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55
카일이 라니엘을 흘겨봤다.”
“아까보니, 너도 뭔갈 준비한 것 같던데. 그건 왜 안 쓴 거냐?””
죽음을 맞이하는 가니칼트에게 라니엘이 보였던 진리의 편린. 그 편린을 가니칼트가 어렴풋이 이해했듯이, 카일 또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게 네가 도달한 마도의 극한인 거 아니냐?””
“극한은 맞지.””
“그럼 왜···.””
“어차피 써도 못 이기니까.””
라니엘이 한숨을 내뱉었다.”
“너희, 검의 마법사··· 아니, 검사들이 추구하는 거 하고 마법사가 추구하는 건 방향 자체가 다르거든.””
다만 한 자루의 검으로 모든 것을 베어내기 위해, 검사들이 자신의 검로(劍路)를 예리하게 갈고 닦는다면··· 마법사는 눈앞의 적이 아닌 저 머나먼 곳의 하늘에 닿기 위해 마도(魔道)를 쌓아올린다.”
“그리고, 아마 가니칼트에게 꺼내 보였어도 못 이겼을걸. 애초에 미완성이니까.””
한숨을 쉬며, 그녀가 손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이건 저 위에 올라가야 완성되는 거고, 저곳에 가야 쓸 수 있는 거니까.””
“···도대체 저기서 하려는 게 뭔데?””
“알고 싶냐?””
라니엘이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웃음을 흘리며 그녀가 무언갈 이야기했고, 카일은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카일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동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였고.”
망상이라 비웃음 살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라니엘 반 트리아스가 할법한 이야기였다. 말하는 주체가 라니엘이 된 이상, 그것은 다만 망상에 그칠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카일은 질문했다.”
“진심이냐?””
“진심이지 그럼.””
“그래서 도와달라고?””
“도와달란 말은 안 했는데.””
카일이 피식, 웃었다.”
“비싼 술로 얻어먹어야겠군.””
“아니, 도와달라고 안 했다니까?””
“그럼 빚진 걸 갚는 셈 치지.””
그리 말하며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 먼저 일어서는 건 라니엘이 아니라 카일이었다. 먼저 일어선 카일은, 앉아서 쉬고 있는 라니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과거 라니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어서라 라니엘.””
카일이 웃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하여간.””
콱, 손을 움켜쥐고 라니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은 지점에 바로 선 채, 두 사람은 황야의 너머를 바라봤다. 드넓게 펼쳐진 황야. 저 너머에 있을 그늘의 신전 알카디아.”
“미리 말하지만, 역천의 검을 더 쓰는 건 무리다.””
“필요 없어, 임마. 애초에 혼자 잡으려 했는데.””
“방법은?””
챠르륵.”
“이거면 됐냐?””
“과연, 충분하겠군.””
“뭐, 그리고··· 부탁 받은 것도 있으니까.””
재앙으로서도, 영웅으로서도, 용사로서도, 검사로서도 모두 만족하며 죽음을 맞이한 가니칼트다. 하지만 딱 하나, 그가 이루지 못한 게 있었다.”
“해방해 드려야지.””
제 주군의 완전한 해방.”
아르카디아의 여왕에게 안식을 가져다주는 것.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라니엘만이 이루어줄 수 있는 소망이었으니까.”
탁.”
알케이아를 향해 라니엘이 걸음을 옮겼다. ”
라니엘과 같은 속도로, 같은 보폭으로 카일이 걸음을 옮겼다. 용사의 역할을 맡은 이만 바뀌었을 뿐,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나아가라, 다음으로.」”
다음으로 향하자.”
그날, 우리가 도망쳐야만 했던 무대의 다음으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거늘,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 내던져져 눈을 뜨고 첫 숨결을 토해낸 그 순간부터 줄곧 그러했다. 혼란스러운 시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난 까닭이리라.”
아크리타, 하고.”
부모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다른 부모들이 으레 그렇듯, 무탈하게 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으리라. 그것은 소박한 바람이었으나, 그 시대상을 감안하면 더없이 무거운 욕심이었다.”
혼란의 시대였으니까.”
전란의 시대였으니까.”
전쟁, 투쟁, 살육··· 각자가 모시는 신(神)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 땅을 살아가는 생명들은 가장 단순한 수단을 선택했다. 그들은 신의 무기가 되고, 팔이 되고, 발이 되어 대륙을 질주했다.”
전쟁의 시대였고, 혼돈의 시대였다.”
하늘 위에 떠있는 수많은 초월자들.”
만신(萬神)이 품은 만 가지 뜻을 따라 갈라진 대륙과,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무기를 들어 올린 수많은 종족들. 서로를 이단이라 부르짖으며 일으킨 전쟁.”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들의 투쟁에 휘말려 아크리타는 부모를 잃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제 자식을 걱정하며 그들은 눈물 흘렸지만··· 부모의 죽음 앞에서 아크리타는 다만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들이 흘리는 피, 그들이 흘리는 물기, 그 모든 것으로부터 아크리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므로.”
홀로 걸음을 옮기며 아크리타는 먼 곳에서 인간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투쟁을 보았고, 때로는 가까운 곳에서 그들과 함께 투쟁했다. 제법 명성을 쌓았던 적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크리타는 ‘천혜’라는 이명으로 불렸다.”
하늘이 내린 천재다. 천혜(天惠), 하늘이 내린 은혜다. 표정이 없어 얼핏 보기엔 인형 같다. 비루한 인간종에서 쓸만한 몇 안 되는 인재다.”
수많은 칭송 속에서도 아크리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동료를 잃어도, 피를 흘려도,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에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아크리타는 다만 무심했다. 표정의 변화 없이 살았다.”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었기에, 이해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살다 어느 날 저들처럼 죽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아크리타는 삶을 다만 낭비했다. 그 어느 것도 아크리타의 심장을 뛰게 만들지 못했고, 그 무엇도 아크리타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나를 죽여도 좋다.””
그런 아크리타의 삶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나를 죽여도 좋으니, 나의 부하들을 살려다오. 저들에겐 죄가 없다. 내가 이렇게 빌겠다. 나를 어떻게 하든 좋으니 이 녀석들만큼은···.””
어느 장군과의 만남이었다.”
장군은 어느 신의 오른팔이라 불릴 만큼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긍지높은 인물이었다. 상대가 신이라 한들 결코 제 머리를 굽히지 않는 인물로 유명했다.”
그런 이가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진흙에 파묻은 채 애원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를 살려달라고. 패배할 당시에만 해도 긍지 높았던 이가, 자신이 아끼는 부하들이 인질로 잡히자 한없이 비굴해졌다.”
모순됨. 이면. 숨기고 있을 본심.”
아크리타는 진흙에 머리를 처박은 장군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마주했다. 자신이 지닌 무색(無色)의 눈동자와 달리 장군의 눈은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다만 색(色)을 의미하지 않았다.”
감정이 지닌 색이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감정, 아크리타가 결코 가지지 못한 것. 그것을 마주한 순간 그는 흥미를 느꼈다.”
그리 긍지높은 장군이 제 앞에서 떨고 있지 않은가. 공포에 질려있지 않는가. 모진 고문에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은 그 장군이, 도대체 어찌하여? 제 부하들을 그리 아껴서?”
“데려와.””
아니, 아니지.”
아크리타는 장군의 앞에 어느 여인을 앉혔다. 인질로 붙잡혔던 장군의 서기관이요, 장군의 약점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여인과 눈을 마주한 순간 장군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아크리타는 놓치지 않았다.”
애당초 장군에게 중요한 것은 부하가 아니었다. 인질로 잡힌 부하들 사이에 섞인 이 여인이었을 테지.”
그저 장군은 자신을 포장하려 했을 뿐, 이 여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나머진 아무래도 좋다고 여겼으리라. 그가 감추고 있을 본심을 끄집어내고자 아크리타는 장군에게 제안했다.”
“네 부하 모두와 너를 죽이고, 이 여인을 살릴지.””
혹은.”
“이 여인을 죽이고 네 부하 모두와 너를 살릴지.””
선택해라, 하고 아크리타는 속삭였다.”
당신에겐 그런 권리가 없다고 언성을 높이려는 제 부하의 목을 아크리타는 베어냈다. 흩뿌려진 피의 앞에서 아크리타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침묵이 감도는 막사의 안에서 아크리타가 말했다.”
“열을 셀 동안 시간을 주겠다.””
줄어드는 시간.”
마른침소리. 눈동자가 구르는 모습. 토해낸 숨결. 하나에서 시작한 발음이 아홉에 이르렀을 때, 장군은 답했다. 이를 악물고 흔들리는 시선과 함께 그가 목소리를 짜냈다. 여인만을 살리는 길을 장군은 선택했다.”
그가 바란 대로 이루어주었다.”
아크리타는 장군의 머리를 움켜쥔 채 막사 바깥으로 나섰다. 인질로 잡아둔 장군의 별동대를, 그의 병사들을 모조리 쳐죽였다.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장군은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들판의 위에서 장군은 숨을 삼켰을 뿐이다.”
다시 막사로 돌아온 순간.”
여인과 눈을 마주친 장군은 참았던 숨을 토했다. 무언가 잘못되었지만, 이젠 끝이라는 생각을 품은 듯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크리타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서걱.”
아크리타는 여인의 목을 벴다.”
장군의 눈앞에서 비스듬히 떨어지는 여인의 목을 본 순간 장군의 두눈이 크게 뜨였다.”
1초, 2초, 3초.”
처음에는 눈동자였다. 크게 뜨였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다음에는 입이었다. 닫혀있던 입술이 파르르 떨렸으며, 열렸고, 열린 순간 소리가 새어나왔다. 새어나오는 소리는 비명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악을 지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장군을 아크리타는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