다졌는가? 다졌다면, 네 각오와 긍지를 증명할 준비는 마쳤는가? 그마저도 마쳤다면···.”
스릉, 하고 칼트가 검을 뽑아들었다.”
“어디 증명해보아라.”
키이이잉, 하고 라니엘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죽음의 앞에서.”
라니엘과 칼트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네가 쌓아올린 것들이.”
찢어진 하늘의 아래. 새겨지고 새겨진 검흔들의 위. 그리하여 검흔과 검흔이 땅과 하늘을 이루는, 죽음마저 침묵하는 곳에 한 명의 검사가 서 있었다. 하나의 죽음이 서 있었다.”
“과연, 유의미한 것인지.”
죽음의 칼, 가니칼트. ”
가장 두려운 재앙은 자신을 찾아온 도전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투구에 한번 울린 목소리가 평야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는 더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이곳까지 찾아온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질문이 아니었으므로.”
“자격을 보여라.””
“어디 한번 내게 보여봐라.”
“다음으로 나아갈 자격을.””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긍지를, 각오를, 신념을.”
“내게 증명해라.””
“내게, 증명해 보아라.”
깊은 숲속, 버려진 유적.”
데스텔은 유적 위로 쓰러진 나무들을 밀어내며 유적의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유적의 한가운데에는 무너진 기둥이 있었는데, 데스텔은 가볍게 발을 뻗어 기둥을 박살 냈다.”
박살낸 기둥의 아래 무언가 드러났다.”
드러난 것은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문이다. 문을 열고 데스텔은 유적의 지하로 들어갔다. 이 장소를 그는 알고 있었다. 이곳은 그의 시간대에서 제법 요긴하게 쓰인 통로였으니까.”
‘그땐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지.’”
숨기고 숨겨놓은 통로.”
꽤 넓은 통로를 걸으며 데스텔은··· 비굴(卑屈)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오랜만이군.””
걸음을 옮기며 그는 떠올렸다.”
그에겐 과거, 이 세상에선 미래였을지도 모르는 일을. 그리고··· 그녀를 따라 이 시간대로 돌아와 보았던 풍경들을 떠올렸다.”
「너는 도달할 수 있어, 라니엘.」”
「나와 다른 결말에.」”
「내가 도달하지 못했던 최선의 결말에.」”
그는 그녀의 사도가 된 채, 그녀와 같은 것을 보고 들었다. 비록 그녀가 죽는 순간 세상으로 흩어져, 지금의 이 몸에 스며들었지만··· 흩어지기 전까지 보았던 풍경들을 데스텔은 똑똑히 기억했다.”
라니엘 반 드라고닉이 회귀하여 겪은 일들.”
그녀가 보았던 풍경, 그녀가 품었던 희망, 망가졌을 그녀가 변하는 모습을, 그녀가 예전처럼 웃으며 최선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녀의 최후를.”
“···후우.””
데스텔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마지막에 라니엘 반 드라고닉은 웃었다. 드라고닉이 아닌, 트리아스로서 웃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간으로서, 그저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제자로서 그녀는 웃을 수 있었다.”
“그래, 그래야만 하지.””
영웅에게는.”
“그에 걸맞은 결말이 주어져야만 해. 반드시.””
자신과는 다른 영웅에게는.”
인류를 위해 제 한평생을 희생한 이들에겐, 반드시 그에 걸맞은 결말이 주어져야만 했다. 그것이야말로 데스텔이 지닌 신념이었다. 결코 영웅이 되지 못한 겁쟁이의 자그마한 소망이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산 놈들이잖아.””
그들은 언제나 타인의 최선을 위해 투쟁한다. 타인의 행복과, 타인의 평안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불태운다. 그렇기에 그들이 도달한 결말에··· 최선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세상에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법이지, 하고 여기 한 명의 겁쟁이가 중얼거렸다. 데스텔이 웃음을 흘리며 걸었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그놈들의 최선을 위해 투쟁해줘야지.””
대신해서 투쟁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삶을 내던져, 타인의 삶을 구하는 그들의 삶을 위해 누군가는 싸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비굴(卑屈)은 부디 자신이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영웅이 되진 못했지만.”
영웅을 위해 살다가 죽은 그였으니까.”
“빌어먹을 여신 같으니라고.””
데스텔이 잿가루를 피워 올리며 웃음을 흘렸다. 눈앞에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걸로 빚은 갚는 거다.””
북서쪽의 끝으로 향하는 마차의 안에서, 라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렸고, 풍경 역시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라크는 문득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