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502
요르문이 지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파스슥, 소리를 내며 바스러지는 지팡이 사이로 나타나는 것은 새하얀 별자리다. 만신(萬神)을 떨어트렸던 그날, 그들의 권능을 강탈해 요르문은 하나의 별자리로 세공했다.”
만신의 권능을 품은 별자리가 요르문의 팔을 타고 뱀처럼 기어올랐다. 팔에 새겨진 별자리가 거세게 타올랐다.”
“거기가 네 길의 끝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은 어디까지고 추락한다. 그것은 신의 자리에 오른 인간이라 한들 다를 바 없다. 그 본질은 불완전하고도 나약한 인간이기에.”
“그러니, 멈추어라.””
신이 되어버린 인간이 손짓했다.”
휘두른 손끝을 따라 신벌(神罰)이 떨어졌다. 하늘이, 땅이, 그리하여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했다. 빛이 먼저 도달하고 소리가 뒤늦게 빛을 따라잡았다.”
————————.”
세상이 찢어지는 소리가, 혹은 뇌명(雷鳴)이 울려 퍼졌다.”
고룡의 도시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뒤이어 콰릉, 하는 뇌명이 뒤따랐다. ”
땅과 하늘을 잇는 새하얀 번개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리는 벌이다. 하늘에 서 있는 어느 신이 오만한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리라. 그렇기에 천벌(天罰)이었으며, 그렇기에 신벌(神罰)이었다.”
예로부터 번개는 하늘이 내리는 벌이었으며, 내리치는 번개를 보며 인간들은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수만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인류는 더이상 그것을 두려운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인류를 대표하는 용사들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를 세 개의 섬광이 절단냈다.”
검기가 흩뿌리는 검광(劍光).”
잿가루를 끄는 섬선(閃線).”
번뜩이는 성창(星槍).”
베이고, 꿰뚫리고, 찢어진 번개가 흩어졌다. 잔류하는 번개를 발로 짓밟아 바스러트리며 라니엘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용사의 정복을 펄럭이며 그녀는 제 마지막 전장으로 향했다.”
자신이 넘어야 할 마지막 시련이 그곳에 있었다.”
태초의 여신의 잃어버린 날개, 과거 여신의 분노를 대리했던 고룡(古龍)은 이곳에 발을 디딘 죄인들을 바라봤다. 하늘의 별을 떨어트리는 금기를 저지르려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고룡이 서서히 움직였다.”
이미 모셔야 할 주인은 없었다.”
주인도, 긍지도 잃어버린 고룡이나··· 그는 제 친우와의 약속만큼은 잊지 않았다.”
요르문, 그리고 글레투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룡이 몸을 움직였다. 고룡이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몰아치는 폭풍에 고룡의 도시가 뒤흔들렸다.”
휘몰아치는 폭풍.”
뒤흔들리는 도시.”
신전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들을 가로막고자, 고룡이 날갯짓하며 땅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인간들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을 향해 고룡이 제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불길을 토하려는 순간이다.”
탁, 하고.”
인간들이 갈라졌다.”
라니엘과 카일이 땅을 박차고 옆으로 도약했다. 두 사람은 미끄러지듯 고룡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고룡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 둘은 곧장 백금 신전을 향해 질주했다.”
등을 훤히 드러내놓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들은 앞만을 보고 달린다.”
그렇다면 그들의 뒤를 책임지는 것은 누구인가. 그 답을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었다. 고룡은 정면을 보았다. 그곳에는 제 앞에 멈춰선 인간이 하나 있었다. 인간은 부러진 창을 움켜쥐고 있었다.”
비굴(非屈) 데스텔.”
고룡의 아가리에 모여드는 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데스텔은 고룡을 향해 창날을 들어 올렸다. 이는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옛 여신의 날개, 고룡을 상대하는 역할을 데스텔은 자처했다.”
카일과 라니엘이 힘을 온존한 채 요르문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뒤를 맡는 것. 데스텔은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여겼으므로.”
“······.””
데스텔은 말없이 제 상대를 바라보았다.”
흑룡에 견줄만한 거구. 폭풍을 끄는 날개. 쩍 벌린 아가리에 모여드는 불길과 휘몰아치는 열기. 태초의 시대 신의 분노를 노래하던 거신룡답게, 저 고룡은 제 앞에 선 생물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데스텔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공포를 느꼈으리라. 공포를 느끼며 뒷걸음질쳤으리라. 물론 지금 역시 공포를 느끼나, 뒷걸음질치진 않는다. 데스텔은 창날을 움켜쥔 채 길게 숨을 내뱉었다.”
펄럭.”
성의(星衣)가 펄럭였다.”
성의에 새겨지는 별자리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별을 떨어트리러 가는 길이니, 별이 힘을 빌려주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별은 필요 없었다.”
별빛이 담기지 않은 옷을 펄럭이며, 별빛을 잃어버린 부러진 성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녀석이 남긴 무기를 움켜쥐며 데스텔이 떠올리는 것은··· 언젠가 미래의 자신과 나눴던 대화다.”
「하나, 고룡의 도시에 들어설 것.」”
「둘, 별빛 대신 잿가루를 품을 것.」”
펄럭이는 성의에 잿가루가 내려앉았다. 재의 여신에게 받은 잿가루를 데스텔은 모조리 털어냈다. 재의 여신과 그녀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사도가 남긴 안배를 지금 이곳에서 사용하고자.”
「마지막으로, 셋.」”
「부러진 성창을 쥐고 있을 것.」”
흩날리는 잿가루 사이로 데스텔이 눈을 감았다. 모든 조건은 충족됐다. 조건을 이룸으로써 데스텔은 잿가루를 매개 삼아 빌려 온다. 과거, 혹은 어느 미래에 죽음을 맞이했던 용사의 힘을.”
눈을 감은 채 데스텔은 떠올렸다.”
꿈속에서 보았던 풍경을. 드넓은 황야에서 마주했던 끔찍하리만치 강했던 어느 용사를. 자신이 도달했을 뒤틀린 미래를. 뇌리를 스쳐지나 가는 것은 어느 용사가 살아왔던 시간이다.”
그 시간의 끝에 자신이 서 있었다.”
“모방.””
데스텔이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뜨고 현재를 바라보며 그가 외쳤다.”
“데스텔.””
비굴(卑屈)의 데스텔.”
한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온 용사. ”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용사. 설령 그 모든 게 없던 일이 되었다 한들··· 그가 살아왔던 기록은 흩날리는 잿가루에 남아 있었다.”
사락.”
휘몰아치는 잿가루 사이로 데스텔이 부러진 성창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고룡이 불길을 내뿜었다. 고룡의 도시에 늘어선 백금색 건물들이 열기에 녹아내렸다. 밀려드는 열기의 파도를 향해 데스텔은 걸음을 내디뎠다.”
모방하는 것은 미래의 자신.”
펄럭이는 성의와 함께 데스텔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누군가 흘린 피를 마시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용사는, 이제 누군가를 위해 피 흘린다.”
그 사실에 비굴(非屈)이 웃었다.”
어쩌면, 비굴(卑屈)이 웃었다.”
백금 신전의 내부로 돌입했다.”
신전의 내부로 들어서자 더는 마법이 쏟아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최상층으로 올라와 자신을 마주하라는 듯이.”
“······.””
라니엘은 계단을 오르며 말없이 신전의 바깥을 바라보았다. 불길을 가르며 고룡을 상대하는 데스텔이 그곳에 있었고, 하늘에 떠오른 강이 그곳에 있었다.”
떠오른 백금색의 강물이 하늘에서 출렁였다.”
그것은 어찌 보면 용(龍)의 형상이었고, 어찌 보면 별자리의 형상이었다. 저것이 요르문을 상징하는 별자리인 것일까. 날개를 잃은 용의 형상을 띤 별자리를 바라보며 라니엘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지금부터 자신이 상대해야 할 존재는, 요르문이다.”
요르문 반 드라고닉이 아닌 요르문.”
그것은 미래의 자신, 그러니까 재의 여신이 상대했을 고룡의 마법사와는 다른 존재이리라. 미래의 자신이 상대했던 것은 세상이 망가져 권능의 태반을 잃어버리고, 마지막까지 금기를 어기지 않았던 마법사.”
하지만, 지금 신전의 최상층에 있는 것은··· 모든 권능을 자유자재로 부리며, 스스로에게 건 제약마저 풀어헤친 최초의 죄인이다.”
‘단신으로 만신(萬神)을 떨어트린 마법사.’”
만신들의 시대의 끝을 고하고 인간들의 시대를 연 초월적인 존재. 마법사들의 신이라 불리는 존재. 그렇기에 자신이 넘어야 할 마지막 벽이기도 했다. 각오를 다지며 라니엘이 신전의 계단을 올랐다.”
신전의 최상층에 라니엘이 발을 디뎠다.”
동시에, 맞은 편에서 카일 또한 최상층에 올랐다.”
백금 신전의 최상층, 드넓은 홀에 요르문이 홀로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요르문의 푸른 머리칼이 흔들렸다. 금빛의 용안(龍眼)과 팔에 새겨진 만신의 별자리. 요르문을 중심으로 공간이 일렁이고 있었다.”
범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라니엘의 눈에는 그 일렁이는 공간이 똑똑히 보였다.”
일렁이는 공간, 한 꺼풀 벗겨진 세상의 단면.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은 잊힌 신들의 권능이다. 그날 요르문이 신들을 떨어트리며 빼앗은 권능. 그것은 눈동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수백, 수천, 수만 개의 눈동자가 일그러진 공간에 박혀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만신전, 알케이아에서 마주했던 잊힌 신들의 껍데기에는 눈동자가 존재하지 않았었지. 신들의 눈동자를 모조리 뽑아버린 최초의 죄인을 바라보며 라니엘이 쓰게 웃었다.”
“다시 봐도 끔찍하네요, 그거.””
라니엘이 일그러진 공간을 가리키며 숨을 뱉었다.”
“눈동자 모으는 취미라도 있으신가 봐. 제 눈동자도 뽑을 생각인가요?””
“필요하다면 그리하겠지.””
요르문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가 팔을 들어 올린 순간 신전의 천장이 바스러졌다. 천장이 바스러지며 드러나는 것은 드넓은 하늘이다. 대낮임에도 검게 물든 밤하늘을 향해 요르문이 손짓했다.”
챠르르르르륵.”
밤하늘 위에 별자리가 재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