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507
쏴아아아, 아아···.”
밀려난다. 부러진다. 휩쓸려 사라진다.”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서 마주한 파도를 한낱 인간이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그렇게 파도가 인간을 집어삼키려는 순간이다. 무심코 인간은 제 손에 쥐어진 것을 바라보았다.”
부러진 검.”
하지만, 여전히 검(劍)의 형태를 가진 것.”
검은 부러졌지만 자신의 삶은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눈을 부릅뜬 채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검로(劍路)를 읽었다. 칼이 부러졌다면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무엇으로?”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칼날을 휘감은 검붉은 번개, 그 녀석이 만들어낸 역뢰를 칼날 삼아 카일은 검을 휘둘렀다. 흐름 대신 검붉은 번개를 끌며 칼날이 한 뼘 앞으로 나아갔다.”
거센 파도를 한 자루의 검으로 가른다.”
칼날을 따라 파도가 갈라지고 시야가 트였다.”
어느새 파도가 치는 환청은 들려오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파도가 아닌 거대한 별자리일 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모아둔 듯한 별자리를 향해 카일은 검을 휘둘렀다, 언제나처럼.”
천리(天理)와 역천(逆天)이 맞부딪쳤다.”
하늘의 이치와 하늘을 거스르는 검이 충돌했다.”
땅이 뒤흔들렸다. 하늘이 요동쳤다. ”
풍경이 비스듬히 잘려나가다가 박살났으며, 박살 난 풍경은 흐름에 휩쓸려 밀려났다. 파도가 쳤다. 바람이 불었다. 땅이 흔들렸다. 하늘이 비명했다.”
찰나를 쪼개며 역천과 천리는 서로를 물어뜯고 집어삼켰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밀어냈다. 그러나 결국 승자는 없었다. 패자 또한 없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긴 마찰음과 함께 모든 게 사라졌다.”
상쇄(相殺),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은 끝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동치던 세상이 한순간 정지했다. 직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세찬 섬광이 고룡의 도시를 후려쳤다.”
번쩍.”
섬광과 함께 폭풍이 밀려들었다.”
역천과 천리가 충돌하며 만들어낸 여파가 신전을 뒤흔들었다. 완전히 박살 난 신전이 땅 아래로 추락했다. 신전의 파편이 고룡의 도시 곳곳으로 내던져져 쿵, 쿠우웅··· 하고 도시가 뒤흔들렸다.”
촤아아악.”
여파에 휩쓸린 요르문이 뒤로 밀려났다. ”
처음으로 뒤로 밀려난 요르문의 몸에서 피가 흘렀다. 신의 자리에 앉은 초월자의 몸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흐트러진 별자리 사이로 신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인간은.”
카일 토벤은.”
“커, 헉···.””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카일의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만신창이가 된 그는 여파에 휩쓸려 신전의 바깥으로 굴러떨어졌다. 역천의 검을 휘둘렀던 왼팔은 보기 흉하게 비틀렸으며, 한계까지 몰아붙인 몸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피를 게워내며 카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몸을 일으켜 세우진 못해서, 고개만을 들어 올린 카일이 제 왼팔을 보았다.”
왼팔도, 오른팔도 모두 비틀렸다. 검은 놓쳐버렸다. 놓쳐버린 검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박혀있었다. 다만 이마저도 싸게 먹힌 것임을 카일은 알았다.”
‘마지막 순간···.’”
번뜩이는 잿가루가 여파를 막아주었다.”
잿가루가 아니었다면 팔이 아예 뜯겨 나갔을 테지. 카일이 쓰게 웃으며 길게 숨을 뱉어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천리를 상쇄해냈다곤 하나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자신의 패배였다. 하지만 카일은 웃었다. 자신의 패배가 곧 승부의 패배를 의미하진 않으므로. 그렇기에 카일은 웃으며 외쳤다.”
“이거면 됐겠지.””
처음부터 자신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다.”
언제나 녀석이 해주었던 역할을 이번엔 자신이 대신한 것뿐이다. 승리로 향할 초석을 세우는 것. 주역이 달릴 길을 마련하는 것.”
“가라.””
카일은 요르문의 전력을 이끌어냈으며, 그가 숨기고 있던 수를 모조리 꺼내 들게 만들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혔다. 그것은 달리 말해 승리로 향할 단 하나의 길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길을 달리는 것은 카일이 아니다.”
카일은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 전장의 주역의 이름을. 믿고 다음을 맡길 수 있는 동료의 이름을.”
“라니엘.””
그리고.”
잿빛 마법사는 부름에 답했다.”
무너진 백금 신전.”
땅으로 추락해버린 신전의 위에서 요르문은 제 왼팔을 바라봤다. 천리를 펼쳤던 왼팔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다만 요르문이 주목한 것은 비틀린 자신의 왼팔이 아니었다.”
육체쯤이야 금세 회복되니 문제 될 게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부상을 입었단 점이었다.”
요르문이 제 몸에 두른 것은 규율 그 자체다. 가장 거대한 별자리. 카일 토벤은 기어코 규율의 틈을 벌려 제 왼팔에 상처를 새겼다. 그 사실에 요르문은 주목했다. 요르문의 눈동자가 조금 더 가늘어졌다.”
“기어코···.””
기어코 여기까지 오고야 마는군.”
규율이 흔들리고 있다. 카일이 펼친 역천의 검은 요르문이 몸에 두른 별자리를 뒤흔들어놨다. 왼팔은 금세 회복됐으나, 흔들린 별자리의 배열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신좌에서 내려와라.”
너 또한 이제 피 흘리고 상처 입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피를 바라보며 요르문이 헛웃음을 흘렸다. 기어코, 기어코 오고야 마는가. 요르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개를 들어 무너진 신전의 천장을 바라보노라면, 푸른 비가 내리고 있었다.”
후두둑.”
하늘에 떠있을 만신(萬神)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대신 그들이 흘린 피로 푸르게 물든 하늘만이 그곳에 있었다. 푸른 하늘에서 푸른 비가 내렸다. 떨어지는 비는 만신들이 흘린 피였다.”
수만년 전, 요르문 또한 보았던 풍경이다.”
쏟아지는 푸른 핏물 사이로 누군가 탁, 하고 신전에 내려앉았다. 신들의 피를 뒤집어쓴 인간이 그곳에 서 있었다. 과거 요르문이 그러했듯, 만신을 찢어발긴 인간이 길게 숨을 뱉었다.”
사락.”
잿빛 머리칼이 흔들렸다.”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요사스레 번뜩였다. 그 눈동자는 꺼지지 않는 불길과도 같다. 아직 태울 것이 남아있노라고 눈동자는 말하고 있었다.”
“···하.””
그리고, 그 불길이 향하는 것은 요르문이다.”
요르문은 인도자의 시선을 마주한 채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기어코 이렇게 되는군. 기어코.”
라니엘 반 트리아스와.”
요르문 반 드라고닉이 서로를 마주 바라봤다.”
이 시대의 인도자와 가장 오래된 인도자가 시선을 마주했다. 혁명가와 쌓아온 것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권력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그리하여 인간과 신이 되어버린 인간은 시선을 겹쳤다.”
요르문이 걸음을 내디뎠다.”
라니엘이 걸음을 내디뎠다.”
검의 극한이 베는 것에 있다면, 마법의 극한은 새기는 것에 있다. 마법이란 세상에 자신의 손짓을 새기는 것. 현실을 왜곡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마법의 기본이자 극한이다.”
요르문이 손을 휘둘렀다.”
라니엘이 손을 휘둘렀다.”
별자리와 회로가 신전을 가득 메웠다.”
요르문은 자신의 모든 회로를 하늘에 별자리로 박아넣었다. 라니엘은 자신의 모든 회로를 제 몸에 새겨넣었다. 비슷한 길, 그러나 두 명의 마법사가 도달한 목적지는 전혀 다르다.”
두 개의 마도(魔道)가 충돌했다.”
어쩌면 두 개의 삶이 맞부딪쳤다.”
마법사들의 싸움이란 본디 상성을 파고드는 싸움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마저 그럴 수는 없다.”
한 명은 마법사의 신이라 불리는 존재요, 이 땅에 존재하는 마법식의 기본(基本)을 다진 존재다. 모든 마법은 그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현대, 고대를 막론하고 그가 다룰 수 없는 주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는 다른 한 명의 마법사 또한 신위에 닿은 마법사라 불리는 이다. 상성이 존재하지 않는 주문을 주력으로 다루며, 그 외의 모든 계열의 주문에 통달한 인물이다.”
둘 모두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둘 모두 전능(全能)에 이른 마법사다.”
그런 두 사람의 전투가 상식에 구애받을 리가 만무하다. 만일 이 자리에 평범한 마법사가, 혹은 하나의 계열에 통달한 마탑주가 있었다면 헛웃음을 흘리며 이리 중얼거렸을 것이다.”
저것이, 정녕 마법이 맞는 것이냐고.”
번쩍.”
별자리와 회로가 동시에 번뜩였다.”
섬광과 함께 범람하는 것은 주문의 파도다. 도시 하나를 불태울 지옥불과, 적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천벌이, 얼어붙는 눈보라가··· 하나의 마법사가 평생을 바쳐 도달하는 영역인 최고위 주문이 1초에도 수십 개씩 쏟아져나왔다.”
타오르는 불길의 적색이, 내리치는 번개의 청색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의 백색이, 녹색이, 흑색이··· 온갖 색(色)들이 뒤섞여 기이한 색을 만들어낸다.”
우습게도 모든 주문이 뒤섞인 끝에 만들어지는 것은 백금색에 가까웠다. 밀려드는 주문들을 시야에 담으며 라니엘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으니까. 이제야,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강타(Smite).”
밀려드는 주문들을 수백의 섬선이 꿰뚫었다.”
가느다란 섬선이 갈라지며 분쇄(Smash)를, 갈라지며 흩날리는 잿가루가 재는 재로(Ashes to Ashes)를, 폭발이 만들어낸 열기가 다시 거대한 불길이 되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불길이 태양이 된다. 태양이 범람하는 주문들을 집어삼키며 열기를 토했다.”
그렇게 불길을 끌며 라니엘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자신이 펼치는 주문이 조금씩 날카로워짐을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었다. 주문과 주문의 이어짐이 더욱 매끄러웠으며 버리는 부분이 사라지고 있었다.”
카일로 하여금 여유가 사라진 요르문이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음에도 라니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보인다.’”