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54
“너도 이 악물고 서 있지 말고 앉기나 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진데, 뭘.””
라니엘의 말대로였다.”
역천의 반동을 끌며, 육체를 한계의 너머까지 혹사시킨 카일이다. 당장 서 있는 것조차 고행인 상태이긴 했지만···. 자리에 주저 앉은 채 카일은 미심쩍은 눈길로 라니엘을 흘겨봤다.”
“······.””
“뭘 그렇게 봐? 보는 사람도 없고, 우리뿐이고, 할 일도 다 했는데 뭐 좀 주저앉는 게 어때서?””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만···.””
“왜, 옛날 생각나서 그러냐?””
라니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카일이 저런 시선을 보내는 이유가 짐작이 간 까닭이었다. 하기야, 흑룡을 쓰러트렸던 그날도, 스케발을 처음으로 쓰러트렸던 그날도··· 자신은 언제나 이를 악물고 서 있었으니까.”
결코 주저앉아선 안 된다고 여겼으니까.”
언제나 바로 선 채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그런 강박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녀다. 라니엘은 털털한 웃음을 흘리며 엉망이 된 제 손가락의 뼈를 뿌득, 하고 맞췄다. 손가락을 맞추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러게?””
“···뭐, 틀린 말은 아니군.””
카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기야 자신은 잠이 들어있었다곤 하나, 그날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최소 4~5년의 세월이다. 한 명의 인간이 변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으리라.”
우득, 하고 라니엘이 꺾여버린 제 엄지를 마저 맞추고선 손을 몇 번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그리곤 이쯤이면 됐다는 양 그녀가 콱, 주먹을 움켜쥔 채 카일을 향해 뻗었다. 자신을 향한 주먹을 바라보던 카일이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그래.””
툭.”
“오랜만이다, 라니엘.””
말아쥔 주먹과 주먹이 가볍게 맞부딪쳤다.”
“저는 왕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붕대를 칭칭 감은 칼트가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도 부러졌고, 몸 상태도 이래서야 다음 전투에선 제가 도움될 것 같지도 않고 말입니다.””
애당초 마왕의 토벌은 라니엘이 단독으로 투입되는 작전이었다. 자신의 역할은 끝났고, 이곳에서 더 따라가 보려 해보아야 발목만 붙잡을 거란 사실을 칼트는 잘 알고 있었다.”
“왕도로 돌아가 죽음의 칼이 토벌되었단 사실을 알리고··· 하운드들의 지휘를 맡아볼까 합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남아있으니까요.””
인류의 명운을 건 전투가 대륙의 양 끝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곤 하나, 기사들이라고 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마왕의 움직임에 끌려 각지에서 들끓는 마수 무리. 그것들의 토벌을 돕겠노라고 칼트는 이야기했다.”
“본래대로라면 억지로라도 선배님을 따라갈려했습니다만···.””
칼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카일을 흘겨봤다.”
“이젠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뭔 걱정?””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칼트가 쓰게 웃었다.”
“또, 수명을 태우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암만 봐도 죽으려고 작정하시고 이곳에 온 것 같기에, 원래대로라면 마왕의 토벌전까진 이 악물고 따라갈 생각이었습니다.””
움찔, 하고 라니엘이 몸을 떨었다.”
“···알고 있었냐?””
“그걸 모르겠습니까? 제가 선배님 따라다닌 게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아무쪼록 왕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살아 돌아 오십쇼. 선배님이 생환하셔야 제가 멋드러진 건물을 받지 않겠습니까.””
칼트가 주섬주섬 짐을 싸들었다. 짐을 싸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칼트가 카일을 바라봤다.”
“아무쪼록 선배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카일··· 아니, 뭐라 불러야 할까요. 잠시만 기다려보십쇼.””
제 턱을 매만지며 칼트가 한동안 중얼거렸다. 검의 초인? 선배? 용사님? 전대 용사님? 그리 한참 동안 중얼거리던 칼트가 끝내 칭호 하나를 입에 올렸다.”
“···검성님.””
“검성?””
“예, 검성님.””
꼭 아끼던 물건을 빼앗긴 아이처럼, 아쉽다는 듯 칼트가 한숨을 내뱉었다.”
“본래 제가 가졌던 칭호긴 합니다만, 인류 최강의 검사에게 주어지는 이명 아닙니까. 갈라트릭의 적법한 후계자에게 가는 이름이기도 하고요.””
검성(劍聖).”
제법 마음에 들었던 칭호였다만, 제 주인이 나타났으니 반납하는 게 맞으리라. 칼트가 제 품을 뒤적여 갈라트릭의 문양이 새겨진 훈장을 카일에게 건넸다.”
“카일 님께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칼트가 내민 훈장을 바라보던 카일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성이니, 용사니, 최강의 용사니, 그런 무거운 칭호는 됐다. 그런 역할은 질릴 만큼 해봤으니까.””
카일이 허리춤에 찬 제 칼자루를 툭, 하고 두들겼다.”
“내겐 검사. 이거 하나면 충분해.””
“···그렇습니까?””
칼트가 반색했다.”
음, 아무렴 그렇지요. 그리 중얼거리며 칼트가 훈장을 제 가슴팍에 다시금 매달았다.”
“검사. 참으로 낭만을 아시는군요. 초대 검성님을 정면으로 꺾으신 분답습니다. 자고로 검사란···.””
“너 그냥 그 칭호랑 훈장 뺏기기 싫은 거 아냐?””
“갈(喝)! 마법사인 선배님께선 모르시겠지만, 검의 세계에는 심오하고도 신묘한··· 말로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는 낭만이 있는 법입니다.””
“뭔 개 헛소리를······.””
정색하며 짐을 싸든 칼트가 휘파람을 불었다. 하늘을 맴돌던 와이번이 칼트의 앞에 착지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난리 통에, 와이번의 갑주 태반이 뜯겨졌지만 비행에는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저 검은 안 가져가는 거냐?””
와이번에 올라타는 칼트에게, 라니엘이 지면에 꽂힌 가니칼트의 검을 가리켰다. 그늘이 떨어져 나가 평범한 날붙이가 된 검이었다.”
그 질문에 예, 하고 칼트가 답했다.”
“아직은 저분을 모실 준비가 안 됐으니 말입니다. 모든 싸움이 끝나고, 검의 협곡을 재정비하면··· 그때 옮겨와야겠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하고 칼트가 웃었다.”
“저분께서도 당분간은 이곳에 남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시야가 탁 트인 이곳에선··· 저 너머에 있는 신전에서의 싸움도, 하늘도 잘 보일 테니까요.””
그럼 왕도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채 칼트는 왕도로 떠났다.”
“그래서.””
한동안 평야에 감돌던 침묵을 깨고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카일을 흘겨보며 라니엘이 질문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뭘.””
“뭐긴 뭐야, 새끼야.””
라니엘이 어이없다는 듯 카일를 바라봤다.”
“너 일어난 거. 그리고, 저건 또 뭔데?””
그녀가 손을 뻗어 가니칼트의 검이 꽂힌 곳을 가리켰다. 역천의 검격과 함께 카일과 가니칼트가 추락한 곳. 잘려나간 돌바위들이 제멋대로 꽂혀있는 그곳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일선(一線)이 그어져 있었다.”
역천과 역천이 뒤섞여 만들어낸 선.”
그 선을 따라 풍광이 절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저 하늘 위의 구름과 푸르른 하늘마저. 반으로 쩍 갈라진 세상을 가리키며 라니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한 건데, 저것들 다? 나랑 싸웠을 때는 저 정도는 아니지 않았냐?””
“글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할 말을 고르던 카일이 문득 웃음을 흘렸다.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카일은 어느 재수 없는 마법사를 떠올리며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하다 보니까 되던데?””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하다 보니까 우연히 됐다는 양. 최대한 라니엘의 억양을 살려서 카일은 그녀를 흉내 냈고··· 그 모습을 본 라니엘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뭐? 하다가 돼? 아니, 뭐?””
굉장히 떫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라니엘의 모습에, 카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끅끅대며 웃음을 참은 카일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
숨을 뱉으며 카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비스듬히 들어 올리 고개로, 카일은 하늘을 바라봤다. 반으로 쪼개진 하늘의 풍경. 역천의 검이 만들어낸 풍광을 바라보며 카일이 말했다.”
“마왕을 베었던 그날, 난 검의 길에 끝에 섰던 거겠지. 본래대로라면 거기서 죽었어야 했고.””
“···그건.””
“그래. 그런 나를 마왕이 살렸고, 마왕이 변질시켜버린 나를 네가 기어코 인간으로 되돌렸잖냐.””
생(生)을 대가로 역천의 검을 완성시켰다.”
삶을 불 질러 검의 극한에 도달했다. 그렇게 삶을 끝맺는 자신을 인간으로 되돌려, 두 번째 삶을 준 것이 다름 아닌 라니엘과 사라, 재의 여신이었다.”
“그리고 일생에 단 한 번 휘둘러볼까 말까 한 검(劍)을··· 너와 싸우면서 미친 듯이 휘둘렀고. 그 탓에 역천의 검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게 크지.””
라니엘이 아아, 하고 탄식했다.”
괜스레 제 가슴팍을 꾸욱 누르며 라니엘이 신음했다. 심장이 꿰뚫렸던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더럽게 강하긴 했지.””
그날의 결전에서 별빛을 잃고, 초인으로 라니엘이 성장했듯이··· 자신 역시 성장을 이루었다고 카일은 말하고 있었다. 꼭 그것만은 아니지만, 하고 카일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다. 오랫동안 꿈을 꾸면서 보았던 것도 있긴 한데··· 이건 여기서 말할만한 게 아니지.””
“꿈? 무슨 꿈?””
“그런 게 있다. 아무튼 여러 일들이 겹치고 겹쳐서, 쌓이고 쌓여서 여기까지 왔으니··· 남은 건 내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뿐이지 않냐. 그래서 증명했지.””
당신을 뛰어넘었노라고.”
나의 검이 당신에게 닿았노라고. 카일은 기어코 그것을 증명해냈으며, 반으로 쪼개진 풍광이 그 결과였다.”
“그러는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